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5권 25화 – 만남 (5권 끝)

만남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본격적으로 키아드리아스의 영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한 번씩 몬스터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 정도 몬스터에게 당할 정도의 약한 파티는 아니었다. 험한 산길이라 꾀를 부려 대는 말을 억지로 끌면서 팔시온이 앞서갔고, 그 뒤에서 스미온이 다 크의 말까지 두 필을 끌고 따라왔다. 자기 말의 안장에 다크 말의 고삐를 매서 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 뒤로 줄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참 전진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드미안이 팔시온에게 외쳤다.

“이봐, 잠시 쉬어 가세.”

“예? 좀 더 가는 게………….”

“저기 좀 보게. 더 가서 될 일인지.”

시드미안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얼굴이 창백해진 다크가 땀을 있는 대로 흘리며 주저앉아 있었다. 팔시온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확실히 같은 육체라도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이렇게 바뀌는군요. 라나라면 죽는 소리를 하면서 더 이상은 못 간다고 떼를 써 댔을 텐데, 저 지경 이 되도록 아무 소리 안 하고 따라오고 있었다니…..”

“인내심이 대단한 녀석이야. 지금의 육체로는 조금만 험한 곳을 걸어도 죽을 지경일 텐데……..아마 저 상태로 조금만 더 가면 곧바로 인사불성이 될걸.”

“으휴, 그래도 계집애라면 칭얼대는 맛이 있어야지, 저렇게 다부져서야 누가 데리고 살겠어요?”

“하하하, 자네가 걱정 안 해 줘도 나중에는 데려갈 사람이 줄을 설 거야.”

이때 미카엘이 시드미안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도대체 키아드리아스는 어디 있는 거죠?”

“모르지, 뭐…………….”

“계속 안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거에요?”

“어떻게 하기는?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어까지 찾아가야지.”

“돌았군요.”

“돌지 않았어. 그 방법뿐이잖아. 안 그럼 어쩔 거야?”

모두 투덜거리며 또다시 길을 떠났다. 키아드리아스는 그레이시온 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카마가스 지역에 산다고 하니까 그 일대를 배회하다 보면 뭔가 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될 수 있으면 좋은 길을 택해 말을 끌고 갔다.

그런 식으로 며칠 걸어가다 보니 그들의 발아래에는 넓고 평평한 구릉지대가 나타났다. 곳곳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돌무더기들이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별로 의심스러운 곳도 아니었다.

“어째 기분이 좀 으스스한데요?”

“그러게 말이야. 돌무더기들이 꽤 많군. 적게 잡아도 1천 개는 되겠어.”

“저 구릉지대 중간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으응? 그렇네. 건물 같기도 하고 안토니 저게 뭐지?”

안토니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워 대더니 시동어를 외쳤다.

“클레어보이언스(Clairvoyance: 천리안)!”

안토니는 구릉 지대의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돌무더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작은 집이 한 채 있어요. 사람이 사는 듯 작은 밭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가 보자.”

일행은 산에서 내려와 구릉지대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가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뭐 그게 걸어 다니면서 공격해 올 가능 성은 없으니까. 그들은 차분하게 중간에 위치한 집으로 걸어갔다.

똑똑!

꽤 낡은 집이긴 했지만 그래도 본바탕이 튼튼한 돌로 만들어져서 인지 아직도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

똑똑!

“뭐야? 사람이 안 사는 거 아니에요?”

“설마, 저기 작은 밭이 있는데 사람이 살지 않을 리가 있나?”

똑똑, 똑똑.

20분 정도 문을 두들겨도 반응이 없자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사람이 안 사는 거라니까요. 그냥 들어갑시다.”

“글쎄, 밭이 있는 걸 보면 외출한 모양인데 들어갈 수야 있나. 그냥 이 근처에서 기다리기로 하지.”

“으휴, 속 터져. 여기까지 와서 기사 흉내를 내야만 하겠어요?”

“나는 트루비아의 자랑스런 기사라네. 그것도 근위 기사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받은 사람이지. 아무리 어려운 곳이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지. 자, 야영할 준비나 하게.”

