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6화 – 라이폰 위너스
라이폰 위너스
잠시 후, 마차가 어딘가에서 정지하자 워커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내려라.”
워커와 라이는 마중 나온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병영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병사의 뒤를 쫓아가며 라이는 주변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병영의 모습은 용병단 건물과는 겉모습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붉은전갈 용병단이 차지하고 있던 요새는 주요 건물들만 번듯하게 지어져 있었고, 그 외의 건물들은 진흙 벽돌로 급조한 엉성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늘어서 있는 건물들은 병영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고풍스럽고 멋진 건물들이 많았다. “이쪽입니다.”
병사는 병영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연병장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연병장 크기에 비했을 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원은 겨우 여덟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두 사람이 격렬하게 검투를 벌이고 있었고, 나머지 여섯 명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복장으로 봤을 때 장내의 여덟 명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세 명은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었고, 네 명은 움직이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꺼운 갑주를 착용하고 있다. 그들 모두의 무장은 검이었다. 검투를 벌이고 있는 둘은 중갑주를 입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나무 그늘 밑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미모의 여성은 일곱명과는 다른 심플한 디자인의 제복을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관이나 마법사처럼 보였다.
병사는 제복을 입고 있는 사내들 중 한 명에게로 워커 일행을 데리고 갔다.
라이의 시선은 화려한 제복 차림의 사내들이 아닌, 중갑주를 착용하고 있는 사내에게로 돌아갔다.
사내들이 입고 있는 제복이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제복들보다 화려하고 멋있는 게 사실이었지만, 중갑주와 비교될 수는 없었다. 금은으로 상감해 놓은 화려한 문양도 멋있었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듯 매끄러운 갑옷의 굴곡은 예술품 그 자체였던 것이다. 라이는 이렇게 호화로운 갑주를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모시고 왔습니다, 페리 경.”
“아론 워커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워커와 달리 페리는 가볍게 답례를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소. 나는 제323정찰조장 라이놀 페리라고 하오.”
정찰조라는 말에 라이는 내심 안도했다. 화려한 제복과 무척 값비싸 보이는 중갑주를 보고 대단한 인물들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반갑다는 말과 달리 자신들을 바라보는 라이놀의 안색이 썩 달갑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라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라이놀이 그런 언짢은 표정으로 라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어젯밤 갑자기 상관으로부터 내일 한 사내의 실력 테스트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상관에게 듣기로는 산맥 안에서 스승과 단둘이서만 지내며 검술을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던 차에 스승이 갑자기 죽어버린 탓에 하산하게 되었다고.
상부에서 특별히 실력 테스트를 해 보라는 명령이 내려올 정도면 제법 실력이 있는 사내인 모양이라고 라이놀은 짐작했었다.
하지만 지금, 테스트를 받아야 할 사내를 보는 순간 그의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너무 어렸던 것이다. 앳된 얼굴을 보니 아직 솜털조차 제대로 벗겨지지 않은 소년이 아닌가. 저래서는 스승으로부터 깊이 있는 검술은 아예 전수받지도 못했을 게 뻔했다.
“테스트를 받을 사람이 이 소년이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만큼이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라이를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을 쓱 훑어본 뒤 라이놀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꼬맹이를 자신이 직접 테스트한다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부하들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녀석들의 표정을 보니 이런 하찮은 일에 동원됐다는 것에 꽤나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표정들이 테스트를 시키면 분명 사고를 칠 분위기였다.
놈들은 애송이가 그 정도도 못 막을 줄은 몰랐다며 변명하면 그뿐이겠지만, 자칫 녀석이 중상을 입거나 죽기라도 했다가는 그 뒤처리가 난감해진다. 상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위급 상황을 대비해 연병장에 신관을 대기시켜 두긴 했지만, 아무리 신관이라 해도 죽은 놈을 다시 살려낼 재주는 없었으니까.
“자네 감찰부장님과는 어떤 사인가?”
“예? 감찰부장님이라뇨?”
