묵향 36권 2화 – 한 놈만 적당히 손 좀 봐주시죠

한 놈만 적당히 손 좀 봐주시죠

라이가 알리와 함께 요새도시 델카의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블루썬더 파 조직원 두 명이 급하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 왔다.

산속에서 오랫동안 혼자 지내 온 라이는 그야말로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원래 색이 어떤 건지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거무죽죽하게 때가 탄 옷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고, 길게 자라 산발이 된 머리카락은 노끈으로 대충 질끈 묶어놨다.

라이는 블루썬더 패거리들과 별로 접점도 없었을뿐더러 현재 거지꼴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라이를 한눈에 알아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라이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옆에 알리가 있었고, 무엇보다 마주 보면 죽을 것만 같은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잭 어르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느라 고생했다. 두목께 잭 어르신과 함께 도착했고, 예정대로 상점으로 갈 거라 전해라.”

“알겠습니다, 조장님.”

원래 예정은 릴리가 일하고 있다는 상점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가던 도중에 일정이 틀어졌다.

“두목께서 잭 어르신을 급히 모시고 오라십니다.”

그러면서 달려온 조직원은 두목이 현재 무시무시한 사내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조직원의 말을 듣고 있던 라이의 눈가에 일순 떠오른 것은 묘한 기대감이었다.

꿈속의 검법을 익힌 이래, 그는 지금껏 제대로 된 적을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아니, 그의 공격을 제대로 막는 인물조차 만나본

적이 없었다.

산맥 안으로 들어가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로 검술을 갈고 닦긴 했지만, 그의 검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몬스터라는 게 덩치가 큰 만큼 방어력은 엄청날지 몰라도 제대로 된 공격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그에게 극악의 공포심을 안겨줬었던 트롤조차 단숨에 고깃덩이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였으니, 다른 몬스터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놈일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제대로 된 반격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응수를 해야 할까? 두목조차 겁에 질릴 정도의 실력자라면 기대를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두목께서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상대가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고 하시면서요. 혹시, 필요하신 장비가 있으십니까?” 그가 봤을 때, 라이는 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전부 다 새로 바꿔야 할 거라 생각했다.

라이가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허리에 차고 있는 낡아빠진 싸구려 장검 한 자루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아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무기점부터 가시죠. 마침, 요새 내에서 제일 좋은 무기류를 취급하는 대장간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검을 쓰는 사람이라면 좋은 검에 대한 열망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라이는 전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적수에 대한 생각에 이리저리 결투 장면을 그려보고 있던 자신을 방해하는 조직원의 목소리가 성가시게만 느껴졌다.

사실, 라이는 좋은 검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검은 오랫동안 다뤄온 만큼, 길이와 무게감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 검을 가지고 꿈속의 검법을 구사하는 데 지금껏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보잘것없는 검을 가지고 있을

때의 이점도 있었다. 상대가 자신의 허름한 모습을 보고 방심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라이는 두목의 명을 전하기 위해 달려온 조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기는 됐으니까, 두목이 있다는 곳으로 안내해.”

“저…, 검도 검이지만 어느 정도 방어구라도 입으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두목께서는 잭 어르신이 준비를 단단히 제대로 갖춰서………….”

“됐고! 빨리 안내하기나 해!”

***

“이곳인가?”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는 허름한 사내. 영락없는 뒷골목 거렁뱅이의 모습이었지만, 똘마니에게 반말을 지껄이며 들어오는 걸 보면 귀중품을 은밀히 운반하기 위해 변장한 것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아론 워커는 사내의 허름한 모습보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보석인가? 아니면 마법 도구?”

척 봐도 사내의 무장은 허리에 차고 있는 싸구려 검밖에 없었다. 게다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걸 보면 품속에 넣고 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그렇다면 아주 작은 크기에 값비싼 가치를 지닌 물품일 테니, 보석 아니면 마법 도구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여기까지 추론한 워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귀찮은 일을 떠안았다 생각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한몫 두둑이 챙길 수 있었으니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였다. 옆에서 풀이 죽어 앉아있던 미친개가 별안간 후다닥 일어나 손짓으로 거렁뱅이를 가리키며 소리친 것은.

“저놈입니다. 저놈이 바로 여왕벌의 둥지를 박살 낸 빌어먹을 그놈입니다.”

미친개가 당시 현장에 있었거나 그 장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하들의 증언과 루크라는 녀석의 증언이 일치하고 있었다. 바로 저놈의 생김새와……………

미친개의 외침에 아론 워커의 시선이 빠르게 라이를 향해 꽂혔다.

하지만 다음 순간 워커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사(戰士)라고 보기에는 덩치가 너무 왜소하고 삐쩍 말랐다. ‘혹시 여자가 남장이라도 한 것인가?”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사내놈인 게 분명했다. 그것도 솜털도 아직 제대로 벗지 못한 애송이.

