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3화 – 근육질 여검사의 정체

근육질 여검사의 정체

월터 일행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밤새 이동했다. 밤하늘은 너무나도 맑고 깨끗해서 수없이 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지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앞서가고 있는 지부장에게 불의의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는지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자신들의 뒤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오고 있는 정체불명의 패거리에게도 주의를 게을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맨 앞에서 따라오고 있는 사람은 근육질의 여검사였는데 가끔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앞뒤를 모두 신경 쓰면서 가는 건 너무 힘들어. 더군다나 상대가 저런 인물이어서야…………’

곧바로 공격해오지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뒤쫓아 온다는 건, 최적의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일대일의 상황에서 지형지물의 유불리를 따지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다. 기습당하는 게 아니라면 상호 동일한 조건에서 싸워야 할 테니까.

그렇다면 가장 현실성 있는 추론은 동료들을 기다리는 것일 것이다. 어쩌면 한 명일 수도 있고, 예전에 그가 기습당했듯 수십 명을 상회할 수도 있다.

저 멀리 앞쪽 어딘가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마법사 및 기사들이 만전을 다한 상태로 함정을 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천하의 월터로서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도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게 분명해.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방법은 단 하나뿐이야. 함정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기습을 해서 적들의 수를 줄여나가는 것! 그렇다면 뒤를 따라오는 놈을 해치움과 동시에 앞으로 달려가 방심하고 있을 매복조를 기습해야겠군.’

월터가 내심 기습하기로 마음을 정했을 때, 옆에서 걷던 파벨이 말을 걸어왔다.

“머지않아 해가 뜰 겁니다. 해가 뜬 후로는 급속도로 기온이 높아진다고 하니, 이제부터 적당히 쉴 곳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야.”

‘녀석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흐흐..

사막에 들어선 첫날, 이쪽에서 기습 공격을 가해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생활 패턴의 급격한 변화로 가장 피곤할 때다. 지금까지는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잤었는데, 날밤을 꼬박 새웠지 않은가. 밤새 이동까지 해야 했으니 피곤이 가중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물론 월터도 저 엄청난 근육질을 지닌 여자 같지도 않은 여자가 피곤을 느낄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월터 자신 역시 피곤하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마법사들은 다를 것이다. 옆에 있는 파벨처럼, 강인하지 못한 그들의 육체는 지금쯤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을 게 뻔했다.

저 근육질의 여자와 달리, 동행하는 마법사들은 이쪽의 동태를 끊임없이 살펴보기 위해 마법을 지속적으로 써야 했을 것이고, 그것이 더욱더 정신적인 피로를 부채질했을 게 틀림없다. 어쩌면 지금쯤 꾸벅꾸벅 졸면서 낙타를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예상은 월터의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램일 뿐이었지만,

“파벨.”

“예?”

자신을 바라보는 파벨에게 월터는 낙타의 고삐를 건네주며 지시했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예? 그게 무슨 말씀…….”

월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곧이어 파벨은 그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월터는 낙타 안장 위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날아오르듯 도약했다.

낙타 안장에서 뛰어오른 것만으로 20여 미터나 건너뛸 수 있다니! 그것도 마법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말이다. 파벨로서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장면이었다.

월터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전속력으로 질주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제서야 파벨은 자신과 함께 여행하고 있었던 사내의 진정한 정체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마법사가 아닌, 그래듀에이트였던 것이다.

파벨은 급히 주문을 외웠다.

“클레어보이언스(Clairvoyance;천리안)!”

순간, 그녀의 시야가 확 밝아지며 월터가 달려가는 그 앞쪽 정경이 눈앞으로 다가오듯 확대되어 보였다.

저쪽은 아직 월터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아니, 그게 아니었다. 모두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맨 앞에 있던 덩치 큰 사내가 안장에서 묵직해 보이는 커다란 검을 끌러 드는 게 보였다.

덩치와는 다르게 귀여운 외모의 사내 입가에는 가소롭다는 듯한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눈치챘나?”

다음 순간, 월터와 덩치 큰 여자와의 격전이 시작됐다.

