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19화 – 또 다른 접전

또 다른 접전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순간 두 명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들이라도 가는 듯한 가벼운 옷차림을 한 두 명이 나타나자 제임스는 실망스러운 어 조로 말했다.

“에게? 아무리 숫자를 맞춰 달라고 했지만 겨우 두 명이야?”

하지만 그의 눈은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겨우 두 명의 증원이었지만, 둘 다 코란 근위 기사단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최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황금색 머 리카락을 날리고 있는 멋진 청년은 제임스의 둘도 없는 친구였고, 또 검과 여자에 있어서는 라이벌이었다.

“둘도 많은 거지. 그래 어떤 놈들인데 천하의 제임스 후작 나으리가 증원을 요청하게 만들었지?”

노랑머리의 말에 제임스는 한숨을 푹 쉬면서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휴~ 말도 마라. 크루마에서 신형 타이탄을 만든 모양인데, 정말 대단해. 파워가 거의 ‘붉은 귀염둥이’ 수준이야.”

“설마 그놈들 헬 프로네의 엑스시온을?”

“그 ‘설마’가 맞을 거야. 크루마에서 제작된 2.0을 초과하는 엑스시온은 그것뿐이니까 말이야.”

“그럼 2.2잖아? 흑기사가지고는 힘들겠군.”

“당연하지. 거기다가 마스터급이 한 명 있어. 미네르바는 아닌 것 같고, 아마 지크리트 루엔 공작인 모양이야.” 제임스의 말에 노랑머리는 이제야 상대가 가진 힘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어려운 상대군.”

제임스는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유쾌하게 말했다.

“네 녀석한테 심각한 것은 어울리지 않아. 자, 가자. 요 근래에 사귄 녀석들을 소개해 줄게. 상당히 괜찮은 아이들이야.”

“좋지. 누군지 궁금한데? 여자야?”

“응, 아직 정체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주 독특한 아가씨야.”

“야, 너 마흔이 넘어 가지고도 여자를 밝히냐?”

드디어 제임스의 나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도대체가 그의 젊고 팽팽한 피부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나이였지만 말이다.

“헛소리하지 마. 그러는 네놈은?”

“그래도 네 녀석보다는 낫지. 아무렴 낫고말고.”

“내가 먼저 찍어 놨으니까 군침 흘리지 마.”

“호…, 아직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군. 네가 웬일이냐? 너, 속전속결이 원칙이었잖아? 흐흐흐…, 하지만 미안하게도 먼저 드시는 사람이 임자야. 네 녀석이 그동안 눈독을 너무 많이 넣어 놓아서 식중독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하지만.

노랑머리는 슬쩍 머리카락을 정돈한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 후 순진한 듯한, 어떻게 보면 노련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과연 어떤 미녀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되는 표정으로 걸어갔다. 제임스의 여자를 고르는 취향은 매우 까다로웠기에 사뭇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복장 점검은 친한 친구의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함이 아닌, 여건만 허락한다면 유혹하겠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제임스와 증원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미 노랑머리가 얼굴을 알고 있는 근위군 소속 기사들이 한곳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가 노랑머리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또 한쪽에 모여 있던 인물들은 새롭게 등장한 이들에게 약간 의심스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우선 뛰어난 실력 을 갖춘 그래듀에이트급의 기사 한 명. 왼쪽 뺨에 나 있는 깊은 검상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는 두 명의 기사들. 아직 햇병아리 수준이었다. 그 두 기 사들은 자기 키만 한 도끼를 등에 지고 있는 드워프하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헉!”

노랑머리는 재빨리 몸을 숨기며, 제임스를 끌어당겼다. 그는 낮은 목소리였지만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해서 저 애가 여기 있는 거지?”

그 말에 어리둥절해진 제임스.

“무슨 말이야?”

“왜, 전에 말했잖아. 엄청난 정령술사가 될 만한 소질이 있는 애를 발견했다고……..

“아하, 크라레스에서 납치하려다가 실패했다던 그 여자 애?”

“응, 바로 그 애야.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호…, 이거 재미있게 되어 가는군. 그럼 이번 작전 끝나고 난 후 잡아서 돌아가면 되는 건가? 그래!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저 아이의 그 독특한 분위기, 그래! 정 령술사였어.”

