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8권 4화 – 불쌍한 신의 실패작

불쌍한 신의 실패작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소녀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빙긋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나와 봤지. 또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구경해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일단은 부하 녀석들을 데려와야 하니까요.”

“부하?”

“예. 견습 기사 두 명인데 코린티아에 있어요.”

“견습 기사라고? 그런 녀석들 데리고 있어 봐야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성가시기만 할 텐데? 좀 실력 있는 녀석들을 데리고 오지 않고 말이야. 크로 돈에 가 보니 꽤 쓸 만한 녀석들이 많던데………….”

“크로돈이라구요? 거기에는 왜 갔어요?”

“당연히 네 녀석이 거기 있는 줄 알고 갔지. 그다음은 치레아로 갔고 거기서…………….”

이때 다크는 아르티어스의 표정이 슬쩍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분노. 하지만 자신이 아르티어스에게 뭐 잘못한 것이 있었나? 하는 생 각이 들었다가 곧이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이 장난쳐 놓은 것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헤헤, 치레아 총독부 건물이 꽤 근사하게 생겼죠? 물론 코린티아에 있는 피의 궁전보다 못하지만 말이에요. 저것 봐요. 얼마나 큰지 여기서도 보이 “네요.”

“말 돌리지 마!”

아르티어스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아예 말을 꺼낼 시간을 주지 않고 선수를 쳐 버렸다.

“말 돌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붉은색의 장엄한 궁전이잖아요? 그럼 나중에 나는 금빛 나는 궁전을 하나 지을까요? 아름다운 호반 주변에 지은 다음 아르티어스궁이라고 이름 지으면 좋을 것 같죠?”

“글쎄… 그렇겠지.”

“그런 다음 궁전 기사단은 모두 다 금빛 나는 옷을 입혀 놓고 ‘골드 드래곤’ 기사단이라고 이름 붙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타이탄도 모두 금도금을 해 야겠네요. 안 그래요?”

다크가 자신이 듣기에 좋은 말만 골라 하는 것을 아르티어스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게 싫지는 않았기에 은연중에 그도 그녀가 말하는 것에 따라 이것저것 상상을 하며 대답했다.

“음…, 글쎄다. 그러는 게 짝이 맞겠지.”

“타이탄의 모양도 골드 드래곤처럼 멋지게 만드는 거예요. 하지만 거기에 금을 입히려면 돈이 많이 들 테니까, 한 10대만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골 드 드래곤이라는 게 원래 강한 데다가 지혜를 상징할 정도니까 문과 무를 함께 지닌 상징이잖아요?”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저는 나중에 궁전을 짓는다면 이왕이면 저따위 붉은색보다는 금색이 좋을 것 같아요. 저 녀석들이 붉은색을 칠해 놓은 것은 레드 드래곤이 최강이 라고 생각하고 만든 모양이지만, 사실 레드 일족은 힘만 세고 머리는 텅 빈 녀석들이잖아요? 골드가 최고죠. 안 그래요?”

슬쩍 레드 드래곤 이야기를 끼워 넣자 평소에 ‘무식한 그 녀석들하고 감정이 많던 아르티어스는 열을 올려가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지혜하면 골드 드래곤 아니겠냐? 무식한 레드 일족 따위는 상대도 안 되지. 그런 무식한 놈들을 만든 것은 신께서 실수하신 거야. 멍청한 놈들! 또 원래가 금이란 것이 영원을 상징하는 신의 선물 아니겠냐? 영원한 제국을 뜻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왕궁을 짓는다면 금색을 입히는 게 최고야.”

“그렇죠?”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다크는 지혜롭기는커녕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골드 드래곤을 어떻게 요리해 나가는 것이 좋을지 대충 감을 잡기 시작하고 있었 다.

다크와 아르티어스는 수정궁이라는 여관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 물어서 찾아갔다. 다크도 아르티어스도 이곳 코린티아에 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둘 다 지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기예요.”

“호, 꽤 근사한 곳이군.”

둘은 안으로 들어간 다음 일행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무사 두 명이 그들에게 조심스런 눈빛을 던지며 말했 다.

“일행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응.”

“모두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들어가십시오.”

무사들 중의 한 명이 문까지 열어 주며 친절을 베풀어 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동료에게 말했다.

“소녀와 함께 온 녀석은 또 누구지? 여기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자네는 빨리 죠드 경에게 연락해.”

“알았어.”

그의 지시를 받은 무사가 죠드라는 마법사를 찾기 위해 달려간 사이 남은 한 명은 문에 살짝 귀를 대면서 내부의 동정을 엿보기 시작했다.

다크와 아르티어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지미와 라빈이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그분은?”

“응, 내 의부(父)야. 그건 그렇고 인원이 좀 모자라는 것 같은데?”

