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16화 – 뚱뚱이의 패배

뚱뚱이의 패배

세계 최강의 제국이라 자처하던 대제국 코린트를 농락한 두 국가의 외교 담당관은 처음 만남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요즘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더군요.”

가레신 후작은 일부러 크라레스의 승리를 빙 둘러서 말했다. 가레신 후작은 이 능구렁이 뚱뚱보를 만나기 전에 크라레스가 현재 처한 상황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왔기에 미리 선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

“허허허, 그거야 뭐……”

뚱뚱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의 말을 끊으며 가레신 후작은 슬슬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공격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단 튼튼한 발판을 마련해 두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이 능구렁이 가레신 후작은 매우 교묘한 타이밍에 말을 차단했기에, 뚱뚱이의 뒤편에 서 있는 크라레스의 마법사나 기사도 가레신 후작이 일부 러 말을 막았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 넓은 크로나사 평원을 다 차지하셨으니 곧이어 크라레스 제국의 위명이 천하에 진동할 것 같더군요. 그렇게도 막강하던 코린트에게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계 시다니, 정말이지 대단하외다.”

“글쎄요. 그렇지만…….

또다시 가레신 후작은 뚱뚱이가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고 말을 끊으면서 자신이 싸우기 좋은 토대를 다지기 시작했다.

“무슨 겸양의 말씀을 귀국의 기사단이 정말 부럽군요. 본국의 기사단은 코린트의 기사단과 몇 번 부딪친 다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을 정도인데 말이 오. 그것 때문에 미네르바 전하께서는 새롭게 기사단을 편성하신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죠.”

상대는 높여 주고, 자신들의 처지는 매우 심각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이제야 뚱뚱이도 상대의 의도를 눈치 채고 방어를 시작했다.

“설마 그 정도야 되겠습니까? 대 크루마의 기사단이 그 정도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면 지나가던 오크가 비웃을 겁니다. 귀국의 기사단을 쳐부수는 것은 오우거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그렇게 심한 겸양의 말씀은 필요 없지요.”

뚱뚱이의 말에 가레신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겸양이 아니외다. 지금 레디아 근위 기사단의 오너들 중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오? 이런 식의 전 쟁을 한 번만 더하게 되면 아예 국가가 망할 지경이 될지도 몰라요. 그에 비하면 귀국 기사단의 무훈은 정말 대단하지요. 아직까지 크로나사 전선에서 잃은 타이탄 은 단 한 대도 없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그건 바로 알고 계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코린트의 기사단이…….?”

상대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으므로 일단 뚱뚱이는 그 말을 인정했다. 하지만 가레신 후작은 그 뒤에 연결되는 뚱뚱이의 말은 의도적으로 끊었다.

“아, 그것도 정보국에서 들었소. 코린트의 외곽을 담당하던 동십자 기사단 전대를 단시간 내에 전멸시키셨다구요.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 눈부신 진격 속도에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소이다. 그토록 뛰어난 기사들을 보유하고 계신 것도 그래지에트 황제 폐하의 복이시겠죠.”

간신히 말할 틈을 잡은 뚱뚱이는 재빨리 지금 크라레스가 처한 상황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지금 본국은 전선이 너무 확장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귀국에서 일방적으로 휴전을 해 버리는 바람에..

이번에도 가레신 후작은 상대의 말을 끊으며 사과했다. 가레신 후작은 능구렁이답게 매우 미안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던지며 시작했기에 이것 또한 그 전처럼 도중에 말을 끊은 것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당하기만 하던 뚱뚱이는 지금 슬며시 약이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아, 그건 어쩔 수 없었소. 본관은 대지의 여신 케레스께 맹세코 어떻게 해서든지 휴전 조약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미네르바 전하께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신 일이라 본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소.”

이번에는 상대가 말을 끊지 못하도록 뚱뚱이는 재빨리 말했다.

“가레신 후작 각하의 입장도 이해는 하지만 동맹국인 본국이 아직도 전쟁 중인데, 전쟁을 시작한 그쪽에서 발을 먼저 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가레신 후작은 매우 가증스럽게도 애처로운 표정까지 연출해 보이며 잘도 말을 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 해도 할 말이 없소이다. 하지만 코린트 쪽에서 치열한 게릴라전을 감행해 오는 데다가 쟈크렌 요새에는 놈들의 주력 부대가 버티 고 있고…, 보급은 어렵고, 최전방에는 막대한 병력을 주둔시켜 둬야만 하고, 그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

“그렇게 어려운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지요.”

“아아, 그렇지는 않을 거외다. 귀국의 기사단은 대단한 정예가 아니오? 그리고 본국과의 전선에 코린트의 주력 부대가 잡혀 있으니 녀석들도 섣불리 손을 쓰지는 못할 거다, 이 말이외다.”