시드미안의 말에 모두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카엘, 지미, 라빈, 팔시온이 숲 쪽으로 나무를 주우러 갔고, 미디아가 음식 만들 준비를 했다. 그리고 시드미안과 스미온은 주위를 둘러보러 갔고, 마법사들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대지의 기억에 물어보기 시작했다. 일단 주인이 누 군지는 알아야 실례가 없을 테니까.

지미와 라빈이 먼저 돌아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디아는 여자였지만 영 음식 솜씨가 형편없는 관계로 지미와 라빈이 음식 준비를 도맡고 있었 다. 돌덩이 몇 개를 놓고는 그 위에 솥을 올려놓고, 그 밑에다 모닥불을 지폈다. 미디아가 이미 길어 놓은 우물물을 펄펄 끓여서 대강 가지고 있는 재 료 다 집어넣고 밀가루를 풀었다. 걸쭉하게 만든다고 지미가 휘휘젓고 있는 동안 라빈은 또 다른 모닥불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밀가루를 반죽해 적 당히 간을 맞추고 팬케이크를 부치기 시작했다.

보통 때는 빵을 데워서 스프하고 함께 먹었지만, 며칠 동안 산속을 헤매다 보니 빵은 다 먹어 버렸고, 이제부터 건조식품을 대강 끓여서 먹는 단계에 온 것이다.

이들이 한참 음식을 만든다고 부산을 떨고 있을 때 팔시온과 미카엘이 나무를 잔뜩 가져왔다. 다른 방향으로 정찰 나갔던 시드미안과 스미온 역시 땔감들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시드미안은 땔감들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안토니에게 물었다.

“수상한 점은 없는 거 같던데,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저 역시 수상한 건 못 느꼈습니다. 이 집 주인은 엘프더군요.”

안토니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나자 잘생긴 남자 엘프의 영상이 만들어졌다. 약간 낡은 듯한 망토와 고풍스러운 검이 아주 잘 어울리는 엘프였 다.

“바로 이 사람이 집주인인 모양입니다. 대지의 기억에 따르면 오늘 아침까지는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요.”

“좀 지나면 날도 저물 테니 돌아오겠군. 지미, 식사는 멀었냐?”

“이제 다 됐어요. 자, 둘러들 앉으세요.”

그러자 시드미안이 저쪽 구석에서 심법을 펼치고 있던 다크에게 외쳤다.

“다크! 밥 먹어라! 밥!”

요즘 들어서 다크는 시간만 나면 태허무령심법을 통해 내공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단련이란 단어라고는 모르던 육체가 되어 놔서 그런지 거의 일주일 이상 내공을 운용해 봤지만 거의 기가 모이지 않았다. 일단 기가 모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쉬운데, 처음에 기가 지나다닐 통로를 개척하 고 정말 실낱같은 기를 끌어 모아 하나의 자그마한 덩어리로 형성해 나가는 것은 엄청나게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심법을 마치고 일행들 사이에 끼어 앉아 지미가 내미는 스프와 팬케이크 덩어리를 받는 다크를 보며 시드미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진전은 보이냐?”

그 말에 다크는 씁쓰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언젠가는 되겠지요.”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는 음식 준비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 미디아와 다크가 해치웠다. 그들이 쉬려고 할 때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시 드미안은 미카엘에게 외쳤다.

“텐트를 쳐!”

“뭐라구요? 집이 옆에 있는데 텐트를 왜 쳐요. 집으로 들어가자구요. 나중에 집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되겠죠.”

가만히 생각하던 시드미안이 말했다.

“그도 그렇군. 혹시 잠기지는 않았나?”

문을 슬쩍 밀자 문은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쉽게 열렸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 팔시온, 미카엘, 가스톤, 지미, 라빈은 말에서 짐을 꺼내서 집 안에 넣고, 나머지는 집 안에 들어가서 불 좀 피워. 스미온, 안 토니 자네들은 나 좀 따라오게.”

기사들의 신조가 ‘숙녀를 위하여’다 보니 여자들은 일단 비를 피할 수 있는 집 안으로 집어넣고, 남자들은 비를 맞으며 각자에게 할당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을 끝낸 후 집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집의 외부는 낡고 허름한 데 반해 내부는 아주 고풍스럽고도 멋있게 잘 꾸며 놓은 데 놀랐다. 거기 에 갖가지 아름다운 금, 은 세공품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매우 아름다운 여자의 그림도 몇 점 걸려 있었다.

