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7권 8화 – 어린놈이 변태인가?

어린놈이 변태인가?

거대전갈이 마법사 한 명을 뒤쫓고 있다는 걸 안 와이번들은 맹렬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급격히 가속한 데다, 고도를 줄이며 얻은 중력가속까지 붙었기에 와이번이 거대전갈 상공에 도착했을 때쯤 그 속도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용기사들은 그 기세를 이용해 일제히 창을 투척했다.

“퍽! 퍽! 퍽!”

와이번의 비행속도까지 더해진 용기사들의 창은 거대전갈의 두꺼운 등껍질을 꿰뚫고 관통해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과시했다.

일제히 공격을 날린 용기사들은 와이번의 고도를 높여 두 번째 공격을 가하기 위한 기동을 하는 대신에, 급격히 속도를 줄이며 더욱 비행고도를 낮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용병들은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곧이어 알 수 있었다. 와이번의 제일 뒤쪽에 타고 있던 기사들이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한 것이 다.

용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저 속도로 사람이 지면에 메다 꽂히면 그다음은 불 보듯 뻔했다. 달걀을 바위에 집어던진 것과 같이 피 떡이 되어 지면에 흩어지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용병들이 눈을 떴을 때 놀라운 광경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우와아아!!”

모두들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와이번에서 뛰어내린 기사들은 모두 무사했다. 아니, 무사한 정도가 아니라 놀라운 속도로 거대전갈을 향해 달려 들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용기사들의 투창 공격에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던 거대전갈은 계속된 기사들의 공격에 거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급격히 생기를 잃어갔다.

용기사들은 기사들을 강하시킨 후, 곧장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날아가 버렸다.

전투 결과조차 보지 않고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는 걸 보면, 저들은 오로지 기사들을 수송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 모양이다.

와이번에서 뛰어내린 기사들이 거대전갈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비행마법을 멈추고 지면에 내려섰다. 짐짓 힘든 척 헐떡거리면서..

그런 그를 향해 와이번에서 뛰어내린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어디 다친 데는 없나?”

“없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말 한계였기 때문에…….”

“잘 버텨줬군. 덕분에 우리도 상부의 지시를 이행할 수 있었고 말이야.”

기사는 아르티어스에게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곧바로 거대전갈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아르티어스의 시선은 거대전갈과 전투를 벌이는 기사들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눈길을 끌고 있는 건 기사들의 전투 모습이 아니었다. 거대전갈을 향 해 달려간 기사들 중 한 명의 모습이 아무리 봐도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작고 왜소한 체형의 기사였다.

물론 그의 관심을 끈 건 그의 체형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도 아니고.

“이상하군.??”

와이번에서 뛰어내린 기사들은 모두 갑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기에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커다란 덩치들 속에 작고 왜소한 체형이 한 사람 섞여 있다면 당연히 그쪽으로 시선이 간다.

여자 기사인가? 여자라면 일단 얼굴부터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게 노소를 막론한 사내들의 공통 관심사였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드래곤인 아르티어스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 여성 기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작고 왜소할 뿐 아니라 거대전갈을 공격한답시고 빨빨거리는 움 직임이 어딘가 다크를 연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렇다고 아주 비슷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은 검 한 자루만으로 절대자의 경지에까지 올라선 놀라운 호비트였다. 그에 비해 저 여기사는 아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접한 실력이었지만, 왠지 자꾸 시선이 갔다. 어쩌면 그건 이곳에서 검을 쓰는 일반적인 호비트들에게서 보지 못한 특이한 뭔가가……?

하지만 곧이어 아르티어스는 그 여기사와 함께 온 다른 기사들도 그녀와 비슷한 움직임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내가 착각한 모양이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티어스는 여기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초조한 모습으로 전장을 바라보던 홉킨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미하엘을 발견하자 곧장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피해는 어떤가?”

“거대전갈의 기습을 당한 것 치고는 경미한 편입니다. 사망자가 다섯 명이 나왔지만 그건 초기 기습 때 당한 것이고 제 휘하의 크레스터 중대장의 용기 덕에 나머 지부하들 전원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나도 봤네.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아! 끝난 모양이군.”

홉킨스는 미하엘의 보고를 듣고 있다 갑자기 말을 몰아 거대전갈 쪽으로 달려갔다. 기사들의 공격에 생명을 다했는지 축 늘어져 버린 거대전갈을 봤기 때문이다. 거대전갈 근처에까지 가깝게 다가간 홉킨스는 곧이어 상상도 하지 못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격렬한 기사들의 공격에 단단한 외피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 안쪽 이 텅 비어있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거대전갈은 언데드 몬스터였던 것이다.