“섣불리 손을 못 쓴다고 해도 크로나사 지방에서는 연일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국에서는 귀국에 정예 기사단을 파병했었습니다. 이제는 귀국에서 본국에 병력을 파병해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뚱뚱이가 우려하고 있던 문제를 끄집어내자 가레신 후작은 침을 튀겨 가며 열변을 토했다.

“아아, 와리스 백작. 본국도 귀국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당연히 도와 드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본국은 얼마 전까지 전쟁터가 되었던 미란 국가 연합에도 원조를 해 줘야 하고, 또 본국 기사단이나 군대가 입은 피해도 막심하오. 그리고 쟈크렌 요새에 주둔 중인 코린트의 주력 부대는 대단히 강력하지요. 본국의 정예 부 대는 어쩔 수 없이 코린트와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그곳에 주둔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 말이오. 귀국의 사정만 주장하지 말고 본국의 어려움도 이해해 주셔야지 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귀국 본토를 지키고 있는 로투스급이면 어떻습니까? 귀국 기사단보고 적 타이탄을 상대해 달라는 부탁은 아닙니다. 게릴라들을 상대하기 위 해 로투스급 타이탄과 그레듀에이트, 마법사, 기사, 그리고 10개 사단의 병력만 빌려 달라는 거지요.”

가레신 후작은 정말이지 놀랍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 연출까지 하며 능청스레 말했다.

“10개 사단이라고요? 10개 사단이나 되는 병력을 빌려 줄 여력은 없소. 본국에서도 점령지를 관리하기 위해 병력이 부족한 형편이니까 말이오. 그러지 말고 우선 1개 여단을 파병해 드리겠소. 그리고 나머지는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보내 드리겠소. 어떻소?”

“병력은 최소한 1만 명은 넘어야 합니다.”

“그러지 말고 5천 명으로 합시다. 본인이 폐하께 허락받은 최대한의 군대요.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 폐하를 설득할 테니 우선은 그 정도로 참아 주시오.”

와리스 백작이 확정적으로 말했지만, 아직도 가레신 후작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주절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기에 와리스 백작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상대편의 황제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는 데야 어쩔 것인가?

“나중에 꼭 증원을 해 주셔야 합니다.”

와리스 백작이 사정하듯 말하자, 가레신 후작은 매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소? 본인을 믿어 보시오.”

“그렇다면 기사들은?”

또다시 증원군 얘기가 나오자 가레신 후작은 주절주절 그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코린트 최강의 기사단들이 모두 크루마 쪽에 집결해 있는데 어떻게 기사나 타이탄을 꺼낸단 말이오? 지금 본국의 정규급 이상의 타이탄들은 대부분 최전선에 배 치되어 있소. 골고디아 일부와 로투스는 모두 산악 지대나 북서부에서 몬스터 또는 적국들과 대치 중이지요. 도저히 그들을 뺄 수는 없소. 그들을 빼기보다는 오히 려 최전선의 기사들을 빼는 것이 더 쉬울 거요.”

이제 완전히 열 받은 뚱뚱이가 얼굴이 벌게져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가레신 후작 각하. 본국은 지금 단 한 명이라도 많은 병력이 필요합니다. 귀국은 지금 전쟁을 종료했는데도 이렇듯 혈 맹(血盟)의 처지를 무시해도 상관없는 것입니까? 이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누군데 이렇듯 혈맹을 박대하시는 겁니까?”

“와리스 백작, 오해하지 마시오. 내가 하는 말은 절대로 귀국을 박대하는 것이 아니외다. 우리도 지금 귀국을 도울 만한 여유가 없다는 얘기지요. 우선은 5천 명의 병력으로 만족해 주시오. 미네르바 전하와 상의를 해 보고 여력이 남는 데로 계속적인 증원을 약속하겠소.”

가레신 후작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간곡히 말했기에, 와리스 백작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대가 문서로 확답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일단 오늘 토의된 내용을 서류로 만들어야 하겠지요? 그대가 초안을 잡아 주시오. 내 기꺼이 서 명해 드리리다.”

상대의 말에 와리스 백작은 일단 종이에다가 쓱싹쓱싹 대충 초안을 잡아서 가레신 후작에게 넘겼다. 후작은 차근차근 읽어 본 후 심각한 어조로 와리스 백작을 향 해 말했다.

“이건 말이 잘못되었소. 본관은 곧이어 2차 파병을 한다고 말한 적이 없소. 본국의 상태가 호전되는 대로 미네르바 전하와 상의한 후 즉각 보내 준다고 했소.” “그렇다면 어쩌자는 겁니까?”

가레신 후작은 직접 펜을 잡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직직 지운 후 토를 달아서 와리스 백작에게 넘겼다. 와리스 백작은 그것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 했다. 이제 상대의 속셈이 완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말은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병력을 보내 줄 수 없다는 말이십니까?”