“우와, 정말 대단하네. 도대체 그 엘프는 이런 멋진 장식을 시골집에다 해서 뭐 하려는 거지?”

“뭐, 각자 취향이 있는 거니까. 꽤 고급스런 취향을 지닌 엘프인 모양이군.”

“이야, 저 활 좀 봐요. 정말 멋있는데…………….’

그러면서 한번 만져 보려고 하자 가스톤이 제지했다.

“될 수 있으면 만지지 말고 감상만 해. 엘프는 대단히 뛰어난 마법사들이야. 누가 알아? 딴사람이 못 만지게 저주라도 걸어 놨는지.”

“저주쯤이야 걸려 봐야………….”

그러다가 지미는 저쪽 구석에서 또다시 수련을 시작한 다크를 보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저 꼬라지가 되면 절단이지.’

한참 지난 후 비에 흠뻑 젖은 시드미안이 돌아왔다. 뭐 하러 갔었는지 모르지만 장작을 한 아름씩 안고 있었다.

“적당히 말려가며 태우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아직도 주인은 안 돌아왔나?”

“예.”

“어디서 비라도 피하는 모양이군, 어쨌든 오늘은 이대로 쉬고……………..

시드미안은 집 안을 두리번거리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따뜻한 보금자리를 빌리는 것만 해도 고마운 거니까, 집 안 물건에는 손대지 않도록 주의하게. 화낼지도 모르니까.”

“아무것도 안 만졌다구요.”

그 집주인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돌아왔다. 집 안이니까 모두들 안심하고 푹 자고 있는데 문이 슬쩍 열리면서 그 남자가 들어왔다.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시드미안이 재빨리 검을 잡고 일어서는 순간, 어제 안토니가 보여 줬던 그 영상과 같은 엘프가 약간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를 보 고 시드미안은 재빨리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어제저녁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그러자 엘프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어제저녁은 추웠는데 이불이라도 좀 가져다가 쓰시지………

“그럴 수야 있습니까? 허락 없이 지붕을 빌린 것만 해도 죄송한데….. 이봐! 일어나. 빨리 일어나.”

시드미안이 깨워 대자 모두들 부스스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집주인이 왔어. 인사해야지.”

“안녕하십니까? 허락 없이 집에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서로 인사가 시작되자 지미는 시드미안에게 저쪽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수련 중인 다크를 가리키며 조용히 속삭였다.

“다크는 어떻게 할까요?”

“자기가 수련할 때 몸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옆에 가서 말을 해. 못 듣는 거 같으면 좀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조금 있다가 다크도 그들 쪽으로 왔고, 모두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저도 인간 세상을 조금 떠돌아다녀 봤는데, 모험자 분들치고는 꽤나 예의에 밝으시군요.”

“아닙니다. 과찬의 말씀을…………….”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이 일대는 공포스러운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스의 영토인데, 혹시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 : 용 살해자)라 도 되고 싶으시오?”

카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엘프가 농담조로 말하자 시드미안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야 꿈만 많은 몽상가들이 하는 소리고………. 혹시 그를 만나면 물어볼 말이 있어서요.”

“드래곤에게 물어본다고요? 당신 제정신이오? 물어보기 전에 뱃속에 들어갈 게 뻔한데.

“그래도 목숨을 걸고라도 물어봐야 할 게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나도 젊었을 때는 제법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서 약간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소.”

“그럼, 혹시 블루 드래곤에 뿔이 달려 있습니까?”

무슨 엄청난 거나 물어볼 줄 기대했는지 한참 흥미를 보이던 카렐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있죠. 드래곤 중에 뿔 없는 드래곤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 그거 알아보려고 목숨을 거셨소?”

“그건 아니구요. 블루 드래곤의 뿔은 몇 개인가요?”

“여기 살면서 몇 번 키아드리아스를 봤는데, 내가 봤을 때 분명히 하나였소. 이렇게 이마 중간에 뿔 하나가 길게 솟아 있죠.”

