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17화 – 승전 무도회

승전 무도회

“흑흑흑, 주인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제발~.”

세린은 다크를 잡고 사정하고 있었고, 다크는 침대에 걸터앉아서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퉁명스레 대꾸했다.

“닥쳐! 누가 너보고 죽으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죽으라고 하시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군소리하지 마. 나는 안 간다고 했으면 안 가.”

“주인님이 무도회에 안 가시면 토지에르 나리가 이번에는 진짜 제 가죽을 벗기실 거라니까요.”

“너는 내 거니까 그 영감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으니 안심해.”

“하지만 토지에르 나리는 주인님의 상관이시잖아요. 주인님이야 괜찮다고 해도 저는……. 엉엉, 내일 죽을 게 분명해.”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수련 좀 하자. 수련! 빨리 밖으로 안 나갈래? 정말 팔려 봐야 정신을 차릴래? 토지에르만 무섭고 나는 안 무섭냐? 이게 정말 가죽이 벗 겨지도록 두들겨 맞고 싶어서…….?”

다크가 말을 멈춘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앙탈할 힘도 없는지 울면서 옆방으로 건너가는 세린의 뒷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사실 무도회 참석권은 귀족급에게는 다 주 어지는 것이고, 거기 참석하든 말든 그건 자기 마음이었다. 문제는 이게 황제가 연 대규모 승전 축하 무도회였고, 또 그런 비중 있는 무도회에 꼭 가야 되는지, 가지 않아도 되는지를 세린이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꼭 가야만 하는 거라면 거기 불참한 다크야 잘 몰라서 안 갔다고 치더라도, 그녀를 보내지 않은 모든 책임 은 자신에게 쏟아질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엉엉,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래도 죽기는 싫다구요, 엉엉..

훌쩍거리는 세린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리는 가운데, 다크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길, 그래! 가 주지! 가 주고 말 테닷!”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다크가 무도회장으로 떠난 건 무도회가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다크는 건성으로 세린에게 설명을 좀 듣기는 했지만 춤(dance)이라 고는 전혀 몰랐기에,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만 기록해 두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들어가는 거야 체크를 하겠지만 설마 나가는 시간까지 체크할까? 또 나가는 시간까지 체크한다고 해도 도중에 누구하고 뭐 했는지까지 기록하는 놈이 있을 거라 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한두 명 초대하는 것도 아니고…….

다크는 무도회장으로 가면서 중원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매우 특이한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림에 있을 때도 금(琴 : 거문고)이나 적(笛 : 피리) 같은 걸 꽤 다뤄 봤기에, 이 특이한 악기에 흥미가 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소리만 들어서는 악기의 종류가 다양한 것도 같았고, 듣기에도 좋았기에 어떤 악기인지 또 어떻게 생 겼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 가까이 다가가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얼굴색이 약간 붉어졌다.

“으아흥, 으으으으흥, 으으응… 아아앙……..

아주 낮으면서도 간드러지는 듯한 신음 소리. 이 소리가 뭔 소린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그 소리들은 다크가 걸어가는 길의 좌우에 펼쳐진 정원의 여기저기에서 아 주 낮게 들려왔는데, 아무래도 나무들을 2미터 정도 높이의 미로처럼 만들어 놓은 이 괴상하게 생긴 정원의 용도를 십분 활용하는 인물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도회장으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높은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가로수에서 2미터 정도 떨어져서 양쪽에 이 미로 같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정원의 바닥에는 폭신한 잔디까지 심어져 있으니 일 벌이기에는 매우 적합한 장소였으리라. 세린도 다크의 뒤를 따르면서 귀를 쫑긋거리는 걸 봐서는 그녀의 귀에도 이 자 극적인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고양이는 후각보다는 청각과 시각이 뛰어난 동물이니까 그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다크는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길옆의 가로수 위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뒤따라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유우우~ 어디를 가시나요? 아가씨?”

다크는 약간 당황해서 나무 위를 쳐다봤다. 그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그녀는 나무 위에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기척을 숨길 수 있다면? “에잉? 어린 애잖아. 어? 낯이 좀 익은 것 같은데, 구면이었나?”

남자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다크 앞에 섰다. 공식적인 무도회라도 여기서는 검을 휴대할 수 있는지, 허리에는 낮에 봤던 그 근사해 보이는 롱 소드가 매달려 있 었다.

“글쎄요?”

“아, 참! 낮에 거리에서 봤었는데, 깜빡했군. 보통 부모들은 15세 정도는 되어야 무도회에 보내 줄 텐데, 너희 부모는 아주 개방적인 성격을 지니신 분들인 모양이 군. 어라? 그런데 어떻게 보호자도 없이 혼자 왔냐?”

