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6권 8화 – 탈출을 위한 첫걸음
탈출을 위한 첫걸음
“주인님, 과자 드실래요?”
“뭐?”
소녀는 한소리하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가 순수한 표정의 상대를 보고는 과자를 받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창문 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 고 있는데, 다시 뒤에서 조심스런 말이 들려왔다.
“날씨가 좋은데 밖에 안 나가세요?”
“그 구두를 신고 말이냐?”
“예, 얼마나 예쁜데요. 요즘 유행하는 최신 모델이라니까요. 저거 한 켤레에 13골드나 하는데도 물건이 없어서 못 판대요.”
“뒤 굽이 그렇게 뾰족한 거는 너나 신어라. 빌어먹을 녀석들……. 신고 달리기 힘들게 생긴 것으로 준 걸 보면 속셈이 빤히 보인다. 그건 그렇고, 내가 부탁한 신발 은 구했냐?”
“주인님, 그런 거 구해다 드리면 저는, 저는…….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 흑흑…….”
가련한 모습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사정하는 세린을 차마 보지 못하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면서 소녀가 중얼거렸다.
“제기랄, 오냐. 그래 나는 놔두고 하녀만 족치면 된다 그거지? 두고 보자. 신발 없다고 도망 못 칠 나도 아니고…….”
“그런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제도 밤새도록 안 주무시고 앉아 계셨잖아요. 그렇게 안 주무시면 몸에 해로워요, 주인님.”
그 말을 듣고 소녀는 세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걱정하지 마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아니까. 운공조식 때 아쿠아 룰러가 나에게 대자연의 기를 나눠 주고 있어. 많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끌어 모을 엄 두도 나지 않는 양을……. 나는 그걸로 천천히 내공을 쌓고 있어. 그 덕분에 시간은 더욱 단축될 거야. 어쩌면 1년, 운이 좋다면 6개월 이내에 가능할지도 몰라. 그 때가 되면, 그때가 되면…..
일부러 다크는 뒤의 말을 중국어로 떠들었다. 상대가 알아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다가 마지막 말을 하면 서 방그레 미소 짓는, 언제나 무표정했던 주인을 바라보면서 세린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말이 통해야만 한다는 법도 없었으니까…….
“그러지 마시고 밖에 나가서 산책이나 좀 하세요. 제가 준비해 드릴게요. 안에만 계시면 몸에 해로워요, 주인님.”
“좋아, 밖에 나가자. 알아볼 것도 있고…….”
“예, 주인님.”
세린은 뛰어나가 몇 가지 준비를 해 가지고 다시 돌아와서 소녀가 신발 신는 것을 도왔다.
세린에게 이 소녀가 다섯 번째의 주인이었지만, 그 성격이 들쑥날쑥해서 어떤 때는 여태껏 모셨던 주인들 중에서 최고로 힘든 대상인 것도 같았고, 어떤 때는 최고 로 다루기 쉬운 주인이 될 때도 있었다. 이제 이 새로운 주인과 지낸 지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이 까다로운 주인을 다루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가고 있었다. 원래 묘 인족은 눈치 하나는 대단히 빠른 종족이었으니까.
“어쨌든 가련한 표정과 눈물에 이상하게 약하단 말씀이야. 딴 주인들은 안 그랬는데…….’
소녀가 뒤 굽이 5센티미터는 족히 되는 예쁜 구두를 신고 약간은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세린과 함께 방을 나서자 언제나 방 앞에 지키고 있던 무사가 20미터 정도 뒤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저쪽으로 올라가자.”
“예? 그쪽은 경사가 심해서 힘드실 텐데요, 주인님.”
“상관없어.”
둘은 약간 높은 언덕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곧 언덕 위에 만들어진 큰 인공 구조물을 볼 수 있었다. 탑 같기도 했지만, 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단조로운 모 양이었다. 그냥 밑에 넓은 발판을 만들고, 그 위에 8미터 정도 되는 바위를 사각지게 잘라 만든 비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쪽에 글자들이 쓰여 있는 걸 보면.. “이건 뭐지?”
“예, 현충탑(顯忠塔)이에요. 30년쯤 전에 일어났던 대 전쟁에서 패한 후, 그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기리는 탑이지요.”
