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6화 : 꼬불쳐 둔 식량과 물이 희망 – 1
꼬불쳐 둔 식량과 물이 희망 – 1
마르코에게 물어보는 건 어렵지 않다. 서로가 통신이 되는 만큼, 그의 의향을 타진해 보는 건 금방이다.
수석 마법사로부터 친구인 마르코가 라이의 타이탄과 최신형 카르마2급 타이탄을 교환해 줄 마음이 변함없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그루시아 후작은 곧장 손을 썼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자신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인 클리프 바그룩 자작을 라이에게 보내는 한편, 연습용 타이탄 하나도 장기 임대 형식으로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습용 타이탄의 수가 워낙 적어 경쟁이 치열했지만, 후작에게 있어서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콘도르 기사단 단장이 직접 고작 훈련용 타이탄 한 기를 장기 임대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데 그걸 거부할 수 있을 정도로 간이 배 밖에 나온 인물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
라이는 이번에 조장이 된 아벨의 호출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집무실로 가보니 아벨은 호화로운 정복을 착용한 웬 기사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도 기사단 입단식을 할 때 한번 착용했을 뿐,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정복이었다.
정복이라 멋지긴 하지만 평상시에 착용하기에는 불편한 게 많았고, 예식 때 주로 입는 옷이라 구김이 가거나 이물질이 묻으면 세탁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찾으셨습니까? 조장님.”
“아, 본대에서 귀관을 찾아오신 분이 계시다.”
아벨은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려 정중하게 말했다.
“여기, 찾으시던 라이라고 합니다. 그럼 편하게 대화를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벨은 사내에게 라이를 소개한 후 자리를 떠났고 방에는 라이와 그 둘만이 남았다.
정복을 착용하고 있는 만큼, 소속이 어딘지 알아보기는 아주 쉬웠다.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문장들을 라이가 전부 알지는 못했지만, 140분대 소속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140분대라면 기사단장 직속의 호위부대였다. 듣기로는 전원이 분대장급의 실력을 지닌 콘도르 기사단 최강의 부대라고 했다.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소개부터 했다.
“클리프 바그룩이다.”
“라이 위너스라고 합니다.”
“귀관을 찾아온 이유는 노획한 적국의 타이탄을 회수하고, 대신 다른 타이탄으로 교체해주기 위해서다.”
클리프 바그룩은 라이에게 자신이 귀족이라는 것조차 밝히지 않았지만, 140분대 소속이라는 것만으로도 하늘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자신이 노획한 타이탄을 회수하겠다는 클리프의 말에 라이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사내는 140분대에 소속될 만큼 대적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막강한 실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제 타이탄을 회수해 가시겠다고요?”
“쯧, 아무리 자네가 노획했다고는 하지만 적국의 타이탄을 타고 기사단 임무를 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아니겠지? 대신 그 보상으로 타이탄
1기를 자네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겠다는 게 상부의 결정이다. 그러니 지금 바로 계약을 해지하도록 하게.”
“직접 타이탄을 회수해 가실 겁니까?”
이미 타이탄을 보유하고 있는 기사는 다른 타이탄과의 중복 계약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물은 것이다.
“아니, 내가 온 건 상부의 명령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저녁때쯤 귀관에게 지급될 새로운 타이탄을 가진 사람이 올 거다. 귀관의 타이탄은 그가 회수해 가겠지.”
“저녁쯤・・・・・・ 말입니까?”
상부의 명령이라는 말에 라이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약간이긴 하지만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라이는 착잡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올 때까지, 그동안만이라도 제 타이탄과 이별의 시간을 가져도 괜찮겠습니까? 제 첫 타이탄인 데다가 정이 많이 들어서…………” 클리프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다 라이를 바라보았다.
라이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통제하다 보니 클리프는 그루시아 후작의 명령에 따라 그저 통보하러 온 것에 불과했다. 클리프가 보기에 라이는 아직 어린 기사였다.
클리프는 잠시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해야 저녁때까지만 이별의 시간을 달라는데 매몰차게 거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도 오너였던 만큼, 타이탄과의 유대감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귀관의 요청을 수락하겠다. 단, 그 시간은 새로운 타이탄이 도착할 때까지 만이라는 걸 명심하도록.”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장의 집무실을 나와 클리프 바그룩이 보이지 않게 되자 라이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를 갈았다.
