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권 8화 – 인질이냐 짐이냐
“자객 녀석을 끌고 와.”
“옛!”
잠시 후 흑의인 몇 명이 만신창이가 된 한 인물을 끌고 왔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온몸이 엉망이기는 했지만, 묵향의 엄명으로 혈도는 다치지 않았기에 정양만 잘 한다면 무공을 회복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초췌한 얼굴을 한 남자가 묵향의 앞에 서자 묵향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자, 자네가 잡혀 온 지도 꽤 된 거 같은데, 나한테 뭐 할 말 없나?”
그 남자는 증오에 불타는 시선을 묵향에게 던지며 짤막하게 답했다.
“없다. 죽여라.”
“그렇게 죽고 싶나? 아무리 무인의 삶이 죽음과 가깝다고 해도 일부러 죽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 내가 아직까지 자네를 살려 둔 이유는 단 하나. 자네의 실력 이 아깝기 때문이야. 몸에 구멍이 나긴 했지만 자네와의 대결은 꽤나 재미있었지. 나를 그 정도까지 재미있게 한 인물은 요 근래 들어 거의 없었거든? 기회가 한 번 더 온다면 그때도 치밀한 계획을 세워 나를 암습할 수 있겠나?”
상대는 악에 받쳐서 이를 갈며 외쳤다.
“당연하지! 기회가 한 번만 더 있다면 그때가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그 말에 주위에 서 있는 흑의인들이 꿈틀했지만 묵향의 제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좋아.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다. 대신 조건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자네의 배후와 연락하는 걸 금한다. 둘째, 나를 죽이지 못하는 한은 내가 시키는 일을 몇 가지는 해 줘야 하겠지? 밥값은 해야 할 테 니까. 셋째, 나를 암살하는 데 무슨 짓을 다 해도 상관없지만 내 수하들을 죽이는 것은 안 된다. 동의하나?”
잠시 생각하던 그 남자는 피식 웃었다.
“당신의 목숨을 담보로 나를 포섭하려는 거요?”
“그렇지. 나는 강자를 좋아한다네. 뒤에서 못된 짓이나 꾸미는 놈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무인의 그 단순함을 나는 사랑하지. 나는 일단 조건을 말했어. 자네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일주일 후에 답해 주기 바라네. 데리고 가라.”
“존명!”
섬서성 남단 화음현에 있는 화산(華山)은 그 뛰어난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또 화산에는 그 수려한 경치를 보고 모여 든 도인(道人)들이 창건한 화산파(華山派) 가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화산파는 정도의 가장 큰 문파들인 9파1방, 5대세가에 들어가지만 도인들의 수련장인 만큼 무림사에 깊게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솔선수범하여 도움을 주었기에 소림사처럼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소림의 땡중들이야 살계(殺戒)를 범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굵직한 사건, 즉 피해가 클 만 한 사건이 터지면 잘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저 멀리 그 유명한 화산이 바라다 보이는, 경치 좋고 전망 좋은 곳에 화진루(華瑨樓)라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객잔이 있다. 유람객을 모으기에는 화산이 너무 멀었고, 그렇다고 음식 솜씨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객잔에 평소와는 아주 다른 이색적인 손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 있나?”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묻는 푸른 옷을 입은 무사의 목소리에 점소이가 그 무사의 눈과 왼쪽 허리에 꽂혀 있는 호화로운 검을 재빨리 훔쳐봤다. 이곳은 화산파에 서 그렇게 멀지는 않았고 또 부근에는 길상표국(吉祥標局)이 위치하고 있어 감히 어중이떠중이가 돌아다니며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곳 주인은 길상표국 의 국주와 꽤나 친분이 돈독하기에 웬만한 불량배가 와서 사건을 일으키면 포졸보다는 표사를 불러 들여 빠르고 조용하게 일을 해결했다.
점소이가 그들의 복장과 무장을 재빨리 훑어본 것은 당연했다. 상대의 직위 고하라든지 금전 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고, 또 상대의 실력을 낮은 안목으로나마 평가 를 해 두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단한 고수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옷은 제법 좋은 천으로 만든 것이었고, 검집도 썩 괜찮은 걸로 보아 나중 에 돈을 받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점소이의 눈은 무사들보다는 그들과 함께 온 묘령의 아름다운 소저들을 훔쳐보느라 재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들은 가만히 있어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뻤던 것이다. 하지만 점소이는 철저한 직업 정신으로 자신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는 소저들에게서 간신히 시선을 거두며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들.”
점소이는 재빨리 손님들을 조용하면서도 경치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무림인들의 대부분은 되로 받으면 말로 주려는 성질이 강했기에 친절을 베풀면, 운 좋을 때 는 두둑한 수고료가, 불친절을 베풀면 곧바로 주먹이 날아온다는 걸 점소이는 잘 알고 있었다. 전에 한 번 맞아 보고 뼛속까지 찌르르 울리는 그 감명 깊은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섯 명의 손님들은 점소이가 권한 자리에 모두 앉지 않았다. 점소이가 권한 자리에는 두 여자만이 앉았고, 나머지 무사 둘과 시녀인 듯한 여자 하나는 다 른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그걸 보면 여자들의 신분이 다른 탁자에 앉은 그 세 명에 비해서 매우 높은 듯했다. 그래서 점소이는 그녀들을 향해서 더욱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그 말에 약간 어려 보이는 소저가 대답했다.
“술과 간단한 안주 몇 가지를 가져와요.”
상큼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점소이는 재빨리 주방으로 갔다.
이 이색적인 손님들은 2각이나 지나서야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짙은 눈썹에 강인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전체적으로 근육이 많이 붙지 않은 호 리호리한 체형이기에 무술을 익힌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허리에 검은색의 짧은 검을 비스듬히 찬 인물이 네 명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는 음식점 안을 슬쩍 둘러보더니 곧장 그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점소이를 불렀다.
“야.”
