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9권 5화 – 이제 우리의 적은 코린트가 아니야
이제 우리의 적은 코린트가 아니야
초조하게 5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제임스는 이윽고 마법 통신이 개통되자 재빨리 마법사를 밀어내고 말했다.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냐?”
“예? 공작 전하께서는 코린티아에 가셨습니다, 각하.”
“코린티아에는 왜?”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언제 돌아오시나?”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조만간에 돌아오실 것입니다. 참, 공작 전하로부터의 전언이 있습니다. 새로운 지시가 있을 때까지 합류할 생각하지 말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라는 전갈이셨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근위 기사단 병력의 태반이 이 구석진 곳에 빠져 있으라고? 도대체 공작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참, 나중 에 공작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나하고 통신을 할 수 있게 해 주게. 그리고 크라레스에서 밀고 올라오는 기사단을 얕잡아 보지 마시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각하.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제임스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통신권을 마법사에게 넘긴 후 돌아섰다. 제임스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며 로체스터 공작의 의도가 무 엇인지 유추해 보기 시작했다. 이렇듯 중요한 때에 전방 사령관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런데도 지금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은 크루마의 대군 을 막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렇다고 수도와 통신 회선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궁금해 죽겠군.’
“제기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제임스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짜증 어린 말을 내뱉은 후 키에리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키에리는 아직도 창백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방에 있어야 할 까미유가 보이지 않았다. 제임스는 서둘러 방문을 닫고는 근처에 눈에 띄는 아무나 잡고 물었다. 제임스의 질문을 받은 사병(私兵)은 망설임 없 이 대답했다. 까미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쪽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급히 방문을 벌컥 열었는데, 그곳에서 까미유는 우울한 얼굴로 포도주를 한 잔 가득 부어 마시는 중이었다.
“술 마시는 중이었나? 나도 한 잔 주게.”
까미유는 말없이 잔을 하나 꺼내어 가득 부은 후 건넸다. 제임스는 잔을 받아 들며 측은하다는 듯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까미유는 별로 상심할 것도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뭐, 자네가 걱정하듯 그렇게 상심하는 것은 아니야. 어머니가 그렇게 짧은 생을 사셨던 것도 아니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겉모습이 젊어서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매우 장수하셨더군. 그런데 허겁지겁 방문을 연 이유는? 내가 자살이라도 할까 봐서?”
그렇게 생각하긴 했었지만 상대가 먼저 물어 오자, 제임스는 시침을 떼고 딴말을 시작했다.
“아니, 자네하고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뭔데?”
“크라레스가 침공해 들어왔어. 타이탄 약 1백여 대로 이루어진 3개 기사단. 그리고 그 뒤를 받치는 군대는 2개 중장 보병사단, 4개 경장 보병사단, 2개 기병 사단 규모라고 하더군. 어때? 놀라운 소식이 아닌가?”
“자네가 그렇게 뛰어 들어올 정도로 놀라운 소식까지는 아니군. 크라레스가 크루마를 도와줬을 때부터 이번 전쟁에 끼어들 것은 정해져 있었어. 다만 본격적으로 마수를 드러내는 그 시기가 언제일지가 불분명했을 뿐이지.”
“그건 그렇군. 하지만 생각 외로 크라레스가 엄청나다는 거지. 자네는 그 생각을 못 했나? 우리가 추격해 온 그 소녀 말이야.”
“그 소녀가 왜?”
“엄청난 검기를 뿌리던 그 검은색 타이탄에 타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버님조차도 당해 내지 못한 상대. 기동 연습 때 우리 둘이서 아버지를 상대했을 때, 분명히 우리들은 아버지 한 사람을 당해 낼 수 없었어. 그런데 그런 상대가 그냥 돌아가 버렸지. 그 거대한 타이탄이 뿜어내는 강렬한 투기(鬪氣) 앞에서 심장이 쪼 그라들 정도였는데 말이야. 다행히 그 투기가 사라졌을 때 나는 안도감에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런 상대가 우리를 놔두고 왜 돌아갔을까?”
제임스의 말에 까미유는 그따위 것 별로 흥미도 없다는 듯 내뱉었다.
“그놈 속마음을 내가 알 게 뭐야.”
