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1화 : 나 조신하게 큰 여자야! – 1
나 조신하게 큰 여자야! – 1
월터와 다이아나는 각자 본국으로부터 급하게 돌아오라는 복귀 명령을 받았다.
타이탄을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언데드 몬스터의 존재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월터나 다이아나 둘 다 손꼽힐 만큼 강한 기사들이다. 그런 두 기사가, 그것도 둘 다 타이탄을 꺼내야만 상대가 가능할 정도의 괴물이 존재할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지금껏 사막에 파견한 첩자들과의 연락이 갑자기 끊겨버린 이유가 바로 그 언데드 몬스터 때문이라는 걸 상부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언데드 몬스터가 사막에 존재한다면, 기사단에서 지원받아 파견했던 오너급까지도 행방불명된 게 충분히 설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거야?”
다이아나의 물음에 월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상부에서 복귀 명령이 내려왔으니, 어쩔 수 없지.”
복귀 명령에 불복해도 치레아 공국 공작 영애인 다이아나가 처벌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위험하니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왜 안 듣냐며 부모에게 잔소리 좀 듣는 정도에서 끝날 테니까.
하지만 그에 반해 월터는 입장이 아예 다르다. 상부의 지시를 어기는 순간 명령불복종이 되는 것이다.
물론 코린트 제국 무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제2근위대 소속이니만큼 처형까지 당할 일은 없겠지만,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는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월터가 본국으로 복귀하겠다고 하자 다이아나도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혼자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얼마 전과 같은 상황에서 만약 다이아나 혼자 샌드 웜을 상대해야 했다면, 분명 놈의 뱃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월터가 밖에서 협공해 줬기에 겨우 샌드웜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냉정하게 판단한 것이다.
“레이디, 복귀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라디아의 채근에 다이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알았어, 딴 데로 튀지 않을 테니 자꾸 채근하지 마. 그런데 복귀하려면 일단 링카 성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알카사스의 서쪽 국경 전체가 링카 영지의 지배하에 있었다. 효율적인 수비를 위함이었고, 밀무역의 침입 루트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알카사스 왕국의 특단의 조치였다.
덕분에 서쪽 국경 전체를 자신의 지휘하에 둔 링카 변경백은 타국에서 들어오는 인원과 물자의 출입을 오로지 링카 성을 통해서만 허용했다. 한곳으로 몰아야지 관리하기 편하니까.
그렇기에 본국으로 복귀하려면 일단 링카 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의견을 통합한 후 링카 성으로 돌아가는 일정 동안 월터 일행은 예상과는 달리 평온하게 갈 수 있었다.
그건 월터 일행이 지나가기 전에 그 일대에 있던 모든 언데드들이 알파17에 의해 북쪽으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링카 성에 도착한 월터 일행은 예전에 이곳을 떠날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일단 성내 수비군의 검문검색의 수준이 확연히 바뀌었다.
그 전에는 적당히 시간을 때운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검문을 했었다면, 지금은 링카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행인들을 노려보듯 세심히 살펴보고 있다.
아무래도 링카 성에서도 대규모 언데드 무리가 사막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전에 떠날 때와는 뭔가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
링카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행인들이 별로 없어서인지 월터 일행은 얼마 기다리지 않아 병사들 앞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러자 검문을 하던 병사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일행을 제지했다.
“멈추시오. 사막을 건너왔소?”
“그렇습니다.”
병사가 얼핏 본 월터 일행은 짐이 거의 없었다. 낙타 등에 실린 거라고는 담요와 약간의 식량, 물통 정도였다.
월터 일행이 무역상이 아님을 알아챈 병사가 수상쩍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쪽 대륙에서 오셨소?”
“그 반대요. 서쪽 대륙으로 가려다가 언데드가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고 급히 되돌아오는 길입니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일정을 짰는데 서쪽 대륙은 구경도 못해보고 왔다 갔다 개고생만 했으니…………, 에휴~.”
월터의 넋두리에 병사의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아, 그러셨군요. 간단한 검문을 해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전원, 신분증을 주십시오.”
월터 일행은 각자 지니고 있던 위조 신분증을 꺼내 병사에게 건네주었다.
밀수를 하는 조직에서 만든 가짜 신분증이 아닌, 코린트와 치레아 공국의 정식 기관에서 만들어 준 신분증이었기에 조금의 틈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신분증이었다.
신분증에는 월터는 자작, 다이아나는 남작인 하급 귀족으로 되어 있었다.
예전에 링카 성을 통과해 사막으로 나갈 때도 이 신분증을 썼었기에, 출입국 명부를 확인해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지 신분증 안의 다이아나는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건 다이아나가 엄청난 근육질 몸이었기에 여성이라고 하면 너무 눈에 띌 것 같았기에 치레아 공국에서 고심 끝에 남성으로 표기한 것이다.
상대가 비록 하급이긴 하지만 귀족이라는 걸 안 병사의 태도가 조심스럽게 바뀌었다.
