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5권 7화 – 샤헨

샤헨

2주일간의 여행 끝에 팔시온 일행은 트루비아의 수도 샤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 저마다의 계획이 있었기에 숙소는 한 곳에 정했지만, 일단 짐 을 풀고 난 다음 모두들 자신의 볼일을 보러 뿔뿔이 흩어졌다.

용병인 미디아는 용병 길드에 매력적인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보러 갔다. 그리고 무예 수업자들은 미카엘을 임시 두목으로 삼아 샤헨에 있는 검투劍 鬪) 수련장과 경기장을 둘러보러 갔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경험을 쌓은 다음 어떤 기사단에 소속되는 것이 소원인 인물들이 었으니까…………….

미네리아는 샤헨의 동쪽에 위치한 대지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에 놀러갔다. 그리고 남은 네 명, 가스톤, 팔시온, 다크, 라라는 저마다의 볼일을 해결 하기 위해 샤헨 아카데미로 갔다.

샤헨 아카데미는 왕립 학술 기관이었기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지만 가스톤이 아카데미에 근무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기에 그 문제는 간 단히 해결되었다. 가스톤은 연락을 받고 달려온 머리가 벗겨지고 살집이 좋은 중년 마법사를 향해 반갑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나눴다.

“이야, 칼. 형편이 좋은 모양이군. 살이 더 찐 거 같아.”

“이 녀석, 독설(毒舌)은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래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냐니. 친구가 보고 싶어서 모처럼 시간을 내서 찾아왔는데, 섭섭하군.”

“헛소리하지 마. 네 녀석이 언제 그런 거 따졌냐? 궁한 일이 있을 때만 찾아왔지.” 그러자 가스톤은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헤헤헤, 이거 내 속이 그렇게 훤히 들여다보이나? 어쨌든 몇 가지 알아볼 게 있어서…”

라라가 다가오자 가스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라라, 이리 와 봐라.”

“기억을 봉인당한 거 같은데,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어서 데리고 왔어. 그리고 저기 있는 다크는 공간 이동 마법에 대해서 잘 아는 마법사 좀 소개 해 줘. 몇 가지 알아볼 게 있다고 하니까………….”

“뭐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군. 따라오게………….”

“만약에, 이렇게 생긴 여러 도형이 겹치는 중간쯤에 서 있다가 번쩍 한 다음 어딘가에 떨어져 내렸는데, 말도 안 통하고, 모든 것이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면 그건 어떻게 된 일인가요?”

“흐음, 아마도 차원(Dimension) 이동의 마법일 걸세.”

“차원이라구요?”

“그렇네, 차원이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지. 각 차원은 아무리 무한대의 거리와 시간을 투자해도 만날 수 없는 별개의 공간이지. 바로 코앞에 있다 하더라도 그건 완전히 별개의 세계야. 이건 아직까지 마법사들 간에도 이론으로만 알려져 있지. 하긴 실제로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도 전해지는 데………….”

“그러니까 요점은 그 차원을 달리해서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자네가 대강 그려 준 걸 보니, 마법진(魔法陣)이군. 이걸 통한다면 대단히 강력한 마법이라도 실행이 가능하지. 마법사는 그 진세를 발동 만 하면 될 뿐, 나머지는 마법진이 주위의 마나를 흡수하여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니까 말일세.”

“그러면 A라고 하는 차원에서 B라는 차원으로 이동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역으로 B에서 A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울 거야. 왜냐하면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는데, 그중에 자신이 원하는 차원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지. 그걸 모르고서 차원이 동을 한다면 A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C라는 다른 차원으로 갈 수도 있지. 오히려 그 가능성이 더욱 크고…….”

“그렇다면 다른 차원으로 가기는 쉽지만 어떤 특정 차원으로 돌아가기는 힘들다는 겁니까?”

“그렇지.”

“어쨌든 차원 이동의 마법은 존재하기는 하는 거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옛날 마법이 극도로 발전했던 마도 시대 말기에 차원 이동의 마법이 만들어졌다고 들었고, 또 그때 실험이 행해졌었네. 하지만 아무도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명확한 결론이 나지는 않은 거야.”

“그렇다면 지금 그 마법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없네. 마도 시대는 1천 년도 전에 마법이 가장 흥성했던 시대야.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지만 어딘가에 기록으로라도 남아 있을 수 있잖아요.”

“흠, 과거 많은 마법사들이 건설했던 던전이 조금씩이나마 발굴되고 있지만 글쎄, 아직까지 그런 마법이 발견되었다는 학술 보고는 없었다네. 지 금 자네 얘기하고 있는 건가?”

“그건 왜 묻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자료지. 다른 차원에서 이리로 생명체가, 그것도 사람이 날아왔으니 획기적인 발견이 아니겠나?”

“예, 그렇죠. 실은 저하고 아주 친한 친구가 그런 식으로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는 걸 제가 봤거든요. 어떤 마법사하고 싸울 때였는데, 그 마법사가 그 도형이 있는 쪽으로 친구를 유인한 다음에 그런 짓을 했다구요.”

그러자 여태껏 다크를 상대했던 늙은 마법사는 김빠진 표정으로 바뀌더니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난 또 자네가 차원 이동 쪽으로 말을 돌리기에 혹시나 했지. 그건 아마 그 마법사가 자네 친구를 당해 낼 수 없으니 공간 이동시켜 버린 걸 거야. 짧 은 거리라면 며칠, 먼 거리라면 몇 달 기다리면 그 친구 멀쩡한 모습으로 자네 앞에 나타날 걸세. 이만 가 보게나. 괜히 시간만 낭비했군. 쯧쯧.”

다크가 투덜거리는 노마법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가스톤, 팔시온, 라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라는 더 이상 멍청한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마법이 풀린 모양이었다.