“예?”
“술잔 하나 더 가져와.”
네 명의 수하들을 끌고 들어온 것으로 보아 이 녀석도 약간은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한 점소이는 재빨리 잔을 가져다가 건넸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요, 나으리?”
“술이나 한 병 더 가져와.”
“예.”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여자들이 마시던 술병을 집어 들어 잔을 가득 채워 들이켜고는 또다시 술잔에 술을 채우는 걸 보면서, 상대의 무례함에 바짝 약이 오른 약간 젊어 보이는 여자가 대들었다.
“통성명이라도 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요?”
그 말에 남자는 여자를 쏘아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본좌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고 그쪽도 나를 알 텐데, 굳이 그런 게 필요할까?”
그 소녀도 질 수 없다는 듯 마주 그 남자를 노려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의 안광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폭발적인 기운이 잠시 드러나자 소녀는 순간적으로 얼어 버렸다. 그 남자는 소녀가 완전히 졸아 버리자 피식 미소를 짓더니 이번에는 그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무심한 듯한 눈길을 돌렸다.
“본좌를 보자고 한 용건은?”
상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듣던 것보다 더 무례하군요. 그래도 약간의 예의는 필요한 게 아닐까요?”
하지만 사내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따위 것 필요 없어. 용건이나 말해. 만나자마자 검을 뽑지 않은 것으로 나는 할 만큼 예의를 다한 거니까…….?
“당신은 언제나 그런 식인가요?”
“언제나는 아니지.”
그 남자는 두 여인을 쭉 훑어보더니 조금 어려 보이는 여인이 공포를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 아이는 이 자리에 낄 자격이 없으니, 저쪽에 가서 앉으라고 해.”
그 여인은 그제서야 옆에 앉은 여인을 돌아보았다. 여태까지 그녀의 모든 신경은 남자 쪽에 가 있었기에 주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따뜻한 눈 길로 소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가 있거라.”
소녀는 불안한 시선을 남자 쪽에 한번 던지고는 마지못한 듯 일어섰다. 그러나 무사들이 있는 탁자로 걸어가는 그녀의 움직임이 꽤나 경쾌한 것으로 보아 여기 앉 아 있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저 아이의 인상은 어떤가요?”
“글쎄…….”
“묵향 부교주도 이제 혼인을 생각해 보시는 게 어때요? 어느 정도 기반도 잡았고, 또 무공도 천하제일이 아닌가요?”
“훗, 비밀 회담이란 게 겨우 중매를 하려는 거였나? 무영문의 옥화무제도 요즘 할 일이 없는 모양이군.”
묵향의 말에 옥화무제는 심기가 뒤틀렸다. 상대는 자신이 옥화무제의 대리인이 아니라 옥화무제 당사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향의 나이가 많이 봐 줘서 70세 정도라면 자신의 나이는 그 두 배에 달하는 140여 세가 아닌가? 대선배의 입장을 봐서 존대어를 쓸 만도 하련만 툭툭 반말을 던
져 대고 있으니 슬며시 약이 올랐다. 하지만 옥화무제는 그걸 꾹꾹 눌러서 참았다. 무림에서 아무리 연배가 중요하다 해도 그건 실력이 받쳐 줄 때의 이야기다. 현경 의 고수를 상대로 신경질 내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뭐, 겸사겸사 해서지요. 저 아이는 당금 무림의 4봉에 꼽히는 매영인이라는 아이예요. 제 손녀랍니다. 서른하나면 아직 꽃다운 나이가 아닌가요?”
“본좌는 혼인 따위 생각해 본 일이 없으니, 그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 그 외에 무슨 말이 하고 싶소?”
상대가 혼인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자 옥화무제는 슬며시 말길을 돌렸다.
“본문과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은 없나요? 무영문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 최고의 정보 단체예요. 그쪽의 무력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겠지만 정보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구요. 어때요?”
묵향은 옥화무제의 말이 상당히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그건 옥화무제라는 인물을 뺀 무영문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적당한 소금기가 가미된 음식은 없는 것보다 더욱 맛있지만, 너무 소금을 많이 넣은 것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한 맛을 낸다. 묵향이 보기에는 지금의 무영문이 그랬다.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야. 하지만 본좌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 옥화무제는 뱀처럼 지혜롭고 여우처럼 약삭빠르다고. 본좌는 혼자서도 원하는 걸 해 낼 수 있어. 그런데 왜 밖에 있던 우환덩어리를 안으로 끌어 들여서 일을 꼬아 놓겠나?”
졸지에 우환덩어리가 되어 버린 인물이 반박했다.
“그렇지 않아요. 당금 무림은 매우 얽히고설켜 한 치 앞도 알기 힘든 구조지요. 진천왕의 반란, 혈교의 등장, 마교 교주의 교체, 무림맹주의 실종, 구휘 대협 무덤의 발견, 요 근래 일어나고 있는 갑작스런 혈겁. 눈앞에 놓인 많은 함정들을 피해 가려면 우수한 정보력이 있는 게 좋지요.”
“갑작스런 혈겁?”
약간은 궁금증을 드러내는 묵향의 질문에 매향옥이 피식 웃었다. 살인을 한 놈이 딴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던 장소에 가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묵향도 자신이 한 짓을 최고의 정보력을 가진 무영문주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산서성과 사천성에 있던 정도 계열의 문파 셋이 무너졌죠.”
매향옥은 흥미롭다는 듯 묵향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태정문, 대맹문, 등룡문이 거의 동시에 무너졌어요. 흉수는 마교로 짐작되죠. 직접 일을 벌이셨으니 잘 아실 텐데 왜 물으세요?”
순간적으로 묵향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그는 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거의 표시가 나지 않았다. 묵향은 자신의 실수를 느끼고는 일부러 살짝 미소 지었다. “본좌는 모르는 일이야. 아마도 장인걸의 장난이겠지.”
