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5권 24화 – 청기사, 힘을 드러내다
청기사, 힘을 드러내다
그들이 찾아가고 있는 블루 드래곤은 썬더 드래곤이라고도 부르는 푸른색이 나는 드래곤으로 뇌전(電)의 정령을 다스린다. 다른 드래곤과는 달리 브레스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그 뿔에서 엄청난 뇌전을 뿜어낸다. 다른 드래곤들의 브레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속에 축적된 뇌전의 기운을 토해 내는 것으로 마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타이탄의 대마법 주문이 무용지물이었으므로 정면 승부하기 매우 힘든 상대가 이 드래곤이다.
어쨌든 드래곤이 세계에 정확히 몇 마리나 살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누가 그 무서운 드래곤의 레어(Lair)까지 가서 인구… 아니, 용구 조사를 하러 다닐 것인가? 그렇기에 한 번씩 말썽을 부린 녀석들의 명단만이 나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드래곤이 어디어디에 산다고 해서 찾아갔다가 살아 돌아오기 힘든 이유가 있었다. 포악한 놈의 명단을 들고 찾아갔으니 애당초 살아 돌아올 생각을 말아야지.
어쨌든 시드미안 일행의 사정도 그와 비슷했다. 현재 알카사스와 코발트 제국의 국경선 역할을 하는 그레이시온 산맥에 블루 드래곤 한 마리가 살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되게 포악한 놈이…………. 그야말로 대화 몇 마디 나누러 목숨 걸고 찾아가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과거 드래곤은 가끔씩 동면을 한다고 헛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다. 소란하던 녀석이 몇백 년 동안 조용하니 그런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소문은 그야말로 헛소문이었다. 사람 괴롭히기도 심드렁해진 드래곤이 그냥 레어에서 낮잠이나 퍼 자면서 기나긴 시간을 때우고 있었던 것인데 그걸 동면이라고 착각하다니…………
만약 드래곤이 주기적으로 동면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 취약한 동면 기간 중에 아마도 이 세상의 모든 드래곤들은 시체가 되어 드래곤 통구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었기에 그걸 노리고 부스러기라도 얻으러 갔던 모험가들이 도리어 통구이가 되어 버렸지만……………
일행은 고헨에서 그레이시온 산맥 쪽으로 가기 전에 고헨시 당국으로부터 여행증명서를 새로이 발급받았다. 여행 목적은 ‘몬스터 사냥’이었고, 여행 취지는 ‘무투회 예행연습’이었다. 그들은 그걸 가지고 그레이시온 산맥을 향해 이동했고, 고헨시는 그레이시온 산맥 부근에 위치한 도시였기에 3일 만에 그레이시온 산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스? 몇 살짜리에요?”
“여기 쓰여 있기로는 아마도 4천 살 정도 되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봐요.”
“여기 있네.”
시드미안 경이 건네준 종이에는 별로 상세하지도 않은 기록이 쓰여 있었다.
이름:키아드리아스
서식지:그레이시온 산맥 동편
종명:블루 드래곤
주식 : 마나(별식으로 인간도 먹음)
특징: 매우 흉폭하므로 그의 서식지에 출입을 금함.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전무(無)함. 약 4천 살 정도로 추측.
쭉 읽어 보던 미카엘이 고개를 들었다.
“이거 얼마나 줬어요?”
“정보료 50실버.”
“도둑놈들! 겨우 저따위 기록으로 50실버라니! 저, 시드미안 경.”
“왜 그러나?”
“대화를 나누려면 뭔가 뇌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드래곤은 원래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고 하니까 금이라든지.
“금을 1톤 정도 가져가도 그 녀석 덩치로 봤을 때는 얼마 되지도 않을 텐데…………. 또 그 정도 돈도 없고.”
“그럼 그놈이 수틀리면 어쩝니까?”
“어쩌기는 죽어라고 도망쳐야지.”
언뜻 듣기에는 리더로서 대단히 무책임한 말 같지만 그건 사실이었고, 또 그 방법이 최고였다.
〈내 앞에 서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희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나는 그대와 주종의 맹약을 맺고자 하는 사람이다. 나는 뛰어난 기사다. 그렇기에 그대에게 실망을 안겨 주지는 않을 거야.”
<좋다. 비교하며 주인을 고를 입장도 아니니 그대의 청을 수락한다. 이제부터 그대와 나는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골렘의 맹약에 따라 주종이 되었다. 내 이름은 페가수스. 그대의 이름은?>
“나는 현재 왕국 제일의 기사이며 근위 기사단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다. 너의 머리를 들어라.”
거대한 청기사의 머리가 열렸고, 프로이엔은 그 안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머리가 닫힌 후 천천히 시험 작동을 하던 프로이엔은 자신에게 주어 진 이 청기사가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는 발이 대지를 쿵쾅거리며 밟을 때마 다………….
왕국의 고위층에 소속된 인물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수가 많지는 않았다. 이번에 테스트하는 타이탄은 너무나도 강해서 극비 리에 제작됐기 때문이다.
