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26화 : 발키란성 전투 – 1


발키란성 전투 – 1

사막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커다란 성읍도시 발키란.

과거 알카사스 왕국 때 건설된 제대로 된 성이었다.

방어마법진은 오래전에 작동을 멈췄지만 높고 튼튼한 성벽으로 인해 무역로 상에 위치한 몇 안 되는 난공불락의 전략적 거점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무역을 통해 얻은 방대한 부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까지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 며칠, 발키란의 분위기는 아주 뒤숭숭한 상태였다. 맛있는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는 화려한 식탁. 어린 양고기의 맛을 즐기고 있던 성주의 인상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비대한 뱃살이 말해주듯 성주는 식탐이 대단했다.

그런데 저 눈치 없는 총리 녀석이 식사 시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들어와 기분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짜증이 난 성주는 거친 동작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내던지듯 식탁에 내려놓으며 호위병들에게 외쳤다.

“나세르 장군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장군을 불러오겠습니다, 성주님.”

성주가 다시금 식사를 재개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은 나세르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긴 수염에 건장한 체격을 한 나세르는 성주가 가장 신뢰하는 장수였다. 전시가 아니었기에 그는 가벼운 복장에 허리에 검만을 차고 있었다.

성주는 나세르 장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냅킨으로 입을 닦자마자 질책했다.

“남쪽 마을 셋이 무너졌다는데, 데르비 장군은 뭘 하고 있는 거냐?”

나세르 장군은 비통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데르비가 당했습니다.”

남쪽 마을들이 언데드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데르비 장군이 1천 병력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성을 출발한 지 4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비보가 날아올 줄이야……………

“뭣이!? 데르비가? 내 그렇게 앞서 달려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늘.”

데르비는 용맹스런 장수였지만, 문제는 성격이 조금 급하다는 것이었다. 적이 조금 밀린다 싶으면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서 달려가는 기질이 있는 아주 호전적인 장수였다.

“데르비만 전사한 게 아닙니다. 믿기 힘들지만 이끌던 1천 병력 역시 전멸당했다고 합니다.”

나세르의 보고에 성주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뭣이?”


“라시드에게 구원을 요청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주님.”

나세르 장군의 조언에, 성주 옆에 서 있던 총리가 급히 끼어들었다.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건 안 됩니다. 성주님께서 부족연합에 들어가신 건, 그 촌놈의 부하가 되시려던 게 아니었지 않습니까?”

성주의 세력은 라시드 휘하의 부족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목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던 부족들과 무역을 통해 방대한 부를 축적한 자신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그 힘을 바탕으로 해서 라시드를 몰아내고 자신이 부족연합의 지도자가 될 속셈이었다.

언데드 토벌을 통해 이름을 떨치고 있는 라시드의 세력과 싸워 승리를 얻는다는 건 아무리 성주의 세력이 강하다 해도 힘들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총리는 성주에게 부족연합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 분란을 조장하여, 라시드를 제거하고 지도자가 될 것을 권했다. 창고 안에 쌓여있는 막대한 금은보화를 통해 여러 부족장들을 회유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면서……………

총리의 지적에 성주는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이 기회를 통해 성주님의 능력을 과시해야 합니다.”

총리의 말에 나세르 장군이 반박했다.

“말이 쉽지, 데르비 장군이 거느린 1천 병력을 하룻밤에 괴멸시킨 놈들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제대로 방어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야지에서 싸웠으니 그렇게 된 게 아니겠나. 만약 난공불락인 발키란으로 적들을 끌어들여 싸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렇지 않습니까? 성주님.”

총리가 실전경험이 없는 문신(文臣)이긴 했지만, 발키란 성벽이 얼마나 두껍고 튼튼한지를 잘 알고 있는 성주는 그의 말이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키란 성은 알카사스가 건설한 제대로 된 석성(石城)이었다. 사막 마을들을 감싸고 있는 어중간한 토벽 따위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언데드 괴물들이라 해도 성벽을 돌파해 들어올 수 있을 리 없다고 성주는 생각했다.

“총리의 말이 옳은 것 같군.”

하지만 나세르 장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성주님. 라시드와 협력한다면 훨씬 적은 피해로 언데드를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현재로서는 언데드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총리는 나세르 장군에게 비릿한 미소를 보내며 질책했다.

“아직 언데드의 세력조차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장군은 정찰병조차 내보내지 않았다는 건가?”

나세르 장군은 불쾌하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총리에게 대꾸했다.

“벌써 수백 명이나 보냈습니다. 하지만 언데드들이 모두 어디로 숨었는지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언데드뿐만이 아니라 언데드에게 죽임을 당했을 시체 한 구 찾아내지 못했지요.”