“여기 있잖아요.”

다크가 뒤에 서 있는 묘인족을 가리키자 사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묘인족이 보호자가 될 수는 없지.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동행이 없으면 함께 들어가자. 나도 일이 있어서 늦게 왔더니 괜찮은 여자는 딴 놈들이 다 꼬셔 버 려서 말이야. 그냥 돌아갈까 말까 궁리 중이었다구.”

사내는 손을 내밀었다.

“자, 가실까요? 아가씨?”

‘놀고 있네! 뭐 딱히 저런 데 가서 할 짓도 없으니 같이 가 볼까??

사내와 함께 두 개의 문 중에서 처음 들어가는 손님들을 위한 문으로 들어가자 세린은 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에게 초대장을 줬고, 그 사내 또한 초대장을 건넸 다. 정원으로 바람을 쐬기(?) 위해 나가는 남녀들을 위한 문은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그쪽에는 급사가 없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며 급사에게 초대장을 줘야만 방 명록에 이름이 기입되고, 누가 출석했는지 체크가 되는 것이다. 다크와 그 사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초대장을 보면서 소리쳤다.

“다크 크라이드 남작님과 코린트 제국의 까미유 드 크로데인 백작님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 두 남녀에게, 특히 그 남자에게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약간의 증오와 두려움이 얽힌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애써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서로 떠들어 대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별로 시선이 곱지 않지?”

“좀 그러네요.”

“이래서 크라레스에는 별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참, 그런데 너 고아냐?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그건 왜 묻죠?”

“남작 영애(令愛 : 딸)라고 부르지 않고 남작이라고 불렀잖아. 그렇다면 결론은 무남독녀에 고아뿐이지.”

그 말에 다크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 질문은 좀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미소를 지으며 말했기에 사내는 처음에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내는 한참 생각해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벌게졌다. 이제야 그의 궁금증을 채우기 위한 질문 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던 것이다.

“아……. 미안, 미안. 의문점이 생기면 앞뒤 생각을 못 한다니까. 미안하다. 안 좋은 일을 물어서……. 어린 나이에 충격이 컸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소녀의 안색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가지고서야 매우 둔감하다는 말을 듣지 않아요?”

그 말에 사내는 피식 웃었다.

“사실 한 가지에 미치다 보면 딴 데는 둔감해질 수밖에 없지.”

“뭐에 미쳐요?”

“검(劍)……. 한쪽으로 천재 소리를 듣다보면 다른 쪽으로는 완전 멍충이 소리를 듣는 게 정상이니까. 이러지 말고 저기 앉자.”

세린은 이런 곳에 들어올 자격이 못 되기에 하인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갔고, 그들은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재빨리 음료 수와 과자 몇 개를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그들이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단발머리 여자가 다가와서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앉았다.

“역시 까미유는 재주도 좋군요. 어디서 이런 예쁜 아가씨를 만났죠?”

“이쪽은 지레느, 지레느 드 카브리에 양이야. 이쪽은 다크 크라이드.”

““반가워요.”

“예, 저도…….”

잠시 얘기를 해 보니 이 두 남녀는 이번에 코린트 제국에서 크라레스 제국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사절단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린트는 크라레스가 전후에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지, 또 크라레스 궁정의 분위기는 어떤지, 이번 전쟁을 눈감아 준 대가로 어느 정도의 진상품을 바칠 것인지 등등 궁금한 점도 많았고, 또 압력을 가할 것도 많았기에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만약 크라레스에서 겨우 작은 땅덩이 하나 집어 먹었다고 반 코린트 기운이라 도 팽배해진다면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박살 내 버릴 계획이었다.

30여 분 정도 대화를 나누다가 이만 돌아가겠다고 다크가 일어섰다. 다크가 문을 나서자 지레느는 재빨리 까미유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저 꼬맹이는 누구야? 도대체 정체가 뭐야?”

“글쎄, 나도 오늘 낮에 거리에서 만났을 뿐이니까 잘 몰라.”

“그런데 네 취향은 저런 어린 애가 아니잖아. 이상하게 풍기는 분위기가 어린 애 같지 않았지만. 엘프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저 애는 엘프도 아닌 것 같던데, 시간을 꽤나 할애하면서 정성을 쏟는 거 보면 뭐 켕기는 게 있지?”

그 말에 까미유는 살며시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단 말이야. 상당히 성숙한 분위기 같기도 하고, 또 겉모양과 달리 연약함은 보이지 않아. 슬며시 여자답지 않은 강인함 이 풍긴단 말이야. 어쩌면 상당한 수준의 검객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말이야. 내 눈이 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지레느는 역시나 하는 미소를 띠었다.

“검객이 아니라 정령술사야.”