옥화무제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화사한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묵향을 슬슬 긁는 내용이었다.
“아니지요. 장인걸이 얼마 전에 교주직에 오르기는 했지만 마교의 힘은 매우 약화된 상태예요. 그런 때에 정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바보는 아니지요.
혈교도들이 뿜어내는 요기(妖氣)와 마교도가 뿜어내는 마기(魔氣)는 언뜻 비슷하기에 혈교 쪽도 이미 조사를 완료했어요. 혈교의 소행도 아니더군요. 그렇다면 범 인은 하나뿐이죠. 부교주는 지금 짐짓 섬서분타에 모든 세력을 집결시켜 놓은 것처럼 꾸미고는 알맹이 세력들은 모두 밖으로 슬며시 꺼내 놨으니, 빈 집 털려 봐야 아쉬울 것도 없을 테고……. 어때요? 본문의 정보력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옥화무제를 마주 바라보며 묵향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슬며시 눌러 버렸다.
“그 정보력이란 게 사람을 이리저리 찔러 보고 그 반응을 살펴 얻어 내는 것이라면, 그쪽의 정보력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군.”
“상대에 따라 다른 거죠. 이쪽의 실력을 잠깐 보여 드렸는데…, 생각이 있으신가요? 본문과 손을 잡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그 정보들을 마교와 무림맹에 고액의 돈 을 받고 팔아 버릴 거예요. 그렇게 되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될 텐데, 어때요?”
옥화무제의 말에 묵향은 일부러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다. 이제 묵향은 이 여자를 죽여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진 심으로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크흐흐흐, 겨우 그따위 협박으로 본좌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 아닐 테고, 또 다른 비장의 술책이 있나? 그렇지 않다면 그따위로 입을 나불거려 자기 무덤을 깊 이 팔 정도의 바보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 말과 동시에 음식점 내의 모든 인물들이 바짝 긴장했다. 물론 이 신경을 건드리는 음산한 느낌이 묵향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살기(殺氣)라는 걸 아는 사람은 긴 장한 채 검집에 손을 가져가는 몇몇 무림인들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강맹한 살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여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만약 그럴듯한 패를 꺼내 놓지 못한다면 내일 태양이 뜨는 걸 보는 건 둘째 치고 오늘 태양이 지는 것도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호호호, 자신의 마음을 매우 직선적으로 드러내시는군요.”
그녀는 다음 말을 어기전성(御氣傳聲)으로 보냈다.
《본문의 정보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귀하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을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죠. 무영문은 지금 귀하가 꾸 미고 있는 일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죠. 마교 총단 기습작전의 전모를 말이에요. 3백 리 간격으로 문파를 비밀리에 잡아먹는다고 고생하셨겠지만, 본문의 이목을 속 이기는 어렵죠.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총관이 여태껏 섬서분타에 대해 조사한 모든 자료를 무림맹, 마교, 혈교, 황궁에 넘길 거예요.
호호호, 그렇게 눈을 부라리니 무섭군요. 자, 내가 하고 싶은 제안은 이거예요. 귀하가 마교를 삼키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 드리겠어요. 지금 전체적인 세력은 마교 가 섬서분타보다 강하다는 걸 잘 알고 계시겠죠? 그러면 승패는 정보력이 아닐까요? 대신 귀하가 이쪽에 해 줄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본문이 좀 더 세력 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뿐이니까. 어때요?》
잠시 생각해 보던 묵향은 살기를 거두며 느긋하게 물었다.
“본좌가 어떻게 당신들을 믿을 수 있을까?”
“저 아이를 인질로 드리죠. 어때요?”
“하! 인질이라……. 저 아이가 당신의 손녀라는 걸 어떻게 내가 믿을 수 있지? 또 문파 사이의 격돌에서 인질 따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건 나도, 그대도 모 르는 게 아닐 텐데? 손녀쯤이야 죽으면 다시 하나 더 낳으면 그만이니까…….”
“누가 마교도 아니랄까 봐 인명을 천시하는 그 천박한 습관은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나는 저 아이를 아주 사랑해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좋아. 한번 믿어 보기로 하지. 하지만 한 가지! 본좌가 교주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 그대가 약속을 잘 이행했다면 그리 싼 보상을 주지는 않을 거야.” 묵향의 말은 약속이 이행되었을 때 신경 써 줄 정도로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니, 배신한다면 그 후환은 미루어 짐작해 보라는 협박이었다.
“명심하죠. 영인이는 지금 데려가시겠어요?”
“흐음, 어떻게 할까?”
묵향이 잠시 궁리하는 사이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섰다. 면사(面紗)로 얼굴을 가린 묘령의 세 여인과 그들의 시녀로 보이는 여인 셋, 그리고 무사 여덟 명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는 음식점 안으로 슬며시 들어선 것이다. 그들이 점소이의 안내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우르르 앉았다. 면사 여인 셋이 한 자리에 앉고 나머지는 모두 딴 자리로 갔기에 그 주종 관계를 간단히 알아 볼 수 있었다. 묵향은 그들이 자리에 앉는 걸 보면서 어기전성을 보냈다.
《저건 무슨 뜻이지?》
《예?》
《갑자기 이런 변두리 음식점에 고수라 할 만한 녀석이 갑자기 셋이나 나타난 건 무슨 뜻이냐고 묻는 거야.》
“호호호, 의심도 많으셔라. 겨우 저따위 애들 가지고 당신을 기습하는 게 가능했다면 왜 모두 고심을 했겠어요? 저들하고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우연히 음식 을 먹자고 들렀겠죠. 이곳이 화산파로 들어가는 길 중 하나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겠죠?”
“글쎄, 나는 우연이란 걸 여태껏 믿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말이야.”
묵향이 무의식중에 묵혼검의 손잡이를 쓰다듬는 걸 보자 옥화무제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설마 여기서 저들을 죽이려는 생각은 아니겠죠?”
