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20화 – 사라진 탈마의 고수 (4권 끝)

사라진 탈마의 고수

묵향의 여행은 그야말로 한동안의 휴식이었다. 그럴듯한 장소가 있으면 남들이 한 번씩은 해 보는 낚시도 했고, 아름다운 산이나 색다른 구경거리가 있다면 한가 롭게 관광을 하는 시골 서생처럼 그곳을 찾아갔다. 또 색다른 요리가 있다면 일부러 그걸 시켜서 먹기도 했다.

장인걸이란 거대한 적을, 그것도 자신보다 월등하게 강대한 세력을 지닌 적을 제압하는 것은 단순한 무공 대결과는 달리 묵향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었다. 상대 를 기만하고, 모략하고, 놈의 속임수에 속는 척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 뒤꽁무니로는 놈을 향한 함정을 준비하고…….

묵향이 이번에 이렇듯 손쉬운 승리를―거의 세 시진에 걸친 사투를 통한 것이었지만—손에 쥘 수 있었던 것도 천마혈검대가 총단에 없었던 덕분이었다. 천마혈검 대가 총단에 남아 있었다면 더욱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천마혈검대는 장인걸이 지닌 세력 중 유일하게 묵향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녔으니 까 말이다.

어쨌든 그동안 해온 일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혹사였기에, 묵향은 한가하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피곤해진 마음에 산뜻한 휴식을 제공했다. 모략이 나 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무인이었던 묵향으로는 요 근래 1년여가 매우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한가하게 떠돌던 묵향은 어떤 식당에 앉아 그곳 특산물인 황사(黃蛇)로 만든 탕에 곁들여 죽엽청을 비우다가 험상궂은 다섯 명의 무림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퍽이 나 시장했던 듯 오리탕과 오리구이 다섯 마리를 시켜 정신없이 들이켜고는 재빨리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묵향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묵향이 이들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이 나눈 대화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한 이야기라고는 식당 안에서 음식을 달라고 한 것과 대금이 얼마냐고 물은 것이 전부였지만, 묵향의 귀에는 또 다른 음성도 들려왔다. 물론 이것은 전음으로 나눈 대화였기에 식당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내용이 었다.

<대형, 그게 사실일까요?>

<물론이지, 네 녀석은 내가 한 번이라도 허튼소리하는 것 봤냐?>

<하지만 구휘 대협의 무덤은.

<그러니까 그게 혈교 놈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라니까. 진짜는 따로 있어. 원래 구휘 대협은 재물을 많이 모은 사람은 아니었지. 그런 그가 재물을 잔뜩 모아 놓 은 거대한 무덤을 건축했겠냐?>

<그건 그렇지만…….>

<그의 무덤에는 그의 죽음과 함께 자취를 감춘 무림에서 사라진 10대기병의 최고라는 흑묵검(黑墨劍)과 북명신공이 있을 뿐이라구.>

여기까지 들은 묵향은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북명신공은 자신의 손에 있었다. 한중길 교주에게서 장인걸에게로, 그리고 이제 총타의 주인이 된 자신의 손으로 넘 어온 것이다. 하지만 험상궂은 사내의 다음 말을 들은 후에는 더 이상 쓴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북명신공이라구요?>

<그렇지. 북명신공은 두 권이야. 하나는 구휘 대협이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아들 구천 대협에게 맡겼지만, 또 한 권은 언제나 품속에 지니고 있었지. 아마 그것은 흑묵검과 함께 있지 않을까?>

“한 권이 더 있다구?”

묵향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순간 놈들은 음식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가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덩치도 좋았고, 다리도 길고 쭉 뻗은 것이 대단히 뛰어난 명마들이었기에 묵향이 재미 삼아 시장에서 구입해서 끌고 다니는 말과는 그 속도와 지구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다.