맹한 얼굴로 대꾸하는 소년을 보며 라이놀의 미간은 더욱 일그러졌다.
한눈에 척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수준을 웬만큼은 알아볼 수 있는 라이놀이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소년에게서는 특출난 구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전신의 근육은 잘 단련되어 있는 듯 보였지만,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은 평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건 라이가 익힌 태허무령심법의 효용 탓이었는데, 그 때문에 실력을 테스트하기에는 너무 허접하게 보이다 보니 라이놀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감찰부장이 후작님께 직접 청탁을 넣은 걸 보면, 잘 봐달라는 뜻이려나? 뭐, 좋아. 어쨌거나 한 수 주고받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괜히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아플 필요가 없다. 기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 라이놀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내게 전력을 다해 덤벼봐라.”
순간, 라이놀에게서 놀랍도록 강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숨이 막힐 듯한 강한 살기!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에 바닥에 주저앉아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라이놀은 더 이상 테스트 따위는 하지도 않고 꼬맹이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안색이 살짝 창백해지긴 했지만, 멀쩡하게 서 있는 라이를 보자 그제서야 라이놀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이 정도라면 테스트를 해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라이놀의 기세에 바짝 얼어있는 라이의 등을 다독여주며 워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가진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봐. 아까 마차 안에서 말했지?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라는 거 명심하고.”
그제서야 라이는 정신을 차리고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나갔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공포감을 안겨준 상대는 없었다. 키메라 오크떼가 안겨줬던 공포심마저도 저 제복의 사내가 발산하는 살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라이의 마음은 공포심에서 벗어나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건 이 상황이 목숨을 건 결투가 아닌, 테스트라고 했기 때문이다.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면 보상으로 뭘 받게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저 엄청난 고수와 대결을 해볼 수 있다는 것.
이런 기회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테스트라고 했으니 목숨을 잃을 걱정 따위는 하지 않고 전력으로 부딪쳐 볼 수 있지 않은가.
라이는 심호흡을 몇 차례 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워커와의 대결 후, 자신에게 뭐가 모자라는지 많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워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와 대결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모자라는 부분이 뭔지 알려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쏟아내는 수밖에 없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
“그럼 공격하겠습니다.”
라이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잡고 심호흡을 하는 걸 보며 라이놀은 내심 비웃었었다.
하지만 라이가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라이놀의 얼굴은 경악으로 가득 채워졌다.
“허억! 거, 검기(劍氣)라고?!”
설마하니 애송이의 검에서 저렇게나 막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않았었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하지만 라이놀은 자신이 콘도르 기사단의 정식기사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라이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콰콰콰쾅!!
검과 검이 맞부딪쳤을 뿐인데도 화려한 불꽃과 함께 엄청난 폭음이 연병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방금 전에 진행된 비무로 인해 좌중의 시선은 모두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연병장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던 두 사내도 어느 순간 싸움을 멈추고 동료들과 함께 서서 조장과 웬 소년이 대화하는 걸 열심히 엿듣고 있는 중이었다.
“스승님의 성함이 뭔가?”
아직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수준의 마나 수련을 시킬 수 있다는 건, 그 스승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대변해 준다. 때문에 소년의 스승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 또한 라이놀이 자신의 스승 이름을 묻는 이유를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자신이 댄 이름을 철저하게 조사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기에 라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거짓말을 했다.
“스승님께서는 자신의 성함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에 라이놀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함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예.”
“아니, 어떻게 제자에게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을 수가 있지?”
강한 의문을 품는 라이놀에게 라이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번이고 스승님의 성함을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원하지 않는 은원(恩怨)에 얽매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전 그분의 성함만이 아닌, 과거에 뭘 하셨던 분인지조차도 전혀 모릅니다. 때때로 제가 잠자리에 든 후에 울적한 표정으로 술을 드시고 계셨던 걸 보면 뭔가 깊은 사연이 있는 듯싶었습니다.”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대충 둘러댄 것이었지만, 라이놀은 쉽게 납득했다.