“웃기는군. 이따위 것을 만든다고 그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또 전쟁에서 패한 후라면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걸 만들다니, 무슨 생 각을 하는 건지.”
한 바퀴 빙 돌면서 탑을 보니 탑 아래쪽에는 돌로 만든 무사와 백성들의 형상이 있었고, 그 중앙에는 커다란 타이탄의 형상도 있었다. 빙 돌아가며 구경을 하고 나 서 위로 더 올라가려는데, 더 이상 길이 없었다. 풀밭 위로 걸어가자니 부드러운 흙 때문에 구두 뒤 굽이 푹푹 빠져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투덜거리며 아예 구두를 벗어 들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소녀에게 한마디 하려던 세린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높지는 않군.”
그래도 언덕 위에서 바라보니 다크의 의도대로 주변의 경치를 명확히 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솟아 있는 아름다운 건물들, 여기저기 모여 있는 군사들도 보였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주인님.”
세린은 준비해 온 널찍한 천을 나무 그늘이 드리워지는 바닥에 깔았다.
“여기 앉으세요, 주인님.”
소녀가 그 위에 앉자 세린이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참 경치가 좋죠? 날씨도 좋고…….”
“저기 보이는 건 뭐지?”
“예, 저건 경계초소예요, 주인님.”
“이 성에는 수비하는 병사들이 많냐?”
“예, 아무래도 왕궁이니까 수비병들이 많죠. 주인님, 저쪽에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이 콜렌 기사단 본부에요. 또 저기 보이는 푸른색의 자그마한 건물이 스바스 근 위 기사단 건물이구요. 저기 보이는 건 경비병들 막사지요. 건물은 좀 아름답지 못하지만, 여기는 과거 황제 폐하의 여름 별장이었는데, 왕궁으로 바뀐 탓에 건물을 갑자기 만들려니 어쩔 수 없잖아요?”
소녀는 흥미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린의 설명을 듣고 있었지만, 그건 저쪽에서 감시하고 있는 기사 녀석을 속이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머릿속은 엄청난 속 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4, 5개월 정도 죽자고 공력을 쌓으면, 이 녀석들이 말하는 그래듀에이트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때 탈출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기다렸다가 힘의 10퍼센트라도 되찾은 후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크는 자신의 손발을 내려다 봤다. 도대체 라나라는 년이 어떻게 자라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독하게, 정말이지 이럴 수도 있을까 싶을 정 도로 단련이라고는 안 된 육체……. 여기서 환골탈태를 한다 해도 예전의 힘을 그대로 되찾는 건 불가능했다.
내공이란 것도 중요하지만 내공은 어디까지나 뒤에서 받쳐 주는 힘! 진짜 힘은 근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환골탈태한다고 이렇게 가는 팔다리에 근육이 덕지덕지 붙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크는 아마 잘되어야 과거 힘의 30퍼센트 정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래 까짓거 3성이면 어때? 그 정도라도 장인걸 정도는 반쯤 죽여 놓을 수 있어. 천천히 하자. 조급하게 굴지 말고…….?
토지에르는 제자가 환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되었느냐?”
“예, 방금 크로마스 경이 시드미안과 또 한 명의 기사를 포획하고 돌아오셨습니다.”
“흐흐흐,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 고헨에 한 번 갔었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고헨으로 파견해 봤더니 대어를 낚았어.”
토지에르는 팔시온 일행과 상담한 후 그들이 고헨 근방에 산다는 블루 드래곤을 만났다는 걸 알았다. 이들이 키아드리아스를 엘프 카렐로 착각했으니만큼, 그들의 말을 건방진 코린트 놈들이 믿지 않고 또다시 그리로 간 게 아닐까 추측했던 것이다. 사실 나타나자마자 공간 이동 마법으로 사라졌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 코린트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예, 크로마스 경의 말로는 코린트 놈들이 오기 전에 그들을 재빨리 포획한 후 고헨을 탈출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쯤 시드미안을 찾는다고 고헨을 뒤지고 있겠지 요.”
“그래? 시드미안을 잡아 온 경로는 철저히 은폐했느냐?”