“필요하다면!”
묵향은 한마디 내뱉으며 술을 한 잔 쭉 마시더니 잔을 옆에 놔두고 찻잔을 들어 차를 바닥에다 쫙 뿌려 버렸다. 그리고는 이제 비어 있는 찻잔에 술을 따랐다. 어느 정도 실력 있는 무림인이라면 내공을 이용해서 찻잔 속의 차를 날려 버리겠지만 묵향은 그런 고상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작은 잔은 감질나서 못 마시겠군. 꿀꺽!”
옥화무제는 묵향의 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의 무공이라면 간단히 찻물을 날려 버릴 텐데 왜 바닥에 그걸 붓죠?”
“본좌는 쓸데없이 무공 쓰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유가 되었나?”
무림인이란 존재는 조금만 방심해도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상대의 움직임에 매우 예민하다. 그런데 갑자기 바닥에 찻물을 쏟아 부으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혹시 독극물 종류를 바닥에 뿌려 두고는 슬며시 떠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걸 보고는 다시 저마다 떠들어 대 기 시작했다.
그때 이쪽 탁자를 계속 바라보던, 면사를 한 여인 중 하나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옥화무제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의아해하는 일행의 눈길을 뒤로 받으며 정중하게 옥화무제에게 포권을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옥화무제 선배님이 아니신가요?”
그 말에 옥화무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람을 잘못 봤군요.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실례했습니다.”
면사 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일행에게 돌아가려다가 그 옆자리에 앉아 있는 매영인을 봤다. 반가운 김에 아는 척을 하려 했으나 방금 전 옥화무제가 자신을 모른 척했다는 것을 생각했다. 뭔가 사연이 있다고 짐작한 그녀는 슬며시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영인이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 더니 일어섰다. 매영인은 옆의 시녀하고 몇 마디 말을 하느라 할머니와 그녀 사이에 오간 말을 듣지 못했기에 실수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 소소(素昭) 언니 아니세요?”
소소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아는 체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으…응, 영인이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언니.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응, 친구들하고 화산에 가다가 들렀어. 그런데 너는?”
“손님하고 만날 일이 있어서요. 친구들 소개나 해 줘요.”
매영인이 그쪽 탁자로 걸어가서 인사를 나누며 떠들어 대는 걸 보면서 옥화무제가 거보란 듯이 눈짓을 했다.
“봐요, 내가 불러들인 게 아니라니까요.”
“그렇다고 해 두지. 나도 쓸데없는 살생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러면서 묵향이 갑자기 일어서자 옥화무제는 잠시 당황했다.
“돌아갈 건가요?”
그 말에 묵향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비밀 이야기도 아닌데, 소곤거릴 필요가 있나?
“할 말이 더 있나?”
“저 아이는 언제 데려갈 거죠? 아니면 내가 그리로 보내 줄까요?”
하지만 묵향의 대꾸는 시큰둥했다.
“저런 애를 데려다가 어디다가 쓰려고? 윗사람의 의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멍청한…….?
“그렇게 바보 같은 애는 아니에요. 인질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구요.”
“듣다 보니 이상하군. 왜 저 아이를 인질로 주지 못해서 안달인 거지?”
“서로의 신뢰를 위해서죠. 나도 인질을 맡기면 당신이 나를 좀 더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하며 안심할 수 있잖아요.”
“말은 되는 것 같은데…, 꼭 집어내기는 그렇지만 뭔가 약간 이상한 냄새가 풍기는군.”
“이상할 거 없어요. 지금 데려가요.”
“싫어. 돌아가자!”
묵향의 수하들이 의자를 덜커덕거리며 일어서는 걸 보면서 옥화무제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쟁취해 낸 승리자 같은 미소를 말이다. 옥화무제는 서둘 러서 매영인을 불렀다.
“빨리 돌아가자.”
“예? 할머니 잠깐만요. 아직 얘기가 다 안 끝났.
옥화무제는 재빨리 전음으로 설명했다.
<빨리 돌아가자. 저 사람 생각 바뀌기 전에.>
어벙한 표정을 지은 채 매영인은 밖으로 끌려 나왔다. 옥화무제는 따라 나오며 인사를 건네는 후배들에게 간단한 손짓으로 답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2리는 왔을까? 그들 앞에는 언제 따라왔는지 묵향이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생각이 바뀌었어.”
묵향은 상대의 미소와 서둘러 떠나는 모양새를 보고 옥화무제의 속마음을 파악했다. 천하제일의 정보 단체이니 자신의 성격쯤은 파악해 놨을 테고, 괜히 권하면 마다하는 성질을 이용해 감히 인질도 안 주고 자신의 신뢰감을 받아 내려고 잔머리를 굴리다니……. 거기다가 현경의 고수 앞에서 전음을 쓰면 그걸 못 들을 줄 알 았나? 어기전성은 순전히 기만을 사용해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기에 엿들을 수 없지만, 전음은 음성을 기로 실어 나르는 것이라 충분히 훔쳐 들을 수 있었다. “예?”
“아무래도 그 아이를 인질로 잡아야겠어.”
‘인질’이란 말이 나오자 매영인의 얼굴색이 파래졌다. 매영인은 할머니가 저쪽에서 이 무례한 인물과 쑥덕거린 이야기를 인질이란 그 한마디만으로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필요도 없는데 함께 화산 구경이나 하자고 꼬셔 오지 않았던가? 이게 다 인질로 써먹기 위해서였다니……. 원망스러움에 얼굴이 파랗게 질리다 못해 눈 물까지 찔끔 나왔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반항은 생각도 못하고 애처로운 시선으로 할머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옥화무제는 매정하게도 그 눈길을 외 면해 버렸다.
인질이란 말에 주위의 호위 무사들도 당황해 검을 뽑아 들었지만, 그들의 행동은 옥화무제에 의해 제지되었다. 그들은 그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묵향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옥화무제는 매영인의 말고삐를 순순히 묵향에게 건네주었다.