아무리 검의 고수라 할지언정 사람인 이상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신분 또한 높아져 자연스럽게 상류층 귀족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런 상류층의 세계는 일반적인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암투와 정치질로 매일매일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다.
라이놀은 라이의 스승이 그런 암투에서 밀려나 산맥 속으로 도피를 한 검의 고수로 짐작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라이놀의 입가에는 처음과 달리 호의 어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자네가 익힌 검법의 이름이 뭔가?”
“믿기 힘드시겠지만 그 이름조차 한 번도 거론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초식도 그냥 1식, 2식이라고 구분해서 전수해 주셨으니까요.” 하기야, 자신의 이름까지 비밀로 했을 정도라면 검법 이름도 당연히 비밀로 했으리라. 각 국가에서 주력으로 가르치는 검술 명칭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
“혹시…, 스승으로부터 타이탄은 인계받았나?”
아무리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하지만 타이탄이라는 게 뭔지는 알았다. 여러 영웅담 속에 등장하는 강철로 된 마법도구의 이름이었으니까.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기에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걸 얻게 되는지도…..
모르는 건 딱 잡아떼면 된다. 괜히 아는 척해봐야 들킬 확률만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건 본 적도 없습니다.”
“흠, 이상하군. 자네 스승 정도의 실력자가 돌아가시면 자동으로 계약이 해지되어 타이탄이 그 모습을 드러냈을 텐데…
라이놀은 라이의 스승이 어딘가의 근위기사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소속되었던 나라가 멸망했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추론했던 아귀가 모두 들어맞는다.
하지만 죽을 때 타이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의외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추론이 틀렸다는 것이었으니까. 아니, 아닐 수도 있다.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타이탄이 죽기 직전에 탈출했었을 가능성도 있긴 했으니까.
“제가 임종을 지켰습니다만,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스승의 출신지가 어딘지 알 만한 힌트라도 있나? 사투리라든지, 아니면 즐기던 음식이나 술이라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며 단호히 고개를 젓는 라이의 모습에 스승에 대해서 더 이상 알아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라이가 크라레스 쪽 억양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는 것.
아무리 부모가 크라레스 출신인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어렸을 때 부모와 헤어진 만큼 그때 배운 억양을 계속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크라레스의 억양을 계속 쓸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하리라.
“크라레스라 ·?”
라이놀이 본 라이의 검술은 아주 독특했다. 특히 붉은색 검기를 뿜어내는 검술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라이가 사용하는 검술의 기본이 크라레스와 이어져 있다는 건 몇 번 검을 부딪쳐 보기도 전에 라이놀은 눈치챌 수 있었다. 발놀림이나 검을 다루는 사소한 기법들에서 크라레스 고유의 기법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질문은 다 끝나셨습니까? 조장님.”
“왜 그러나?”
라이놀이 잠시 라이의 스승의 정체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테스트를 지켜보고 있던 부하 중 하나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저도 한 수 교환해 보고 싶어서죠. 타국의 검술을 익힌 고수와 대련할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흔치 않으니까요.”
“흠, 자네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될 걸세. 실전경험이 거의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검술만큼은 저보다 더 강한 것 같아서…………….”
콘도르 기사단장 마이크 그루시아 후작이 라이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는 어제 감찰부장에게서 들은 극소수의 정보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감찰부장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던 것은 감찰부장이 왜 그 소년을 자신에게 보내려고 하느냐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라이놀은 소년에 대한 테스트가 끝나자마자 그루시아 후작의 집무실로 달려왔다.
그루시아 후작은 창가에 서서 라이놀의 부하들과 비무를 하고 있는 소년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단장님, 테스트를 끝내고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여기서 지켜보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루시아 후작은 비무에 집중하고 있는 시선은 돌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말해보게. 경의 생각을 듣고 싶군.”