“그럼 뭔 줄 알았는데?”

“마법사. 마법도 좀 하는 모양이던데? 뷰 마나 포스라든지 그런 거에 포착되지 않는 걸 보면?”

“이런, 이런……. 그러니 정령술사를 친구로 하나 둬야지. 정령술사는 정령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감출 수도 있어. 정령의 힘은 마법과는 조금 달라서 마법으로 는 알아낼 수 없어. 대신 정령술사는 귀신같이 알아내더군. 뭐 정령에는 독특한 냄새가 난다나? 정령술사라는 것들은 모두 개코를 달고 있는지 원……

“빨리 나가자. 이러고 있으면 의심한다구.”

제임스와 노랑머리는 슬쩍 앞으로 나가서 시선을 저 멀리 운하를 따라 내려가고 있는 화물선에 고정시킨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노랑머리는 잠시 헛기침을 해서 소 녀의 시선을 자신 쪽으로 돌린 후 유쾌한 어조로 인사했다.

“안녕? 꼬마 아가씨, 여기서 또 만나는군.”

짐짓 너스레를 떨며 수작을 걸어오는 노랑머리를 향해 소녀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내 이름은 다크야.”

“이름은 벌써 알고 있답니다. 다크 크라이드 남작. 그런데 아르곤까지는 어쩐 일로 왔지?”

노랑머리의 말에 소녀는 의아한 듯 물었다.

“응? 너는 누군데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쯧쯧…, 겉모습과 달리 기억력이 별로 좋지 못하시군. 전에 크라레스에서 만났잖아? 무도회에도 같이 갔고 말이야. 이름이라면 몰라도 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다니 섭섭하군.”

그 말에 소녀는 약간 생각하는 눈치더니 곧장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기억났다. 그 호색한이었군.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지?”

가슴이 뜨끔해진 까미유의 안색이 약간 일그러졌다. 자신을 기억해 낸 것은 좋은데, 하필이면 그런 세부적인 사항까지 기억할 것은 또 뭐야? 소녀의 말을 옆에서 듣고는 제임스가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까미유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힐끗 봤다. 까미유는 ‘네 녀석도 마찬가지면서 날 비웃어?’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수야 없었다. 어쨌든 시간이 얼마 지나지는 않았지만, 그때보다 소녀는 더욱 성숙해 보였고, 키도 좀 더 자란 것 같았다. 잘하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 르는데, 거기에 초칠 수는 없는 노릇. 까미유는 점잖은 어조로 여자들이 좋아하던, 부드럽고도 우울한 듯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멍청하고 힘없는 동료가 도움을 요청해서 말이야.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여행 중이야.”

화물선은 거의 시속 1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기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증원군과 합류한다고 꽤 많은 시간을 지체했기에 한 곳에서 계속 잡담을 나눌 수는 없 었다. 조금만 더 가면 랜트 국가 연합과의 국경선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조만간 어떤 형식으로든 결판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제임스가 끼 어들었다.

“자자, 잡담은 가면서 하자구. 너무 멀어지면 제때 싸우기 힘들어.”

코란 근위 기사단의 정규 멤버 일곱 명이 한꺼번에 파견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강했고, 또 근위 기사단이 직접 투입될 만큼 중요한 일도 거의 없었 다. 근위 기사단이 출동했던 가장 최근의 기록은 30년 전 크라레스 제국과의 전면전 때였다. 물론 그 전에는 코란 근위 기사단도 자주 출동했었다. 하지만 국력이 강 성해지고, 또 45년 전 강력한 흑기사가 근위 타이탄으로 대체된 후 코란 근위 기사단은 타국에 파견될 일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거기다가 30년 전 크라레스의 영토 80퍼센트를 뺏고 더욱 국력이 증강된 후, 세계 최강의 대열에 올라선 코린트의 신경을 건드리는 국가는 아예 없었다.

