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19화 – 모두가 다 옳은 일은 아니었어

모두가 다 옳은 일은 아니었어

“대공 전하, 자리에 누워 계시지 않고 뭐 하시는 것이옵니까?”

병자가 자리에 누워 있지 않고 나무에 기대어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죠드가 키에리의 등판을 향해 따지듯 말하자, 키에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 고 천천히 답했다.

“훗, 자네는 아직도 나를 대공 전하라고 부르는가? 본인은 기사의 맹세를 저버린 몸. 이제 더 이상 기사도, 대공(大公)도 아니라네.”

“그런 말씀 하지 마시옵소서.”

“자네는 왜 돌아가지 않는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코린트의 귀족이 아닐세. 나를 자네가 더 이상 돌봐야 할 의무가 없다는 말이야.”

“그래도 전하, 상처가 찢어질 수 있사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렇게 큰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살아나신 것만도 아레스신의 도우심이옵니다.”

“아닐세. 나는 이제 많이 좋아졌어. 이제 더 이상 치료 마법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거야. 자네도 그것을 잘 알 텐데 왜 여기에 남아 있나? 돌아가지 않을 텐가? 제임 스의 부탁 때문이었다면 이제 돌아가도 된다네.”

키에리가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죠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키에리를 혼자 놔두고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설혹 조국이 지금 전쟁 중이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전하이시기 때문이옵니다. 전하께서 안 계신 코린트는 생각할 수도 없고, 또 그런 곳에 남아 있고 싶은 생각도 없사옵니다.”

죠드의 말에 키에리는 비웃듯 내뱉었다.

“미친 녀석이군.”

죠드는 그 말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간곡하게 키에리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상관없사옵니다. 제발 저를 돌려보내지만 말아 주시옵소서.”

“좋아,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내 한 가지 부탁함세.”

“뭐든지 하명하소서.”

“나는 더 이상 공작이 아닐세. 그러니 그 망할 놈의 전하 소리는 좀 빼 주게. 그리고 작위에 관계된 그런 존칭은 더 이상 받을 자격이 없으니 말투를 좀 낮춰 주게 나. 그렇다면 내가 참고 들어 주지.”

“예, 그게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아아…, 석양이 참 아름답구먼. 예전에 수련할 때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을 참 좋아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이 그 좋아하던 것을 바라볼 여유도 없이 살아왔 군.”

“예, 전하께서도 이제 좀 쉬실 때가 되었지요.”

“전하 소리는 빼래두 그러는구먼.”

“예, 전하.”

“푸흐흐흐, 어쩔 수 없는 놈이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키에리가 말하자, 죠드는 키에리의 뒤에서 난처한 듯이 말했다.

“입에 익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전하가 아니라면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냥 발렌시아드라고 부르게. 그게 어색하면 님 자라도 붙이든지.”

어느덧 해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고 하늘에는 붉은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위는 어둠에 덮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제 해는 졌으니 들어가시지요. 밤이슬은 상처에 안 좋습니다.”

키에리는 죠드의 부축을 받으며 작은 오두막집을 향해 가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죠드로서는 이렇듯 말 많은 키에리는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죠드가 알고 있 는 키에리는 말수가 적고 엄하며, 불같이 화를 잘 내기도 했지만 관용(寬容)이라는 것이 있었다. 실수를 했을 때 부하를 엄하게 질책하기도 했지만, 부하의 실수를 감쌀 줄도 알았다. 그야말로 죠드가 꿈꾸고 있는 최고의 상관이었던 것이다.

“그냥 드러누워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러네. 리사, 까뮤, 그라세리안 그렇게 넷이서 코린트를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자고 맹세했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 써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버렸어. 자네는 이렇듯 후회되는 삶을 살지는 말게.”

“예? 발렌시아드 님의 삶이 어때서 그렇습니까? 발렌시아드 님께서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복권(復權)되실 것입니다.”

“쯧쯧, 나는 지금 복권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세. 코린트를 키워 놓은 것은 좋았지만, 충성심이란 미명 아래 너무나도 못된 짓을 많이 했구먼. 아마도 그것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만큼 코린트를 위해 열심히 일하신 분이 누가 있으시겠습니까? 자, 전하, 그만 침대에 좀 누우시죠. 그게 편하실 겁니다.”