“자, 생각을 해 봐. 아버지까지 쓰러뜨릴 정도의 실력자라면 상대방 기사단장 내지는 사령관이라고 봐야지. 안 그래?”
“실력으로 생각한다면 그게 맞겠지.”
“크루마의 사령관은 미네르바. 나중에 우리들한테 걸려서 혼쭐이 났었잖아? 미네르바가 헬 프로네의 주인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구. 그렇다면 그 검은색 타이탄은? 그게 만약 크라레스의 신형이라면 설명이 되지. 우리가 추격하면서 알아낸 바로는 소녀는 치레아 총독이자, 파견군 사령관이었어. 그렇다면 그 타이탄에 타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까미유도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그 가냘픈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이성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감정상으로 그녀를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 은 것인지도 몰랐다.
“설마…….?”
“설마가 아니야. 검은색 타이탄에 타고 있던 사람이 그 소녀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 수 있지. 우리들이 그녀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또 적기사를 이미 아르곤에서 봤기에 그 안에 우리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눈치 챘겠지. 우리들이 나섰을 때 그녀는 우리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외모에…….”
“그게 아니라니까.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아르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마스터인 나를 앞에 두고도 비웃는 듯한 어조로 겨우 그 실력으로?”하고 말한 것. 그때 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확신하고 있어. 그녀는 검객이었어. 그것도 엄청나게 강한.”
“이리저리 맞춰 보면 검객인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모는…….”
마지막까지 부인해 봤지만 까미유도 대충 그녀가 범인일 것이라고 이성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데다가 제임스는 마지막으로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외모야 마법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 만약 그녀의 외모가 약간 나이든 우락부락한 남자였다면 처음부터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
“별로 마음에 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크라레스에 그녀 같은 고수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야. 그녀를 어떻게 해치우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뀔 거야. 그건 그렇 고 이제는 아버님도 위기를 넘긴 상태고……. 원래는 건강이 약간 회복되면 쟈크렌 요새로 이동해서 본대와 합류할 예정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로체스터 공작 전하 께서는 이곳에 우리들이 남아 있기를 바라셔.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에 여기는 별로 안전하지 못하다는 거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자네 의견에 동감이야. 공작 전하의 지시가 그렇다면 일단 지켜야 하겠지. 녀석들도 우선 굵직한 영지들과 잔여 병력들을 소탕한 후에는 아마도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겠지. 그 전에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아. 그런데 근위 기사단원들만 해도 거의 1백여 명인데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 있을까?” “지금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는 코린티아로 가신 모양인데, 곧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하니까 돌아오시는 대로 보고를 드리고 전투에 불필요한 인원은 돌려보내야 겠지. 그때를 위해서 남아야 하는 인원을 자네가 한번 뽑아 봐. 그리고 우리들이 머물 만한 장소도 한번 알아 보고 말이야.”
까미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알았어. 자네는 옛날부터 내가 편히 쉬는 꼴을 못 봤으니까…….”
“자네니까 부탁하는 거야. 영광으로 알라구.”
까미유는 이제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생겼기에 술잔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제임스는 방을 나서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것도 아니고 중상을 입었을 뿐인데도 자신의 마음이 이런데, 전사한 경우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거리를 만들어 까미유가 딴 생각을 못 하게 도와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크와 그 일행이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 크로돈에 도착했을 때, 토지에르가 몇몇 중신(重臣)들과 함께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토지에르는 다크의 모습이 나타 나자 재빨리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 왔다.
“어서 오시옵소서, 공작 전하. 먼 길에 수고 많으셨사옵니다.”
“그러는 자네도.”
“개선 사령관을 영접하는 데 너무 소홀한 것 같아 송구하옵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자네가 요즘 들어서 매우 바빴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왔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조사해 봤나?”
“예, 당연히…, 20여 명의 마법사들을 풀어서 조사하는 중이옵니다. 만약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면 기필코 찾아낼 테니 안심하시옵소서.”
토지에르의 말에 다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잊지 않고 있었다니 고맙군. 그건 그렇고 코린트 전선은 어떻게 되어 가나?”