그렇기에 까미유 백작은 승리는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그다음 일을 궁리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 소녀를 코린트로 끌고 가지?’하는 것이었는데, 일단은 정석대로 회유책을 써 본 후 먹혀 들어가지 않으면 강제로 납치하는 게 좋을 듯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소녀가 마법과 정령술을 함께 쓰는 마도사라는 데 문제가 있 었다. 마법사는 주문을 외울 시간이 필요하지만 정령술사는 정령과의 친화력을 중시할 뿐 주문 따위를 외우지 않기에 언제 마법이 날아올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나 마 다행인 것은 정령술사는 마법사와 같은 무시무시한 파워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위험하니까 회유 따위는 생략하고, 납치를 먼저 한 후에 회유하기로 하지. 저 예쁜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아깝거든. 흐흐흐…….”

아무리 화물선이 시속 1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고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이 출발한 무역 도시 아르네이아가 랜트 국가 연합과의 국경선에서 30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국경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처음 드래곤 슬레이어 일행을 쫓던 크로티아르 성기사단은 도착이 늦어지고 있는 크로미아, 카쟈르, 타리아 성기사단을 기다리지 못하고 정면충돌, 괴멸당해 버렸 다. 그 덕분에 상대방의 전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1개 기사단이 소멸당한 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한 시간쯤 늦게 도착한 크로미아, 카쟈르 성기사단은 자신들만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중앙에서 파견된 최정예인 타리아 성기사단을 기 다렸다. 하지만 10분, 20분이 한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되어, 이제 랜트 국가 연합과의 국경선은 코앞에 다가왔다. 크로미아와 카쟈르의 기사단장들은 모여서 대책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손을 써야 하는 게 정석이었지만 잘못되면 덤으로 2개 성기사단이 전멸당할지도 모르니…….

“아무래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하지만, 10분 뒤에는 놈들이 국경을 통과합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랜트 국가 연합에서 결전을 벌여야 하는데, 그건 힘듭니다. 랜트 국가 연합은 본국의 오랜

동맹국인 데다가…….?

“그러니 잘되었지 않소? 랜트 국가 연합에도 지원을 부탁하면 우리들의 청을 거절하지는 못할 거요. 하지만 랜트 국가 연합의 기사단들도 우리들만큼이나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오.”

“맞습니다. 상대는 최고 정예. 어설픈 타이탄으로 덤벼 봐야 피해만 커질 뿐이죠. 하지만 타리아 성기사단으로부터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라서……..

“그럼 본국과의 연락은? 나는 서둘러 떠난다고 전체 성기사단을 모두 끌고 오지도 못했소. 먼저 가장 뛰어난 성기사들만 엄선하여 최고 속도로 달려왔으니까, 나 머지는 두 시간쯤 뒤에나 도착하겠지. 그쪽에는 통신의 권능權 : 신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가진 사제가 지금 있소?”

“있습니다. 하지만 본국에서는 계속 똑같은 지시입니다. ‘적당 거리에서 적을 추격하라. 절대 교전은 하지 말 것.’ 뭐 이런 말이죠.”

“그렇다면 국경을 통과해서 적들을 계속 추격할 것인지 물어봤소?”

“예, 물어봤습니다.”

“결과는?”

“랜트 국가 연합에 대한 국경 침입은 절대 불가라는 지시입니다. 그리고 랜트 국가 연합과의 공동 작전도 불가하다고 하더군요.”

“빌어먹을! 험험. 미안하오, 아로지에 형제. 말이 잠시 헛나왔소.”

“괜찮습니다. 도대체 교단의 뜻이 뭔지 알 수가 없군요.”

“성기사단이 추격을 중단했습니다.”

마법사의 껄끄러운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제임스는 그걸 알 수 있었다. 증강된 1개 성기사단, 혹은 2개 성기사단 정도의 병력이 화물선을 계속 추격했지만 국경선 에서 멈춘 것이다.

“이제 시작할 때인가?”

“한 시간쯤 더 기다렸다가 하자구. 국경선 부근에서 맞붙었다가 재수 없으면 저 녀석들 좋은 일 시켜 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적어도 놈들 시야에서는 벗어나는 게 좋겠지.”

“좋아. 그런데 탈취한 후에 수송은 어떻게 하지?”

“간단하지. 일단 화물선을 근처 항구에 가져간 다음 각 화물마다 코린트 황실 문장을 찍어서 운반하면 그 내용물을 보자고 들 정도로 간 큰 놈은 없을 거야. 우리가 호위하면서 육로로 옮기면 되지. 어린 그린 드래곤이니까 대형 짐마차 일곱 대면 충분히 실어 나를 수 있겠지.”

