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7권 5화 – 홀로 서기
홀로 서기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여자의 행복은 그게 아니라는데 그러는구나.”
어제의 그 따뜻한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음 날 아침 또다시 부자(父子)는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행복 따위 필요 없어요. 나는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고, 또 예전에 했던 그 빌어먹을 토지에르란 마법사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일 을 도와주면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구요.”
“하지만, 외로운 이 아빠를 위해서 일 년, 아니 한 달이라도 시간을 내어 줄 수는 없겠냐?”
“안 돼요. 아버지는 언제나 볼 수 있고, 그게 의심스러우면 같이 가면 되잖아요. 이제 더 이상 쓸모도 없는 마법 따위 배운다고 허송세월하기 싫어요. 또 밥하고 빨 래하기도 싫구요. 나는 저주 때문에 이 빌어먹을 모습이 되어 있지만 분명히 남자고 또 무사(武士)라구요.”
“이런 빌어먹을! 여자는 여자다워야지 검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냐?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이 아빠 말을 안 듣는 거냐?”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해요? 나는 여자가 아니라구요.”
“으윽! 이런 못된 것!”
분노를 억눌러왔던 아르티어스 옹은 이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버릇없는 아들의 왼쪽 뺨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날렸다. 물론 그의 이성은 사랑하는 소녀 의 뺨에서 “짝!”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면 가슴 아픈 죄책감과 함께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그의 이성을 돌아오게 만든 소리는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퍽!
쿠당탕!
“아구구구, 이젠 아들놈이 아예 마음 놓고 아빠를 패는군.”
아르티어스는 인정사정없이 왼쪽 뺨에 작렬한 그녀의 펀치를 느꼈다. 아들놈은 그가 느끼기에도 매우 뛰어난 무사였기에, 충분히 힘을 뺄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 도 이토록 심하게 팬 것에 대해 그는 투덜거렸다.
볼썽사납게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는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왼쪽 뺨을 주무르는 ‘아빠’를 부축해 일으키며, 소녀는 매우 죄송하다는 듯한 말투로 사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혀 죄송한 표정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의도적으로 뒷말을 흐렸다. 처음에 아르티어스의 손을 왼손으로 막고 반사적으로 오른손이 뻗어 나간 것은 정말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하지만 손이 날아 가는 도중에 그녀는 충분히 그 오른손을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을 하나도 빼지 않고 처음의 힘에다가 오히려 힘을 더 보태어 그대로 ‘아빠’의 왼쪽 뺨을 사정 없이 때린 것은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는 멍청한 드래곤에 대한 징계의 의미였다.
“에휴, 그래 너하고 싸워 봐야 뭐가 남겠냐. 떠나고 싶으면 떠나거라. 하지만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나는 너와 지낸 이 짧은 순간에 대한 기억을 아마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거야. 얘야, 나에게는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었단다. 하지만 그게 너에게는 불행한 시간이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말이 다.”
아르티어스의 체념한 듯한 말에 다크는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아르티어스가 그녀에게 강요해 온 여성적인 것들이 결코 그녀를 괴롭히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가 아님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억이 없을 때는 자신을 그렇게나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해 주기 위해 안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마법을 암기했고, 열과 성을 다해 가사 일을 익혔다. 또 굳어진 얼굴 근육을 열심히 연마하여 아빠가 주문하는 여성스런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 했고, 아빠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법들을 익혔던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오자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남성으로서의 기억과 뼛속까지 심어진 그 자부심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아르티어스 에게 잘 잤느냐는 인사와 함께 뽀뽀를 해 주면 아주 좋아할 것이고, 하다못해 그를 아빠라고만 불러 줘도 그가 매우 기뻐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여 성스런 행위를 그녀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도 그에게 설명해 줬다. 자신의 과거를… 그런데도 이 빌어먹을 드래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러니 열불이 치민 그녀는 이왕에 나간 손이니 아예 힘을 조금, 아주 조금만 더 보태서 힘껏 두들겨 버린 것이다. ‘제발 내 처지도 이해해 달라구요!’하는 마음을 담아 서 말이다.