그 말을 들은 시드미안은 실망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블루 드래곤도 아니군………….”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그럼 혹시 이렇게 생긴 짐승이 있는지 아십니까?”

카렐은 신탁에서 받았던 그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푸른색이 나면서 이렇게 생긴 짐승은 없소. 색깔을 무시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여행하면서 듣기로 레드 드래곤이 뿔이 3개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생기지 않았소. 이건 무슨 투구나 마신의 머리 모양 같군요.”

“투구나 마신이라구요? 하지만 투구는 아닐 거고, 마신이라면…….”

시드미안은 안토니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이보게 안토니, 마신 중에서 이렇게 생긴 마신이 있을까?”

“마신들이야 원체 숫자가 많으니까 그 생김새들을 기억할 수는 없죠. 하지만 모양이 꽤 다양하니까 어쩌면 이렇게 생긴 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돌아가서 마신에 대해 연구를 해 보면 되겠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데 그러시나요? 그대를 보아하니 꽤 수련을 쌓은 분 같은데…………. 그냥 모험가나 할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예, 저희들은 드래곤 하트를 훔쳐간 놈들을 추격하는 중인데, 신탁으로 드래곤 하트의 행방을 물으니까 달랑 이런 그림이 나왔죠. 그리고 그놈들 중에는 뛰어난 흑마법사까지 있거든요. 그걸 보면 아무래도 이 그림이 마신일 가능성이 크겠군요.”

“드래곤 하트라…………. 정말이지 인간들이 가지기에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군요.”

“예, 드래곤의 마나가 집중된 것이니만큼 그게 나쁜 목적에 사용된다면 큰일이지요.”

한참 얘기를 나누던 카렐은 저쪽에서 또다시 내공 수련을 하고 있는 다크를 보면서 말했다.

“저 아이도 동료인가요? 동료치고는 너무 어리군요……………”

“아주 뛰어난 동료였습니다. 디스라이크라는 저주에 걸려서 저 모양이 되었지만요. 실의에 빠져 한 달 정도 술독에 빠져 있다가 요즘 들어 다시 수 련을 시작했죠. 대단한 정신력을 갖춘 검객이죠.”

“후후, 디스라이크에 걸린 것치고는 꽤나 특이한 모습이군요. 그건 그렇고 대단한 젊은이네요. 저렇게 자연스레 마나를 다스릴 줄 알다니……………”

 “마나를 다스린다구요?”

“그럼 그대는 그걸 못 느꼈단 말이요? 아주 미약한 양이지만 스스로의 통제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요. 그러면서 외부에서 마나를 조금씩 흡수하여 그 덩어리를 키우고 있지요. 대단한 기술입니다. 나는 여태껏 저런 방식으로 수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그 말에 시드미안의 얼굴에는 약간은 씁쓰레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크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게 약간은 마음에 걸렸지만, 상대는 정령을 부리는 엘 프니까 어쩌면 마나의 움직임에 특별히 민감할 수도 있기에 시드미안은 별 생각 없이 말했다.

“그럴 만할지도………. 저주를 받기 전에는 검 한 자루로 타이탄도 박살 냈던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였으니까요. 전쟁의 신전에 등록은 되지 않았지만 그때 그는 아마 마스터의 경지에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지요.”

“서론이 길었던 것 같은데 여기 먹을 것도 좀 있으니까 식사라도 같이 하시겠소? 과일이나 채소뿐이지만…………….”

“아닙니다. 지금 동료들이 준비하고 있으니 같이 드시지요. 밖으로 나가시죠. 지금쯤 준비가 다 끝났을 겁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 것도 가져올 테니………….”

모두 죽 둘러앉아 카렐이 가져온 생과일과 과일 절임을 그들이 끓인 스프, 팬케이크와 함께 먹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 와중에 카렐은 여자답지 않게 퍼질러 앉아서 무표정하게 음식들을 씹고 있는 다크를 보며 말을 건넸다.

“그대는 누구에게 검을 배웠나요?”

“스승들에게서요.”

“스승들이라고요? 그러면 당신의 스승들도 당신만큼 검을 다룰 줄 압니까?”

“아니요.”

“흐음,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송’이라고 불리는 아주 아주 먼 곳에서 왔지요.”