“예, 순조롭게 진격 중이옵니다. 하지만 곳곳의 지방 영주들이 사병들을 거느리고 저항하는 바람에 진격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못한 편이죠. 아마도 문제가 없다 면 6일 후에는 크라레인시에 도착하게 될 것이옵니다. 오랜 시간 고생이 많으셨으니 한 며칠 쉬시고 크라레인 공방전에 참석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알겠다. 자네는 아버지와 내 일행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드리게. 폐하는 어디에 계시나?”
“예, 중앙 홀에 계시옵니다.”
다크가 중앙 홀에 들어설 때 황제는 몇몇 중신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반겨 맞이했다. 다크는 황제에게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그의 뒤에 서 있는 장교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검이 매우 눈에 익은 것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자자, 어서 오게나. 그 엄청난 무훈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네. 짐의 휘하에 키에리를 패배시킬 무인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의 도움인 것이야.”
“소임을 다한 것뿐이죠. 그런데 저 검은?”
다크의 경우 궁중 언어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황제는 그녀에 한해서 묵인을 해 주고 있었다. 그는 신하의 말투가지고 마음 상할 정도로 쪼잔한 사람은 절대로 아니 었다.
“아, 저건 경의 아버님이 짐에게 선물로 준 것이지. 대단한 명검이지 않나?”
그 말에 다크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벌레만도 못 하게 생각하고 있는 인간 황제에게 저런 검을 선물할 리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 는 아르티어스가 여기서 뭔가 사고라도 친 게 아닐까하고 의심했다.
“그런 것 같군요, 폐하. 그런데 혹시 아버지가 뭔가 실례되는 행동이라도 한 것은 없습니까? 여기에 들렀다고 하던데…….”
다크의 말에 황제는 약간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인했다. 아르티어스가 황제에게 검까지 선물한 이유는 절대로 그 사실이 아들의 귀에 들 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입막음용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우둔한 황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일은 없었네. 전시가 아니라면 무도회라도 열고, 거창한 열병식을 하며 경을 환영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좀 힘들군. 이해해 주게나.”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점령지를 넓혀 가는데 코린트의 저항이 워낙 거세다 보니 병력이 많이 들어가는구만. 아마도 일주일 후에는 제2진을 투입해야 할 것 같아. 치레아, 스바시에, 크 라레스 각 지구에 보병 사단 하나씩만 남겨 놓고 모든 병력을 집어넣어야 하겠지. 말토리오 산맥에 출몰하던 모든 오크들을 경이 전멸시켜 둔 덕분에 병력을 빼는 데는 별로 무리가 없더군. 지금 국경선 부근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중이지.”
“국지전에도 타이탄을 넣는 것은 어떻사옵니까?”
“안 그래도 그렇게 하고 있네. 각 사단에 콜렌 기사단에서 저급 타이탄 두 대씩을 지원해 주고 있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방 영주들을 진압하는 것만도 벅찰 거 야. 덕분에 콜렌 기사단의 전력은 지금 반으로 줄어 있다네. 코린트가 힘을 못 쓰는 형국인데도 매우 힘들구만.”
“모든 것이 잘될 것이옵니다, 폐하.”
“그래야 하겠지. 오랜만에 경하고 함께 식사나 할까?”
“좋사옵니다. 그런데 오늘도 돼지고기를 넣은 채소 수프인가요?”
상대의 말에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경은 그게 별로 구미에 안 맞는가 보군.”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별로 음식을 가리지 않습니다.”
역시 황제의 점심 식사는 다크의 예상대로였다. 개선장군을 맞이한 매우 경사스러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절약 정신은 변함이 없었고, 다크는 그런 황제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황제가 그렇게 투박한 음식을 즐기는 것이 노랭이라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크는 황제와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며 적당한 시간을 함께하다가 물러나왔다. 그녀는 아르티어스가 있는 곳으로 갈까 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토지에 르가 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토지에르는 집무실에 있지 않고 타이탄 제조창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크라레스의 타이탄 제조창은 예전부터 외부 사람이 잘 모르도록 매우 비밀리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코린트가 30년 전 전쟁 이후로 크라레스의 타이탄 생산을 엄 금하고 있었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타이탄의 거대한 덩치를 생각했을 때 제조창은 당연히 아주 크면서도 모두들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건물이어야 했다. 그리고 웬만큼 많은 사람이나 화물이 들락거려도 이상하지 않은 곳. 그렇게 생각한다면 선택의 폭은 몇 가지로 줄어든다. 크라레스의 타이탄 제조창은 크루마의 신전 양식 (神殿樣式)에 가깝게 지어 놓았고, 또 건물 밖에 포진하고 있는 경비병들은 모두들 신관(神官)의 복장과 무장을 하고 있었다.