하지만 아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아르티어스의 진심 어린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다크는 자신도 모르게 아르티어스 옹의 가르침에 따라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를 꼭 껴안아 버렸다. 아르티어스의 덩치는 그리 큰 편도 아니었고, 또 우람한 근육질 도 아니었지만 다크보다는 훨씬 큰 편이었기에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마주 껴안자 그녀의 몸은 포근히 감싸졌다. 다크는 매우 편안하고 안락한 의지할 만한 그 어떤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그런 생각이 떠오른 자신에게 당황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던 그녀로서는 겨우 이런 가벼운 포옹에 이토록 큰 만족감을 얻 었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었고, 또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크가 새로이 솟아나는 이놈의 감정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줄도 모르고, 아르티어스는 아들을 꼭 껴안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 천히 입을 열었다.
“부모는 아무리 귀여웠던 자식이라도 그들이 품속에서 떠나고자 할 때는 놔줘야 하지. 끝까지 놔 주지 않는다면 그건 자식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만 족감을 위한 것일 뿐이야. 그건 서로를 해칠 뿐이거든. 너는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아들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마 나는 너를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평생 안 볼 것처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렇군. 다음에 찾아가 보지. 크라레스 왕국이라고 했냐?”
“예, 거기서 다크 크라이드 남작을 찾으시면 돼요.”
“허허허, 출세도 빠르군. 이제 떠나거라. 만남의 시간은 길수록 좋지만, 이별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은 거야.”
차분해지려고 애쓰는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될 수 있으면 부드럽게 말하는 아르티어스에게 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뭔가 목구멍에 꽉 찬 듯한 괴상한 음성을 냈다.
“예, 꼭 찾아뵐게요.”
“몸 건강하거라.”
“예.”
자신을 여자로 개조하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노망난 드래곤으로부터 떨어져서 매우 기분이 유쾌해야 할 텐데도 그와 헤어진 다크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가슴에 얽매여 오는 고통을 뿌리치기 위해 그녀는 전력으로 질주했고, 어느 정도 마음을 바로 잡았을 때쯤에는 완전히 경치가 변해 있었다. 높은 산은 끝났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다크는 이제 주위의 경치를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이라도 나오면 거기서 수소문을 하여 크라레스 왕국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한참 걷다 보니 작은 마을이 나타났고, 다크는 문득 시장함을 느꼈다. 그렇게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때 되면 찾아 먹는 편이 건강에 좋았기에 마을 한쪽 구석에 있는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런, 돈을 안 가져 왔잖아.”
헤어지는 데만 급급해서는 달랑 허리에 검 한 자루 차고 드래곤의 레어를 출발했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머리 좋은 드래곤이나 다크나 둘 다 헤어진다는 그 사실에 감정이 싱숭생숭해진 관계로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도 챙기지도, 챙겨 주지도 못했던 것이다.
“할 수 없지. 몇끼 굶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다크는 투덜거리며 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크라레스의 수도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크가 투덜거리며 크라레스의 수도로 돌아가기 시작한 그날로부터 3개월 후, 팔시온은 사단장의 명령을 받고 사단 사령부로 불려 왔다. 팔시온은 갑작스런 사단 장의 호출에 기분이 영 찜찜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짐을 정리하고 타지로 부임할 준비를 하고 오라는 지시였기 때문이다.
팔시온은 겨우 1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대대장이다. 그 말은 1만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사단장이 직접 호출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리고 겨우 부하의 전출에 왜 사단장이 끼어들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단장이 팔시온에게 원하는 일이 있다면 팔시온이 배속되어 있는 연대장에게 통고하면 되는데, 왜 직접 불렀을까? 어쨌든 명령이 내려왔기에 팔시온은 그의 대대를 부대대장에게 맡기고 짐을 꾸려, 이른 봄의 추위를 막기 위해 중무장한 갑옷 위에 두터 운 망토를 두른 후 사단 사령부로 출발했다.