홉킨스는 거대전갈을 살펴보고 있는 기사들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만약 이들이 적시에 오지 않았다면 자신의 부대가 얼마나 큰 피해를 당했을지 가슴이 써늘했기 때문이다.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저는 이 부대를 이끄는 홉킨스라고 합니다.”

“수고가 많소. 나는 콘도르 기사단 323정찰조장 라이놀 페리라고 하오. 링카 변경백의 요청에 따라 귀하들의 퇴각을 도와주기 위해 왔소.”

“안 그래도 콘도르 기사단에서 지원이 있을 거라는 건 링카 본부로부터 이미 전달받았습니다.”

라이놀의 정찰조가 이렇듯 사막 깊숙한 곳까지 오게 된 건, 기사단장 그루시아 후작이 용병단을 도와주기 위해 투입한 5개 정찰조의 조장들 가운데 그의 지위가 가장 낮았던 탓이다.

하지만 덕분에 언데드 거대전갈과 격전을 펼치며 근래 습득한 검법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었기에 그는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라이놀은 홉킨스와 인사를 나눈 뒤, 짐짓 겸연쩍은 미소를 흘렸다.

“와이번을 여덟 마리밖에 지원받지 못해서 신관이나 마법사는 데려오지 못했소. 게다가 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닦달을 하는 바람에 식량조차 제대로 챙겨오지 못 했는데…….”

“아, 그건 걱정마십시오. 식량과 물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신관이나 마법사도 부대 내에 있습니다. 물론 기사단에 소속된 분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만, 최선 을 다해 기사님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핫핫, 그럼 신세 좀 지도록 하겠소.”

“신세라니요. 저희야말로 기사님들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상황이 잘 풀리자 당연하게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흘렀다.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복귀 경로에 알파17이 매복시켜 놓은 대량의 언데드 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재수가 없다 보니 우연히 거대전갈과 조우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 전갈이 매복지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기에 먼저 맞닥뜨린 것 일 뿐이다.

•홉킨스 이하 지휘부 장교들은 기사들의 지휘관인 라이놀 페리에게 커다란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작고 왜소한 체형의 여기사에게서 시 선을 떼지 못했다.

투구로 얼굴을 가린 데다 갑옷으로 몸매를 숨기고 있었기에 외형만으로 성별을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작고 가녀린 체형으로 봐서 아르티어스는 그가 여기사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여기사를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 역시 여기사와 비슷한 검법을 쓰는 것 같긴 했지만, 뭔가 풍기는 분위기가 아들을 계속 연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흠, 암컷이라서 그런가??

여덟 기사들 중에서 여기사는 그녀 한 명뿐인 게 사실이긴 했지만, 여자라고 해서 다크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지금껏 그가 만났던 여기사가 어디 한두 명도 아니었고…….

‘정말 신기한 일이로고……?”

얘기나 좀 나눠볼까 해서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는데, 아르티어스를 발견한 홉킨스가 갑자기 그를 라이놀에게 소개했다.

“아, 저 사람이 우리 부대 마법사입니다. 디겔, 이리 와서 인사하게.”

아르티어스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랄프 디겔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난 323 정찰조장 라이놀 페리요. 귀하의 활약상은 상공에서 봤소. 한동안 신세를 질 거 같은데, 잘 부탁하오.”

라이놀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아르티어스의 시선은 여전히 여기사를 힐끗힐끗 쫓고 있었다.

이때, 뜨거운 사막 더위에 지쳤는지 그 여기사가 투구를 벗는 게 보였다.

순간 왠지 모르게 아르티어스의 기대감이 한껏 고조됐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얼굴에는 짙은 실망감이 떠올랐다.

땀에 푹 젖은 머리카락은 아들이 지녔던 화려한 금발이 아닌, 금발이 되다만 듯한 어중간한 색깔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기분이 더욱 시궁창 으로 떨어졌다. 머리카락 색깔만큼이나 흔해 빠진 평범한 얼굴의 사내놈이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아니라 체구가 작은 남자라는 것을 안 순간, 아르티어스는 아예 시선을 돌려버렸다.

자신의 아들은 여자였고, 저런 변태적인 성 정체성을 가진 놈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다크의 외모는 일종의 성형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신관의 것이라 생각될 만 큼 환상적이었다. 안 그래도 미적 심미안이 높은 아르티어스였기에 다크 정도쯤 되어야 봐줄 만했고, 그 이하는 오크가 씹다 뱉은 고깃덩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에휴~, 다크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컸나? 저런 눈이 썩을 것 같은 놈을 보고 아들 생각이 났다니……. 어쨌거나 너무 보고 싶구나, 내 아들아. 조금만 더 기다려 라. 내 기필코 전생한 너를 찾아낼 테니 말이다.’