콰콰콰쾅!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덩치 큰 여자의 동료들이 싸움에 가세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충격파를 피해 급히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나는 게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주위를 자욱하게 뒤덮는 짙은 모래 먼지! 먼지로 인해 시야가 앞을 가려 전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파벨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흘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도 주변에 다른 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쪽 상황을 알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이 끼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

그렇다고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는 것도 문제다.

월터의 승리를 기원하며 멍하니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잽싸게 도망쳐야 하나? 파벨로서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또 다른 적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만큼, 미지의 적을 단숨에 제압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월터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전력을 다해 기습할 작정이었다.

상대가 설혹 알카사스 최강의 검객이라 해도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반 토막이 날 것을 월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인은 전격적으로 기습을 감행한 월터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냈다. 아니, 월터가 달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안장에서 검을 뽑아 든 것으로 봤을 때, 여인은 월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고 봐야 옳았다.

‘젠장. 내 딴에는 기습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상대의 함정에 빠진 건가?’

그도 그럴 게 지금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처음에 저 여인을 포착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옅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 봤을 때의 존재감은 자신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걸 월터에게 알리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흘렸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상대가 파놓은 함정을 향해 달려든 것일 줄이야.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월터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재빨리 주위를 살펴봤다. 하지만 덩치 큰 근육질 여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저 멀뚱히 싸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의 뭘 믿고 저런 태평한 얼굴들인 건지, 아니면 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이럴 때는 하나하나 적을 확실하게 없애는 게 최선의 방법이지.’

하지만 곧 월터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육질 여인 뒤쪽의 마법사가 싸움에 가담하기 전에 일단 이 여인부터 먼저 처리하려던 월터는 한두 차례 검을 맞부딪쳐 보는 것만으로도 여인이 사용한 검법이 뭔지를 알아챈 것이다. 워낙 유명한 검법이었으니 월터 같은 경험 많은 고수가 그걸 몰라볼 수가 없었다.

월터는 후속타를 가하는 대신 재빨리 뒤로 후퇴했다.

이때, 여인이 뒤쫓으며 공격을 퍼부었으면 난감한 상황이 되었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근육질 여인 역시 월터와 검을 섞은 후, 그의 신분을 눈치챈 듯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육질 여인은 월터의 뒤를 쫓아 반격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코린트의 기사가 왜 나를…………?”

사내 찜쪄먹을 만큼 단단하고 우람한 덩치! 저 두툼한 팔뚝만 해도 웬만한 사내들보다 훨씬 굵었다. 힘에 자신 있는 사내가 아니라면 아예 들고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중검(重劍)의 대명사 바스타드 소드를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라레스의 정통검법.

이 모든 게 합쳐지면 떠오르는 크라레스의 유명한 무가(武家)가 있다. 바로 치레아 공국을 다스리고 있는 치레아 대공가였다.

치레아 대공가의 여자는 둘. 모녀 다 우람한 덩치를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치레아 대공과 그 부인은 둘 다 소드 마스터인 만큼, 월터로서는 상대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상대는 월터와 거의 호각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인물은 단 한 명으로 좁혀진다.

“잠깐만!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월터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다급히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다이아……?” 

“잠깐!”

근육질 여인은 월터의 말을 막으며 고개를 뒤를 향해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뒤쪽에서 지원을 위해 주문을 외우고 있는 여 마법사가 보였다.

근육질 여인은 여 마법사에게 손짓을 하며 명령했다.

“괜찮아. 주문 해제해.”

여 마법사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되물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다고 했잖아!”

근육질 여인의 일갈에 여 마법사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여 마법사는 주문을 취소하며 지금껏 모은 마나 덩어리를 공중을 향해 발산해 버렸다.

공중을 향해 날아가는 엄청난 빛 덩어리가 그녀가 얼마나 강력한 공격마법을 준비 중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근육질 여인은 낙타 안장에 매여 있는 검집에 자신의 바스타드 소드를 집어넣으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월터에게 다가와 조용하게 말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군요.”

월터는 금방 그녀가 원하는 바를 파악했다.

자신을 쏘아보는 여 마법사와 달리, 저쪽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인 둘과 그의 호위 둘은 일행이 아닌 모양이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두 사람은 함께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걸어갔다.

