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23화 – 마인 탄생
마인 탄생
전신에 요기(妖氣)가 넘치는 아름다운 소녀. 긴 금발을 아무렇게나 묶었고, 옷도 평범한 여행복 같은 간소한 것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미모를 가리기는 힘들었 다. 매우 성숙한 듯하면서도 앳된, 어딘지 상반된 느낌을 가진 이 소녀는 약간은 멍청한 표정으로 넓은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명히 그 실바르라는 멍청하게 생긴 녀석의 안내를 받아 잠자리에 든 것 같았는데, 어느 결에 여기 서 있는 자신이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는 어디지? 눈에 보이는 놈이 하나라도 있어야 잡고 물어보지.”
투덜거리며 자신의 손바닥을 잠시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른 건 몰라도 무시무시한 힘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 고 가만히 있으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무공구결들……. 떠오르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바르라고 불린 그놈의 힘과 비교해 봤을 때 도저히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실력 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해결되겠지. 내가 누군지, 또 이 빌어먹을 곳이 어디인지.”
이때 호수 중앙의 물이 솟구쳐 오르더니 곧 그 물 덩어리는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그 남자는 소녀를 찬찬히 살펴본 다음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며칠 잠 안 자고 수련 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도대체 무슨 수련을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지?”
하지만 소녀는 그 남자의 놀라움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이봐, 여기는…, 어디?”
소녀는 딸리는 언어 실력으로 가까스로 상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말이 안 통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골똘히 생각하면 간간히 단어들이 떠올라 대화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말이 안 통하면 상대가 답답하지 자신이 답답할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는 그대의 꿈속이야. 나는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 반지의 주인이 제대로 된 인간인지 판단하여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지.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맹약을 지켜 줄 것이고, 내 마음에 안 들면 그놈은 내 노예가 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일단 그대의 힘은 합격선, 아니 그 이상이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능력은 있으되 너무 힘이 없어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했는데 말이야.”
“빌어먹을! 무슨 소리! 짧게 말해!”
욕 한 마디를 보태 단어 다섯 개만으로 명확한 의지를 전달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나이아드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응? 전에는 이렇게 말을 못 하지 않았는데……. 너무 속성으로 수련하다가 부작용이라도 생겼나?”
“여기 어디?”
“꿈속!”
“하, 꿈이라면 별 상관 안 해도 나중에 깨겠군. 그럼 어디 가서 잠이라도 자야겠다. 꿈속에서 잠을 자면 또 어떤 꿈을 꾸게 되지?”
소녀가 자신은 본 척도 안 하고 나무 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쭉 드러눕는 걸 보면서 나이아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령왕 생활 수만 년에 이런 년은 보다 보다 처음이었다.
이 녀석에 준하는 뻔뻔이가 예전에 하나 있었지만, 그놈은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놈이었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드(Iprid)와 맹약이 맺어져 있는 플레임 스 파우터(Flame Spouter : 화염을 내뿜는 자)의 주인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봐, 네 녀석의 힘은 통과 수준이지만, 또 다른 시험이 남아 있단 말이다. 과연 제대로 된 정신 상태를 가진 놈인지 두 번째 시험을 거쳐야 해. 그 시험까지 통과 한다면 너는 아쿠아 룰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사악한 자는 아쿠아 룰러의 주인이 될 수 없어. 이봐, 듣고 있는 거야?”
“…….”
“이런 빌어먹을 자식! 내 말을 들으란 말이다.”
들은 척도 안 하는 상대에게 열 받은 나이아드가 분노에 찬 노성을 터뜨렸고, 그와 동시에 나이아드가 서 있던 호수의 표면이 약간 출렁이더니 호수 물의 일부가 소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소녀의 손이 잘 달구어 놓은 쇳덩이처럼 진한 선홍색을 띠면서 그것을 막자 곧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곧장 튕기 듯이 일어선 그녀는 나이아드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언어로 떠들어 대더니 미친 듯이 웃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나는 걸어 오는 싸움을 마다할 만큼 사람이 좋지 못해. 꺄하하하!”
“미쳤군.”
“미쳤군……. 무슨 뜻? 뭐? 미쳐? 탄마지(彈魔指)!”
그와 동시에 그녀의 열 손가락에서 열 줄기 지풍(風)이 뿜어져 나오며 나이아드를 향해 날아갔다. 나이아드가 그걸 간단히 막아내는 걸 보면서 소녀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 실력도 상당한 것 같은데, 같이 몸이나 풀어 보자. 오호홋!”