“인질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잘 아시겠죠? 그럼, 영인이를 부탁해요.”
살짝 옆으로 지나가는 옥화무제가 또다시 미소를 짓는 것 같자 묵향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계집이라서 표정이 저리 잘 바뀌는 건가? 도대체 알 수가 없군.’
매영인이 탄 말의 고삐를 쥐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수하들을 기다리던 묵향은 뭔가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인질이란 건 상대를 제압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특히 상대와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상대에게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인질로서 가치는 상승한다. 하지만 인질을, 그것도 공식적인 인질을 잡을 때는 매우 귀찮은 문제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절대 인질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갑(甲)이 을(乙)의 자식 병(炳)을 인질로 잡았는데 그 병(炳)이 죽었다고 하자. 병이 나서 죽었건(자연사), 단식 투쟁을 하다가 죽었건(자살), 갑(甲)이 성질나 서 죽였건(타살 유형 1), 을이 보낸 자객이 죽였건(타살 유형 2), 제3자가 갑과 을이 치고받으라고 자객을 보내 죽였건(타살 유형 3)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질을 보호하지 못한 갑에게는 입이 열 개가 있어도 변명할 수 없는 공개적인 개망신이었고, 을에게는 갑을 공격할 최고의 대의명분이 주어지는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질을 잡았을 때는, 그것도 공식적인 인질을 잡았을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인질을 잡은 게 최악의 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완전히 체념을 했는지 풀죽은 모습으로 말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소녀를 힐끗 바라보며 묵향은 인질을 어디에다가 모셔 둘까(?) 생각했다. 정말이지 공식 적인 인질이라면 자신의 딸보다도 소중하게 모셔야만 했다. 정기적으로 의생을 불러 건강 관리도 해 줘야 하고, 꾸준히 운동도 시켜야 하고..
“이봐.”
“…..”
“야! 귀 먹었냐?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저 말인가요?”
“그래, 너 혹시 도망칠 생각이 있냐? 그것부터 확인해 보자구. 솔직하게 말해. 그래야 나도 뒤처리를 어떻게 할까 궁리해 보지.”
매영인은 우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도망칠 수 없죠. 나는 당신과 할머니 사이에 맺은 약속의 증표잖아요. 내가 도망치면 그 약속도 깨진다는 거 잘 알아요.”
“좋아,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소저군. 마화!”
“예.”
“시비는 데려오지 않았으니, 분타에 돌아갈 때까지는 네가 책임져라.”
“예, 그런데 영인 소저의 무장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놔둬. 자신을 지킬 무기가 하나쯤은 있는 게 좋겠지.”
““예.”
묵향 일행은 중촌(中村)이라는 곳에 이르러 그곳의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방 둘을 잡아 하나에는 매영인과 마화가 들고, 다른 사람들은 나머지 한 방에 몽땅 틀어 박혔다. 식사를 마치고는 한 방에서 쉬고 있을 때 매영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들의 성격이나 상하 관계, 또 출신 내력 등을 따져 보았다.
매영인이 지닌 마교에 대한 상식으로는 수하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저 묵향이란 인물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천하의 대마두(大魔頭)로서, 마교라는 속성에 따라 수하들을 공포로서 억누르고 있는 살인귀여야만 했다. 그때 백씨세가에서 봤을 때는 살인귀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강렬한 위화감(違和感) 같은 것을 느 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농담도 하면서 수하들과 술잔을 나누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는데…….
“그때 대장님은 정말 대단했다구요.”
“내가 뭘?”
묵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기억은 없지만 상대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궁시렁거리니 별수 있나.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어렴풋이 뭔가가 떠오 르는 것도 같았기에 그는 이런 자리를 즐겼다.
“하부르하고 참 잘 어울리셨는데……. 몽고 아이긴 했지만 참 예뻤죠.”
그 말에 임충이 덧붙였다.
“하부르도 만나보고 싶군. 몽고 원정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했어. 그렇게 지독하게 짓밟은 건 몽고 원정이 처음이었으니까.”
임충의 말에 차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때 흑풍단에 들어간 걸 후회했지. 하지만 덕분에 대장을 만났잖아.”
“흑풍단 해체 때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어.”
정상이 아쉬운 듯 말하자 그 뒤를 이은 마화의 목소리.
“흥! 하지만 그 공지 녀석은 잘 죽었어. 그런 놈은 그렇게 죽어 마땅했다구.”
“공지 대장 대단했지. 아무리 계집에 굶주렸다지만 몽고 계집들을, 큭큭.”
“대장은 무슨 얼어 죽을. 아무나 보면 덮치는 그런 놈은 대장 소리 들을 자격도 없어. 변태 자식!”
“그래도 그 사람 무술은 대단했잖아. 특히 참마도(斬馬刀) 쓰는 솜씨가 일품이었지.”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어 보고야 매영인은 그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흉계에 걸려 풍비박산이 난 찬황흑풍단 소속의 무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언뜻 할 머니에게 듣기로 묵향은 기억을 상실했을 때 흑풍단에서 일했다고 하니 그건 당연한 건지도….
인질 신세가 되어 묵향과 함께 길을 가게 된 오후부터 줄곧 긴장하고 있었기에 매영인은 매우 피곤했지만, 술자리는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약간의 허풍이 가미된 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저 넷은 몽고병쯤은 파리 잡듯 때려잡는 괴물 같은 고수였고, 묵향은 몽고병 1만 명쯤은 개미를 짓밟듯 순식간에 없애 버릴 수 있는 진짜 괴물이었다.
어느덧 잡다한 얘기가 화기애애하게 오가는 소리에 매영인은 긴장이 풀려, 그들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앙칼진 여자의 목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매영인은 눈을 번쩍 떴다.
“얏! 닥치고 옆방으로 안 갈래?”
“그래도…….”
