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12화 – 절대 배우는 사람이 되지 말자
절대 배우는 사람이 되지 말자
투명한 물 속!
청아한 푸름이 숨쉬고 차가운 한기(寒氣)가 헤엄쳐 다니는 거대한 물의 흐름이 세상을 수놓는 곳. 그곳의 중심에 비류연이 서 있었다. 이곳은 소리가 함부로 나다니지 못하는 특별한 장소였기에
비류연이 조용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폭포 바로 밑 물 속이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싸고돌았지만 현재 그곳에 있는 비뢰문의 유일한 제자이자 계승자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지금 비류연의 손에는 한 자루의 비 뢰도(飛雷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여 눈 앞 5장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바위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지겹고 미운 사부 얼굴만한 바위 덩어리였다.
그 바위 덩어리는 크기가 사부 얼굴만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의 파괴 의욕을 두 배로 부추기고 있었다. 순간 비류연의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빠른 속도는 아 니었다. 물의 저항 때문에 아직은 지상에서처럼 빠르게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팔은 극심한 수압과 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어색함이 없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손에 쥐어져 있던 한 자루의 비뢰도는 물 속을 빠른 속도로 헤엄쳐 날아가 멀리 떨어져 있던 사부 대갈통만한 크기의 바위에 가서 박혔다. 엄청난 수압 이 온몸을 짓누르는 깊은 물 속에서 비도(飛刀)를 던졌는데도 비도는 자연의 법칙을 깔보기라도 하듯 유유히 물 속을 뚫고 날아가 바위에 박힌 것이었다. 하지만 이 런 자연의 법칙을 정복한 장한 쾌거에도 불구하고 비류연은 썩 기쁘지 않았다.
‘쳇, 실팬가……. 반으로 쪼개지지 않았군.’
비류연의 얼굴에 언뜻 실망의 빛이 스치듯 떠올랐다. 남들이 보면 대단하기 그지없는 공부(工夫)도 비류연에게는 단지 참담한 실패일 뿐이었다. 비류연은 다시 비 뢰도를 회수하기 위해 비뢰도에 연결된 뇌령사(雷靈絲)를 잡아 당겼다. 여기가 지상이었다면 어김없이 비류연의 손으로 되돌아왔을 비뢰도(飛雷刀)였지만, 보이지 않는 무형의 수류(水流)가 존재하는 수중(水中)에서는 반쯤 되돌아오다가 힘을 잃고 그냥 가라앉으려고 했다.
이 순간 물의 정령이 심하게 요동쳤다. 물살에 휩쓸린 비뢰도는 물결을 따라 물 속을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이미 통제를 벗어난 비뢰도는 더 이상의 조정이 불 가능했다. 아직 수련이 부족한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뢰도의 약점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수중전이 아닐까? 물의 저항과 거센 수압을 받으면 몸은 둔해지고 비도는 날아가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지 않는 무형이 흐 름이 더해진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물론 비도에 실려 있는 힘도 현저히 줄어든다. 속도(速度)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다. 빠르기가 생명인 비도가 빠름을 잃는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사검(劍)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거센 흐름을 따라 불규칙하게 물결치는 물 속에서 머리카락보다 가는 실(絲)을 조정(調停)한다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 다. 그나마 비도라면 물 속에서 느림보 거북이 걸음 같은 속도지만 약간의 거리 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게도 강도도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사검(劍)을 수중에서 부리려 든다면 세인들은 서슴없이 그 사람을 미친놈이라 부를 것이다. 못 믿겠으면 직접 물 속에다가 실을 넣어 보라. 실은 당장에 힘을 잃어 버리고 물이 흐르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러니 수중(水中)에서 비도(飛刀)를 던진다는 것은 폭풍이 거세게 치는 날 미친놈처럼 활을 쏘아 백 장 밖에 떨어진 과녁의 정 중앙을 맞추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더 쉽게 말하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비뢰문의 전대 조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난공불락의 장벽에 도전하여 세인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상식을 송두리 째 뒤엎어 버렸다. 비도(飛刀)와 사검(劍)의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비뢰도(飛雷刀)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바로 수뢰비(水雷飛)라고 불리는 상 급 수련 과정이었다.