슬쩍 주위를 둘러본 월터는 목소리를 낮춰 근육질 여인에게 물었다.

“혹시, 다이아나 폰 치레아 공작 영애십니까?”

근육질 여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월터는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레이디 다이아나, 적으로 착각하고 다짜고짜 공격부터 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다이아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생긴 것만큼이나 털털한 어조로 말했다.

“뭐,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코린트의 기사가 이 황량한 사막에는 어쩐 일로 오신 거죠?”

월터가 그녀의 검술이 크라레스의 것임을 알아봤듯, 다이아나 역시 월터의 검술이 코린트의 것임을 알아본 모양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를 대충은 짐작하고 있을 게 분명하기에 월터는 솔직하게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밝혔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코린트 제국 제2근위대에 소속되어 있는 월터 드 페레즈 백작이라고 합니다.”

“페레즈 백작이셨군요. 이런 먼 타국까지 와서 코린트의 기사분을 만날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네요.”

“저 또한 이런 곳에서 레이디 다이아나를 만나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변명 같지만 얼마 전에 알카사스에서 큰 곤경을

당한 후였기에, 이번에는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었는데…………”

월터가 굳이 알카사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타국의 귀족에게 대략이나마 설명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말도 없이 선제공격을 가한 것에 대한 해명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그만한 신분을 지닌 고위 귀족이었으니까.

크라레스라면 코린트와 거의 쌍벽을 이루는 강국이다. 물론 전체 국력으로 따진다면 코린트가 월등했지만, 크라레스는 드래곤의 비호를 받고 있다. 드래곤과의 인연은 초대 치레아 대공의 업적이었고, 그로 인해 크라레스의 양대 공작가라 할 수 있는 스바시에 공작가와 치레아 공작가 중에서 치레아를 한 수 위로 꼽고 있었다.

더군다나 치레아 공작가는 공작은 물론이고 공작 부인까지 둘 다 소드 마스터였고, 웬만한 군소국가의 전력보다도 강한

독립기사단까지 보유하고 있는 전무후무한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의 영애라면 왕족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그녀 정도의 신분이라면 아무리 월터가 코린트의 근위기사지만 하대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게다가 적인 줄 알고 기습 공격까지 했으니, 다이아나가 뭐라 한들 할 말이 없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월터였기에 격의 없는 다이아나의 언행에 상당한 호감을 느꼈다.

월터의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다이아나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내가 만약 페레즈 백작이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불문곡직하고 기습공격을 가했겠네요.”

“그런 사유로 인해서 송구하지만, 레이디께서 호위도 거느리지 않고 몰래 암행하시는 이유를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이아나 일행이 여섯이긴 했지만, 실질적인 수행원은 여 마법사 하나뿐이었다. 다이아나와 같은 고위 귀족 영애의 호위로는 턱도 없이 적다. 게다가 다이아나의 말투로 봐서는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월터의 말에 다이아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직까지도 나를 의심하는 모양이군요?”

월터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다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레이디 같으신 분께서 이런 오지에, 그것도 호위도 제대로 거느리지 않고 와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도 그냥 오지도 아니고, 최근 끊임없이 수상쩍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티투스 대사막에서 말이지요.”

다이아나는 피식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겠다면?”

그러자 월터는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식적인 외교 사절을 파견해 귀국을 추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귀국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지요.”

외교 사절을 파견해 추궁한다는 말에 순간 다이아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미소의 의미는 뻔했다. 가소로운 것이다.

“호오, 감히 나를 추궁하시겠다? 과연 백작께 그만한 권한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오히려 내가 묻겠어요. 백작께서 이곳에 있는 이유를 밝혀주세요. 안 그러면 아버지를 통해 귀국의 로체스터 공작께 공식적으로 항의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덧붙여 백작께서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고 날 기습했다는 것도 포함되어야 하겠죠.”

다이아나의 지적에 월터는 자신이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실수한 쪽은 자신이었으니까.

헐레벌떡 달려온 파벨이 두 사람에게 도착한 건 그때쯤이었다.