라이놀은 자신이 파악해낸 걸 차분하게 정리하여 보고했다. 라이의 스승과 그가 전수했다는 검술에 대해서 말이다.
라이의 스승은 아무래도 억양으로 미루어 보아 크라레스 쪽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라이가 익힌 검술이 크라레스 쪽 향기가 짙게 풍기긴 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목격되지 않은 검술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초식을 전개할 때마다 붉은색 검기가 은은히 뻗어 나오는 아주 특이한 검술 말이다.
이렇게 눈에 확 띄는 검술이라면 오래전에 그 존재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널리 퍼졌어야만 했다.
“아마 감찰부장님께서도 그게 미심쩍어서 저희 쪽으로 소년을 보낸 게 아닌가 사료됩니다. 검술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는 감찰부 쪽보다는 저희 쪽이 훨씬 뛰어나니까요.”
“여기서 지켜보니 소년이 사용하고 있는 초식의 종류가 몇 가지 되지 않더군. 그거밖에 배우지 않았다고 하던가?”
“얘기를 해보니 검술 전반에 대해서 배우기는 다 배웠답니다. 하지만 자신 있게 쓸 수 있을 만큼 숙달한 게 몇 가지 되지 않아서 그 초식들만 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라이놀의 대답에 그루시아 후작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뜻밖에 엄청난 횡재를 하게 된 것이다.
“호오~, 전부 다 배웠다고?”
“예.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좋아. 잘 됐군. 기왕에 경이 시작한 일이니, 마지막까지 경이 책임지도록 하게.”
강력한 검법에 대한 열망은 그 어떤 국가든지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사대강국 중에서 기사단 전력이 가장 약세인 알카사스의
열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크라레스에서 비밀리에 전수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검법을 습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저 소년에게서 그 검법을 제대로 뽑아낼 수만 있다면 그 공로는 엄청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뻔히 아는 상황에서 이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라이놀이 분노할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임무에서 배제된 그가 엉뚱한 곳에다가 이 일에 대해 흘리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커질 우려도 있다. 이 검술의 소유권은 크라레스에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장님.”
“저 소년의 보안 등급을 최상으로 책정하고, 밖으로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주게.”
“명심하겠습니다.”
“부탁하네.”
라이놀을 내보낸 후, 단장은 마법사를 불러 감찰부장과의 통신을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에 수염을 단정하게 다듬은 고아한 인상의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찰부장이었다.
“연결됐습니다, 단장님.”
그루시아 후작은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부장님.”
「지금쯤 연락이 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네. 그래, 내가 보낸 자는 어떻던가?」
그루시아 후작은 곧바로 핵심부터 꺼내 들었다. 상대는 정보전의 전문가였다. 쓸데없이 이리저리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의중을 감찰부장이 눈치챌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테스트를 받게 하신 건, 이쪽에 건네줄 의향이 있으시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테스트의 결과는 건너뛰고 곧바로 얘기를 진행시켰기에 감찰부장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을 안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감찰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물론 의향이 있으니까 그리로 보냈지. 하지만 이쪽의 사정도 생각해 줬으면 하는 게 내 작은 바램이라네.」 감찰부장이 협상할 뜻이 있음을 넌지시 밝히자마자 그루시아 후작은 시원스레 거래를 진행시켰다. “원하시는 걸 말씀해 보시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감찰부장은 그루시아 후작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제안을 말했다.
「그래듀에이트를 셋 정도 이쪽에 보내줄 수 있겠나?」
최근 감찰부가 앤트러스를 포함한 상당수의 고수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다는 걸 그루시아 후작이 알고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감찰부가
일의 특성상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라이의 잠재된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그루시아 후작이었기에 처음부터 흥정을 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흔쾌히 감찰부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단 부하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찰부 쪽으로 가고 싶다는 대원이 있는지…………”
그루시아 후작이 너무 쉽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느꼈는지 감찰부장의 표정이 순간 떨떠름하게 바뀌어 있었다.