와리스 백작이 따지고 들자, 가레신 후작은 난처한 듯 말했다.

“아아, 그렇게 오해하지 마시오, 와리스 백작. 아마도 조만간에 코린트 쪽에서 어느 정도 긴장을 완화하면 그때 전선에서 표시 나지 않게 병력을 빼서 그대들에게 보내 줄 거요. 제발 그때까지만 참으시오. 아마도 본인의 예상으로는 5개월 내에 2차 파병은 분명히 해 드릴 것이오.”

와리스 백작의 분노는 이제 폭발 직전까지 도달하고야 말았다.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큰 소리가 나게 두들기면서 따지고 들었다.

“5개월이라고요? 5개월 후면 겨울입니다. 겨울에 무슨 파병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때까지 본국의 군대가 전멸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으면 다행일 겁니다.” 상대가 매우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가레신 후작은 상대를 향해 다독거리듯 부드럽게 말했다.

“자자, 와리스 백작, 상황을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시오. 만약 귀국이 그렇게 어렵다면 그때 마법진을 이용해서 오너들을 수십 명이라도 보내 드릴 것이오. 코린트를 막으려면 귀국과 본국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절대로 귀국이 잘못되게 방관하지는 않을 거요. 그러니까 우선은 5천 명으로 참아 주시 오.”

또 한 차례 줄다리기가 있었지만 와리스 백작은 어쩔 수 없이 가레신 후작이 작성한 서류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관례에 따라 정식 서류는 종이보다는 장

기적인 보관이 가능한 양피지(皮紙)에 작성하게 된다. 와리스 백작은 이건 사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서류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크루 마가 크라레스와 결별을 선언한다면 크라레스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서류에 서명했던 것이다.

와리스 백작은 축 처진 몰골로 크루마의 황궁에서 걸어 나왔다. 상대방이 군대 파견을 최대한 안 하려고 들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겨우 1개 여단만을 파병하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처사였다.

“망할 자식들.”

울분에 차서 욕설까지 중얼거려 보는 와리스 백작이었지만, 지금은 크루마가 이쪽보다 월등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이번 전쟁에서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대단한 실력을 과시하자, 크루마는 코린트와 크라레스가 맹렬하게 치고받기를 원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크라레스가 코린트 에게 재기 불능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을 때쯤 참전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크라레스와 전쟁을 벌인다고 국력을 심하게 낭비한 코린트와 크라레스를 자신 들이 제어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현재의 상태로는 크루마 혼자서 코린트를 상대할 수 없고, 크라레스와 크루마가 힘을 합친다면 코 린트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뒤에서 따라오던 마법사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묻자, 와리스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휴, 글쎄. 이런 휴지 조각을 가지고 폐하를 알현할 용기가 나질 않는군.”

지금 크라레스는 크루마의 우방이지만 미래에도 계속 우방으로 남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또 크루마 쪽에서도 크라레스의 그 막강한 기사단을 보고 서서히 경계하 기 시작했기에, 될 수 있다면 이번 전쟁에서 코린트 쪽에 치명타만 입혀 준 후 쇠퇴의 길로 들어서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에 와리스 백작보다 훨씬 더 유능한 인 물이 갔다고 하더라도 크루마는 최대한 병력을 보내 주지 않으려고 용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구원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온 것은 와리스 백작이었고, 전후 사정이나 배경이 어찌 되었든 그는 겨우 5천 명의 원병밖에 얻어 내지 못한 것이다. 와리 스 백작의 무능함에 격분한 황제는 어쩌면 보고를 듣자마자 그의 목을 칠지도…….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본국으로 귀환하여 폐하께 보고를 올리기보다 미란에 가서 원군을 청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결과가 좋다면 폐하께서도 크루마에서 백작님께서 실패하신 것을 용서해 주실지도 모릅니다.”

“미란 국가 연합에?”

“예, 미란이 이번에 매우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고 하지만, 그건 기사단뿐이지요. 군대는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기에 피해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와리스 백작은 미란이 이번 전쟁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반신반의하여 말했다.

“하지만 그쪽도 피해 복구 작업이 한창일 텐데, 도와주려고 할까?”

“도와줄지도 모릅니다. 지금 미란은 거대해진 크루마 제국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언젠가는 크루마 제국에 합병될 것을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걸 이용해 서 잘 설득한다면 1개 사단 정도 파병해 줄지도 모릅니다. 5천 명에 1만 명을 합하면 1만 5천 명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밑져 봐야 본전인데 미란에 가서 원병을 청해 보신 후에 본국에 돌아가서 폐하께 보고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법사의 말을 한참 생각해 보던 와리스 백작은 결심한 듯 외쳤다.

“좋아. 그렇게 하지. 미란으로 가세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