호화로운 복장을 하고 높은 좌석에 앉아 있는 오만한 표정의 인물이 냉랭하게 “시작해라”하고 말하자 곧이어 두 대의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대는 현재의 근위 타이탄인 카프록시아, 또 한 대는 미래의 근위 타이탄이자 최초로 생산된 프로토타입 청기사였다.
당당한 모습의 카프록시아를 창문 틈으로 바라보는 프로이엔의 귀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을 해치우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 그러면서 네가 가진 모든 힘을 여기 있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과시하는 게 목적이야.”
카프록시아급 타이탄 겔리오네스가 폐하의 명에 따라 준비를 갖추며 방패와 검을 들어 올려 준비 자세를 갖추는 걸 보며 페가수스가 프로이엔에게 말했다.
<좋아.〉
그와 동시에 청기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기사는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덩치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속도로 다가가서는 재빨리 검을 내리쳤다. 겔 리오네스도 당할 수만은 없다는 듯 재빨리 방패로 막았다.
쾅!
그와 동시에 청기사는 검을 그대로 아래로 밀어붙이며 왼손의 방패로 상대를 그대로 가격했다.
쿠앙!
엄청난 충격에 비실비실 뒤로 밀리는 겔리오네스를 보면서 청기사는 그대로 검을 강력하게 휘둘렀다. 겔리오네스가 방패로 막았지만 두 번의 칼질 에 방패는 거의 박살이 나 버렸고, 세 번째 칼질은 방패를 박살 내며 그대로 겔리오네스의 몸통을 향해 휘둘러졌다.
관중석에서는 경악에 찬 신음성들이 터져 나왔다. 전쟁터가 아닌 이상 저렇게 할 필요는 없었고, 또 저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둘 다 왕국을 지 탱하는 최고의 힘인데………………
겔리오네스는 가까스로 뒤로 물러섰지만 겔리오네스의 앞부분을 휩쓸고 지나간 청기사의 검에 의해 흉부의 2차 장갑이 잘려 길고 예리하게 째진 상 처가 생겼다. 이때 갑자기 청기사의 머리가 들리더니 프로이엔이 뛰어내리며 외쳤다.
“이봐! 괜찮아?”
그러자 겔리오네스의 머리가 들리며 또 다른 기사가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아까 건 정말 위험했다구. 좀 살살해. 무게도 꽤 차이가 나지만 힘도 엄청나게 차이가 난단 말이야.”
프로이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관중석 앞으로 걸어갔다.
“폐하, 강력한 타이탄을 하사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방금 전의 테스트만으로 두 타이탄의 힘의 차이를 느끼셨을 것이옵니다. 소신도 너무 나 강력한 청기사의 조종에 아직 미숙한 부분이 남아 있사오니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압도적인 청기사의 힘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던 젊은 황제는 부드럽게 말했다.
“윤허하노라.”
“문제가 있습니다, 토지에르 경.”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론가르트를 보며 토지에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정중히 말했다.
“무슨 문제인가?”
“페가수스가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늘 비무도 저는 그냥 마나만 공급해 주고 있었을 뿐…………… 아니 빼앗기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겠군요. 싸움은 완전히 페가수스 혼자서 다 했습니다.”
토지에르 경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흐음, 역시 우려한 일이 발생하고 있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엑스시온이 강한 만큼 청기사도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지. 그만큼 자존심과 자아가 강하다는 말이네. 웬만한 타이탄만 되어도 처음에 기사가 자신의 몸을 조종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게 되지.
청기사는 아직 길이 들지 않은 상태야. 시간을 들여 천천히 친구가, 아니 동반자가 되어 청기사를 길들여 보게. 사실 미스릴을 입혀 그 시야를 대 부분 차단하지 않았다면, 왕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그대도 청기사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네.”
자신을 얕잡아 보는 듯한 말에 자존심이 상한 프로이엔의 눈이 약간 꿈틀했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그걸 짐짓 모른 체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건 지금 주인을 마음대로 고르고 있는 유일한 타이탄인 헬 프로네가 입증해 주고 있지. 헬 프로네의 주인들은 모두가 마스터급이지. 아마 청기사 에 미스릴을 입히지 않았다면 그 심사 기준은 헬 프로네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네. 우리는 그만큼 콧대 높은 미인을 길들여야 하 는 거지. 그건 그대의 실력과 정성에 달려 있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히야, 파티 내에 실력자들이 많다는 건 정말 좋군요.”
그날 하루 종일 산길을 강행군한 후 해가 저물자 모두들 노숙 준비를 했고, 지미가 스프를 끓이면서 내뱉은 말에 라빈도 동의했다.
“맞아요. 미카엘하고 셋이서 다닐 때는 감히 이런 산골짜기에서 식사 준비는 꿈도 못 꿨는데………….”
그러자 미카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야, 그렇다고 내가 너희들을 굶겼냐? 왜 투정이야?”
“언제 이런 산골짜기에 들어갔을 때 따뜻한 식사 한끼 한 적 있어요? 모두 그놈의 말라빠진 고기포 아니면 비스킷, 딱딱한 빵 쪼가리…………. 뭐 그랬 지.”