다크가 거대한 신전 건물에 다가서자, 그녀를 알아본 신관이 인사를 건네 왔다. 얼룩덜룩한 수많은 무늬를 집어넣고 그 사이사이에 물고기라든지 해일, 폭풍을 형 상화한 것 등등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복장. 이 신전은 바다의 신 넵튠(Neptune)의 신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이 이 신전을 말토리오 산맥 속에 지어 놨 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넵튠의 신전은 해안가에 지어져 있었다. 그래야 그 신을 필요로 하는 어부라든지, 아니면 바다와 연관된 일을 하는 무역상인 등이 참배를 하 기에 좋다. 물론 크라레스에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산골짜기에는 넵튠을 신봉하는 인물들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넵튠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만약 진짜 넵튠 신도가 참배를 하겠답시고 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으니까.
거대한 신전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완전히 경관이 바뀌게 된다. 거대한 공장. 타이탄의 작은 부품 하나하나는 여기저기 딴 곳에서 제작되고 그것들이 이곳에 운반 되어 와서 여기서 조립되어 그 안에 크로네를 채워 넣고, 미스릴을 입히는 것이다. 내부는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기 덕분에 후덥지근했는데, 그런 와중에 한 쪽 귀퉁이에서 마법사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막 틀에서 뽑혀 나온 엑스시온을 앞에 두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토지에르는 앞의 마법사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제조창 안으로 경비병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서는 소녀를 보고는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이시옵니까? 전하.”
“이제부터 정식으로 싸워야 하니까 타이탄의 도장(圖章)을 새로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황제께서 말씀하셔서 말이야. 아주 바쁜 것 같군.” 여기저기에 뼈대를 입히고 있는 20여 대의 타이탄을 바라보며 다크가 감탄 어린 어조로 말하자, 토지에르는 맥이 빠진다는 듯 대꾸했다.
“예, 노획 타이탄이 거의 2백여 대가 넘게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옵니다. 하지만 저것들이 실전에 배치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지…….”
“이번에도 테세우스를 생산하는 것인가?”
“예, 이제 대 제국으로서의 위풍을 세워 나가려면 카프록시아를 생산하는 것이 더 좋겠지만…, 카프록시아는 외장에 꽤 신경을 쓴 녀석이기에 짧은 시간에 대량 생산하는 데는 힘이 좀 들지요. 아주 단순한 외형을 하고 있는 테세우스 쪽이 생산 시간이 적게 드니 어쩔 수 없사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이때 그녀의 뒤쪽 공간을 열고 엄청나게 거대한 청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장을 새로 칠하는 작업은 언제 끝나게 되지?”
다크의 질문에 토지에르는 저쪽에 도열해 있는 테세우스 여덟 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들에는 여러 명이 달라붙어서 새롭게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입혀지는 테세우스의 색상은 카프록시아와 같은 붉은색과 푸른색이었다.
“이번 전투로 인해서 모두들 엉망진창이니까 한…, 3일쯤 후에나 칠하게 될 것이옵니다.”
토지에르는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청기사를 세심히 살펴보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저기에 검상을 입었던 흔적이 보이는군요. 거의 무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타이탄이 이 모양이니 테세우스들의 표면이 그렇게 많이 상한 것은 당연한지 도…….”
토지에르가 우려 섞인 어조로 말했지만, 다크는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뭐, 걱정하지 말게나. 더 이상 페인트를 새로 칠해야 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을 거야. 그건 그렇고 치레아로 가려고 하는데, 보내 줄 수 있나? 바쁘면 아버지한 테 부탁하고.”
“치레아와 스바시에에는 영구 이동 마법진을 건설했사옵니다. 그걸 이용하면 마법사의 도움이 없어도 이동이 가능하지요. 경비병들에게 물어보면 공간 이동문을 가르쳐 드릴 것이옵니다.”
“좋아, 6일 후에 보기로 하지.”
“예, 전하.”