랜트 국가연합과의 국경선을 통과한 후 화물선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국경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 뒤따라온 성기사단 덕분에 신경이 약간 날카로워졌 던 레디아 근위 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다섯 시간이 넘도록 상대가 나타나지 않자 조금씩 긴장감이 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꽤나 스 트레스를 주는 것. 모두들 ‘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드래곤의 뼈를 수송하는 화물선이라는 엄청난 먹잇감이 있는데도 놈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드디어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화염을 토하는 레드 드래곤이 그려진 문장을 자랑하면서 말이다.

“공작 전하! 코란 근위 기사단이옵니다.”

“코린트도 냄새를 맡았나? 그런데 저 뻘건색을 칠해 놓은 재수 없게 생긴 타이탄은 뭐야?”

“흑기사와 함께 나타난 것을 보면 코린트의 신형 타이탄인 모양이옵니다.”

“오랜만에 근사한 싸움을 할 수 있겠군. 코란 근위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놈들이길 바란다. 흐흐흐…, 모두들 전투 준비!”

부하들이 타이탄에 탑승하자 루엔 공작은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집단 대형! 돌격하랏!”

공작의 명령에 따라 일곱 대의 안티고네는 서로 간의 거리를 바짝 좁힌 채 상대를 향해 육중한 체구를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공작은 약간 꺼림칙한 붉은색을 칠해 놓은 상대방 타이탄이 방패 없이 소드 스톱퍼만을 붙여 놓은 것을 보고, 집단전을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내린 명령이었다.

크루마 쪽에서 일곱 대의 타이탄이 뭉쳐서 돌진해 왔다면, 코린트 쪽은 다섯 대의 흑기사는 뭉쳐서 중앙을 맡고 두 대의 적기사는 좌우 날개로서 상대를 치는 방법 을 택했다. 곧이어 두 기사단이 맞붙자 서로 간의 파워 차이는 확실하게 드러났다. 안티고네의 엄청난 무게, 또 그 무게를 활용한 강력한 파워에 흑기사들이 몸싸움 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다섯 대의 안티고네가 다섯 대의 흑기사를 상대로 약간 우위에 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면, 두 대의 적기사를 맞아 싸운 두 대의 안티고네는 약간 사정이 달랐다. 공작이 직접 몰고 있는 안티고네는 적기사와 거의 대등할 정도의 격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다른 적기사를 맡은 타론은 연신 뭇매를 맞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안티고네의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는 파워와 내구력, 그리고 10톤이나 되는 거대한 방패 덕분에 상대방의 예리한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 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리고 물리는 난타전을 벌이는 동안 흑기사들이 안티고네에게 밀려서 후퇴하기 시작함에 따라 두 대의 안티고네는 주 전장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주위에 걸리적거릴 타이탄이 없어져서 광대한 공간을 확보한 적기사들이 그 엄청난 스피드를 십분 활용하기 시작했다. 안티고네에 비해 훨씬 가벼웠기에 재빠르게 움직이는 적기사를 막기는 점차 어려워졌다.

적기사는 재빨리 안티고네를 내려쳤고 안티고네는 그걸 방패로 막은 후 재빨리 오른손의 검으로 상대를 후려쳤다. 하지만 적기사는 벌써 거기에 없었다. 일격 이

탈 전법. 내려친 후 상대가 튕겨 내는 그 힘을 역이용하여 재빨리 벗어난다. 그 후 옆으로 약간 이동해 또다시 허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노리고 공격하는 것이다.