‘이런 망할 새끼들!! 아버지께 기사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어지간한 건 참고 좋게 좋게 넘어가려 했건만…… 아무리 내가 만만해 보인다고 하지만, 케이론을 내놓으라니. 나를 뭘로 보고!’
기사단원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마음이었지만, 케이론을 줄 수는 없었다.
갑자기 케이론을 달라고 하는 이유야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며칠 전 자신에게 흥정을 걸어왔던 그 늙은 마법사에게 팔아먹으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의 손아귀에 넘어가면 케이론은 산산이 분해되어 버릴 것이다.
기사라는 명예가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생명의 은인인 케이론을 버릴 만큼 소중하지는 않았다.
타이탄의 가치가 얼마나 엄청난지 라이는 지금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검이나 갑옷 따위를 양보하는 것과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케이론과는 의사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로지 자신과만 대화를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친구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식하긴 했지만, 전혀 때 묻지 않은 그런 친구. 하지만 그런 것도 케이론이 마법생명체라는 걸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들이다.
‘그래, 모르는 거야 내가 가르쳐주면 되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하지만 클리프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런 구석진 자리에서 라이는 케이론을 불러냈다.
“케이론, 나와 봐.”
말이 끝나자마자 공간을 열고 케이론이 밖으로 나왔다.
이곳 요새에 배치된 이래 여러 기사들과 전투 연습을 해왔었다. 라이가 새로운 타이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141분대의 오너들이 연습전을 청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이의 타이탄이 요새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도 아무도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다.
“케이론, 클리프 바그룩이라는 사람이 너를 내놓으라고 했어.”
기껏 조심스레 꺼낸 서두였건만 케이론은 알아듣지를 못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뭐라고 해야 케이론이 이해를 할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 라이는 힘겹게 다시 말했다.
“너와의 계약을 해지하라는 말이야.”
그리 오랜 시간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케이론은 라이의 능력이 전 주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라이는 이곳 링카 성에 와서 141분대의 오너들과 수시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걸 통해 케이론은 이곳에 있는 오너들이 전 주인의 동료들과 비교해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파악해 냈다. 그리고 그런 상대들로부터
라이는 놀라운 속도로 기술을 흡수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전 주인과 비교했을 때 놀라운 발전력이었다.
우수한 주인과 헤어질 생각은 전혀 없다.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주인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기에 케이론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는 나와의 계약 해지를 원하는가?』
라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내가 아주 곤란해질 거야.”
말을 하던 라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 요새에 함께 주둔하고 있는 동료 기사들은 라이에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장의 집무실을 슬쩍 바라보니, 창문 쪽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창가에 서 있지도 않은 걸 보면 자신이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고 있지 않음에 틀림없다.
사실, 지금 당장 라이가 타이탄을 타고 튄다 해도 클리프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식이었다면 타이탄을 지급받을 능력도 되지 못하는 햇병아리가 단장의 호위기사인 자신에게서 도망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이가 타이탄을 꺼내 얘기를 나누고 있어도,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는 슬쩍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두 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즉,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길게 잡아도 한 시간 남짓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사막에서 공간이동 마법이 불가능하다는 건 라이도 잘 안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건 와이번일 것이다.
용기사가 조종하는 와이번에 타고 용병단을 구하러 가기까지 해봤으니, 와이번의 기동력이 얼마나 좋은지 너무나도 잘 안다.
하지만 와이번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야맹증(夜盲! 즉 밤에는 날 수가 없었다.
이대로 해가 지기 직전까지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문제는 그 전에 교환할 타이탄을 가진 기사가 도착하면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린다.
지금 라이가 믿는 건 타이탄 좌석 뒤쪽에 꼬불쳐 놓은 물통과 비상식량이었다.
샌드웜의 뱃속에서 탈출한 후 사막을 건너오는 과정에서 탈진해 죽을 뻔한 경험을 했던 탓에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몰래 비축해 놓은 것들이었다.
아껴 먹으면 최소 일주일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양이다.