“그럴 리가 있나. 정찰 보낸 병사들이 꾀를 부린 건 아니고?”

계속 깐죽거리는 총리에게 나세르 장군은 답답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 마물들이 시체를 먹어버렸는지, 아니면 그 시체들조차 자신들의 동료로 만든 거겠지요. 어쨌거나 파괴된 마을의 잔해들뿐, 시체는 단 한 구도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게 정찰병들의 보고였습니다. 만약 마을에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는지조차 의심할 지경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방에 튀어있는 핏자국들만 봐도 피난민들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나세르 장군은 다시 성주에게로 시선을 돌려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데드의 규모를 모르는 이상, 구원을 청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성주님.”

“그건 안 됩니다. 성주님. 우리들의 힘을 다른 부족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는 우리들만의 힘으로 승리해야만 합니다.”

한동안 고심하던 성주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주변에 있는 모든 주민들을 성내로 대피시켜라. 여기서 싸운다.”

더 이상 조언을 해봐야 성주의 심기 건드릴 거라 판단한 나세르 장군은 성주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성주님.”

성주의 결정이 나오자 나세르 장군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부하들을 총동원하여 언데드의 공격로 상에 위치한 모든 마을의 주민들을 성으로 대피시켰다. 성으로 대피시키기 여의치 않은 위치에 있는 주민들은 북상시켜 보다 안전한 마을들로 이동시켰다.

데르비 장군과 그가 이끄는 병력이 전멸당하고 3일이 지났을 때, 주변 마을에 대한 대피작업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피난민들의 증언을 통해 얻어진 언데드의 이동속도로 봤을 때 이틀, 최대한 늦춘다 해도 3일 이내에는 공격이 들어올 거로 예상됩니다.”

나세르 장군의 보고에 총리가 옆에서 참견했다.

“좀 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건가?”

“언데드는 밤에만 움직이고 낮에는 모래 속에 숨어있습니다. 밤에 이동할 때도 횃불 따위가 필요 없는 놈들이다 보니 그 위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잡아 놈들의 위치를 유추해 볼 수는 있었습니다.”

“그게 뭔가?”

“정찰병들입니다. 그들이 정찰하러 갔다 행방불명된 위치가 언데드가 이동한 위치라고 판단됩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언데드들은 밤에도 아주 잘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껏 언데드를 발견했다고 보고해 온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사라진 병사들은 무척 많았습니다. 아주 빠릿한 녀석들로 골라서 보냈는데도 그런 걸 보면, 놈들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뭔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됩니다.”

나세르 장군의 말에 총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틀 내에 공격이 올 거라는 게, 그들의 목숨을 통해 얻어진 결론인가?”

“예, 그렇습니다.”

부하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성주가 끼어들었다.

“언데드들 중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것들도 있다고 하던데, 괜찮겠는가?”

“걱정마십시오, 성주님. 예전에 조약을 맺기 위해 라시드를 찾아갔을 때 들었던 게 있습니다.”

라시드를 시골 촌놈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성주가 그를 직접 찾아가 조약을 맺었을 리가 없다. 자신을 대리해서 총리를 파견해 조약을 맺도록 했다. 나세르 장군은 그때 총리를 호위하여 그쪽으로 가서 주변 부족장들이나 그 부하들과 친분을 쌓고 왔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토벽이라면 모를까, 튼튼한 석벽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발키란의 성벽은 알카사스인들이 건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데드 따위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뚫지 못합니다.”

“허어, 장군의 얘기를 듣고 나니 안심이 되는구나.”

총리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듣기로는 언데드에게는 화살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장군에게는 뭔가 생각해 둔 방법이라도 있나?”

“우리에게는 투석기가 있지 않습니까.”

“돌덩이 보유량이 그리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을까?”

주변에서 충분한 돌덩이를 확보할 수가 없었기에, 아주 멀리서 운반해 올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돌덩이의 보유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총리는 그걸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화공도 쓸 수 있을 겁니다.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거죠. 그런 식으로 놈들을 처치하다 보면,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동안 고심하는 듯하던 성주가 문득 나세르 장군에게 물었다.

“과연 우리의 힘만으로 승리할 수 있겠느냐?”

“언데드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이상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일순 성주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나세르 장군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발키란 성을 의지한 방어전에서 패할 리는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몇 달간 공방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겁니다.”

“내 장군만 믿겠네.”

“예, 성주님.”

나세르는 군례를 올린 후, 갑옷을 철그럭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성주에게 말했듯 그는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튼튼하고 높은 성벽, 풍족한 식량, 그리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는 지하수가 있다.

성주 앞에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몇 달이고 버티다 보면 연합을 맺은 라시드가 원군을 파병해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