수뢰비(水雷飛), 대충 ‘물 속을 나는 번개’라는 그런 의미를 지닌 이 과정은 무공(功)이 아니라 하나의 수련 과정이라 할 수 있었다. 비뢰도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수련. 이 수련을 위해 주어진 구결은,
“물과 하나가 된다. 물아(物我)의 구별이 없다. 나를 잊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자연과 하나가 된다.’
어쩌고저쩌고 하는 구결(口訣) 한 줄뿐이었다.
이제 1단계를 거의 완성한 비류연이었지만, 아직 비뢰도에 실리는 힘이 부족했고 속도도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진기를 다스리는 능력도 매우 부실해서 진기운 용(眞氣運用)이 필수인 사검(絲劍), 즉 뇌령사(雷靈絲)의 조정은 아직 꿈도 못 꾸고 있었다. 현재 비류연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물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게 비도를 던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흘러간 비뢰도를 다시 힘겹게 회수한 비류연은 화가 났다. 아직도 이 정도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열이 뻗쳐 나왔다. 그런 비류연 의 발 옆에 마침 수박처럼 둥근 바위 덩어리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비류연은 그 수박만한 바위를 들어올린 다음, ‘우아아아!’ 속으로 고함을 지르며 정신을 가다듬 은 다음 물 밖을 향하여 힘껏 바위를 던져 올렸다. 힘차게 날아가던 바위는 암벽에 부딪혀 다시 아래로 추락하는 위험을 간신히 넘기더니 이 세계를 떠나 공기가 존 재하는 다른 세상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이것도 수뢰비(水雷飛)를 익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바위가 어디로 날아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하는 것 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애꿎은 곳에다 화풀이를 하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슴이 답답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숨이 모자라서 일어난 일이었다. 비류연 은 아직 물 속에서 반 시진(약 1시간) 정도밖에는 버티지 못했다. 게다가 무공 수련을 하면 한식경(약 30분) 정도가 한계였다.
비류연은 다시 산소를 공급받기 위해 물 밖으로 올라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때는 물 위로 헤엄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암벽을 기어 올라가야만 했다. 왜냐하 면 현재 비류연의 두 손목과 두 발목에는 각각 140근, 도합 560근의 묵룡환(墨龍環) 4개가 차여져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던 비류연은 번 거롭게도 일일이 묵룡환을 벗어 차례대로 하나씩 물 밖으로 던져야 했다. 무척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비류연은 물 속에서 수련할 때는 차라리 이 묵룡환을 차고 있는 게 편했다. 처음에는 이것 때문에 죽을 고비도 넘겨야 했었지만 지금은 묵룡환이 없으면 수중 에서 균형을 잡기가 매우 힘들었다. 특히 이곳은 폭포 밑이어서 물살의 변화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물 밑바닥에 그냥 서 있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때문에 이제 물 속 에서 수련할 때는 항상 이 묵룡환을 차고 수련을 했다.
“푸우.”
비류연은 폐부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깨끗한 공기였다.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 주며 몸에 묻은 물기를 말려 주었다. 물 밑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상 쾌한 기분이었다.
앗, 그런데 이게 뭔가? 잠시 다른 세계에 있다가 땅 위로 올라온 비류연의 눈에 웬 흰머리 할아버지가 대(大)자로 뻗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할 아버지 얼굴이 파랗게 부어 있는 게 아무래도 얼굴에 큰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종의 타격이 무엇인지 비류연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노인의 입 안에서 게거품이 보글거리는 게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비류연은 쓰러진 노인에게 다가가 맥(脈)을 짚어 보고 몸 상태를 파악해 보았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절 레절레 흔들었다.
“쯧쯧, 죽었군.”
비류연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혀를 찾다. 숨은 멈추고, 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심장도 활동을 중지한 채 침묵했고, 몸에 흐르던 피도 흐름을 멈추었다. 누워 있 는 노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외딴 곳에서 어이없이 죽다니, 참 안됐군.”