다크가 단출한 일행들을 거느리고 치레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녀가 온다는 것을 보고받은 부총독이 마중 나와 있었다. 부총독은 여태껏 있었던 기나긴 상황 보 고를 하려고 했지만 다크는 대충 필요한 것만 몇 가지 물어본 후 회의를 끝냈다. 겨우 6일의 휴가밖에 없는 상태에서 영양가 없는 보고를 장시간 들어 줄 이유는 하 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총독의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다. 지금 이곳 치레아는 겨우 1개 경장 보병사단과 친위 기사단이 보유한 전력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소한 병력으로 막아야만 하는 상대는 거대한 아르곤 제국이었다.
“자네가 대충 알아서 대처하도록 해.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까만 토…, 아니 토지에르에게 보고하면 될 거야. 지금 전 병력을 코린트 전선에 쏟아 붓는다고 본국 방위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둘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지.”
“그래도…….”
“아, 더 이상 필요 없는 얘기는 때려치우자구. 떠들어 댄다고 없는 병력이 튀어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이제 회의를 끝내기로 하지.”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부총독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밖에 기사 몇 명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모두들 뭔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더군요.”
부총독의 말을 듣고 다크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으며 말했다.
“좋아, 들여보내라고 해.”
부총독이 나간 후 조금 있다가 파시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약간의 긴장 때문인지 평상시에도 별로 표정이 없던 얼굴이 더욱 굳어져 있었다. 파시르는 들어서자 마자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문 옆에 풀어 놓은 후 다가와서 필요 이상으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예, 전하께서 저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염치없는 부탁이오나 친위 기사단을 은퇴하고 싶사옵니다.”
“뭐? 갑자기 왜?”
“아무리 대 제국 코린트와 대적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크라레스가 손잡은 국가는 크루마. 제 조국의 원수이옵니다. 원수와 손잡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다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경은 영원한 동맹국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나?”
“예?”
“아마도 크루마와의 동맹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깨질 거야. 그리고 10년 이내로 전쟁에 들어가게 되겠지. 내기를 해도 좋아.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만약 지금 여기서 나간다면 크루마를 상대로 복수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거야.”
“진정이옵니까?”
“물론이지. 자네는 그동안 검술이나 좀 더 닦고 있으라고. 아마도 그때쯤이면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탄을 지급받게 될지도 모르지. 드래곤 사냥 때도 보지 않았나? 크루마의 신형 타이탄은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을 말이야. 그것들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더 좋은 것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어. 자 열심히 해 보게. 딴 생각 하 지 말고.”
“예, 전하.”
파시르가 어느 정도 수긍하고 밖으로 나간 후, 이번에는 몇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미카엘, 팔시온, 미디아, 가스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다크는 미소를 지으며 환영했다.
“어서 와. 오랫동안 고생들이 많았지?”
반갑게 맞이하는 다크를 보며 미카엘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정말 죽을 지경이었지. 콜렌 기사단이 빠져나간 다음부터 그 공백을 메운다고 매우 바빠졌거든.”
“모두 앉아.”
다크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한 다음 밖에 대고 외쳤다.
“세린! 차를 내와라. 그리고 술도.”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다크의 외침에 답해 왔다.
“예.”
술이라는 말이 나오자 팔시온이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대낮부터 술은 됐어.”
“왜? 너희들 술 좋아하잖아.”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은 시원한 맥주지. 대낮부터 너처럼 그 독한 브랜디를 마시는 사람은 없다구.”
“그럴까? 이봐! 세린, 브랜디 한 병하고 맥주 좀 가져와.”
“예.”
“안 그래도 나중에 찾아갈 건데, 뭐 하러 이렇게 급하게 왔어?”
“실은 또 딴 곳으로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찾아왔지. 우리는 도저히 여기서 하는 일이 적성에 안 맞아. 기왕이면 전쟁터에 좀 데려가 달라구. 모험가 생활을 하다가 한 곳에 박혀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려서 죽을 지경이야.”
미소 띤 그녀의 질문에 팔시온이 대표 자격으로 대답을 했고 덧붙여 미디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그걸 부탁하러 왔어. 코린트와의 전쟁터, 꼭 참전해 보고 싶어.”