묵향은 반 시진도 안 되어 그 차이를 느끼고는, 필요한 짐들을 재빨리 말안장에서 꺼내어 대충 품속에 넣은 후 경공술을 펼쳐 쫓아가기 시작했다. 시간도 많았고,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검 따위는 필요 없지만, 그 두 번째 북명신공을 한번 읽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교주에게서 강탈하다시피 얻어 내서 읽어 본 북명신공은 묵향의 무공 성취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에 묵향으로서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만사를 제쳐 두고 그들을 뒤따랐을 텐데, 지금은 다행히 시간까지 꽤 많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묵향은 상대가 또 다른 북명신공을 찾아낼 때까지 조용히 뒤따라가다가 조용히 말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간단하게 물리력을 행사할 예 정이었다. 묵향은 상대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관심사였을 뿐, 그들에게서 그걸 어떻게 얻어 내느냐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쫓아오는데요?》

《흐흐흐, 놈의 저 나약한 몸매로 봐선 무영문의 정보가 영 미덥지 않더니만, 진짜일 줄이야. 놈이 추격을 시작했으니 더욱 조심해라. 언행에 신경을 쓰고, 특히 우 리끼리 주고받는 말은 어기전성이 아니면 안 돼. 알겠나?》

《옛! 흑마대주님.》

그들은 묵향이 뒤따르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삼광(三鑛)에 들러 이것저것을 조사했다. 그리고는 뭔가 단서를 찾아 낸 것처럼 태행산(泰杏山)으로 이동했 다. 이들은 두툼한 책자 한 권과 오래된 듯 너덜거리는 양피지 한 장에 의지해서 길을 갔다. 물론 이 둘은 다 대어를 낚기 위해 고심해서 제작한 미끼였다.

묵향은 놈들의 뒤를 무려 10일이나 끈기 있게 따라가 철우산(鐵寓山)에 도착했다. 과연 철우산은 구휘 같은 인물이 만년에 무공을 연마하고 생을 마감할 생각을 했을 법한, 너무나도 아름다운 산이었다. 산세가 너무 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완만하지도 않은 데다가, 군데군데 기암괴석이 드러나 있어 보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그들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묵향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미약하지만 군데군데에서 마기(氣)와 사기(邪氣)가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발걸음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자신을 제압할 만한 고수가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도 않았고, 최악의 경우 혈마와 같은 엄청난 인물이 있다고 해도 그와 정면 대결이 아니라면 도망치는 것은 손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이리저리 모습을 숨기며 앞서가는 인물들의 뒤를 따르던 묵향이 이제 아예 대놓고 천천히 다가오자 숨어 있던 무리들은 묵향이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챘다 는 것을 알았다.

“휘이이익!”

긴 휘파람 소리가 심후한 내공을 싣고 울려 퍼지자 곧 묵향 좌우의 땅속에서 암습자들이 튀어 나왔다. 묵향은 자신의 바로 옆에서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오는 녀석 에게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일장을 먹였다. 하지만 손을 통해 전해지는 그 반탄력은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다. 쓸 만한 실력을 쌓은 암습자 정도로 생각하고 날린 일장이었지만, 웬만한 사람은 즉사했을 텐데도 나자빠졌던 상대는 비실거리며 일어섰다.

“크아아아.”

“쿠르르륵.”

흐리멍텅한 눈을 하며 괴상한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을 보고 묵향은 그제서야 상대가 누군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강시들이었군. 그런데 무슨 강시들이 이렇게 빠른 거야? 들은 것하고는 좀 다른데?”

저마다 괴성을 지르며 이제 본격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강시들은 묵향이 익히 알고 있던 혈교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 아니었다. 혈교의 강시 제조법이 장인걸 패 거리에게 전해진 후 더욱 연구를 거쳐 개발된 천령강시였다. 이지력을 완전히 상실한 강시와 달리 이 녀석은 충분히 스스로가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강시처럼 피리 소리 따위로 조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예전의 한중길 교주는 묵향을 제거하기 위해 보통의 강시보다 훨씬 속도가 빠르고, 더욱 강인한 천령강시를 3천 구나 제작해 두었다. 그들 상당수는 장인걸이 한 중길 교주를 없애는 과정에 투입되어 소모되었다. 그러나 그 소모분을 장인걸이 적절하게 채워 놓았기에 이곳에는 3천2백 구의 천령강시 부대가 존재했다.