“송?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들어 본 적이 없겠죠. 여기와는 차원도, 시간도, 공간도 다른 곳이니까.”

카렐은 경악하며 다시금 다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럼 당신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예, 그렇게 봐야 별로 차이도 못 느낄 거예요. 그놈의 저주 때문에 겉모양이 바뀌었으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예전의 수준까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합니까?”

“10년 이내. 어쩌면 그보다 더 당겨질지도 모르죠. 여기는 내가 살던 곳보다 기, 아니 마나가 더욱 충만한 곳이니까.”

“그렇다면 겨우 10년 만에 마스터의 경지까지 오를 자신이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의 그 쓸모없는 육체로?”

“내 계산이 정확하다면요. 사실 그보다 더욱 앞당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 정신 상태로는 그건 목숨을 건 도박이라서 실행을 못 하고 최대한 안전 한 방법을 택하고 있을 뿐이에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거든요.”

“놀랍군요. 그토록 빠른 시간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니……….”

“그건 내가 한 번 지나왔던 길이니까 그렇지요. 그건 그렇고, 당신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입니까?”

다크는 커다란 눈으로 상대의 눈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 눈과 천천히 다져지는 감각, 그리고 느낌은 당신이 절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어요. 엄청난 경지까지 검을 이해한 사람이 라고 말하고 있지요. 안 그런가요?”

카렐은 아직까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느낌은 종종 틀릴 수도 있지요.”

그러면서 그는 허리에 찬 고풍스런 검을 가리켰다.

“이 녀석은 내가 오래전 세상을 떠돌 때 사용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걸 써 본 적은 거의 없어요. 그때 배웠던 검술도 거의 다 잊어버렸구 요.”

미소 띤 카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다크는 다시 스프를 먹기 시작하며 말했다.

“검이란 것은 배우기도 어렵지만 잊어버리기는 더욱 힘들지요. 나도 배웠던 수많은 검술들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데 40년 정도가 걸렸으니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일행들은 모두 음식 먹기를 멈추고 다크의 예쁜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중에는 먹던 게 목에 걸렸는지 기 침을 심하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놀라서 입속에 있던 음식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카렐은 좀 더 짙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대가 저주에 걸리기 전에 만났다면 더 좋았을 텐데…………….”

다크도 방긋이 미소 지었다.

“나 또한…….”

“그대의 나이는 몇 살이오?”

“일흔둘. 그대는?”

“420세라고 해 두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대단히 오래 사셨군요.”

“원래 엘프의 수명은 5백 년 정도니까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내가 여기 와서 만난 그 어떤 인물보다 강한 무예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왜 이곳에서 숨어 지내고 있죠?”

그러자 카렐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나는 결코 숨어 지내는 게 아니에요. 다만 추악한 인간들 근처에서 살고 싶지 않을 뿐…………. 그 더러운 욕망과 추악한 심성을 그만큼 뼈저리게 느꼈 으면 되었지, 더 이상 내가 인간 세상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겠지요. 또 엘프는 자연과 함께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결코 은둔하는 게 아닙니 다. 이 세상 거의 모든 엘프가 자연을 벗 삼아 살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지내는 게 좋으시다니 다행이군요.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선배도 그렇게 세상을 떠돌며 살았죠. 그의 경우는 과거 저질렀던 어떤 실수에 대 한 사죄 같은 거였지만…………. 어쨌거나 내가 아는 강자들은 이상하게 세상과 떨어져서 살기를 더 좋아하는군요.”

“그도 당신만큼이나 강했나요?”

다크의 눈이 회상에 잠기듯 약간 몽롱해지며 살짝 미소를 띠었다.

“나보다도 더 강했죠. 단 한 번, 잠시 스쳐가듯 만났지만 그에게서 꽤나 많은 걸 배웠지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카렐은 그런 다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러면 나중에 당신이 잊었던 무예를 되찾았을 때 나와 한번 비무를 해 주겠습니까?”

“예,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그러자 카렐은 빙긋이 미소 지으면서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던 아름다운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를 빼내어 건네주었다.

“이건 내가 오래전 여행에서 얻은 거죠. 원래 나한테 별로 맞지 않는 반지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가지게 되었지요. 나중에 힘을 되찾으면 이게 필 요도 없겠지만, 지금은 이게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 사양 말고 받아요.”