감찰부장은 그루시아 후작이 자신의 제안을 이렇게 곧바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먼저 셋을 부른 다음 차츰 협상을 하다, 최악의 경우 하나나 운이 좋다면 둘까지 그래듀에이트를 받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운을 띄웠던 것 같았다.
사실, 라이와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던 감찰부장은 라이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다고 보는 게 맞았다. 내가 뭔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놓친 게 있었나? 그제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라이는 그루시아 후작의 손아귀 안에 들어가 버린 후였다.
그랬기에 감찰부장으로서는 그래듀에이트 3명을 얻어낸 것만으로 만족하며 씁쓸한 입맛을 다시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날 라이는 조장인 라이놀 페리는 물론이고, 323정찰조원 전원과 비무를 해야만 했다.
비무 결과 라이는 단 한 명에게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검술에 대해 더욱 많은 걸 얻을 수가 있었다. 첫 번째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조원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전력을 다해 라이를 상대해줬기 때문이다.
라이는 현재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실전경험이었다.
정상적인 사제관계 속에서 검술을 전수 받았다면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만, 라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상대와 전력을 다해서 싸워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에 싸웠던 워커가 그나마 대단한 실력자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워커는 풍부한 실전경험으로 라이를 누른 것일 뿐, 검술 수준에 있어서는 몇 수 뒤처지는 게 사실이었다.
‘젠장, 이런 식으로 초식을 흘려버리고 찔러올 줄이야…………’
산속에서 몬스터들을 상대로 검을 휘둘렀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장갑도마뱀의 외피를 간단하게 찢어발겼던 자신의 검술이 이토록 간단히 막혀버릴 줄이야.
도대체 이곳이 어디이기에 이런 강자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걸까? 323정찰조라고 했으니, 최소한 323개의 정찰조가 있을 거라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숫자와 정찰조의 수와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라이는 그 사실을 몰랐다.
라이가 생각했을 때, 각 조당 일곱 명씩 323개 조가 있다고 한다면 물경 2천 명이 넘는 강자가 이곳에 득실거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2천 명…………. 여기까지 생각한 라이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꿈속의 검술을 연마하며 마치 천하무적이라도 된 듯 기고만장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여러 명을 상대로 격렬한 비무를 진행한 만큼, 라이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워커는 가쁜 숨을 내쉬며 헐떡거리고 있는 라이의 등을 토닥이며 칭찬했다.
“잘했어. 자네는 미래를 잡은 거야.”
그의 표정이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진 것은 라이의 기분 탓이었을까?
“자네는 일단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할 거야. 윗사람들 간에 몇 가지 협상할 일이 남아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워커는 손을 쑥 내밀어 라이의 손을 붙잡고는 힘차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오늘 자네가 전력을 다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내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네. 행운을 빌겠네.”
워낙 말수가 적었던 워커였기에 그동안 믿지를 못했었는데, 그의 허심탄회한 말에 라이는 상대의 본심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라이는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한 마음을 드러냈다.
“잠시 의심했던 거 죄송합니다. 그리고 배려에 감사합니다.”
“뭘. 자네라면 충분히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괜한 오지랖이었을 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워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의 발걸음은 그동안 함께 하며 라이가 봤던 것 중 가장 가벼워 보였다.
“자네가 라이 폰 로티넨인가?”
되는대로 가져다 붙인 성씨였기에 로티넨이라는 성에는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라이라는 이름은 친숙하다. 그 때문에 둘 다 바꿔 촌장 아들 이름으로 하려다가 라이 폰 로티넨으로 했다. 혹시라도 워커가 자신을 불렀을 때 못 알아듣는 사태가 일어나면 난감하니까.
하지만 그때의 그 선택 덕분에 라이는 실수하지 않고 곧바로 사내의 부름에 응할 수가 있었다.
“예, 제가 라이 폰 로티넨입니다.”
“상부에서 허가가 떨어졌다. 자네는 콘도르 기사단에 입단할 의사가 있나?”
콘도르 기사단이라는 말에 라이는 경악했다.