묵향은 처음의 한 방 맞았던 천령강시가 비실거리며 일어서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검을 뽑았다. 놈들이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어느 정도 전력을 감춰뒀는지 모르니, 자신의 장기인 검술로 상대하는 편이 공력의 소모를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슈걱!

묵향은 공력의 소모가 큰 검강 종류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어검술만을 이용해서 천령강시들의 대군을 상대했다. 검푸른 빛으로 이글거리는 묵혼검이 가르고 지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무쇠보다도 단단하다고 알려진 천령강시의 몸은 토막이 났고, 검붉은 약재에 전, 죽은피가 콸콸 쏟아졌다. 천령강시를 제조하는 데 사용하 는 것의 8할이 독 종류였기에 그 피가 튄 묵향의 옷에는 곧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만독불침(萬毒不侵)을 자랑하는 그의 신체에는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검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뽑아내기에 그 어떤 고급 검술보다도 공력의 소모가 적은 어검술만을 사용했으므로 한꺼번에 많은 수의 천령강시들을 토막 칠 수는 없었 지만 묵향은 한 번에 하나나 둘, 어떤 때는 셋씩 착실하게 강시들을 분해해 나갔다.

극마에 이른 고수였던 흑마대제 한중길이나 무림맹주였던 화경의 고수 무극검황 옥청학까지 어느 정도 궁지에 몰아넣은 천령강시였지만, 탈마의 고수인 묵향에 게는 그 어떤 해도 주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 때문인지 4백여 구의 천령강시가 분해되어 버리자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대천악마나진(大千惡魔羅陣)을 펼쳐랏!”

대천악마나진. 마교의 1천 년 역사에서 단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던 전설적인 진세가 서서히 발동되었다. 온 사방에서 마기가 짙게 깔리며 천령강시는 더욱 힘 을 얻은 듯 미쳐 날뛰었다.

원래가 대천악마나진은 마기와 요기를 지닌 인물에게는 더욱 힘을 보태어 주고, 그렇지 못한 인물들은 그 힘에 압도되어 평상시 힘의 반도 내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 진세를 이용하여 천하제일문이 멸문당했을 때, 그 강대한 힘에 놀란 마교의 고위급 고수들에 의해 오히려 사용이 제한되었을 정도로 지독한 진세였다.

천령강시들이 대천악마나진의 그 강력한 진세 속에서 미쳐 날뛰기 시작했을 때 그와 비슷한 현상이 묵향의 몸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혈관을 격동시키는 힘의 이동. 묵향은 자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하며 온몸에서 힘이 펄펄 솟는 것을 느꼈다. 마의 극한을 뛰어넘었기에 도저히 마인으로 느껴지 지 않았지만, 묵향 역시 마인이었기에 대천악마나진에서 힘을 얻어 내고 있었다. 이것으로 묵향의 내공 근원이 정인지 마인지는 자연스레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 다.

대천악마나진이 펼쳐지고 난 후 묵향은 더욱 강맹한 어검술을 구사하며 천령강시들을 베어 갔고, 이제 천령강시의 수가 수백 구 정도로 줄어들었다. 장인걸은 입 술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천마혈검대를 투입할 것인가?

자신이 믿었던 함정은 묵향에게는 그 어떤 타격도 줄 수 없음이 드러나 버렸다. 과거 화경이나 극마에 이른 한중길이나 옥청학을 상대할 때도 끝마무리는 자신이 했다. 천령강시 덕분에 그들의 힘을 많이 소진시킨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기대를 했던 것인데, 이게 예상외로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고 있었다. 3천 구가 넘는 천령강시를 반 토막 내고도 묵향은 그 어떤 피로감도 보이지 않았다. 한중길이나 옥청학은 이때쯤 헥헥대며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자신은 있는 거요?”