“예, 거기 거주하던 모든 첩자들은 그 즉시 거점을 옮겼습니다. 또 알카사스에서 활동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에 알카사스 내에 투입했던 첩자 20명도 모두 본국 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대신 한 명은 코린트 녀석들을 감시하기 위해 놔뒀습니다. 연락은 전서구로 코발트에 잠입한 첩자에게 보내고, 또 거기서 마법으로 이쪽에 연 락하라고 지시해 뒀습니다.”
“잘했다. 딴 건 다 좋은데, 알카사스는 마법사들이 활동하기에 너무 위험하단 말이야……. 3사이클급 이상의 마법만 되어도 위치를 정확히 잡아내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해놨기에 그렇게 잘 알아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어. 그건 그렇고, 시드미안에 대한 심문은?”
“프로이엔 경께서 직접 하시기로 했습니다. 정신계 계통의 마법을 쓴다면 곧 실토하겠지요.”
토지에르는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좋아, 좋아…….”
“그런데, 스승님.”
“왜 그러느냐?”
“알카사스에서 첩자들을 모두 후퇴시키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만약 그놈들이 단서를 찾아낸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팔시온 녀석들에게 물어본 결과 그들이 알아낸 사실은 거의 전무(全無)해. 겨우 그 정도 단서를 가지고 이쪽을 찾아낼 수는 없다는 말이지. 괜히 얼쩡거리다가는 오히려 꼬리를 밟힐 수 있으니까 고헨에 남은 녀석도 탈출시켜라. 대신, 공간 이동이 아닌 정식 통로로.”
“예, 스승님.”
한참 폼을 잡으면서 그림을 감상하던ᅳ자신이 순수 무골이 아니라 예술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걸 부하들에게 자랑하기 위해백작을 부르는 외침이 있었다. ““백작 각하!”
마법사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백작은 별로 곱지 못한 눈으로 그를 째려보며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는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이런 식으로 허둥대는 걸 별 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바, 발렌시아드 공작 전하로부터의 통신입니다. 각하를 찾으십니다.”
“공작 전하께서?”
그 말을 내뱉으며 백작은 통신 마법진을 그려 놓은 방을 향해 재빨리 뛰어갔다. 키에리 발렌시아드 공작은 그가 단 1초라도 기다리게 만들 수 없는 지고(至高)한 위치의 인물이었다.
방금 전까지 허둥대던 부하를 험한 눈초리로 쳐다봤던 그도 역시 허겁지겁 달려가 수정 구슬 앞에 서자, 수정 구슬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가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비춰졌다. 그 화면을 향해 백작은 최대한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정중히 절을 했다.
“안녕하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그래, 일은 어찌 되어 가나?”
냉랭한 공작의 말에 백작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어쩌면 자신의 무능을 책(責)하기 위해 통신을 했는지도……?
“예, 단서가 너무 적어서 추적 작업에 어려움이 많사옵니다. 또 블루 드래곤에게 몇 가지를 알아보겠다고 간 지오네로부터도 연락이 없사옵니다. 하지만 사실상 드래곤이 드래곤 하트를 훔쳐갔을 리는 없으니…….”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백작의 변명을 도중에 끊으며 수정 구슬 속의 인물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좋아, 힘들다 이거군. 이번 작전은 당분간 중지한다.”
“예? 그럼 그 도둑들은…….”
“사실 나도 그 보고서들을 읽어 봤지만 그 정도 증거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시드미안의 보고로는 놈들이 로메로급 타이탄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메로를 가지고 있는 나라만 거의 50개국이다. 그런데 그 나라들을 모두 다 철저히 뒤지지 않고 어떻게 찾을 수 있겠나? 기다려 보면 놈들의 마각이 드러나겠지. 그냥 창고에 넣어 두려고 훔쳐간 것은 아닐 테니까, 그때를 기다리자는 거야. 그리고 로메로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에 첩자들을 파견해서 감시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 상태로 계속 시간만 끈다면 황제 폐하의 권위가 실추된다. 그러니 자네는 트루비아를 멸망시키도록 하게.”