그녀는 자신의 내력을 천천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단전에 쌓인 강대한 마(魔)의 기운. 마의 극한, 즉 극마(極魔)의 힘이 뻗어 나오자 소녀의 몸은 더욱 사악하게 보였다. 전신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눈동자마저 핏기가 올라와 완전히 아수라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공구결은 많지 않았다. 3분의 1 정도는 매우 패도적인 무공이었고, 나머지 3분의 2 정도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패도적이지 못한 무공이 훨씬 더 깊이 있는 것들이지만, 그녀로서는 지금 자잘한 초식 따위를 기억하고 응용해야 하는 그런 무공들보다는, 막대한 양이 소모되지만 엄청난 위력을 지 니는 무공이 더 쓰기 편했다. 내공이야 사발로 퍼 줘도 남을 만큼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꺄하하하, 묵룡혼원공(墨龍混元功). 파(破)!”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진 수십 줄기의 강기 다발이 자신을 향해 날아왔을 때에야 나이아드는 뭔가 매우,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재빨리 아쿠아 바리 어와 실드를 함께 쳤지만, 그중 몇 개는 그 벽을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저 사악한 기운은 또 뭐란 말인가? 자신의 몸에 난 상처는 꼭 호수에 돌 던진 식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긴 했지만, 나이아 드는 매우 자존심이 상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죽어랏!”
나이아드는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 꿈속에서 사라져 버리자 낭패한 표정으로 하늘 위를 향해 외쳤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보면 미친 듯한 행동이었지만 놀랍게도 그에 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녀는 너무 무리하게 마나를 흡수하다가 사고가 났어요. 예전에 몸속에 가지고 있던 정갈한 마나와 새로이 생성, 흡수된 사악한 마나가 충돌했거든요. 그러면서 그녀의 몸속에 축적된 엄청난 양의 마나들이 제멋대로 체내를 돌기 시작했죠. 그러던 중에 사악하면서도 강렬한 마나의 일부가 골수에 자리를 잡아 버렸어요. 그녀 는 폭주하는 마나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진정시켜 보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어요. 그 덕분에 골수에 자리 잡은 사악한 기운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제가 중 간에서 그 사악한 기운이 골수를 장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면 아마 미쳐 버렸을지도……. 하지만 제 능력으로는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기에, 그 기운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 기억은 잊어버린 상태지만, 만약 그녀의 심경에 뭔가 변화가 생겨 제가 간신히 막고 있는 그게 자극을 받는다면 폭주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폭주한다면?”
“엄청난 악마가 한 명 탄생하겠죠. 그걸 막아야만 합니다. 그녀의 정신은 지금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火山)과 같아요.”
“막을 방법이나 있냐?”
“저는 그녀의 몸에 붙어 있는 상태니 그녀에게 간섭할 수 있습니다. 나이아드 님께서 힘을 좀 빌려 주신다면 조금씩이나마 그 사악한 마나를 없앨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한 달 이내로 그 사악한 기운을 골수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 방법 외에는 없겠군. 아무리 내 힘이 강대하다하나 나 자신의 의지로 정령계가 아닌 인간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많지 않다. 싸워 본 결과 거의 비슷한, 아 니군. 그녀의 파워가 월등했어. 실전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무작정 힘에만 의존해서 덤빈 덕분에 그나마 평수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실전 경험이 갖춰진다면 나도 벅찬 상대다. 꿈의 세계(夢界)가 아닌 인간계에서 부딪쳤다면 큰일 날 뻔했지. 안 그랬으면 점점 감각을 되찾아가는 그녀에게서 도망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내가 밀리기 시작했을 때 여기서 쫓아내 버렸으니 다행이었지만, 잘못하면 정령계로 강제 소환당할 뻔했어. 도대체 인간이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가 않는단 말이야. 초상급 악마에게 혼을 판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힘을 빌려 주는 것도 아닌데…….”
나이아드의 투덜거림에 앳된 목소리는 조금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그녀를 가만히만 놔뒀으면 6개월 이내에 그 정도 경지까지, 아니 그 이상의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었어요. 재미있다고 그녀를 매일 못살게 군 것은 나이아드 님이 아니신가요?”
그 말에 나이아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흠,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심심하기에 제법 발악하는 꼴이 재미있어서 좀 가지고 놀았더니, 쯧쯧……. 어쨌든 마나는 얼마 없는 주제에 싸우는 감각 하나는 끝내줬지. 정말 괴롭히는 재미가 나는 상대였단 말이야.”
“그렇다고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매일매일 괴롭혀요?”
“닥쳐. 겨우 반지의 정령 주제에 이 위대하신 정령왕께 대들다니.. 명심해! 네 녀석은 맹약에 따라 내 힘의 일부를 빌려 쓸 수 있을 뿐, 나는 네가 아니고 너 또 한 내가 아니야. 네놈이 위대하신 나와 동급이 될 수 없단 말이다. 당장이라도 내가 힘을 차단하면 소멸하는 주제에……. 알겠냐?”