“저 아이 피곤해서 조는 거 안 보여, 이 멍청아? 대장도 빨리 가요. 상 뒤집어엎어 버리기 전에.”
“제길, 알았다구.”
묵향은 투덜대면서도 옆방으로 건너갔지만, 임충은 그냥은 절대로 못 간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너, 그 성깔 못 고치면 아무도 안 데려간다.”
퍽!
“아구구, 몽고 들판의 전우 엉덩이를 차다니. 너는 여자도 아냐.”
“죽어랏!”
“히익!”
마화가 성질나서 달려들자 임충은 재빨리 술병을 들고 옆방으로 도망쳤다. 남자들을 모두 쫓아내 버리고 마화는 침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
“피곤하지. 편히 쉬어.”
마화는 매영인을 이끌어 침상에 눕혀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피곤하면 말을 하지. 술자리는 옆방에서 벌여도 되는데…….”
“괜찮아요. 오히려 술자리를 보고 안심이 되던데요. 그런데 어떻게 저런 무서운 사람을 그렇게 대할 수가 있죠?”
그 말에 마화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래 보여도 내가 좀 둔하거든. 처음 만났을 때 대장은 저렇지 않았어. 정말 누구나 한눈에 반할 정도로 멋있는 무인이었지.”
마화의 눈빛이 더욱 따뜻해지고 있었다.
“고강한 무공을 지녔지만, 약자를 사랑하고 보호할 줄 아는 진짜 사나이였다구. 우리 다섯은 그때 잘 어울려 다니며 술도 많이 마셨지. 다시 대장을 만났을 때는 사 람이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나는 멍청하게도 예전에 하던 대로 그를 대했어. 하지만 그가 싫어하지 않더라구. 그래서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는 거야. 사실 그렇잖 아? 계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힘과 권력은 강해지겠지만 외로운, 읍!”
마화는 갑자기 픽 쓰러져 버렸다. 매영인이 놀라서 쓰러지는 그녀를 잡았다. 매영인 또한 무공이 약하지 않았기에 간단하게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혈 도를 제압당한 것이다. 방 안에 슬며시 사람이 나타났다. 낮에 봤던 면사 여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니?”
“소소 언니?”
“응. 그런데 선배님은 어디 가시고?”
“언니는 어떻게 여기에……?”
“선배님이나 이들의 행동이 이상해서 일행과 헤어져 뒤따라 온 거야. 어떻게 된 일이니?”
“저…, 말할 수 없어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안 그러면 큰일 나요.”
“어떻게 된 일이냐? 나는 도저히 알 수 없구나. 선배님이 계셨으니 납치된 것은 아닐 테고, 설마… 인질?” 그 말에 매영인이 슬픈 듯한 안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천하의 무영문이 손녀까지 인질로 줘 가면서 손잡고 싶은 대상이 있으려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소소였지만, 매영인은 그녀의 궁금증을 채워주고 있을 정도로 한가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언니, 제발 빨리 돌아가요. 그가 눈치채면 언니도 봉변을 당한다구요.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매영인의 말은 소소라고 불린 면사 여인이 갑자기 픽 쓰러졌기 때문에 끊겼다.
“언니!”
잠시 후 묵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쓰러져 있는 면사 여인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생쥐가 한 마리 있었군. 낮에 네가 만났던 사람이지?”
매영인은 그의 섬뜩한 눈초리에 정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묵향이 천천히 검을 뽑는 걸 보고는 매영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크게 소리치지도 못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보면 몰라? 본좌도 무영문과 본타의 합작이 외부에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게 알려지면 무영문이 본타를 돕기는 매우 힘들 게 뻔하니까 말이 야.”
그 말에 매영인이 쓰러진 면사 여인과 묵향 사이를 몸으로 막으면서 외쳤다.
“안 돼요. 언니를 죽이면 안 돼요. 풀어 주는 게 어려우면 함께 데려가요. 나도 말동무가 필요하다구요. 제발….”
잠시 주춤했던 묵향이 싸늘하게 말했다.
“저런 계집이 도망치는 것까지 감시하고 있을 정도로 나는 한가하지 못해. 비켯!”
매영인은 필사적으로 떨리는 몸을 참고 그를 막아섰다. 식당에서 잠시 느꼈던 그 공포스런 기운이 묵향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니 매영인은 감히 무력을 동원해 상대를 막아 볼 생각도 못했다. 아니, 자신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도망 못 가게 막을게요, 예?”
묵향은 매영인을 다시 한 번 노려보더니 묵혼검을 스르륵 칼집에 집어넣었다.
“좋아.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탈출을 시도하거나 외부와 연락하려 한다면 곧 죽여 버릴 테니까 명심해.”
“예.”
묵향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밖으로 나가 버렸고, 어느 결에 해혈을 했는지 쓰러져 있던 마화가 부스스 일어섰다.
“으응? 내가… 왜?”
마화는 방 가운데쯤에서 쓰러져 있는 웬 여인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매영인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그 여자는 누구지?”
“제가 아는 언니예요. 저를 구하러 들어왔다가 그만…….”
화들짝 놀란 마화는 상대에게 다가가서 맥을 짚어 보고는 안도했다.
“뭐야?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잖아. 괜찮아. 그냥 혈도만 제압된 거야. 대장이 그랬어?”
“예.”
“조금 비켜, 엇차!”
마화는 쓰러진 여인을 안아다가 침상에 눕히고는 매영인도 끌어다가 그 옆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편히 쉬어. 저 여자 덕분에 내 편안한 잠자리는 날아가 버렸군. 옆방에 가서 술이나 마실까…….”
마화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매영인에게로 돌아섰다.
“나도 근래에 알았는데, 대장은 밖에 나오면 거의 안 자거든. 내 말은, 도망은 생각도 말라는 거야.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니까. 나중에 일어나면 그녀한 테 전해. 아마 모든 일은 1년 안에 끝날 거야. 그때까지 얌전히 참고 있으라고 말이야.”