상대는 장인걸이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장인걸을 마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들의 선조가 제작한 최고의 강시인 천령강시 가 저렇게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에는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

“물론이오. 하지만 반 각이 필요하오.”

“그렇다면 빨리 준비하시오. 저놈이 천령강시를 몽땅 조각내 버리기 전에.”

장인걸은 조금 더 지켜보기로 생각하고 구양운 장로에게 어기전성을 보내 천마혈검대로 하여금 제 위치를 지키고 있을 것을 당부했다. 괜히 저 난장판에 휩쓸린다 면 또다시 수하들을 잃을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욱 적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핏빛과 같은 적포를 입고 있는 혈교 교주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의 수하들도 기다렸다는 듯 묵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령강시들처럼 묵 향을 향해 돌진하는 대신 상당한 거리를 두고 포진하는 것으로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은 모두 해골 모양이 새겨진 긴 지팡이를 들고는 일제히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그들이 모두 같은 주문을 외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혈교 교주를 따라 도열한 이들 3백여 명의 혈교 고수들 중 1백여 명만 교주와 비슷한 주문을 외웠고, 나머지 2백여 명은 목표물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옭아 매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묵향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천령강시를 상대로 싸우다가 과거에 상당히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어떤 느낌을 받았다. 뭔가 끈적한 것에 갇힌 느낌. 아차 하는 순간 주위를 둘러봤을 때는 이미 예전에 자신을 꽤나 고생하게 만들었던 해괴한 해골 모양 지팡이를 든 놈들 3백여 명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더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던 묵향은 처음부터 강공으로 나갔다. 엄청난 검기가 사방으로 폭발적으로 뿜어 졌다. 그의 검기는 대천악마나진의 도움으로 더욱 막강해졌으나, 요기를 뿜어 대는 혈교의 마술도 그 힘이 배가됐다. 그리고 예전에는 겨우 아홉 명이 자신을 향해 술법을 시전했지만, 지금은 스물두 배나 많은 인원이 묵향을 향해 대라혈망진(大羅血網陣)을 펼치고 있었다.

퍽퍽!

사방으로 뿜어 나가는 검강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자 혈의를 입은 인물들의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겨우 반 각. 반 각을 버티는 게 이렇게 힘들었다. 묵 향이 첫 번째로 혈의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강기를 사방으로 뿜어 댔을 때, 그 한 방에 수백의 천령강시들이 토막 토막 잘려 파괴되는 것을 본 그들은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주문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 하는 짓거리를 보다가 정신이 흐트러지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시간이 가기만을 죽자고 기다리면 시간은 더욱 안 간다. 대라혈망진은 상대의 진기를 뺏는 효과도 가졌지만, 대천악마나진 안에 들어와 있는 묵향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힘이 난다는 듯 괴력을 발휘했기에 혈의인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혈교의 무리들은 마기와는 관계없이 요기를 띠고 있었기에 그 진세의 영향을 받아 힘을 낭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능력이 배가된 것 또한 아니었다. 어쨌든 아무리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또는 아무리 시간이 늦게 지나가기를 바란다 해도 시간은 일정하게 지나갈 뿐이다.

혈교의 교주, 그리고 그와 함께 주문을 외워 대던 1백 명의 혈교 고수들이 어느 순간 손을 쭉 뻗자 암흑의 기운이 묵향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여태껏 전력을 다해 술법에 정신을 쏟던 2백여 명이 자신들의 할 일이 가까스로 끝난 것을 느끼고 허물어졌다. 그들은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내뿜으면서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혔던 장본인이 분해되는 장면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야말로 혈교가 최고, 최강의 주문으로 생각하는 묵령시분술의 위력에 의해 그놈의 시체까지도 갈가리 분해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는 장면을 꼭 봐야지만 오늘 밤 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것이었다.