보통 이렇게 깊은 산골짜기까지 들어와서 해가 질 때쯤 시작되는 저녁 식사는 무조건 고기포나 비스킷 같은 걸로 정해져 있다. 요리를 하면 그 불빛 을 보고 몬스터들이 달려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파티에는 뛰어난 인물들도 꽤 많았고, 거기에 타이탄 쿠마가 있지 않은가? 그런 만큼 처량하게 고 기포나 우물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내일이면 키아드리아스의 서식지로 들어가게 되는데, 혹시…….”
라빈의 말을 팔시온이 가볍게 받아넘겼다.
“괜찮아. 죽기밖에 더하겠어? 자, 식사나 하자구.”
오랜만의 산악행군으로 일행들은 모두 피곤에 지쳐 밥맛도 별로 없는 상태였지만, 내일도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조건 먹어 둬야 했다. 모두들 잘 들 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어 치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크는 가냘픈 몸으로 험한 산길을 걸어서 그런지 식사 후에 곧장 곯아떨어져 버렸다. 자원해서 첫 번째 불침번을 맡은 로니에 사제는 모두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가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는 소녀 가 덮고 있는 모포 아래쪽을 들췄다. 그녀의 예쁘고 날씬한 다리가 나타났다. 하지만 양말을 본 로니에 사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물집과 피가 배어 나온 게 보였기 때문이다.
로니에 사제는 서둘러 양말을 벗겨 내고 물집 투성이가 된 발을 꺼내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 정도가 되었다면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을 게 뻔 한데도 아프다는 소리 한 번 안 하고 따라왔다는 게 놀라웠다.
다크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로니에 사제는 이미 다크의 발이 엉망진창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전에 라나도 산길을 한 번 걸은 후에 이 랬기 때문이다. 물론 라나의 경우 이 상태가 되기 전에 죽는 소리를 해 대며 일찍이 가스톤에게서 치료를 받고 뻗은 척하면서 말에 실려 갔지만……………
로니에 사제는 성스러운 치료 마법을 동원해서 다크의 발을 깨끗하게 치료한 후 다시 양말을 신기고 모포를 잘 덮어 줬다. 그런 후 이번에는 파티의 모든 구성원에게 샤이하드의 축복을 내렸다. 이렇게 축복을 내려놓으면 근육통이 사라지고 내일 아침 편안하게 잠에서 깰 테니까. 그는 신관으로서 뒤에서 조용히 구성원들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작업을 끝낸 후 로니에 사제는 충실하게 불침번을 섰다.
로니에 사제는 두 번째 불침번인 가스톤을 깨운 후 잠이 들었다. 가스톤 또한 어김없이 다크의 발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양말이 엉망인데도 발바 닥이 매끈한 것을 본 가스톤은 이미 로니에 사제가 치료를 해 줬다는 걸 눈치 채고는 다시 모포를 잘 덮어 줬다.
다크의 모습을 보면 과거 자신이 존경했던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선배가, 저주에 걸려 오크가 된 후 절망감에 자살했던 쓰라린 기억이 떠올랐다. 그 선 배는 오크가 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자살했지만, 다크는 마음을 잡고 다시 수련을 시작하는 걸 보고 가스톤은 마음속 깊이 존경 어린 찬사를 보냈다. 그에게 있어 이번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침번을 서게 된 지미는 약간씩 졸다가 뭔가 부스럭하는 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자세히 보니 뭔가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게 있었다. 그걸 보고 놀라서 시드미안을 깨웠다.
“뭐야?”
“일어나 보세요. 뭔가 있어요.”
시드미안은 벌떡 일어서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트롤이다. 한 30마리는 될 것 같은데, 모두 깨워.”
“이봐요, 트롤이에요.”
지미의 말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일어섰고, 각자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조건 머리를 날려 버려.”
트롤(Troll)은 묵향이 이 세계에 처음 와서 싸운 괴물로, 그 치유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좋아서 딴 곳을 공격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 그렇기에 최 고로 좋은 방법이 머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었다. 트롤들과 인간들 간의 대규모 접전이 시작되었다. 힘이 약한 마법사나 신관들은 말(馬)과 다크를 보 호하며 안쪽에서 지원을 하고, 검객들은 밖에서 격투를 벌이며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트롤이 휘두르는 거대한 돌도끼를 방패로 막으며 각자 있는 실력을 다해 상대의 목을 노렸고, 그들에게 보호받고 있는 마법사들은 놈들을 향해 마법 을 날렸다. 이들이 겨우 트롤 30마리를 가지고 시간을 끈 데는 다크가 전투 불능이라는 이유가 컸다. 트롤 30마리쯤이야 다크 정도의 실력자라면 얼 마 걸리지도 않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봤을 때는 거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대다.
어쨌든 이들의 리더인 시드미안은 근위 기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며 거의 반수에 가까운 트롤들의 목을 잘랐고, 나머지는 동료 들이 합심해서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