마화의 말에 매영인은 약간 두려운 듯이 말했다.
“저, 그러면 1년 후에는 동맹이 깨지는 건가요?”
동맹이 깨진다는 것은 그녀 자신의 인질로서의 가치도 없어진다는 것을 뜻했다. 만약 상대가 ‘모든 게 다 끝났으니 인질 데려가쇼’할 정도로 공명정대한 인물이라 면 또 모르지만, 마교의 인물이니 자신을 안전하게 무영문에 데려다 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 말에 마화는 피식 웃어 버렸다.
“깨진다고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1년 후에는 네가 무영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그럼 잘 자.”
마화는 방을 나와서는 옆방에서 또다시 술판을 벌이고 있는 남자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라? 너 감시 당번 아니었냐?”
“도망칠 생각도 안 하는데 감시가 필요해? 그리고 도망쳐 봤자지. 그건 그렇고 대장, 그 여자는 어떻게 할 겁니까?”
묵향은 술잔을 비우고는 임충에게 빈 잔을 내밀었고, 임충은 거기에 술을 따랐다.
“어떻게 하기는? 말동무가 하나 필요하다고 하니 데리고 가야지. 몇 년 갇혀 있으려면 친한 말동무가 하나 있는 게 좋겠지.”
“하지만 그러면 납치가 된다구요.”
“상관없어. 살인보다는 낫겠지.”
큼지막한 잔으로 꿀꺽꿀꺽 술을 마시는 묵향을 바라보며 마화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죽는 것보다야 살아 있는 게 나을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다음 날 아침 면사 여인은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한참 단꿈을 꾸고 있는데 매영인이 깨웠기 때문이다.
“아응, 조금만 더 자자. 응?! 여기는?”
“쉿!”
“영인이구나.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어제 일이 생각나는지 다급하게 묻는 면사 여인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매영인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조용히 해요. 이제 글렀어요, 언니. 언니는 나하고 같이 가야 돼.”
“어디를?”
“마교의 섬서분타요.”
“마교! 읍…….”
놀란 면사 여인의 목소리가 커지자 매영인은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잠시 기척을 살핀 매영인은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제가 가려던 곳이 거기니까요. 1년쯤 후에는 풀어 줄 거예요. 그때쯤 되면 잡아 둘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도망을 치거나 어떤 표식을 하려고 한다. 면, 언니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어요.”
그 말에 면사 여인은 공력을 잠시 운기해 본 후 자신 있게 말했다.
“내공도 그대로인데, 내가 도망 못 칠 줄 아니? 아무리 악양세가 출신이지만 나도 꽤 무공이 강하다구. 무공만 사용할 수 있다면 도망치는 건 문제도 아니야.” 그 말에 매영인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어제 언니의 혈도를 짚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악양소소도 할 말이 없어졌다.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혈도를 제압당해 정신을 잃었으니, 그 흉수를 알 방도가 없었다.
“글쎄…….”
“엄청난 고수예요.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세력을 가진, 천하제일의 고수죠.”
“흥! 천하제일? 말도 안 되는, 읍…….”
소소는 자신도 꽤 높은 수준의 무공을 익혔다고 자부했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게 혈도를 제압당했으니, 자신의 혈도를 제압한 인물은 아마 상당한 수준 의 고수일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소소는 상대가 그 정도로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영인은 황급히 상대의 입을 막으며 속삭였다.
“좀 조용히 해요. 그는 지금 무림에 단 한 명뿐인 현경의 고수라구요.”
매영인이 입을 막고 있어 소리는 못 냈지만, 악양소소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현경이라고?
“20년 전에 뇌전검황(雷電劍皇) 노선배님을 죽인 사람이라면 이해를 하겠어요? 그가 어제 말했다구요. 도망치기만 하면 무조건 죽여 버리겠다구요. 같이 가서 1 년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딴 생각 하지 마세요.”
“…..”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믿으라니까요.”
악양소소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너, 거짓말 많이 했잖아. 동정호에서도 했고, 으음…, 또 본가에 들러서도 몇 번 했고, 또…….?
“칫! 기억력도 좋아. 하여튼, 그때는 거짓말이 아니라 농담이었잖아요. 이건 실제 상황이라구요.”
여자들이 쏙닥거리는데, 문이 활짝 열리더니 마화가 안으로 들어섰다.
“깼으면 준비하고 밖으로 나와. 식사하고 바로 출발해야 하니까.”
묵향이 납치한 인물을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마차를 한 대 장만해 오라고 임충에게 지시했기에 모두 마차에 타고는 섬서분타를 향해 출발했다.
동맹의 묵계에 의해, 절대적으로 믿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손녀를 살려 두고 싶다면 무영문이 여러 가지 정보전을 대신해서 펼쳐 줄 것이다. 사실 무영문의 최고 수 뇌부는 벌써부터 중원 지도를 앞에 두고 쑥덕공론을 하고 있었다. 화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무영문의 비밀 분타에서 상황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수뇌 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옥화무제가 도착함과 동시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꼭 작은 아씨를 그런 무뢰배한테 인질로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문주님이시라면 충분히 아씨를 보내지 않고도…..”
“호호호, 일부러 준 거예요.”
“예? 일부러라니요?”
“영인이도 그리 멍청한 아이가 아니니, 인질로 받아들여서 애지중지 보살피다 보면 그 아이의 장점들을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히 정이 싹트게 될 테고……. 그게 결혼으로만 이어진다면 본문은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무력을 지닌 단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설무지라는 구렁이가 혼사 문제를 가로막은 거겠지만.. 혼사를 거절했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밀어 붙여야죠.”
