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28화 : 발키란성 전투 – 3
발키란 성 전투 – 3
성벽 위에 늘어서 있던 모든 병사들이 일제히 벌레 떼를 쫓아내기 위해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패닉에 빠진 병사들의 일부는 허둥대다가 성벽 밑으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나세르 장군은 그때까지도 짙은 어둠 탓에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진형을 흩트리는 것이냐? 모두 진정하라!”
그때 부관이 헐레벌떡 달려와 보고했다.
“벌레입니다. 엄청난 벌레 떼가 날아와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장군.”
“벌레? 이런 한밤중에 웬 벌레 떼란 말이냐?”
하늘을 날아와서, 그것도 한밤중에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상태에서 가해진 공격이었기에 역전의 맹장인 나세르 장군조차도 대책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기이한 상황.
하기야, 움직이는 시체 떼가 사람을 공격해 온다는 것 역시 그가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모두가 혼란에 빠져있는 그 순간, 성문 쪽 방향에서 요란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뭔가를 파괴하는 듯한 강한 굉음 속에 섞여 있는 건 처절한 단말마였다. 성문 쪽에서 뭔가 사태가 벌어졌음에 틀림없었다.
“저 소리는 뭐냐? 설마, 성문이 뚫린 거냐?”
2중으로 만들어진 성문은 작은 언데드는 힘이 약해 뚫을 수가 없고, 거대한 언데드는 바깥쪽 문을 파괴하는 건 쉬울지 몰라도 비좁은 터널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기에 두 번째 문을 파괴할 수가 없다.
즉, 어떻게 해도 언데드의 능력으로는 성문을 뚫고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뚫고 들어온 모양이다.
나세르 장군은 휘하 장수 몇 명을 불러 언데드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막도록 지시했다.
외성에 나와 있는 병력과 주민들을 내성 안으로 대피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병력이 성문 쪽으로 달려갔음에도 그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성이 잦아들지 않는 걸 보면 작은 시간조차 끌 수 없는 게 분명했다. “모두 내성으로 후퇴해라. 한시가 급하다!”
성주 일가와 핵심 신하들이 기거하는 내성은 외성과 완전히 분리되도록 건설되어, 외성이 점령당하더라도 내성 문을 닫아걸고 농성전을 할 수 있었다.
핵심 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소인 만큼, 외성에 비해 내성 성벽이 훨씬 더 두껍고 높다. 그리고 성문 또한 적이 공격하기는 어렵고, 수비하는 쪽에서는 공격하기 좋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몰릴 줄이야………….”
결국 외성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 대부분은 물론이고, 내성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병사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히 주변 병사들만을 챙겨 내성으로 후퇴하는 나세르 장군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졌다.
난공불락이라 불리는 발키란 성에 의지한 방어전에서 몇 시간도 채 버티지도 못하고 외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2주 정도 방어전을 펼치며 언데드의 세력을 충분히 꺾는 데 성공하면 곧바로 치고 나갈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최악으로 상정했던 게 몇 달 정도 공방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성 내에는 식량도 충분했고, 물 또한 풍족했다.
버티기로 작정한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겨우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외성이 뚫려버릴 줄이야.
밤새 언데드의 내성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지만, 다행히도 외성 성문처럼 뚫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내성은 외성보다 성문에 대한 공격을 하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었던 덕분이다.
충차(車)로 성문을 공격하기 힘들도록 긴 회랑을 통과해야 성문 앞에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회랑의 위쪽에는 활과 창을 든 수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기에, 회랑을 통과해 들어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구조 덕분에 대형 언데드는 비좁은 회랑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고, 떼로 몰려 들어온 중소형 언데드는 기름이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소멸해 갔다.
여명이 천천히 밝아오기 시작하자 병사들이 기쁨에 찬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제 산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에 맞춰서 언데드 떼는 자취를 감췄다.
“모두 물러난 것 같습니다.”
“정말 철수한 게 맞을까?”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나세르 장군은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언데드의 활동 패턴에 따르면 철수한 게 맞겠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예전에 라시드 휘하에서 싸운 장수들과 얘기를 나눴을 때, 그것들이 낮에 움직이지 못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행동 패턴으로 봤을 때, 저것들은 낮에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모래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움직였지요.” “그건 그렇지.”
“소장이 나가서 정찰을 해보겠습니다.”
자원하는 젊은 장수에게 나세르는 허락을 내렸다.
“우선, 밖으로 도주할 수 있는 통로 주변부터 철저히 수색하도록 하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찰을 나간 장수는 가장 가까운 외성 문인 동문까지 언데드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보고해 왔다.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나세르는 성주에게 허락조차 받지 않고 곧장 라시드에게 구원을 청하는 전령부터 내보냈다.
언제 언데드의 공격이 재개될지 알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성주에게 허락을 받으려다 전령을 보내는 것을 거부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주 옆에서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총리가 어떤 식으로 방해할지 알 수도 없었고.