“하지만 나하고 같이 다녀 봐야 싸울 일은 거의 없을 텐데? 나는 유령 기사단에 합류할 거니까 말이야. 흥분을 맛보고 싶다면 콜렌 기사단 쪽이 좋지 않을까? 그쪽 이 반군 토벌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모두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아니, 그런 곳에는 전쟁이 끝난 후에라도 갈 수 있잖아. 우리는 타이탄들끼리 치고받는 것을 구경하고 싶다구.”
“그래, 나도 흑기사라는 것 한번 구경해 보고 싶었어.”
“하지만 너희들에게는 위험해. 너희들은 정찰조에 배속되게 되는데, 재수 없으면 상대방 그래듀에이트와 싸울 가능성도 있지.”
“그런 것은 상관없어. 싸나이는 말이지, 검을 잡고 죽는 것이 소원…, 으갸갹!”
미카엘이 폼 잡고 말하자 미디아는 얄밉다는 듯 미카엘의 살덩어리를 잔뜩 틀어쥐고 비틀어 버린 후 투덜거렸다.
“야, 사나이만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냐? 이 멍충아. 그리고 저 가스톤이 검을 잡고 싸울 수는 없잖아. 이봐 다크, 우리들은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다만 전사답게 역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함께 가기로 하지.”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두들 환성을 질러 댔다. “끼얏호, 빨리 준비를 해야겠군. 언제 출발하지?”
“6일 후. 크라레인시 공방전에 참가하게 될 거야.”
“좋아. 기대가 되는군. 흐흐흐…….”
다크가 오랜만에 주어진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미네르바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그 주 원인은 제임스 패거리 덕분이었다. 기사단들끼리의 대규모 접전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뺏은 것이 아니었다. 기사단을 격퇴한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영토에 주둔 중인 군대를 격파하는 일이다. 그걸 단시간 내에 해내지 못하면 그 군대는 퇴각을 완료하든지 아니면 산속에 숨어서 게릴라가 되는 것이다. 또 지방 영주들도 토벌해야 한다. 지방 영주들은 황제 로부터 하사받은 자신들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휘하의 사병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봉건제에 의해 농노들을 통치하는 방식은 새로운 점령지를 확보했을 때 대단히 유용하다. 기사들이나 마법사 등 자신의 군주를 정한’ 사람들이나 영지를 ‘하사받 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 시대의 경우 한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식은 거의 없 었다. 농노들의 경우 자신들의 주인이 바뀔 뿐이었고, 자유 무역 지대에 있는 상인들이나 평민들의 경우 세금을 납부할 대상이 바뀌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것 이다. 그리고 용병(傭兵)들의 경우도 자신의 주인이 돈을 낼 수 없을 것 같거나, 아니면 돈을 지급하지 못하면 부담 없이 떠나 버린다. 그런 다음 새로운 주인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직 국왕이나 황제를 위해 충성의 서약을 했던 지방 영주나 귀족, 또는 기사들만이 저항하게 되는데 이들의 저항을 재빨리 뿌리 뽑는 것이 점령지의 안정을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리고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후에 발생하게 되는 게릴라성 산적들 또한 토벌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미네르바는 이러한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점령지를 완전하게 통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저항 세력 안에 타이탄을 지닌 오너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3~6대의 타이탄을 거느린 것으로 추정되는 적은, 상당수의 기사들이나 마법사를 포함한 소규모 기사단이라고 봐야 했다. 그들은 지방 영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크루마 군대를 괴롭히고 있었고, 그곳에 파견 나온 타이탄 한두 대 정도는 간단히 박살 내 버렸다.
“제8경장 보병사단으로부터 제536보병 연대의 패잔병들과 합류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사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거기 파견 나가 있던 쿠로닌 남작은?”
“쿠로닌 남작 이하 두 명의 기사는 전사한 것이 확실하옵니다.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쿠로닌 남작은 타이탄을 꺼내 들고 달려들었지만 상대방의 붉은색 타이탄 에 목숨을 잃었다고……..”
쾅!
얼마나 세게 내려쳤는지 탁자가 나무 조각을 흩날리며 박살 나 내려앉았다.
“제기랄! 이게 지금 몇 대째야?”