은근히 권하는 통에 다크는 할 수 없이 그 반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크는 카렐의 굵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워지자, 잠시 빛을 내더니 곧이어 자신의 손가락에 딱 맞게 줄어드는 것을 보고 이게 마법 반지라는 걸 알았다.

“그 녀석의 이름은 아쿠아 룰러(Aqua Ruler:물의 지배자). 그 녀석을 잘못 사용하면 그대의 목숨이 사라질 수 있지만, 그대가 그런 사악한 인물이 아니라고 믿고 주는 것이니, 그 반지를 사용해야만 할 때는 꼭 세 번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그대의 힘으로는 그걸 사용할 수 없어요. 그러니 그 냥 끼고만 있으면 나머지는 그 녀석이 알아서 해 줄 겁니다.”

아쿠아 룰러라는 말이 나오자 그 말이 뜻하는 걸 알고 있는 몇 명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은 무한한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걸 모 르는 다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럼 제 힘을 찾을 때까지만 빌릴게요. 내 힘을 되찾았을 때 그때는 이걸 돌려드리겠어요. 사실 그때쯤 되면 이건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요.”

다크의 말을 들은 카렐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주인을 꽤 잘 찾아준 것 같군. 그럼 그때 되돌려 받기로 하지요.”

그들은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이유도 없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에 기억에 남을 만한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카렐과 작별을 하고 서둘러서 산 을 내려갔다.

카렐과의 대화에서 그 그림의 주인공이 아무래도 마신일 가능성이 높아진 이상 마법에 대한 연구가 잘 되어 있는 알카사스에서 그에 대한 단서를 찾 아볼 생각이었다.

빨리 돌아가기 위해 점심은 건조 식량으로 때우면서 길을 재촉했다. 밤이 되어 식사를 끝내고 모닥불 가에 쭉 둘러앉자 곧 다크가 받은 반지에 대한 얘기가 터져 나왔다. 그 이야기의 시발점은 시드미안이 끊었다.

“다크.”

“왜요?”

“카렐이 엄청난 실력의 검객인 건 어떻게 알았지? 나도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야 당연하죠. 엄청나게 높은 경지까지 올라가면 자신이 가진 마나를 몸속 깊이 숨겨서 밖으로 드러내지 않죠. 그냥 보면 평범하게 보여요. 나도 오랜 시간 수련을 하며 쌓은 경험에 의한 것일 뿐……. 꼭 뭐라고 집어서 말할 수는 없군요.”

그러자 팔시온이 물었다.

“아까 그 말 정말이야? 일흔두 살이라는 거.”

“정말이에요.”

“이야! 그렇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최고 고령자가 가장 어리게 보이는 소녀로군. 그건 그렇고 이렇게 되면 내가 말을 높여 불러야 할까요, 다 크 어르신?”

그러자 다크가 낮은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킥킥, 그따위 소리 하지 말고 같이 놓자. 그렇게 덩치 큰 인물이 나한테 높임말을 쓰면 다들 미쳤다고 생각할 거야. 아니면 나를 귀족쯤으로 생각하 겠지. 하여튼 둘 다 내가 원하는 건 아니야.”

“그도 그렇네. 하기야 엘프들은 1백 살이 다 되어 가지고 세상에 나오면서 스무 살 정도의 외모를 가지지만, 그들이 모험가들과 파티가 되었을 때 모험가들이 엘프에게 존댓말 쓰는 거 본 적이 없으니 뭐 그렇게 하지. 또 갑자기 존댓말 쓰자니까 거북하고………….”

“그런데 어떻게 일흔두 살의 나이에 20대 중반 정도의 외모를 가질 수 있었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이해가 안 가는데…………?”

“내가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화경’이란 단계에 들어가면 체내에 쌓인 그 엄청난 마나로 육체를 완전히 젊게 바꿀 수 있지. 화경이 검강을 뿜어낼 수 있는 단계니까 아마 이쪽의 마스터하고 같은 무예 수준일 거야. 혹시 마스터라고 불리는 사람을 본 적 있어?”