일단 급한 불은 껐다고 판단한 나세르 장군은 성 밖으로 부하들을 보내 언데드의 위치부터 수색하기 시작했다.
성밖으로 정찰을 나갔던 부하들은 곧 돌아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모래 위에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놈들이 흔적을 모두 지워버린 것일까요?”
“설마 그렇게까지 지능이 좋으려고. 바람에 날려가 버린 것이겠지.”
“아무리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고 해도 대형 언데드의 흔적까지 모두 사라진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젯밤에 그렇게 심하게 바람이 분 것도 아니었고요. 그리고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이상한거라니, 뭔가?”
“처음 대형 언데드에게 뚫렸던 성문 있잖습니까. 바깥쪽 문은 갈기갈기 뜯겨져 나간 게 언데드의 소행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만, 안쪽 문은 달랐습니다. 뭔가 예리한 걸로 잘려 나간 듯한 흔적이…………….”
“잘려 나갔다고?”
바깥문은 두꺼운 나무와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안쪽 문은 위쪽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도록 만들어진 철창으로 된 문이다.
굵은 쇠막대로 얼기설기 만들어져 있기에, 문과 문 사이에 들어와 있는 적들을 활이나 창으로 공격하기에 편리했다.
그런 쇠막대들을 언데드가 자를 수가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치 예리한 뭔가로 절단된 듯 아주 깨끗하게 잘려 나가 있었습니다.”
“이해를 할 수가 없군. 내가 직접 가서 살펴보겠다.”
백부장급 부하들에게 각자 병사들을 이끌고 외성의 거주지역을 샅샅이 수색하라 지시한 뒤, 나세르 장군은 직접 성문을 살펴보러 갔다. 성문은 20여 미터 정도의 아치형 터널 구조물로 되어 있고, 나무와 쇠로 만들어진 커다란 외성문과 쇠로만 만들어진 내성문으로 되어 있었다. 외성문은 좌우로 활짝 열리게 되어 있었고, 내성문은 위로 끌어올려 놨다가 필요할 때 아래로 떨어뜨려 닫는 구조였다.
성문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건, 일반적인 성과 달리 성벽 바깥에 해자(垓字)를 만들어 둘 수 없기에 성문을 방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걸 잘 아는 알카사스 인들이 공들여서 만들어 놓은 성문이었는데, 그게 밤사이에 간단히 뚫려버린 것이다.
그 탓에 외성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은 물론이고, 거주민들까지 거의 다 궤멸당해 버렸다.
겨우 하룻밤 사이에 이토록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에 나세르를 비롯한 상층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세르 장군이 성문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외성 거주지역에서 피폐한 몰골의 주민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어? 저게 어떻게 된 일인가?”
“가택을 수색해 보니 대부분의 주민들이 무사했습니다.”
외성에 거주하고 있던 살아남은 주민들의 말로는 문을 꽉 닫아걸고 있으니, 언데드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집 안으로 들어오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벽을 벅벅 긁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능이 전혀 없는 것인지 문을 열지는 못하더라는 것이다.
“손을 전혀 쓸 줄을 모르더랍니다. 마치 짐승처럼 말입니다.”
“허기야, 그것들은 시체니까…………. 살아생전에 익혔던 기억 또한 모두 사라진 것이겠지.”
“병력 피해는 막심합니다만, 집 안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덕분에 이대로 언데드들이 물러간다면, 빠른 시일 내에 복구가 가능하게 된다. 주민들의 피해가 거의 없는 덕분이다.
하지만 오늘 밤에도 언데드가 몰려온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저 수많은 주민들을 내성 안으로 대피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성에 다시금 병력을 배치해 전투를 벌이는 것도 문제가 있다.
어젯밤 그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도 외성을 지키지 못했는데, 내성 주둔군을 밖으로 꺼내 외성 전체를 수비한다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어젯밤 파괴된 남쪽 성문은 아직 복구 작업을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어떻게 하지?’
순간, 언데드들이 일부러 주민들을 죽이지 않고 그냥 놔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나세르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골 속에 썩어버린 물이 가득 차 있을 언데드에게 지능 따위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어젯밤 공방전에서 봤듯, 언데드들은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느릿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만약 지능이 있다면 화염이 치솟는 곳 근처로는 가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언데드들은 그런 걸 따지지도 않고 무턱대고 전진해 왔다. 오로지 성벽 밑으로…………….
썩어서 떨어져 버린 눈알. 말라붙은 고깃덩이가 군데군데 붙어있는 뼈뿐인 몸체. 그것들의 시각이 살아있는 사람과 같을 리가 없을 거다.
‘허어, 참. 사람과 언데드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군. 대규모로 침공해 들어왔기에 뭔가 집단적인 지능을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뭔가 상위급의 존재가 지휘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외성 주민들을 어떻게 할까요? 장군.”
“나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다. 성주님과 의논해 보겠다.”
“알겠습니다,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