“후방 각지에서 타이탄 전투가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아무래도 상대는 최정예 기사들을 남겨 둔 모양이옵니다. 흑기사를 봤다는 패잔병까지 있 을 정도이옵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안 돼. 그렇다고 전방의 타이탄을 뺄 수는 없다. 쟈크렌 요새에는 적의 주력 부대가 남아 있어. 만약 이쪽에서 병력을 뺀다면 역으로 치고 나올 가능성마저 있다.”
“하지만 그들을 계속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옵니다, 전하.”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마법사들에게 일러서 통신 채널을 한두 개 정도 더 만들라고 해. 그 채널은 놈들을 발견했을 때만 써야 하고, 그러면 제때 보고를 받을 수 있겠지. 그런 후 오너 10여 명을 대기시켜 둬라. 언제든지 투입이 가능하게 말이야.”
“전하, 오너들의 등급은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사옵니까?”
“놈들도 근위 기사단을 투입했으니 이쪽도 최소한 카마리에는 되어야 하겠지.”
“예, 곧 조치를 취해 놓겠사옵니다.”
“제길, 루엔이 살아 있었다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루엔 자네에게 가르칠 것이 너무나도 많았었는데, 그걸 다 배우지도 못하고 그렇게 빨리 가 버리다니……..”
미네르바는 무술을 익히는 일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가사(家事)라는 것에 시간을 뺏기게 되고, 또 아이를 낳기라도 한다면 거 의 1년에 가깝게 무술을 익히기도 힘든 사태가 벌어진다. 그렇기에 그녀는 결혼을 포기했던 것이다. 자식을 낳아 보지 못했던 미네르바였기에, 자신의 대를 이을 루 엔 공작을 자식처럼 아껴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요즘같이 바쁠 때 자신보다도 먼저 가 버린 루엔의 존재가 그리운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참, 스펜과 아더, 샤트란은 치료가 끝났나?”
“예, 지금 거의 치료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때 아르곤 성기사단과의 전투에서 탈진했을 뿐,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좋아. 타론이 죽은 지금, 그 녀석들은 유일한 드래곤 슬레이어들이야. 3차분으로 생산되는 안티고네를 그 아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하도록 해라.”
“예, 전하.”
“코린트의 주력 부대가 살아 있는 한, 이쪽도 대비를 최대한 해야겠지. 그린레이크 공작에게 연락해서 이번에 노획한 코린트 타이탄을 해체한 것은 모두 다 에프 리온으로 생산하라고 전해.”
에프리온은 대마법사 안피로스가 크루마 제국의 근위 타이탄으로 생산했던 것으로 헬프로네를 제외한다면 그의 설계작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타이탄이었다. 즉, 1.5의 출력을 가지는 카마리에에 비했을 때, 전투 중량이 5톤 정도 늘었다고 하지만, 출력은 0.2나 상승했기에 전체적인 파워는 훨씬 더 뛰어난 타이탄이었다.
“예? 하지만 전하, 그건 본국의 주력 타이탄 골고디아와 비교해 너무 등급 차이가 나옵니다. 그리고 에프리온으로 만든다면 두 배 이상의 시간이 들어가니까, 계획 대로 차세대 주력 타이탄인 카마리에를…
미네르바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어조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게 아니야. 경은 이번에 코린트와 전투를 하고도 느끼지 못했나? 코린트의 기사들은 강하다. 한 등급 떨어지는 타이탄으로도 본국의 기사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단 말이야. 기사들의 검술 실력이 떨어지니까 타이탄의 질이라도 올려놔야 균형이 맞는단 말이다. 알겠나?”
“예, 전하.”
“폐하께 드린 요청은 어떻게 되었나?”
미네르바의 말에 상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예, 전하의 요청은 기각되었사옵니다. 모처럼 얻은 점령지를 포기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정이셨사옵니다.”
“제기랄, 지금 승리를 얻은 김에 코린트와는 화해를 해 버려야 해. 점령지로서 유지도 안 되는 이따위 땅덩어리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야? 또 우리의 적은 이제 코린트가 아니야.”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의아해하는 노장군을 향해 미네르바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크라레스다. 크라레스에 그녀가 있는 한 조만간 크라레스는 코린트 이상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거야.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강대해지기 전, 그러니까 기사단이 그녀의 힘을 받쳐 주지 못하는 지금, 무슨 일이 있더라도 크라레스를 멸망시켜야 해. 그런데 본국의 그 머저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빌어먹을 자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