검은 기운은 곧 사라졌지만 묵향의 몸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혈의인들의 믿음대로 묵향은 시체마저도 분해되어 버린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었지만 그를 이곳에 서 ‘없앤 것만은 확실했다.

모두 지독한 공력 소모와 오랜 시간의 정신 집중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혈교의 교주는 부하들보다는 훨씬 더 우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서도 땀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엄청나게 지쳤음을 알 수 있었다.

장인걸은 혈교의 교주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서며 질문을 던졌다.

“과연, 없앤다는 것이 바로 이런 말이었구려.”

장인걸은 묵향이 입었던 검은 옷과 땅바닥에 뒹구는 묵혼검을 지그시 쏘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묵령시분술이라. 정말 대단한 술법이었소.”

이때 묵혼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줄에 매달려 끌려오듯 천천히 날아올라 장인걸의 손에 들어왔다. 장인걸은 묵혼검을 차근차근 훑어봤다. 자신이 사용하는 검에 비해 매우 짧았다. 하지만 그 거무튀튀한 묵광을 발하는 검신은 매우 깨끗했고, 또 너무나도 날카로워 보였다.

“과연 좋은 검이군. 이 시대 최강의 고수가 가졌음직한 검이야.”

그와 동시에 장인걸의 손에 들려 있는 묵혼검이 허공을 갈랐다.

슉!

장인걸이 노획물품을 감상하는 줄 알고 미처 대비하지 않고 있었던 혈교 교주는 그 한 번의 기습 공격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우두머리의 곤경을 본 혈교의 고수들 이 장인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곧이어 나타난 천마혈검대에 가로막혔다.

곧바로 치열한 난전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4척이나 되는 핏빛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흑의 무사들. 그들이 바로 마교가 자랑하는 최강의 집단, 천마혈검대였 다. 개개인이 신검합일급에 달하는 고수들로 이뤄진 천마혈검대와 대적한다는 것은 지금 너무나도 지쳐 있는 혈교 고수들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쳐 있지 않아도 상대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막강한 집단인데, 너무나도 지쳐서 지팡이도 들기 힘들 정도인 그들이 어찌 그 막강한 천마혈검대와 싸울 수 있겠는 가. 순식간에 하나 둘 피를 뿌리며 나뒹굴기 시작했다.

장인걸은 혈교와의 전투 따위에는 신경도 안 쓰며, 묵혼검의 짧은 검신 덕분에 죽음은 면한 채 신음하고 있는 혈교 교주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혈교 교주는 발악적으로 외쳤다.

“이런 비열한 놈. 비록 네놈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네놈의 명운도 그리 길지는 못할 게다.”

하지만 장인걸은 혈교 교주의 저주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장인걸은 상대를 향해 조소 띤 어조로 이죽거렸다.

“크흐흣, 유언으로 알고 명심하겠소이다. 그래, 또 할 말은 없으시오?”

너무나도 상대가 느글느글하게 나오자, 혈교 교주는 치솟는 분노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장인걸은 손에 들고 있는 묵혼검을 손에서 놓으며 말했다.

“역시 이 검은 묵향에게나 어울릴까 본좌의 손에는 맞지 않는구려.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가 이토록 오랫동안 고통에 몸부림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오. 뭐, 덕 분에 그대의 유언을 들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제 곧 편안하게 해 주겠소. 잠시만 기다리시구려, 흐흐흐”

장인걸은 신음하고 있는 혈교 교주의 곁에 선 채 공력을 있는 대로 오른손에 끌어 모았다.

“대단한 술법이기는 했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술법이었소. 잘 가시구려.”

그리고 장인걸의 손은 아래로 내려갔다.

퍽!

혈교 교주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대송제국의 숨 막히는 격변기. 그때를 즈음하여 진천왕의 세력은 확실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를 뒤에서 지원하던 혈교가 3백여 명의 상층부 고수들과 교주를 잃은 후 복수의 이빨을 갈며 지하로 잠적해 버렸기 때문이다.

<묵향5 : 외전-다크 레이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