팔시온은 대기실에서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카엘, 가스톤, 미디아, 지미, 라빈, 로니에 사제를 말이다. 그들 역시 팔시온과 마찬가지로 정규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3개월 전 크라레스가 가지고 있던 5개 용병 사단 중에서 3개가 정규군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용병 생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은 2개 용병 사단에 배속되었 고, 정규군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만 정규 사단으로 편입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팔시온 일행의 경우 그걸 원하지 않았지만 정규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크라레스의 수도 크로돈에서 직접 그래듀에이트 한 명이 내려와서는 그들을 협박했던 것이다. 크라레스와 도난당한 드래곤 하트에 얽힌 속사정을 알고 있는 그들 이었기에 크라레스 입장에서는 그들을 놔 줄 수 없었다. 정규 사단에 편입되느냐, 아니면 막강한 그래듀에이트급 기사와 싸우다 장렬히 죽느냐ᅳ거절하면 곧장 죽 일 거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협박했다둘 중 하나의 선택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정규 사단에 편입되는 것을 택했다. 만약 상대가 약간이라도 만만했다면 반발을 할 수 있었겠지만 크로돈에서 파견되어 나온 인물은 팔시온 일행과 비교했을 때 너무 강했던 것이다.
팔시온까지 합류하자 그들은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크로돈에서 왔던 그 망할 기사는 서로 간에 작당할 수 없도록 사단장에게 특 별히 부탁해서 같은 사단이긴 했지만 각 대대 단위에 뿔뿔이 흩어 놓아서 거의 만나기 힘들었다.
“이야, 미카엘, 번쩍거리는 정규군용 갑옷이 잘 어울리는군. 모두들 오랜만이야. 로니에 사제님도 오랜만입니다.”
“망할! 누가 입고 싶어서 입었냐? 안 그러면 죽인다고 협박하니까 입었지. 도망치면 기사단을 동원해서라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데 할 수 있어? 자기도 굴복한 주 제에 왜 비꼬아?”
“비꼬는 게 아니야. 당당한 몸매에 잘 어울려서 하는 소리지.”
미카엘과 팔시온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미디아가 팔시온에게 물었다.
“너도 사단장 호출받고 온 거야?”
“응. 그럼 모두 다 호출받은 거야?”
“그래. 혹시 함정이 아닐까? 우리를 다 죽이려고…….”
“설마. 하지만 준비는 해야 할 거야. 나도 좀 찜찜해서 무장을 잘하고 왔지. 그러고 보니 모두들 중무장 아닌 놈은 하나도 없군. 하여튼 눈치 하나는.
“눈치 하나로 사는 게 용병인데, 그 재주라도 없었다면 벌써 땅속에 묻혔겠지.”
“이봐, 가스톤, 뭔가 이상한 점은 없어?”
가스톤은 약간 침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있어. 네가 오기 전에 마법으로 알아봤어. 사단장하고 지금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두 명. 하나는 그래듀에이트고 하나는 마법사야. 아마 5사이클 정도 될걸? 치레아와의 전쟁에 가지 않은 덕분에 혼자서 한가한 시간에 수련을 좀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힘들어.”
이때 문이 열리면서 부관(副官)이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모두 다.”
가스톤은 공격 마법 하나를 외워 놓고 들어갔고, 나머지는 검집에서 검이 제대로 잘 빠지는지 확인을 하거나 아니면 평상시 걸어 다닐 때 검이 임의로 빠지지 않게 걸어 놓은 가죽 끈을 풀어 두었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말이다.
그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장대한 체구를 가진 무사가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안녕하시오? 나는 드미트리 실바르요. 콜렌 기사단에 있었소. 그리고 이쪽은 같은 소속의 그라시에 마리온 양이오. 마법사지요.”