아르티어스가 라이를 살펴보며 한눈을 팔고 있는 동안, 양쪽 수뇌부의 대화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저희 부대가 앞장서겠습니다. 뒤에서 지켜보시다가 이번처럼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을 때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홉킨스의 제안에 라이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기왕에 귀 용병단을 돕기 위해 여기까지 왔소. 그리고 귀측이 앞장선다고 해봐야 이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괜한 피해만 커질 뿐이요. 저런 초대형 언데드 몬 스터를 귀하들의 전력으로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말이오.”

짐짓 용병단을 배려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라이놀이 솔선해서 선두에 서겠다는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까지 용병단 호위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 다.

그는 최대한 빨리 임무를 마치고 본대에 합류하고 싶었다. 다른 용병단들은 사막 속으로 깊게 들어가지 않았기에 그들을 지원하러 간 동료 정찰조들은 훨씬 빨리 임무를 끝마치게 될 게 뻔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려면 그만큼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우리들이 먼저 1킬로 앞에서 선행하겠소.”

“도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괜찮다면 마법사를 한 명 지원해 주시오.”

“아, 죄송합니다. 그건 좀…….”

당황한 홉킨스는 얼마 전에 떠나온 토착민의 성읍에서 언데드들과 접전하던 도중에 부대 내의 마법사들이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탈진해 버린 사태에 대해 솔직히 얘기했다.

아르티어스를 그들에게 지원하면, 당장 자신들의 통신이 먹통이 되는 것이다.

“곤란하군. 이럴 줄 알았으면 용기사대의 마법사라도 한 명 지원해 달라고 하는 거였는데…….’

“어쩔 수 없지요. 여기 있는 랄프를 데려가십시오.”

““그럴 수는…….”

“아닙니다. 귀하 쪽이 월등한 전력을 지니고 계시니 마법사는 귀측이 데리고 있는 게 맞습니다.”

홉킨스는 랄프 디겔은 물론이고 그의 호위부대까지 몽땅 다 기사단 쪽에 배속시켰다. 이쪽에 전해줄 정보가 있을 때, 전령 노릇을 해줄 사람들도 필요했기 때문이 다.

“랄프, 책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게.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대장님.”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였기에 아르티어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근히 신경 쓰였던 그 변태 같은 놈도 좀 더 관찰할 수 있을 테고.

“와아! 거대전갈이다!”

거대한 전갈 껍질에 달라붙어 만져보는 용병들. 이 껍질을 어떻게 운반할 수 있을지 가늠하는 한편, 전갈을 해치운 기사들의 눈치를 살핀다. 저들이 소유권을 주장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렇게 크다 보니 저들이 다 가져갈 수 없을 거라는 데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들은 전갈 껍질은 쳐다도 안 보고 서로 모여 뭔가 쑤군거리더니 그냥 떠나버렸다. 그들이 가져간 건 전갈 껍질이 아니라 용병단 쪽에서 나눠준 물과 식 량이었다.

기사들이 떠나자마자 용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거대전갈에 달려들었다. 저걸 링카 성으로 가져가기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거대전갈의 껍질은 가볍지 만 그 강도는 강철을 상회한다. 방금 전까지는 창검도 통하지 않는 절망스러운 존재였는데, 껍질만 남은 지금은 보물이 따로 없는 것이다.

문제는 저걸 어떻게 자르느냐 하는 것. 통째로 옮기기에는 덩치가 너무 컸다. 마차에 실을 수도 없을 정도로…….

“뭐하고 있어?”

브로마네스의 물음에 그의 부하들이 대답했다.

“이걸 어떻게 옮길 방법이 없을까요? 중대장님.”

“저런 쓰레기, 가져가서 뭐 하려고?”

마치 똥을 쳐다보듯 거대전갈을 바라보는 브로마네스의 표정에 부하들은 자신들 상관의 정신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레기라뇨. 이걸 링카 성까지 가져갈 수만 있다면 거금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맞아. 옮기는 건 힘들겠지만, 가져가기만 하면 거부가 될 수 있지.”

“저런 쓰레기로?”

브로마네스는 콧방귀를 뀌며 뼈가 무더기로 쌓여있는 곳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그 단단한 등껍질 부위를 쾅 치며 말했다.

“봤냐? 이건 쓰레기야.”

놀랍게도 브로마네스의 주먹질에 전갈 껍질이 푹 파였다.

“언데드가 됐던 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죽기 전에야 강철 같았는지 모르지만 죽고 나면 이딴 쓰레기로 변해.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모두들 출발할 준 비나 해.”

“에잇, 좋다 말았네.”

“어쩐지, 기사들이 그냥 떠난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거대전갈에 달라붙어 있던 용병들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전위로 달려가고 있는 기사단원들 중에서 말에 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홉킨스가 말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음에도 라이놀은 정중히 거절했다. 단지 식량과 물만 지원받았다.