“명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이아드 님.”
“알았으면 됐다. 가 봐.”
“으하아앙…..
일어서서 기지개를 펴는 주인을 바라보며 세린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제 수련을 끝낸 후 주인이 좀 이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푸근히 자고 일어나는 주인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목욕물 받아 놨습니다, 주인님. 씻고 식사하시지요.”
“목욕물? 목욕, 목욕……. 응.”
그제야 알아듣고 소녀는 세린의 안내를 받아 목욕탕으로 향했다. 꿈속에서 어떤 빌어먹을 녀석하고 만나 잠에서 깨기 직전까지 아귀다툼을 벌였었는데, 끝장을 못 본 것이 영 찝찝했다. 처음에는 좀 밀렸지만 나중에는 슬슬 요령을 터득해 가면서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완전히 끝장을 낼 수도 있었는데…….
“제길! 검이 있었다면 완전히 박살 낼 수 있었는데…….”
세린은 소녀가 목욕하는 것을 도와 깨끗이 닦아 주고, 옷까지 입혀 줬다. 그런 후 자그마한 검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녀가 이 검과 장갑을 몸에서 떼어 놓은 모습 을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는 장갑은 본 척도 안 하고 검만 허리에 찼다.
“저… 주인님, 장갑은?”
소녀는 대꾸를 하려다가 말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자 고개만 가로 저은 후 밖으로 나갔고, 그 뒤를 세린이 재빨리 따라갔다. 어쨌거나 시중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 다.
그녀가 밖으로 걸어 나오자 언제나와 같이 실바르가 뒤따랐다. 실바르를 흘끗 본 소녀는 실바르에게 다가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실바르가 무슨 일인가 해서 소 녀에게 다가가자 실바르의 큼직한 롱 소드를 가리켰다.
“검… 줘!”
“예? 예에…….”
자신의 검을 잠시 구경하자는 말인 줄 알고 실바르는 검을 살짝 뽑아서 건네줬다. 얼마 전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검은 다크와 토지에르 간의 다툼을 막다가, 다크가 날린 물줄기에 박살 나 버렸기에 그로서는 큰마음 먹고 거금 20골드를 주고 구입한 꽤나 고급 검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소녀가 가리키는 것은 검대(劍帶)였다. 무슨 남의 검을 구경하는데 검대까지 벗어 달라고 하나 싶었지만 실바르는 그것도 벗어 줬다. 그러자 소녀는 자신의 얄팍 한 검을 실바르에게 건네주고는 실바르의 검대를 허리에 차고 그 검대에 실바르의 롱 소드를 묶었다. 그걸 보는 실바르의 속이 뒤집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봐요. 그건 제 검입니다.”
소녀는 실바르의 항의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실바르에게 건네줬던 자신의 얄팍한 검을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그거…, 가져.”
그런 후 소녀는 긴 검을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고, 열 받은 실바르는 소녀의 뒤에 바짝 붙어 소녀를 잡아먹을 듯 악을 써 댔다.
“아니, 그건 내 검이야. 얼마 전에도 내 것을 하나 박살 냈으면 됐지. 그걸 꼭 빼앗아야겠어? 엉?”
아무리 폐하의 총애를 받는 여자라 해도 이건 너무 심한 처사였고, 또 겨우 남작 작위 가지고 그래듀에이트인 자신을 이렇게 깔볼 수는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맛을 좀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뒤로 획 돌아서서 곧장 실바르의 목을 잡아왔다. 실바르는 재빨리 피하려고 했지만 그 손이 뻗어 오는 속도는 정말 놀랄 정도 였다.
“컥!”
“죽고… 싶어?”
무표정한 소녀의 말 한마디였다. 사실 소녀의 손은 크지 않았기에 실바르의 목 전체를 잡을 수는 없었고, 기도(氣道) 부분만을 틀어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정 말 기도를 뜯어내고도 주리가 남을 것처럼 느껴졌고, 실바르는 슬슬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엄청난 살기(殺氣)……. 그리고 딱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매우 사악하면서도 강력한 기운이 소녀의 몸에서 느껴졌다. 그걸 느끼는 순간 실바르는 자신이 그 이름 높은 그래듀에이트의 시험을 통과한 무사라는 것마저도 잊어버렸다.
“컥…, 가, 가지세요. 컥컥…….
가져요.”
잠시 소녀는 그 가지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 본 후 손을 풀어 주고 뒤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실바르는 벌겋게 손도장이 찍힌 자신의 목줄기를 주무르며 투덜거렸 다.
“제길, 가져라 가져. 더러워서……. 그런데 이 검을 어떻게 쓰라는 거야? 또 한 자루 사야겠군. 제길! 이번 달은 완전히 적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