“정령술사?”

“응, 네가 그 애하고 들어올 때부터 저 애한테서 정령의 냄새가 나서 주의를 기울였지. 정령술사만이 정령술사를 알아볼 수 있잖아. 어쨌든 꽤나 강한 정령술사인 것 같았어. 정령의 냄새가 상당히 강렬했거든.”

“어느 정도인데?”

“글쎄, 그게 알기 어렵다니까. 뭔가 강력한 정령의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기는 하는데, 그게 어떤 정령인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어.”

“불과 바람의 정령은 아니라는 말인가? 네가 부릴 수 있는 건 불과 바람의 정령이잖아. 흠, 이럴 줄 알았으면 지레인도 데려오는 건데 잘못했군.”

지레느 자매는 타고난 정령술사들이었다. 언니인 지레인은 대지와 물의 정령을, 동생인 지레느는 불과 바람의 정령을 부릴 수 있었다. 지레느의 경우 불의 하급 정 령 살로스(Salos), 중급 정령 살라만더(Salamander) 그리고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피드(Sylphid)를 부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둘이 모인다면 뇌전을 빼고 모든 종 류의 정령을 부릴 수 있었다.

“언니를? 언니는 대지와 물의 정령을 부릴 수 있으니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니가 부리던 정령의 냄새는 내가 다 안다구. 그 아이에게서 나던 정령의 냄새는 대지의 하급 정령 노움(Gnome)이나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Undine), 중급 정령 닉스(Nix)도 아니었어. 정령술사는 한 번 맡은 정령의 냄새는 절대 잊지 않 으니까 이건 신뢰성 있는 말이라구.”

“그럼 뭐야? 뇌전의 정령을 부린다는 말인가?”

“그 외에는 답이 없지. 설마 하급 정령은 부리지 않고 중급 정령, 또는 정령왕만 부린다면 몰라도…….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돼. 중급을 부른다면 하급은 언제든 부 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저런 당당한 분위기가 나오는 건가? 불의 정령과 마찬가지로 뇌전은 완전히 파괴적인 정령이니까 말이야.”

“뇌전의 정령을 다룰 줄 아는 정령술사는 많지 않아. 뇌전의 정령은 꽤나 친해지기 어려운 존재들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일단 친해지면 상당한 득이 있어. 상대하 기 매우 까다롭거든. 불의 정령을 검에 씌워 봐야 파이어 블레이드(Fire Blade : 화염 칼날) 정도의 효과밖에 얻을 수 없지만 뇌전은 다르지. 검이나 강철 방패로 막 으면 전기가 타고 들어오니까 말이야. 드래곤 본이나 목검(木劍), 또는 나무 방패를 쓰지 않는 한은 충격을 막기 힘들어. 아니면 처음부터 매직 실드로 감싸고 싸우 든지.”

“그래서 고아인데도 대접이 좋은 모양이군. 납치할까? 쓸 데도 많을 텐데…….”

그 말에 당황한 지레느가 숨을 죽이며 반박했다.

“미쳤어? 그러다가 발각되면 아주 곤란해.”

“큭큭, 농담이야.”

“그런데 저 아이 좀 이상한 점은 있어.”

“어떤?”

“보통 정령술사가 단 한 종류의 정령만 다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대부분이 두 가지 이상의 정령을 다루지. 상극(相剋)의 정령만 피한다면 가능하거든. 불과 물, 불과 대지의 정령은 완전히 상극이야. 이렇게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정령들이니까 이것만 피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지. 그러니까 저 아이가 최소한 한 종 류 이상의 다른 정령도 부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그 말은 한 종류 정령과의 친화력이 매우 크다는 말과 같지.”

“…..”

“멍청한 표정 짓지 마. 그토록 하나에 대한 친화력이 크다는 건, 오랜 시간 수련한다면 정령왕의 힘까지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야.”

“정, 정령왕의 힘이라고?”

“응, 뇌전의 정령왕 카르스타(Karstar)의 힘. 사실 정령왕을 마음대로 소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힘의 일부를 빌려 쓸 수 있다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 나지. 거의 7사이클급 전격의 힘을 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

7사이클이란 말에 상대의 안색이 굳어지는 걸 보며 지레느가 미소 지었다.

“잘 키우면 대단한 재목(材木)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안 될 가능성도 많지만…….”

“……”

한동안 말이 없던 까미유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납치하자.”

“미쳤어?”

“쉿! 7사이클급이라면 엄청난 거라구. 거기다 고아라니까 잘만 달래면 코린트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칠걸? 밑져 봐야 본전인데…….”

그 말에 지레느도 약간은 솔깃한 듯 중얼거렸다.

“글쎄…….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