키에리는 죠드에게 이끌려 통나무로 얼기설기 짠 후, 그 위에 짚을 채워 만든 매트리스를 깔아 둔 침대에 몸을 눕혔다. 오랜만에 오랜 시간 서 있어서 그런지 상처 가 쑤셔 오고 약간 현기증도 나는 듯싶었다. 죠드가 자신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 주는 것을 보며 키에리는 약간 힐책하듯 말을 꺼냈다.

“또 전하로군……. 그게 아닐세. 코린트를 위하는 것이라고 그게 다 옳은 일은 아니지. 권력이라는 것에서 떠나는 그 순간 그것을 이해하겠더군. 그리고 그라세리 안이 왜 떠났는지도 알겠어. 그는 이제 싫증이 났던 거야. 코린트와 친구들에게서 말이지.”

키에리의 돌연한 말에 죠드는 놀랍다는 듯 물었다.

“예? 떠나시다니요? 코타스 전하께옵서는 행방불명이 되거나 암살당하셨을 확률이…….”

“아닐세. 그건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숨어서 마법 실험이나 하고 있던 그 친구를 산속에서 끌고 나온 건 우리들이었지. 그는 정말 대단한 마법사였지. 그는 우리들과 함께 세상에 나온 후 열성적으로 우리들을 도왔어. 하지만 마지막에 적기사를 개발한 후, 더 이상 뛰어난 엑스시온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그는 회의감을 느꼈겠지.”

“회의감이라니요? 그라세리안 전하께옵서는 저희들 마법사의 꿈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야. 자신이 처음 개발한 카로사, 그리고 미노바, 그다음 흑기사. 카로사와 미노바야 크라레스 전쟁이 끝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흑 기사는 달랐지. 개발됨과 동시에 양산(量産)되어 다섯 대가 만들어져서 처음 전쟁에 쓰였을 때 그는 그것이 엄청난 살육을 위한 병기라는 것을 깨달았겠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흑기사보다 더 뛰어난 타이탄을 만든다는 목표가 있었어. 그 때문에 수십 년을 틀어박혀 있었지. 흑기사의 엑스시온을 개발하는 데 토대가 된 헬 프로네…, 쿨룩쿨룩!”

상처가 쑤시는지 기침을 해 대는 키에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죠드가 말했다.

“말씀을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아직 상처가…….”

“괜찮네. 지금은 뭐라도 지껄이고 싶군. 그래, 아마도 그 녀석은 주인도 아닌 주제에 헬 프로네에 탑승한 유일한 인물이었을 테지. 그가 내 헬 프로네에 탄 것도 운 전석 밑에 보이는 헬 프로네의 마법진을 연구하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모방으로는 흑기사 이상의 출력을 낼 수 있는 엑스시온은 개발하기 힘들었지. 그래서 모든 것 을 잊고 그렇게 오랜 시간 틀어박혀서 적기사의 엑스시온을 개발한 거야. 수많은 시험용 엑스시온을 만들며 폭발 사고도 많이 일으켰고, 또 좌절도 겪었겠지. 하지 만 그걸 개발하겠다는 일념으로 죽자고 연구를 해 댔으니 그때 친구들인 우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고, 또 부강해진 코린트가 약소국을 잡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적기사의 엑스시온은 완성되었고, 그는 그제야 할 일이 없어져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되찾은 거야. 그런 후 환멸을 느꼈 겠지. 쿨룩, 쿨룩쿨룩!”

“그 얘기의 뒷부분은 내일 듣겠사옵니다. 이제 그만 주무십시오.”

“아닐세, 좀 더 얘기하고 싶어.”

하지만 죠드는 키에리의 말을 무시하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노련한 마법사답게 재빨리 주문을 완성한 후 시동어를 외쳤다.

“슬립! (Sleep).”

키에리의 잠들어 있는 평안한 모습을 보며 죠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생각했을 때 키에리는 권력의 상실에 너무 심한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렇게 나약하신 분이 아니었는데……. 그래, 몸이 병들어서 그 때문에 마음까지 약해지신 거야. 나중에 건강이 회복되시면 다시 예전의 자신감을 회복하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