“앞서 달릴 테니 뒤에서 따라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앞서 달리고, 아르티어스와 호위들은 말에 탄 채 그 뒤를 쫓았다.

앞서 달리는 기사들의 속도가 그리 느린 것도 아니었음에도 누구 하나 숨을 헐떡거리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들이 달리고 있는 땅이 탄탄한 대지도 아니고, 발이 푹 푹 빠지는 모래 위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장면은 본 적도 없었던 아르티어스의 호위들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사만 터트렸다.

한 시간여를 달린 후, 잠시 휴식을 취하라는 라이놀의 지시가 떨어졌다.

모두들 모래 위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을 때,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라이에게 접근했다.

“아직 어린듯한데 벌써 정규 기사단에 입단하다니, 대단한 실력인가 보구먼?”

부끄러움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라이가 대답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 좋다고 정규 기사단에 들어올 수는 없다. 고귀 귀족의 자제나 검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없지 않는 한.

기사단과 동행하게 된 후, 그동안 아르티어스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근히 라이를 살펴봤었다.

드래곤인 그가 호비트의 정확한 연령대를 짐작하는 건 좀 힘든 게 사실이긴 했지만, 아들이 환생했을 나이대는 아닌 듯했다. 17세 정도의 수컷 호비트라고 보기엔 키도 작고 덩치도 작다. 추정되는 나이대를 생각한다면 상당한 량의 마나를 단전에 축적하고 있는 게 이채롭기는 했지만, 뭐 기사단원이라면 그 정도는, 아니 그보 다 더 많은 마나를 지니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간과하고 넘어간 게 있었으니, 라이의 단전에 축적된 마나는 전설적인 도가의 심법인 태허무령심법(太虛無靈心法)을 통해 모인 정순한 기운 이었다. 일반적인 잡스러운 기운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막강한 기운인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라이가 호비트들이 말하는 명문 무가 출신으로, 실전경험을 쌓기 위해 잠시 기사단에 들어와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정규 기사단이라는 데가 운만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 그래, 자네 고향은 어딘가?”

“다란스 출신입니다.”

뻔한 거짓말에 아르티어스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어투에 크라레스 억양이 짙게 배여있는 놈이 제도(帝都) 다란스 출신이라고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음흉스럽게도 그 의문은 그냥 묻어둔 채 얘기를 계속 나눴다. 괜히 상대에게 경계심을 품게 만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절대적인 기억력을 지닌 드래곤이었기에 굳이 마법을 동원 하지 않아도 이런 대화 속의 모순들을 찾아내어 진실을 포착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아, 혹시 제 말투 때문에 오해하실 수 있는데 전 다란스 토박이 맞아요. 단지 어릴 때 유모(乳母)가 크라레스 출신이라 말투가 이렇게 된 겁니다. 같이 놀면서 성장 한 유모의 아이들 영향도 컸구요.”

“아하, 그렇구먼. 어쩐지, 이런 곳에서 동향 사람을 만났나 싶어 무척 반가웠었는데, 아니었네. 실은 내가 크라레스 출신이거든.”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아르티어스와는 달리 라이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셨군요. 크라레스에 대해서는 유모를 통해 많이 들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나라라고요.”

“뭐, 그렇긴 하지. 휴우, 어릴 때 뛰어놀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말토리오 산맥이 그립구먼.”

은근히 떠봤지만 라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크라레스에서 성장하지를 않았으니 그곳에서의 추억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걸 보고 아르티어스는 최종적으로 라이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해질녘이 되자, 라이놀은 용병대 지휘관 홉킨스와 논의했던 대로 행군을 멈췄다. 용병단은 계속 이동해 해지기 전에 기사단과 합류했다. 이동할 때라면 정찰을 위 해 기사단이 선행하는 게 좋지만, 야숙을 할 때는 모두 함께 모여있는 편이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위가 탁 트여있는 데다, 시야를 막는 거라고는 군데군데 솟아있는 작은 관목들뿐. 기습을 당할 염려는 전혀 없다고 봐야 했다.

모두 안심하고 야숙 준비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자리 잡은 곳과 그리 멀지 않은 모래 밑에 링카 영지군 6만을 궤멸시켰던 바로 그 언데드 군단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차후에 있을 링카 영지와의 전투를 위해 알파17이 주둔시켜 놓은 언데드 군단이었다.

자아가 없는 언데드들이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이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던 이유는, 그곳 지하에 마신의 은혜가 하나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강렬한 생명의 향이 풍겨오는 것이 아닌가.

본능적으로 생명력을 갈구하는 언데드들이었기에 대기하고 있으라는 알파17의 명령을 무시한 채 모래를 뚫고 하나둘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