“마법이 풀린 모양이군요.”

다크의 퉁명스런 물음에 라라가 고운 목소리로 답해 왔다.

“예, 저는 라라가 아니고 ‘라나 슈바이텐베르크’ 예요. 그리고 드로아 대 신전에서 지혜의 여신 아데나를 모시는 수련생이구요. 잡혔을 때 도와주셔 서 감사드려요.”

“슈바이…, 뭐라고?”

다크의 말에 그녀는 약간 비웃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슈바이텐베르크요. 저 아저씨는 머리가 별로 안 좋은 모양이야.”

다크가 울컥해서는 한소리하려는데, 팔시온이 끼어들었다.

“역시 그놈들의 목표는 라나가 아니었어. 라나가 가지고 가던 작은 상자였지. 트루비아 왕실 마법사 다리아 경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드로아 대 신전 에 보관하던 그 상자를 샤헨의 왕궁으로 가져오다가 기습을 받고 물건을 뺏긴 거지.”

“그 속에 들어 있는 게 뭡니까?”

“놀라지 말게. ‘드래곤 하트’야.”

하지만 다크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뭔 헛소리하냐는 듯한 얼굴로 팔시온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팔시온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다크는 검술 실력은 엄청나지만 마법 쪽으로는 아예 무지하다는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아, 그러니까 드래곤 하트라는 건 드래곤의 목뼈와 척추가 만나는 지점에 불룩 튀어나온 부분인데, 그곳에 드래곤의 마나가 집중적으로 모이지. 사 실 드래곤이 죽어 버리면 그 안에 남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 평생 가도 모을 수 없는 엄청난 마나가 들어 있다구. 그 부분의 색깔이 붉기 때문에 드래곤의 심장이라고 부르는데, 아마 그 부분의 뼛조각을 어떤 모양으로 가공한 덩어리가 그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던 모양이야.”

‘아하, 내단 같은 거군.’

다크는 감을 잡았다. 드래곤이 어떻게 생긴 영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말이었고, 그런 영험한 놈의 내단이라면 대단한 내공 증진의 효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크는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따위 내단이 아니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과 같은 경지까지 무공을 닦았다면 쓸데없는 영약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더욱 중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처음에는 놀랍다는…, 그다음은 탐욕(貪慾)의,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무욕(無慾)으로…, 마지막에는 무관심으로 변해 가는 다크의 얼굴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던 라나가 말했다. 그녀는 지혜의 여신을 섬기는 만큼 눈치가 빨랐고, 잔머리 굴리는 게 보통 수 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 얼굴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네요. 한 사람의 얼굴 표정이 그렇게 순식간에 마구 변하는 건 처음 봤어요.”

다크는 지나치게 쾌활한 라나의 얼굴을 힐끗 본 다음 냉랭하게 물었다.

“팔시온, 저 쓸모없는 계집애는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거죠?”

‘쓸모없는 계집애’란 말에 발끈하는 라나를 바라보며 팔시온이 대답했다.

“흠, 이제 기억도 돌아왔으니 드로아 대 신전으로 돌려보내야지.”

“아뇨. 저도 같이 갈래요. 드래곤의 심장을 찾으러 갈 거 아니에요?”

그러자 다크가 냉랭하게 받아쳤다.

“드래곤의 심장 따위는 찾아서 뭐에 쓰려구. 팔시온, 전에 그 와이번 갑옷을 어디서 만든다고 했지요?”

“알카사스”

“예, 거기. 알카사스로 가 보지 않을래요?”

“알카사스는 왜?”

“당연히 제가 필요로 하는 게 마법이니까 그렇죠. 마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가 거기라면서요. 가스톤도 마법사니까 거기 같이 가면 뭔가 배울 것도 있을 거 아니에요?”

팔시온은 시큰둥한 얼굴이었지만 마법사인 가스톤은 다크의 유혹에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그 모양을 본 라나가 다시 팔시온을 꼬시기 시작했다. “빨리 쫓아가지 않으면 그 마법사를 완전히 놓칠 거예요. 생각해 보라구요. 드래곤의 심장을 찾아다 주면 엄청난 상금을 지급해 줄 거예요.”

라나의 유혹에 팔시온과 가스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짜 그걸 되찾을 수 있다면 엄청난 포상금을 받을 수 있 으리라……………. 하지만 회색 갑옷들과 검을 섞어 본 팔시온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다크가 아니었다면 자신들도 백색 갑옷을 입은 자들과 마 찬가지로 지금쯤 짐승들 밥이 되어 있을 테니까………..

팔시온은 다크를 쳐다봤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다크 같은 든든한 실력자가 있다면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크는 이번 일에 끼 어들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확실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팔시온은 약간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안 되겠어. 그놈들 엄청나게 강해. 그들 중에 그래듀에이트도 한 명 있었어. 그때 죽을 뻔했다구. 역시 그래듀에이트급에는 그래듀에이트급 이 상대해야 장단이 맞지. 트루비아의 정예 라칸 기사단원 50여 명을 겨우 30명 정도로 기습한 놈들이야. 우리들이 겨우 그따위 포상금 타겠다고 설 쳤다가는 목숨이나 잃기 딱 좋지.”

“그래듀에이트급이 있었다구요? 맞아. 그때 라칸 기사단을 인솔하신 분은 알렉스 시드미안 경이셨지요. 그분은 그래듀에이트셨는데… 그분을 죽인 그래듀에이트가 있었을 텐데, 당신들은 어떻게 저를 구하셨죠?”

“운이 좋았을 뿐이야. 꼬맹이도 이제 돌아가거라. 우리 중에서 목숨 걸고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가스톤, 팔시온, 이제 여관으로 돌아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