확실히 여인의 집념이란 것은 만만히 볼 것이 못된다. 옥화무제의 집념 어린 말에 수하들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오, 그것도 대단히 좋은 계책입니다. 당연히 사위가 장모의 말을 어느 정도는 들을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또 두 문파가 혈연으로 맺어진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구요. 그런데 서문세가에 가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쪽도 제안에 응했어요. 이제 말들은 어느 정도 갖춰진 셈이니 그들을 잘 다루기만 한다면 본문의 판도는 몇 곱절 넓어지게 될 거예요. 문제는 장인걸의 처리인 데……. 장인걸이 별로 반항도 못 하고 묵향의 손에 떨어진다면, 묵향을 저지할 단체는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예요. 장인걸을 무림공적(共敵)으로 만들어 그 세력 을 소모시키면서, 묵향 또한 정파에게 어느 정도 전력이 손실되도록 힘써야 해요. 그러고 나서 그 둘을 붙여 또다시 대판 싸우게 만든다면 묵향이 교주가 된다고 하
더라도 우리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으로 축소되겠죠.”
옥화무제의 말에 수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지당하신 생각이십니다.”
“그 정파의 선봉에는 서문세가를 세워야 해요. 서문세가는 지금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를 타고 있어요. 뛰어난 가주와 후계자를 가진 강대한 문파죠. 하지만 마교와 마주친다면 서문세가 또한 어느 정도 힘을 상실하게 될 거예요. 지금 때는 난세예요.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이간질을 해, 최소한 50년은 그 누구도 무림통일 을 꿈도 못 꾸게 해야 합니다.”
“존명!”
“정파의 세 문파를 박살 낸 것은 마교에서 행한 짓으로 확정지어 선전하세요.”
“존명!”
“섬서분타에서 별 신경 쓰지 않고 전멸시킨 용병대들 중에 무림맹과 연줄이 닿아 있는 맹호대가 있고 더구나 생존자가 있으니, 이 또한 하늘이 우리를 돕는 거예 요. 비밀리에 무림맹에 섬서분타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세요. 섬서분타와 무림맹이 충돌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나중에 섬서분타가 마교를 차지할 때쯤에는 무림맹이 섬서분타를 향해 전면 공세를 펼 수 있도록 공작을 하세요. 그래야만 섬서분타의 세력이 더 이상 커지는 것 을 막을 수가 있어요. 그의 세력이 너무 커지면 그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을 겁니다.”
“존명!”
이때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한 중년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문주님, 수도에서 온 전갈에 의하면 황제가 죽었다는…….’
옥화무제의 눈이 놀라움을 드러내듯 동그래졌다.
“정말인가요?”
“모든 정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 사실인 모양입니다. 황제는 요 근래 2년 넘게 병치레를 하고 있었고, 거의 40여 년을 집권했으니 죽을 때도 되었죠.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황제의 붕어(崩御) 사실이 비밀로 묻힌 이유는 진천왕의 반란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사 문제가 더 큰 이유죠.
황제는 후계자로 이제 열세 살인 5황야(五) 지(智)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위로 전(前) 황후의 아들들이 네 명이나 있으니, 아마 그들을 모두 처치한 후에 붕어 사실을 발표할 생각인가 봅니다. 지금 전선에 나가 있는 두 황자들을 불러 들였고, 아직 미확인된 정보지만 도성 내에 남아 있던 3황야(三皇也)와 4황야(四皇 也)는 벌써 죽임을..
“놀라운 소식이군요.”
“예, 그다음 대국(大局)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 건지?”
“황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면 그들이 승리할 확률은 어느 정도 되나요? 거기서 분란이 벌어진다면 오히려 진천왕이 승리할 확률이 더 올라가는 게 아닐까요?” “예, 아직 요 정벌에 나간 군대가 회군하지 못했으니, 전쟁이 벌어진다면 진천왕과 싸우는 전선에서 군사를 뺄 테죠. 그렇다면 진천왕에게 매우 유리하게 돌아갈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방관한다면 근래에 황후로 책봉된 엄귀비나 간신 엄승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잘해 나갈지 그것도 의문이죠.” “원정군은 언제 돌아오나요?”
“거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모양이지만, 최소한 두 달 정도는 걸릴 것으로 사료됩니다.”
“두 달이라……. 너무나 긴 시간이군요.”
“예, 사천성 남쪽에서 시작된 전쟁이 지금은 사천성 북쪽까지 밀렸으니, 잘못하면 천도(遷都)라도 해야 할 지경이죠. 각 성(省)에서는 지원병을 모집한다고 난리 고, 향방군까지 대량으로 동원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가을의 추수가 문제가 되겠죠.”
“그건 그렇군요. 어쨌든 진천왕이 승리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문제는 진천왕이 아니라 그를 지원하고 있는 혈교예요. 진천왕이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무림은 혈교가 장악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이 사실을 무림맹에 알리고, 최대한 정파가 진천왕과의 전쟁을 지원할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가야만 합니다.”
“존명!”
“그리고… 총관!”
“예.”
“그대가 생각하기에는 1황야 정晶)과 2황야 진중에서 누가 나은가요?”
“그야 당연히 2황야가 낫죠. 2황야도 멍청한 편은 아니지만 주색(酒色)을 매우 좋아합니다. 또 성격도 과격한 편이구요. 일국의 황제감은 아니죠. 그에 비해 차분 하고 냉정한 성격의 1황야가 황제감이기는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된다면 세상이 너무 안정되어 버려 본문이 돈벌이 하기는 별로 좋지 못합니다.”
“호호홋, 좋아요. 그럼 2황야를 빼돌리세요. 1황야는 엄승의 손아귀에 들어가서 죽도록 놔두세요. 1황야가 살아 있다면 황위 쟁탈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으니, 엄 승이 죽이게 하는 겁니다. 2황야는 회군해 오는 정벌군 사령관 진길영 원수에게 인계하세요. 그러면 정예군을 가진 2황야는 곧 진천왕을 토벌할 테고, 또 우리에게 신세를 졌으니 본문의 성장에 많은 도움을 줄 테죠.”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