각 타이탄들은 자신들을 조종하는 인물들이 최고 클래스의 기사들이라는 것을 자랑하듯 마나를 있는 대로 써 대고 있었다. 검에는 기가 응축되어 약간 푸르스름한 광채가 났고, 그 검을 가로막는 방패에도 푸르스름한 광채가 배어 있었다. 그냥 강철로 만든 방패였다면 그 검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지도 모르지만 방패도 기를 응축하고 있었기에 그걸 막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적기사를 탄 두 명의 기사들이 제법 반응이 괜찮은 적을 만나 신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그들이 데려온 부하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흑기사도 안티고네도 둘 다 집단전용 타이탄이다. 두터운 방패, 묵직한 몸무게, 강력한 파워로 서로 난타전을 벌이는 타이탄들이라는 말이었다. 이때는 강력한 파워와 무게가 무거운 쪽이 유리하다. 특히나 안티고네 같은 경우 거의 30년에 걸쳐 흑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연구 제작된 타이탄이었다. 동급의 기사가 탑승했을 때 흑기사로 안티고네를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크루마의 정예 레디아 근위 기사단과 코린트의 정예 코란 근위 기사단이 박 터지게 싸우고 있을 무렵. 크로미아 성기사단장 레가르가 해군 지원을 요청했던 아르 곤의 항구 도시 트라팔시에서도 대규모 타이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천사의 문양이 그려진 타이탄들과 하얀 유니콘이 그려진 타이탄들이 트라팔시에 서 맞붙은 것이다.

“제기랄! 증원은?”

스펜은 악을 썼지만 사실 증원 따위가 올지 안 올지 그건 알 수 없었다. 당당한 덩치의 타이탄 ‘라르곤’에 타고 있는 성기사들은 성기사들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클 래스의 인물들이었기에 겨우 세 대의 카마리에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카마리에가 나왔으니 이제 완전히 들통 난 거나 다름없는데, 왜 증원을 안 보내는 거야? 제기랄! 위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년 이나…, 다 죽어 버려랏!”

스펜 등은 베티 사제, 마리나와 함께 도우러 씨를 도와 아르곤 남부의 항구 도시 트라팔시로 왔다. 도우러 씨는 드래곤 본을 화물선에 실어 떠나보낸 후, 창고에서 큼직한 짐마차 일곱 대를 끌고 나왔었다. 그의 말로는 트라팔시에서 선적하여 타국에 수출할 물건이라고 했는데, 그것의 호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스펜 일행은 타론의 지시도 있었기에 도우러 씨의 짐마차를 호위해서 트라팔시까지 왔다. 트라팔시까지의 거리는 잘 포장된 육로로 70킬로미터. 늦어도 세 시간 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부담 없는 기분으로 따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짐을 대충 화물선에 실었을 때 아르곤의 성기사단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이어진 타이 탄 전투. 아르곤의 타이탄들이 비교적 성능이 떨어지는 저급 타이탄임을 감안해도 상대는 아르곤의 정예 성기사단이었다.

세 대의 카마리에는 정말 엄청난 투혼을 발휘하여 상대와 대치했다. 하지만 그들의 타이탄이 상대보다는 뛰어나고, 또 그들이 근위 기사단의 정규 멤버라고 해도 그 숫자의 열세를 만회하기는 힘들었다. 상대 또한 정예였고, 정규급 이상의 타이탄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펜과 아더, 그리고 샤트란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 하지만 순식간에 샤트란의 타이탄이 먼저 파괴되었고, 다음에는 아더의 타이탄이 쓰러졌다. 스펜의 타 이탄 ‘죠르아’는 거듭되는 경고를 주인에게 보내고 있었다.

<방패 55퍼센트 손상, 1차 장갑 12퍼센트 손상. 손상률이 복구율을 초과한 지 오래다. 후퇴하는 것이 좋겠다.>

“닥쳐! 누가 몰라서 싸우는 줄 알아? 쓸데없는 곳을 복구할 생각 하지 마. 시간을 끌어야 해.”

죠르아는 그 거대한 방패를 들어 상대의 검을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곧이어 등 뒤에서 묵직한 충격과 함께 거대한 검이 몸통 깊숙이 박혔다. 죠르아는 재빨리 뒤로 돌면서 비겁한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놈은 그 자리에 없었다. 죠르아가 뒤쪽에 정신을 팔자, 여태껏 죠르아와 격전을 벌 이던 세대의 타이탄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재빨리 기습을 가해 왔다. 그리고 죠르아의 그 거대한 덩치가 서서히 아래로 무너졌다. 이때 화물선 위에 희뿌연 빛이 일 렁이기 시작했다. 그 희뿌연 빛은 곧이어 사라졌고 바로 그 자리에는 거의 20여 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