“코린트, 그리고 크라레스 제국 분들이셨습니까?”
“같은 일행은 아니고, 우연히 사막에서 만나 동행하게 된 사입니다. 혹시라도 언데드 떼와 만난다면 숫자가 많은 게 유리하니 여기까지 함께하게 된거죠.”
“아, 그러셨군요. 혹시, 언데드와 접전하신 적은 있으십니까?”
월터 일행 모두가 무장을 갖추고 있는 데다, 사내 둘은 특히나 강해 보였기에 묻는 말이었다.
“아뇨. 얘기는 들었지만 다행히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그놈들을 사막에서 만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죠.”
월터 일행의 행색을 봐도 전혀 전투를 한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서쪽 대륙으로 놀러 가려다 낭패를 본 귀족의 우아한 옷차림이다. 다시 한번 신분증을 확인한 병사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운이 좋으신 분들이군요. 자, 통과해도 좋습니다. 알카사스 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검문을 통과하자마자 다이아나가 월터에게 제안했다.
“일단 시원한 맥주부터 마시러 가자. 사막의 모래 먼지 때문에 목이 텁텁해 죽을 지경이었거든.”
하지만 월터는 그런 다이아나의 제안을 단번에 거부했다.
“아니, 일단은 링카 성을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월터는 슬쩍 턱짓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위를 봐봐.”
링카 성 성문이 잘 내려다보이는 전망탑 위에 서 있는 세 사람. 마법사 둘과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병사 한 명.
월터는 비밀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제2근위대 소속이라 마법사의 탐지 마법에 대한 대책이 되어 있었고, 그건 다이아나 일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다이아나는 월터가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며 투덜거렸다.
“링카 성이 서부 지역을 방어하는 중요 거점인데 마법사들이 감시하고 있는 건 당연하잖아. 설마 우리 치레아 공국이 저런 마법사의 탐지 마법에 대한 대책조차 없을 정도로 허접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마법사가 아니라, 그 뒤의 기사를 잘 보라고.”
병사가 아닌 기사라고? 다이아나는 침중한 월터의 표정에 얼굴을 굳히며 다시 한번 슬그머니 병사를 살펴봤다.
병사는 투구도 쓰지 않았고, 무장도 칼 한 자루 허리에 차고 있는 게 전부였다. 게다가 강철 갑옷도 아닌 가죽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인식저해 마법을 펼쳐놓아서 그런지 마나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저 일반적인 호위병 정도로만 보였다.
“차림새로 보아하니 병사 같은데…………. 그래 뭐, 기사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이곳 링카 성에 팔콘 분견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거기 기사일 게 뻔하잖아?”
“쯧, 갑옷을 잘 봐봐. 저 갑옷에 그려진 문장은 팔콘이 아니라 콘도르야.”
그 말에 다이아나는 눈을 실쭉하게 뜨고 다시 자세히 살펴보더니 곧 탄성을 내질렀다.
“저 작은 문장을 용케도 알아봤네?”
월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흐흐, 이 정도야 뭐 보통이지.”
다이아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콘도르 기사단의 기사가 여기서 왜 마법사를 호위하고 있지?”
“아마 언데드 때문이 아닐까 싶어.”
타이탄 2기를 가지고도 상대하기 버거웠던 초대형 샌드 웜이 사막을 배회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알카사스 제국에서 그런 웜의 정보를 입수했다면, 콘도르 기사단의 기사가 파견 나와 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1~2개 분대 정도가 파견 나와 있는 게 아니라 콘도르 기사단 전체가 배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월터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빨리 링카 성을 벗어나자고 한 것은 어쩌면 너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그래.”
치레아 공국의 공작 영애인 다이아나는 알게 모르게 널리 알려진 유명인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여자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놀라운 근육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한번 본 사람은 잊어버리기가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공식 행사에 참가할 일이 간혹 있는 기사단원이라면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월터는 그걸 우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런 쓸모없는 걱정은 안 해도 돼. 내가 이래 보여도 극성맞은 부모님 덕분에 꽤나 조신하게 큰 여자야. 잘됐네. 안 그래도 아무 성과 없이
빈손으로 복귀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여기에 콘도르 기사단이 배치되어 있는 걸 보면 제법 쓸 만한 정보를 건질 수 있을지도 몰라.”
다이아나의 말에 월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정보를 얻는 데는 술집이 최고잖아. 안 그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러다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아, 정말. 좀 전에 말했잖아! 나 조신한 여자였다구. 정 그렇게 걱정된다면 싸구려 술집으로 가면 돼. 설마 그런 허접스런 장소에 내 얼굴을 알 만한 기사단 관계자가 있을 리 없잖아?”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파벨은 순간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알던 조신하다의 뜻이 치레아 공국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그건 다이아나를 수행하는 마법사 라디아도 마찬가지인지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리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다이아나의 뒷모습에 월터는 쓴웃음을 지으며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다이아나만 없었다면 그도 곧바로 술집으로 향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