그러자 모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스터란 존재는 이 세상에 열두 명 정도가 생존해 있을 뿐인, 정말이지 지고무상의 존재였기에 그들과 만날 가능 성은 평생 길거리를 가다가 1만 골드를 주울 확률보다 낮았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젊은 육체를 가지고 있을 거야. 또 몸속에 쌓인 마나의 양이 많다면, 그러니까 지금 시드미안 정도의 양만 있다면, 어느 정도 기술만으로도 노화를 막을 수 있어. 노화를 억누르는 것은 마나만 많다면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러자 솔깃해진 시드미안이 관심을 보였다.

“그 기술 나한테 좀 가르쳐 줘.”

다크는 씩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봐야 겉모습뿐이야. 근골의 노화는 똑같이 진행되니까 말짱 헛거야. 대신 너희들이 말하는 마스터부터는 다르지. 그때 완전히 몸이 새로 재구 성되는 ‘환골탈태’라는 걸 경험하게 되는데, 그걸 여기 말로는 잘 모르겠어. 그걸 거치면 어거지로 노화를 억누르는 게 아니라 진짜로 몸이 젊어진다

고.

여기서는 마나를 이용한 여러 가지 기법들이 발달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들 정도 경지까지 올라갔다면 그따위 기법은 필요 없이 저절로 몸이 젊어 지게 돼 있어.”

미카엘은 그 말을 듣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단하군. 나는 마스터라면 엄청나게 늙은 인물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닐 줄이야. 앞으로는 젊어 보이는 사람들한테도 조심해야겠어.”

“그건 그렇고 다크 너, 그 아쿠아 룰러가 뭐 하는 반지인 줄 알고 있는 거냐?”

시드미안의 물음에 다크가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면서 지미가 궁금한 듯 말했다.

“우리들한테도 말해 줘요. 우리들도 그게 뭐 하는 건지 잘 모르니까.”

시드미안이 쭉 주위를 둘러본 후 말했다.

“내가 설명하기는 좀 그러니까 전문가인 안토니가 설명해 주게.”

“예, 그러니까 아쿠아 룰러는 물의 지배자. 물을 지배하는 강력한 마법 반지죠. 전설에 따르면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Naiad)의 힘이 봉인되어 있다 고 전해지는 봉인 반집니다. 그 힘을 모두 끌어내면 폭우를 부를 수 있다고 전해지는 엄청난 물건입니다.”

안토니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빈이 물었다.

“그런데 정령왕이 봉인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 물은 없어야 되잖아요. 또 홍수도, 비도 없어야 하는데 왜?”

“아, 그건 라빈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말이 봉인이지 사실은 봉인이 아니거든. 이 세상에 정령을 봉인할 수 있는 물건은 없어. 정령과 계약을 맺 을 수 있을 뿐이지. 저 아쿠아 룰러를 통해 나이아드는 자신의 힘을 원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계약을 맺었을 뿐이지. 그러니까 결론은 저 아쿠아 룰러 가 곧 나이아드고 나이아드가 곧 아쿠아 룰러가 되는 거야. 언제라도 아쿠아 룰러를 매개체로 나이아드를 불러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아마도 카렐이 한 말은 아쿠아 룰러 자신이 파괴되지 않도록, 또는 그걸 가진 자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지켜 준다는 계약도 있는 모양이지. 그러니까 저걸 가지고 만 있어도 어느 정도 힘이 되어 줄 거라고 하는 거지.”

지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쿠아 룰러가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무렴. 과거 저걸 이용해서 도시 하나가 완전히 물속에 잠긴 일이 있었지. 하지만 그 후로 거의 3백 년간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 데…………. 설마 카렐이 그 사건의 주인공은 아니겠지?”

안토니가 농담 삼아 뒷얘기를 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미디아가 말했다.

“어쩌면 카렐이 그 나쁜 놈을 죽이고 그걸 빼앗았는지도 모르죠. 카렐이 말했잖아요. 나쁜 일에 쓰면 목숨이 날아간다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대화가 계속 이어지자, 시드미안이 손을 저으며 일행의 대화를 끊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그만 자자. 내일도 엄청나게 걸어야 하니까.”

<묵향6:외전 – 다크 레이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