공작의 냉랭한 말에 백작은 조금은 정신이 없는 듯 반문했다.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대 코린트 제국의 드래곤 하트를 훔쳐갔는데도 아직까지 범인을 잡지 못했다면, 본국의 명성이 실추되고, 또 황제 폐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지. 우선은 트루비아를 그 범인으로 만들어 죄를 묻는다. 그런 후 차근차근 놈들을 추적해 나가 멸망시킨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하지만 트루비아도 피해 당사국인데, 그들을 공격할 만한 명분이…….”
수정구슬 안의 젊은이는 싸늘한 눈초리로 백작을 노려봤다.
“멍청한 녀석! 왜 명분이 없어? 이번에 드래곤 하트를 훔친 것은 트루비아의 국왕이 사악한 마왕의 꼬임에 넘어가 마신을 부활시키려고 한 짓이다. 어쨌든 본국에 서는 그렇게 발표할 것이다.
본국의 발표가 있은 후 자네는 자네가 가진 전력과 동맹국에서 차출한 약 50대의 타이탄, 그리고 코린트 남부에 주둔 중인 제12, 13보병사단을 거느리고 본보기 로 트루비아를 철저히 파괴해라. 코린트의 뜻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그놈들에게 보여 주란 말이다. 알겠나?”
“명심하겠사옵니다, 공작 전하.”
“동맹국의 타이탄들은 앞으로 한 달 후에 소환될 것이다. 그때까지 자네는 지렌시에서 그들과 합류, 트루비아를 정복하라. 그대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 “감사하옵니다, 공작 전하.”
타국의 정복대 사령관이 되는 것. 그것도 승리가 확실한 싸움이라면 그건 대단한 특혜였다. 정복한 국가로부터는 엄청난 노획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물론 그것의 상당량을 황제 폐하께 바쳐야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떨어지는 게 전혀 없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막대한 수의 노예도 잡아들일 수 있었다. 또 이번 정복을 잘 마무리 지으면 자신의 위치는 더욱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런 기회를 자신에게 베풀어 준 것을 생각하며, 백작은 수정 구슬에 비춰지고 있는 젊은이를 향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빛이라고는 천장에 있는 작은 환기창을 통해 조금밖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기에 실내는 몹시 어두웠다. 꾀죄죄한 몰골의 시드미안이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는 도미니크를 향해 물었다. 도미니크는 수갑을 이용해서 벽에 표시를 하던 중이었다.
“오늘로서 며칠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여기 들어온 지는 7일째입니다.”
“7일이라……. 벌써 그렇게 되었나?”
“예, 그놈들은 왜 우리를 그냥 가둬만둘까요?”
“그냥 가둬 둔 건 아니겠지. 아마도 정신계 마법을 써서 알아낼 건 다 알아냈을 거야.”
“예?”
“쿠마가 사라졌다. 아마 자네의 티론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그 녀석과 계약을 해약한 기억은 없으니, 아마도 뭔가에 홀렸을 때 상대의 지시에 따라 쿠마를 놔 줬으 리라는 건 뻔한 사실이지. 제길, 국왕 전하께서 하사해 주신 타이탄을 이렇게 무력하게 뺏기다니……. 나는 기사로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야.”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놈들은 인질로 협박했고, 상대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만만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또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 중일 때 그놈들은 비겁 하게 마법으로.
“도미니크.”
“예?”
“변명을 하자면 한이 없는 거라네. 결과만이 중요한 거야. 나는 전하께서 나에게 주신 타이탄을 보호하지 못했고, 또 내가 맡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그 중간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그런데 왜 녀석들은 우리를 여기다가 가뒀을까요? 더 이상 우리에게서 알아낼 것도, 빼앗을 것도 없을 텐데..
“모르지, 아마 회유하려는 생각인지도……. 자네나 나는 그래듀에이트고, 또 안토니는 마법사니까 말이야.”
시드미안 일행이 감옥에 처박혀 있을 때, 다크는 또다시 세린과 함께 현충탑이 있던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 번만 간다면 뭔가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었기에 날씨 좋은 날에는 세린과 함께 놀러가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몇 번 올라간 후에 세린은 아예 음식까지 싸들고 따라와서 점심까지 언덕 위에서 먹는 일이 잦아졌다. 거기에다가 다크는 일부러 매일 따라 다니는 호위 무사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하면서 조금씩 친분을 쌓아 가는 중이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 이자의 조심성도 천천히 풀려 갈 거라는 걸 노린 작전이었다.