아무래도 미친개 녀석이 착각한 게 분명하다.

‘이 망할 놈이 몇 대 처맞고 돈을 게워내더니 돌았나? 저런 애송이가 여왕벌의 둥지를 박살 낸 놈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면………

워커는 미친개를 향해 살기를 담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주둥이 다물고 있어라.”

찔끔한 미친개가 눈치를 살피자 워커는 박스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미안하네. 이 멍청한 놈이 소란스럽게 해서 말이야. 부하가 온 모양인데, 이쪽으로 오라고 하게. 동생이 날 위해 뭘 준비했는지 무척 궁금하군.”

하지만 박스터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워커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박스터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라면 잭이 패배할 게 분명하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주둥이를 털어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눈치를 살핀 것이다.

“헤헤, 형님께 죄송한 말이지만 한 놈만 적당히 손 좀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평생을 바쳐 일궈왔고 나름 이 지역을 주름잡던 조직입니다. 저야 한눈에 형님의 실력을 알아봤으니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지만 저 아랫것들이 어디 그런 눈썰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놈들의 눈이 번쩍 뜨이도록 형님의 실력을 조금만 보여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박스터의 말이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워커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반항 한 번 안 하고 항복을 한다면 부하놈들이 두목을 신뢰할 수 없겠지. 동생은 날 따라가겠지만 이곳을 관리할 놈들도 필요하고……

뒷골목의 생리상 약점을 보이거나 부하들의 신뢰를 잃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곧바로 부하들 중 누군가가 두목의 뒤통수를 쳐 배반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박스터 역시 그런 방식으로 두목의 자리를 차지한 거였고.

“좋아. 이번에는 처음이니 동생의 말을 들어주지. 하지만 또다시 나를 시험하는 듯한 이런 짓을 한다면, 그때는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알겠나? 동생.”

박스터는 입가에 걸리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헤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워커는 거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뒤 라이에게 말했다.

“따라와라. 여기서 피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라이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 풍기는 코를 찌르는 악취에 워커는 눈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변장이 아니었다. 진짜 거지였던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데려왔을 정도면 그래도 나름 조직 내에서 실력이 있으니 뽑혀왔을 텐데, 그게 저 거지놈이라면 조직을 통째로 삼키는 건 다시 한 번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볍게 손을 봐주겠다는 마음으로 거지놈을 식당 뒤쪽 공터로 데리고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대치를 하게 되자 워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저분하게만 보였던 거지놈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실력자를 앞에 두고도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고 있는 거지놈. 그리고 호흡을 고르면 고를수록 뭔가 보이지 않는 무형의 방벽이 더욱더 튼튼하게 거지놈 주위에 형성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술을 너무 마셔서 감각이 흐트러진 건가?’

하지만 단순히 술에 취해 이상하다 느꼈다고 그냥 넘기기엔 뭔가 찜찜했다. 취할 만큼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고.

이때, 워커의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샐러맨더 파의 수뇌부를 누군가가 단신으로 쳐들어와 잔인하게 학살해 버렸다는 미친개의 헛소리. 그리고 박스터 녀석은 이놈만 손봐주면 다른 조직원들이 납득하고 따를 거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시골 촌구석의 뒷골목 조직이라지만 밀수꾼들을 사냥하는 거친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납득하고 따를 정도라면 어느 정도 실력은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실력자라 보기에는 진짜 거지새끼가 분명한데…, 게다가 나이도 어려 보이고……………? 헛!’

이리저리 라이를 살펴보던 워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주춤 뒤로 한발 물러섰다.

‘혹시 변장을? 아무리 봐도 거지새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설마하니 저런 모습으로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다니……… 대단한 놈이군. 흐흐, 그런 얄팍한 수법에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나?’

하마터면 놈의 잔꾀에 속아 넘어가, 제대로 실력 발휘도 못 해보고 칼침을 맞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의 스승은 기회가 될 때마다 제자들을 앉혀 놓고 당부했었다. 세상에 나가거든 늙은이와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를 조심하라고. 한순간의 판단착오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그들의 사형이 한둘이 아니라며…

그렇다면 미친개의 말처럼 저 거지새끼가 여왕벌의 둥지의 학살극을 벌인 당사자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저놈이 애송이일 수가 없다. 아마도 애송이처럼 보이도록 변장한 놈일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년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놈의 잔꾀를 눈치챈 이상, 목 없는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게 되는 건 저 얍삽한 놈이 되리라.

스르릉.

경쾌한 소리와 함께 워커의 애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든 건 아니지만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해 온 애검이었다.

워커는 천천히 검을 들어 상대를 겨눴다. 언제나 그러했듯 저 녀석도 애검의 먹이가 될 것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