파벨은 모래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월터가 근육질 검사와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급변할지 모르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월터를 지원하기 위해 공격마법 주문을 외우며 달려온 것이다.

그녀가 공격 목표로 잡은 건 우람한 덩치의 근육질 검사가 아닌, 뒤쪽에 서 있는 여 마법사였다.

파벨이 도착했을 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미 불덩이가 완성되어 버린 상태라는 점이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를 모르니 이걸 애초 생각대로 저쪽 여 마법사를 향해 날려버릴 수도, 그렇다고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쉬운 노릇이 아니기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월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최근 사막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기류에 대해 조사해 보라는 근위대장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 있던 차였습니다.”

월터의 말에 우람한 덩치의 근육질 검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대꾸했다.

검사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파벨은 그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마법주문 외우랴, 공격 목표인 여 마법사의 행동을 살피랴 정신도 없었지만, 그만큼 여자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덩치가 크고 거대했기 때문이다.

“과연, 코린트 쪽에서도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나도 사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그걸 조사하기 위해 온 거예요.” “레이디 다이아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레이디 다이아나…………? 저 오크만한 덩치의 여자가 귀족 영애라는 말에 경악한 파벨은 하마터면 마법제어에 실패해 폭사할 뻔했다. 그녀는 서둘러 불덩이를 하늘 위로 날려버렸다. 이대로 계속 마법을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파벨 혼자서 화염 마법으로 쇼를 한 셈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이목은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에게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파벨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근육질 여검사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그리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나름 귀여운 축에 들어가는 얼굴일 수도.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얼굴 아래로 내리면 사내 못지않은 굴강한 육체와 섞여 강인한 인상으로 바뀌어 버린다.

파벨은 작금의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녀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귀족 영애의 모습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서 춤추는 가녀리고 예쁜, 사내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여자였지, 오크조차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듯한 근육질의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사내 못지않은 털털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그리 나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사막지대에 그리 대단한 적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말이죠. 방금 전에 검을 나눠봤으니 백작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백작……? 뭐, 윗사람으로부터 하늘 같은 신분을 가진 분이라는 얘기는 들었으니 월터가 귀족이라는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사내 같은 귀족 영애의 신분이 뭣이기에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있던 신분을 밝힌 것인지 파벨로서는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과 달리 파벨은 귀를 바짝 기울여 둘 간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월터는 그녀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이디 다이아나의 실력을 제가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껏 사막 저 안쪽으로 정탐을 나섰던 저희 쪽 요원이 단 한 명도 살아서 나오지 못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중에는 오너도 있었거든요.”

다이아나? 오크처럼 커다란 덩치에 근육질 여자의 이름으로는 너무나도 여성스럽고 예쁜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이름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커다란 덩치와 여성스러운 이름, 이런 절묘한 대비를 보이는 인물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곧이어 파벨은 기억 한구석에서 예전에 첩보원 과정을 이수할 때 각국의 중요 인물에 대한 인적사항을 교육 받았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히익!”

파벨은 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이아나 폰 치레아 공작 영애. 그 사람임에 틀림없다. 대코린트 제국의 백작이 고개를 숙여야 할 만큼 높은 지위를 지닌 영애는.

순간 오랜 시간 정보를 다뤄온 요원으로서 파벨의 눈은 더욱더 호기심으로 불타올랐다.

타이탄을 보유한 기사조차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건 다이아나로서도 의외였던 모양이다.

“아, 그래서 제2근위대가 투입된 거로군요?”

다이아나의 신분도 충격이었지만, 월터의 신분은 파벨에게 더욱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물론 백작이 고위 귀족은 맞지만, 제국에 속해 있는 백작의 수는 생각 외로 많았다. 하지만 제2근위기사는 다르다. 제국 최고의 정예라는 황제 직속의 근위기사.

기습을 하기 위해 달려가던 모습과 경천동지할 정도의 충돌 장면을 보고 실력이 범상치 않은 기사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 이름도 드높은 근위기사일 줄이야………………

“저야 원래 이런 험한 일을 수행해 왔던 사람입니다만, 레이디 같은 고귀한 분께서 호위기사 하나 거느리지 않고 저곳으로 들어가신다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다고 사료됩니다만………….”