인사를 건네 온 기사는 인사가 끝나자 사단장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부탁했다. 사단장이 나가자 실바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그대들은 스바시에 주둔 8사단에서 전출되어, 이번에 새로 부임하신 치레아 총독 전하의 제2친위 기사단에 배속되게 될 거요.”
“친위 기사단이라구요? 하지만 저희들은 용병 출신입니다. 어떻게 친위 기사단에?”
“위에서 결정한 거요. 의문을 가질 필요 없이 그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되오. 짐은 모두 가져왔겠지요? 곧 출발합시다. 가면서 얘기하기로 하죠.”
“예? 가면서라뇨? 함께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됐소. 자, 나갑시다.”
드미트리 실바르는 꽤 숙련된 행동으로 그들을 지휘해 사단 사령부를 출발했다. 사단 사령부 내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면 이리저리 어떤 놈이 주워들을 수 있는 가 능성이 높아지기에 그는 서둘러 출발한 후 떠나면서 그들에게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인지 설명해 줬다.
“나도 이번에 창설될 제2친위 기사단에 배속되었소. 앞으로 잘 부탁하오.”
“저희들이 부탁드려야죠. 저희들의 상관이 되실 게 확실한데…….”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소. 이번 일은 매우 기밀이 요구되는 것이오. 나는 지금 단 두 대만이 만들어진 카프로니아급 타이탄인 도로니아와 가계약을 맺은 후 운반하 는 중이니까요. 솔직히 나는 타이탄을 조종할 줄 모르오. 카프로니아급은 두 명의 총독을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된 녀석이오. 그러니 도중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타 이탄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는 말이오. 알겠소?”
“예.”
드미트리 실바르의 얘기에 따르면, 팔시온 일행이 배속되어 있는 제8경갑 보병사단과 제9경갑 보병사단이 스바시에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 치레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본국에 3개 보병 사단만을 남겨 두고, 5개 보병 사단, 3개 기병 사단, 그리고 40여 대의 타이탄이 동원되었기에 개전 일주일도 안 되어 치레아 왕국은 두 손 들고 말았던 것이다.
치레아 왕국과의 전쟁에는 이번에 새로이 대폭 보강된 콜렌 기사단만 동원되었고, 실바르는 콜렌 기사단에 소속되어 직접 치레아 전쟁에 참전했기에 비교적 자세 하게 설명을 해 줬다.
스바시에 왕국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수의 고철 타이탄을 노획한 크라레스 제국은 그것을 살리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스바시에에서 노획된 타이탄들은 거의가 정 규급(출력 1.0) 이하의 출력을 지니는 약한 타이탄들이었기에, 그것들은 모두 완전 분해되어 새로이 테세우스급 타이탄으로 재생산되었다.
테세우스는 근위 타이탄인 카프록시아에 사용되던 엑스시온(출력 1.3)에 겉장갑만을 바꾸어 만든 것으로, 모두 다 유령 기사단에 납품되어 국적 불명의 용도로 쓸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카프록시아의 외장 갑옷 형태를 완전히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프록시아의 설계도는 30년 전의 전쟁에서 황궁이 파괴되는 수난 속에서도 지켜졌기에 카프록시아의 엑스시온을 생산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테세우스 급은 노획한 물자로 짐작했을 때 총 42대가 생산될 예정이었고, 한 대씩 생산되면서 유령 기사단에서 가지고 있던 저급 타이탄들이 두 대씩 콜렌 기사단으로 넘어 가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발표하기에는 미가엘이나 루시퍼, 푸치니 같은 저급 타이탄들로 재생산될 것이라고 발표했기에 타국의 눈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타이탄이란 게 자기 보수 능력이 있어 처음 생산된 모양이나 50년쯤 지난 모양이나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속임수를 쓸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새로이 보급된 대량의 타이탄으로 증강된 콜렌 기사단은 40여 대의 타이탄을 끌고 가서, 스바시에와 크라레스 간의 전쟁에 타이탄을 10여 대 보태 줬다가 몽땅 상실한 탓에 군사력이 매우 약화된 치레아를 단숨에 으깨 버렸다. 물론 치레아 후방에 버티고 있던 저 광신도들의 천국 아르곤 제국에서 갖은 외교적 압력을 가했지만, 크라레스는 그걸 묵살해 버렸다. 그 때문에 지금 크라레스에서는 아르곤과 한판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소문이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팔시온 일행은 드미트리 실바르를 통해서 크라레스가 영토를 대폭 확장한 만큼 상당히 많은 군사 편제를 재편하고 있다는 것도 주워들을 수 있었다. 크라레스 정 규 기사단의 가장 큰 변화는 콜렌 기사단이었다.