워낙에 강자들이 많이 있는 곳이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황실 직속 기사단의 이름을 들을 줄이야. 더군다나 기사단 쪽에서 먼저 자신에게 입단 권유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노예 신분이었는데 말이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예? 콘도르 기사단이라고요? 설마…, 4대 기사단에 들어간다는 황실 직속의 그 콘도르 기사단 말씀인가요?”
라이의 반응을 살펴보던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자네는 그것도 모르고 이곳에 왔나?”
“저는 그냥 여기서 테스트만 받으라고 해서.”
“크크, 이거 어처구니가 없군. 어쨌든 이곳은 자네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콘도르 기사단이 틀림없다. 그리고 테스트 결과 입단 허가가
떨어진 거지. 입단할지 말지의 선택권은 자네에게 있다네. 어떻게 할 건가? 며칠 고민할………….”
시간적 여유를 주겠다는 말을 사내가 채 꺼내기도 전에 급히 대답하는 라이. 혹시라도 사내가 마음을 바꿔 입단을 취소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라이의 오랜 꿈이 지금 이뤄지려 하고 있었다.
“입단하겠습니다.”
사내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자네의 입단 수속을 내가 도와주지. 참, 한 가지 문제가 있네. 이름은 괜찮지만 로티넨이라는 성을 그대로 사용하는 건 너무 위험해. 크라레스 쪽에서 냄새를 맡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혹시 따로 쓸 성을 생각해 둔 게 있나? 없다면 우리 쪽에서 만들어 주겠네.”
라이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위너스로 하죠. 라이 위너스.”
뻔뻔스럽게 자기 진짜 본명을 말하는 라이.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사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위너스라…, 어감이 괜찮군. 그리 희귀한 성씨도 아니고 말이야. 명심하도록 하게. 앞으로 로티넨이라는 성은 두 번 다시 쓰면 안 된다네. 아무리 친밀한 사이가 됐다고 해도 본명을 가르쳐 줘서는 절대로 안 돼.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나를 따라오게.”
라이는 그 사람을 따라가 기사단 입단 수속을 밟았다. 일단은 수습기사로 들어간 후, 단계를 밟아 정기사가 되는 모양이었다. 온몸의 치수를 재면서 기사단 제복이 완성되려면 최소한 이삼 주일은 걸린다고 했다.
대신 그동안 착용할 수 있도록 창고에 있는 여분의 옷들 중에서 세 벌을 꺼내줬다. 병영 안에서 민간인 복장으로 어슬렁거리도록 놔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복이 나올 동안 지금 입고 있는 허름한 옷만으로 지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라이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한창 성장할 때 오크 굴에 갇혀 제대로 영양 섭취를 못한 탓에 지금은 또래에 비해 훨씬 왜소한 체격으로 바뀌어 있었다.
만약 병영 밖이었다면 어린애들도 많은 만큼 그의 체격이 왜소한 게 별로 표시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병영이다. 주위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다 단련을 거듭한 당당한 덩치의 사내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라이가 입을 만한 여분의 제복은 그나마 체격이 비슷한 여성용이었다. 다행이라면 하의가 치마가 아니라 바지라는 것 정도일까.
“젠장, 어딜 가나 여자 옷이군……………
“크크, 어쩔 수 없지. 자네 덩치가 너무 왜소해서 그런 거야. 여기 들어오는 남자들 중에서 자네 같은 작은 체형은 처음이거든. 어쨌든
이삼 주일만 참고 입게. 그때쯤이면 옷이 완성될 테니까.”
새로운 신분증도 며칠 내로 만들어 지급해 준다고 했다.
이 모든 게 꿈인 것만 같아서 슬며시 허벅지를 꼬집어보는 라이였다.
썩 내키지 않았었는데, 박스터와의 의리 탓에 워커를 따라온 게 이런 행운을 안겨줄 줄이야.
라이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회를 안겨준 상대가 마인 테귤러였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