그러면서 월터는 다이아나 뒤쪽에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 마법사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그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 마법사는 월터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다이아나에게 바짝 다가서서 낮지만 빠른 어조로 속삭였다.

“페레즈 백작의 지적이 옳습니다. 최소한 본국에서 호위기사라도 몇 명 불러들이신 후에 움직이시는 것이………….”

하지만 다이아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만큼 호위기사들이 도착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곳의 위험성을 안 부모님이 호위기사를 보내지 않고 곧장 되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다이아나는 여 마법사에게 퉁명스레 대꾸해 입을 틀어막은 후, 월터에게로 시선을 돌려 제안했다.

“서로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여기로 왔으니, 함께 동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페레즈 백작이시라면 내 뒤를 맡길만하다고 생각되기에 드리는 제안이에요.”

월터로서는 다이아나의 제안이 솔깃한 게 사실이었다. 실력도 상당히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잠시 얘기를 나눠보니 심성도 꽤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의상 깍듯이 존대를 해주고 있긴 했지만, 상대가 감히 자신에게 조건을 거론한다는 것에 재미있어하며 다이아나가 물었다.

“뭔가요?”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앞으로는 월터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리고 제 일행은 파벨이라 합니다. 좀 어리숙해 보이긴 합니다만, 정보부에서 오랜 시간 일해 왔던 만큼 서쪽 대륙 사정에 아주 밝습니다. 게다가 사막 부족의 언어나 서쪽 대륙 언어도 조금 알고 “말이죠.”

“좋아요. 그렇다면 나는 「셀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여기서는 모두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요. 다이아나라고 하면 내 신분을 알아차릴 사람이 꽤나 많기에……………

다이아나는 파벨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파벨도 어느 정도 내 신분을 눈치챈 것 같지 않나요?”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월터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오크만한 근육질 몸매를 지닌 여성에게 코린트 제국의 백작인 자신이 고개를 숙일 만한 사람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동료 라디아 콜린스예요.”

제2근위대가 특수작전을 주로 하는 만큼, 주요 국가들의 상층부 인물들에 대한 인적사항은 언제나 숙지하고 있었다. 언제 전장에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라디아 콜린스. 정확하게는 라디아 폰 콜린스 백작. 치레아 기사단의 정규 멤버로, 궁정마법사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월터는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 뒤쪽에 서 있던 여 마법사가 쌀쌀맞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라디아라고 불러주세요.”

다이아나는 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동행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은 내 신분을 몰라요. 상인들은 통역을 위해 함께 가고 있던 중이었고, 두 명의 호위는 그들이 알카사스의 길드에서 고용한 용병들이에요. 그러니 말조심해 주길 바래요.”

“걱정 마십시오. 셀리나 님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월터가 살짝 고개 숙이며 깍듯이 말했지만, 다이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월터가 조건을 먼저 달았으니, 나도 조건을 걸겠어. 신분 노출을 방지할 목적이라면 나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앞으로는 셀리나 님이 아닌, 셀리나라고 불러. 그게 안 된다면 따로 움직여.”

잠시 망설였지만, 월터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다이아나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알았어, 셀리나.”

“파벨은?”

“그…, 저………….”

월터조차도 잠시 주저했을 정도로 다이아나의 신분은 범상치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평민 신분인 파벨이 반말을 한다는 건 정말 무리한 요구였다. 그것도 파벨처럼 새가슴의 여자로서는 더더욱.

보다 못한 월터가 슬쩍 끼어들었다.

“파벨이 좀 낯을 가려서 말이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파벨의 어깨를 토닥이며 월터가 설득했다.

“괜찮아. 셀리나에게 말을 놓는다고 네가 불이익을 받을 일은 없으니까. 오히려 이런 경우는 반말을 하지 않는 게 문제지. 자, 한 번 이름을 불러 봐. 못한다면 너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고.”

파벨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지만, 월터의 은근한 압박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알았어, 셀리나.”

다이아나는 잇몸이 훤히 드러나도록 크게 웃으며 말했다.

“파벨, 한동안 잘 지내보도록 하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파벨은 애써 웃는 모습으로 응답하려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