“사과 드실래요, 주인님?”
“응, 그리고 포도주도 줘. 실바르 경도 포도주 한잔하실래요?”
그 말에 앞에 앉아서 함께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기사가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공손한 어조로 실바르를 대하는 주인을 보면서, 세린은 믿 을 수 없다는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이제 이 주인과 함께 산 지도 2주일. 성질이 뭐 같은 데다가 입은 거의 시궁창 수준을 방불케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기사를 향해 생글거리며 공손히 말하다니……. 으욱, 저런 내숭.
“실바르 경은 참 건장하시군요.”
부럽다는 듯한 예쁜 소녀의 눈길을 받자 실바르의 안색이 약간 붉어졌다. ‘육체가 바뀔 바에야 저런 몸매가 좋았을 텐데. .’라는 뜻이었지만 정작 여자에게 그 런 눈길을 받는 남자의 입장에서는 생각이 다르다. ‘혹시 이 아가씨가 나한테 마음이 있나? 저런 뜨거운 눈길로 보게, 흐흐흐’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하하.”
궁정 제1마법사인 토지에르로부터 철저히 신변 보호와 탈출 방지를 명령받은 실바르로서는 ‘겨우 저따위 소녀쯤이야…’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상관 의 명령이 있었기에 철저한 감시와 보호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는 소녀의 행동을 보고 ‘겨우 저 따위 소녀쯤이야… ‘하던 생각을 재확인 할 수밖에 없었고, 점차 감시의 눈길까지 무뎌지고 있었다.
이들이 한참 식사를 즐기고 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와이번이 아래로 급강하(急降下)하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실바르는 재빨리 일어서서 검을 뽑아 들며 대비했다. 하지만 그 와이번은 야생이 아니었고, 위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무사가 타고 있었다. 정찰대 소속이거나 콜렌 기사단 소속인지도… 하지만 자 신이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기에 실바르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상대의 행동을 주시했다.
와이번은 그들의 머리 위 10미터 정도 높이를 통과하며 밑으로 내려갔고, 실바르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그 뒤를 따라 쫓아갔다. 순간적으로 몸을 날리자 거의 한순간에 그의 몸이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실바르가 밑으로 쫓아 내려갔을 때 와이번은 현충탑 부근에 내려서 있었고,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사는 우울한 표정으로 현충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실바르가 경계하며 묻자, 기사는 천천히 뒤로 몸을 돌렸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용모에 다부진 체구, 허리에 늘어뜨린 바스타드 소드. 실바르는 상대의 날카 로운 눈매를 쏘아보며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러는 자네는 누군가?”
“나는 콜렌 기사단 소속, 드미트리 실바르다. 그대는?”
그 말에 상대는 역시 우울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스바스의 루빈스키 폰 크로아라고 한다네, 젊은이.”
그 말에 실바르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루빈스키 공작은 지금 60세가 넘은 인물이었다. 정확하게 말
하면 63세. 그런데 이렇게 젊은 인물이 그를 자처하고 있다면 미친놈이든지, 하지만 진짜일지도…….
“신분을 증명하실 물건을 가지고 계신지요.”
그러자 상대는 자신의 호화로운 검을 쑥 뽑아 들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크로마타.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검이다.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할까?”
그것을 보고 실바르는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몰라 뵈어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자네가 몰라보는 것도 당연하지. 28년 만에 돌아왔으니…. 응? 저기 있는 인물들은 자네의 동행인가?”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싸늘한 눈빛을 던지며 서 있는 소녀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묘인족 한 명이 있었다.
“예, 전하.”
“나는 폐하를 만나 뵈러 갈 테니 자네는 자네 볼일을 보게나. 재미난 시간을 방해했다고 그렇게 눈을 부라릴 필요 없다고 여자 친구에게 전해 주게. 자네 여자 친구 는 대단한 미인이기는 하지만 꽤나 성깔이 있어 보이는군. 그럼, 다음에 보세.”
그 말과 함께 그는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고, 와이번은 급속히 날아오르더니 황궁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