만약 꼬불쳐 둔 비상식량이나 물이 없었다면 라이는 눈물을 머금고 케이론과의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상식량이 라이에게 일말의 가능성을 희망으로 바꿔주고 있었다. 실패해 봤자 케이론을 빼앗기기밖에 더 하겠는가. 어쩌면 기사단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목숨을 내놔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오크의 식용 노예라는 최악의 밑바닥을 경험해 본 라이에게 있어서 그쯤이야 겁날 것도 없었다.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다 타이탄이 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과 동시에 냅다 달리기 시작한 라이
‘쯧, 어리석은 녀석.’
순식간에 가속하며 요새의 담장을 뛰어넘는 걸 보면서도 클리프 바그룩은 여유로웠다.
시간절약을 위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리긴 했지만, 주변을 지나가고 있던 기사를 불러 저녁때 도착할 동료를 향한 전언을 잊지 않고 건넸다. 기사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놈이니 마음만 먹으면 금방 잡아 올 수 있다는 생각과 혹시 동료가 상황을 몰라 난감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치를 취하는 데 걸린 시간은 2분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클리프에게 있어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요새 담장을 뛰어넘어 라이의 뒷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클리프는 자신이 너무 여유를 부렸음을 깨달았다.
평지에서 달리는 것에 비해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달리는 건 훨씬 더 힘들다. 그렇기에 제까짓 게 도망쳐 봐야 얼마나 갔을까 생각했던 것인데,
라이와의 거리가 그의 예상을 훨씬 초월해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질적인 거리를 생각한다면 그리 멀리 간 게 아니었지만, 문제는 자신도 저 거리를 달려가야 한다는 게 아니겠는가.
클리프는 이곳에 오기 전에 라이에 대해서 간략한 보고서를 받았었다.
하지만 클리프는 라이의 나이를 보고는 더 이상 다른 건 읽지도 않고 그냥 던져버렸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새파란 햇병아리의 실력이라는 게 뻔한 거였으니까. 더 이상은 자세히 볼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배운 걸 지식으로서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몸에 익히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스승으로부터, 똑같은 검술을 전수받는다고 해도 자질에 따른 성취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벌어진다. 즉, 안다고 해서 그게 다 실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검술을 갈고 닦기에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어린 나이니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가 있지?”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이후, 마나를 몸에 축적하는 기법인 마나 연공법이라는 것이 각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크라레스 제국의 기사들에게는 치레아 대공 본인이 직접 가르친 것이 널리 퍼졌고, 코린트 제국의 경우에는 치레아 대공으로부터 전수받은 미카엘이 휘하 기사들에게 가르친 것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국가들의 경우, 크라레스나 코린트에 첩자들을 파견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 마나 연공법을 훔쳤다.
다크가 자신의 친구 및 부하들에게 가르쳐준 태허무령심법은 아주 천천히 마나를 축적할 수밖에 없다는 게 최악의 단점이었지만, 안정성만큼은 첫손에 꼽히던 심법이다.
여러 사람의 입에 입을 거치며, 손실된 부분도 많고 왜곡된 부분도 많았지만, 그럭저럭 큰 문제없이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크의 마나 연공법이 전수된 후에 각국에서 그래듀에이트에 도달하는 실력자의 숫자가 월등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게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마나 연공법이 등장한 이후, 몸속에 마나를 쌓는 속도가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빨라진 게 사실이다.
때문에 라이가 극소수 엘리트들에게만 전수된다는 마나 연공법을 익히고 있다고 해도, 저 나이대에 몸속에 쌓을 수 있는 마나의 양이라고 해봐야 일정 수준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걸 클리프는 잘 알고 있었다.
“으으윽!!”
잔뜩 기합을 넣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전속력으로 쫓아가 봤지만 꽁지에 불이 붙은 것마냥 미친 듯 도망치고 있는 라이와의 거리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더 멀어지기만 했다.
도대체 누구한테 뭘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도망치는 속도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고 있었다.
짜증이 치솟은 클리프는 잡히기만 하면 저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빨을 갈았다.
‘저렇게 속도가 빠른 만큼 마나 소모 역시 클 거야. 지금이야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가 고갈되어 뻗어버리겠지.’ 거기에 생각이 미친 클리프는 달리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짧은 시간에 라이를 잡기는 힘들다고 판단했기에 효율적으로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