“아, 예. 파시르하고 드워프는 잔뜩 먹고는 방에서 자고 있어요. 둘 다 신경의 굵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더군요.”

“그 녀석들 깨워서 데려와.”

“예.”

지미가 그들을 깨우러 들어간 후, 다크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소녀가 아르티어스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아르티어스는 그 속셈 뻔히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답했다.

“왜 그러냐? 너는 꼭 무슨 부탁할게 있을 때만 그렇게 부르잖니?”

“꽤 성가신 놈이 있어서 그러는데 우리들을 이곳에서 멀찌감치 이동시켜 주실 수 있어요? 예? 부탁드려요.”

“성가신 놈이라니?”

아르티어스는 수상쩍은 듯 의심이 가득한 눈동자를 소녀에게 던지면서 말했다.

“네 실력에 그런 녀석이 있다면 살려 뒀을 리가 만무하고, 또 상대가 그러고도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글쎄요. 아마도 저를 좋아하는 모양인데…, 여기 온 것도 그녀석이 꼬셔서 온 것이거든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흑심을 드러낸 것도 아니고, 또 나를 좋아한다는데 없애 버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부탁드려요.”

“흐흐흐, 하기야 좋다고 따라다니는 놈을 어떻게 손봐 주기도 좀 그렇지? 그럼 어디로 가고 싶냐?”

“경치 좋고, 조금 색다른 곳이면 좋겠는데, 어디 아는 곳 없어요?”

“흠, 예전에 내가 여행했던 곳이 있는데 거기는 어떨까?”

“좋아요.”

소녀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방 안에서 걸어 나오는 두 명을 아르티어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파시르라는 용병이고, 저쪽은 뭐라더라? 어쨌든 드워프예요.”

말도 안 되는 소개에 파이어해머는 발끈해서 외쳤다.

“뭐야? 나는 엄연히 지크레아 파이어해머라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근사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어쨌든 드워프’라는 요상한 이름이 아니란 말이야.”

화내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드래곤의 입장에서 드워프란 존재는 심심할 때 ‘간식거리’ 내지는 간혹 가다가 일이나 시키는 ‘노예’ 정도에 지나지 않았 다. 그런 존재가 감히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 짜증스런 어조를 내뱉자 아르티어스는 슬쩍 노기를 담은 눈을 드워프에게 돌리며 중얼거렸다. “감히 신의 실패작인 드워프 주제에 내 아들한테 대들다니, 그렇게도 죽고 싶냐?”

딱 벌어진 어깨를 도전적으로 내밀고 수염을 푸들거리며 화를 내던 파이어해머는 ‘신의 실패작’이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 봤던 표현을 사용하는 무례 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향해 분노에 찬 눈길을 던졌다.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파이어해머는 상대의 눈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는 순수한 난 폭함, 광기, 분노 따위를 읽을 수 있었다. 만약 사람이 저런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이 바로 박힌 인물일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저 정도 눈을 가지기도 전에 미쳐 버렸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파이어해머는 저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치지 않은 가증스 런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들조차도 자신들의 뛰어난 손재주를 인정하는데, 한 번씩 자신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면서도 자신들의 능력을 결 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 자들. 거기에다가 신의 실패작이라고 모멸스런 표현으로 비웃는 놈들. 그 놈들은 바로………….

“당신은 드……, 드…….”

처음의 호전적인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완전히 고양이 앞의 쥐같이 무력해지며 파이어해머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중얼거림도 곧 끝났다. 머릿속을 울리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더 이상 말하면 죽여버릴 테다. 내 정체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있어. 알았어?>

사람들은 파이어해머가 “당신은 드, 드…”하고 말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맹렬히 위아래로 흔들어 대자 수상한 듯한 시선을 보냈다. 잠이 덜 깨서 헛 것을 봤나? 하면서……………

다크는 방 안 공기가 약간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가자구요.”

“그러자구나.”

아르티어스는 몇 마디 주문을 외우다가 말고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잠시 잊고 있었는데 너를 만나겠다고 나를 따라온 녀석들이 있는데 만날 거냐?”

“따라오다니요?”

“왕이 보낸 녀석들이지. 아마도 눈치를 보아하니 그쪽에서도 너를 필요로 하는 것 같던데?”

“흠, 벌써 일을 벌이려고 그러나? 이상하네, 아직 때가 아닐 텐데…………. 어쨌든 그리로 가죠. 어디로 갈 건지는 그 녀석들과 만나서 무슨 일인지 알아 본 후에 결정하기로 해요.”

“알겠다.”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곧이어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역시나 아르티어스는 드래곤 답게 이동용 마법진 따위는 사용하지도 않고 곧장 이동 마법을 시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