이번에 추가로 생산된―실바르는 그렇게 설명했지만 사실은 유령 기사단에서 보내온것을 합쳐 17대가 된 정규급 타이탄 미가엘(출력 1.0)을 반으로 나눠서 10 대는 스바시에 총독이 지휘하는 제1친위 기사단에, 7대는 치레아 총독의 제2친위 기사단에 배치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각 친위 기사단을 지휘할 총독을 위해 특 별히 총독의 취향에 맞춰 주문 제작된 타이탄이 카프로니아급이었다.
두 총독은 모두 매우 뛰어난 검술 실력을 자랑했기에 방어력보다는 공격력을 더 선호했고, 그렇기에 출력이 좋으면서도 가벼운 타이탄을 원했다. 그 때문에 그들
의 주문으로 제작된 카프로니아급 타이탄은 테세우스급에 들어갈 엑스시온 둘을 빼내어 장착했다. 그래서 테세우스는 40대만이 생산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큼의 희생은 감수해도 될 정도로 그들을 조종할 기사들의 능력은 대단했다. 카프로니아는 외형상으로는 카프록시아와 같았지만 군살이 많이 빠진 날렵한 형태를 가졌 다. 물론 그것은 속도를 높이기 위해 무게를 줄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크라레스는 외형상 4개 기사단, 총 91대의 타이탄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이건 현실적으로 가진 숫자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 이유는 유령 기사단 때 문이었다. 유령 기사단은 이번에 새로 보급된 40대의 신형 타이탄 테세우스와 로메로 22대, 미가엘 7대를 보유해 총 69대를 가지고 있는 크라레스 최강의 기사단 이었다.
또 근위 기사단에 배속된 8대의 청기사도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실지 크라레스가 보유한 전력은 5개 기사단, 총수 174대의 타이탄이었다. 거기에다가 아직 일이 밀려 해체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 치레아에서 노획한 로메로 8대와 크메룬 5대까지 합한다면 앞으로 테세우스 7대는 더 만들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대 제국 코린트를 박살 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코린트의 전력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사실 지금 크라레스나 다른 모든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코린트의 전력(戰力)에 대한 자료는 10년 전의 것이었다.
30년 전 전쟁에서 승리한 코린트는 막대한 부와 노획한 타이탄을 이용해서 흑기사 30대를 제작했고, 그들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그 귀하디귀한 드래곤본으로 만 들어진 황제 전용 타이탄 백기사를 완성했다. 이들의 신형 타이탄 생산 계획이 완료된 것이 그러니까 10년 전이었다.
만약 이 10년 동안 코린트가 그 어떤 타이탄도 생산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대하기 벅찰 정도로 강한 상대인데, 만약 그들이 뭔가를 더 만들어 냈다고 한다면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크라레스의 왕실에서도 첩보망을 이용해서 코린트의 타이탄 생산 계획이 있는지 조사했지만 아직까지는 알아낸 것이 없었다. 만약 생산 계획이 있다면 최고의 기밀을 요하는 것, 그러니까 흑기사가 아닌 또 다른 더욱 강력한 타이탄이 있다는 말과 같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