아무래도 사인은 뇌진탕(腦蕩 같았다.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추측해 보건대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노인의 머리 뒤쪽에 뾰족 하게 솟아 있는 심술 궂게 생긴 날카로운 돌 때문인 것 같았다. 아마 뒤로 넘어지다가 재수 없게 뒤통수가 그 뾰족한 돌멩이를 강타한 것 같았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뾰족한 원추형 돌이 급소를 찍어 비명횡사의 직접적인 이유가 된 듯 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은 할아버지의 얼굴이 왜 푸르게 되었는지는 도무지 원인을 알 길이 없었다. 사체(死體) 주위에서는 아무런 흔적이나 잔재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시선을 번뜩이며 노인의 얼굴에 이 정도 타격을 입혔을 만한 흉기를 찾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냉철하고 날카로운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주장하는 비류연으로서는 이 할아버지가 미끄러운 암석 위에서 발을 헛디뎌 뒤로 자빠지다가 안타 깝게도 뒤통수가 원추형 돌부리에 부딪히는 바람에 뇌진탕을 일으킨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면에 가해진 모종의 자극에 대해서는 끝내 그 원인을 밝혀 낼 수가 없었다.
당연히 노인의 안면에 가해진 모종의 자극이 바로 자신이 물 속에서 홧김에 던진 바위라는 사실은 꿈에서라도 상상치 못하리라. 이미 한때 타의에 의해 살인 도구 로 전락했던 바위 덩어리는 이미 물 속으로 자취를 감춘 이후였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일에 비싼 머리 굴리기를 포기한 비류연은 자신의 이 비범한(?) 추리가 정확 할 것이라고 굳게 확신해 버렸다. 진상은 오직 하늘만이 알 따름이었다.
이런 외진 곳에 시체를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비류연은 이 노인의 시체를 염(민속, 풍수 지리에서 말하는, 무덤 속 시체에 드는 이상 상태 : 이상한 상태가 아니라 이상적인 상태)해 주고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시체를 염하기에 앞서 비류연은 시체의 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비뢰문(飛雷門)의 가르 침에 따라 뭐든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일단 밖으로 꺼내 놓았다. 그런 것들은 속세에서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당장 저승길을 가기엔 아직 일렀다. 속세 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이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무기도 포함해서 말이다.
저승에 가지고 가는 것은 옷 한 벌뿐, 그것으로 충분했다. 단 한 벌의 옷을 입은 사체(死體)야말로 무덤에 드는 가장 이상 상태(理想狀態)라는 것이 비뢰문에서 대 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의 골자였다. 꺼낸 물건은 이제 비류연의 물건이 될 것이다. 그것이 법칙이었다.
노인의 품 속에서는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이 많이 나왔다. 어린애 장난감처럼 생긴 동글동글하고 묵직한 호두 크기의 철담(鐵潭) 8개, 칼날처럼 얇은 팔찌 크기의 비환(飛環) 12개, 정교한 인피 면구 하나, 그리고 한 장의 서찰(書)과 보면 볼수록 마음이 흐뭇해지는 매우 묵직한 주머니 하나가 나왔다.
“어, 주머니가 상당히 묵직한데, 이야!”
비류연은 가벼운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쉿, 쉭.”
고개를 좌우로 맹렬히 꺾으며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비류연은 부푼 마음을 달래며 서서히 주머니의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서서히 주머니가 열리면 서 궁금증의 정체를 확인시켜 주었다. 주머니 속에는 찬란한 황금색 돈 덩어리가 무려 10개씩이나 들어 있었다. 게다가 은자 30냥 정도도 덤으로 들어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액수의 돈이 들어 있다니…….
‘빤짝빤짝 황금 돈 아름답게 빛나네, 랄라랄라!’
이 순간 비류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성을 상실한 것이다. 정말이지 그로서는 황금 10냥을 한꺼번에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평소 근검절약을 생활 신조로 삼 는 자신이 언제 이런 큰돈을 만져 볼 기회조차 있었겠는가?
‘황금 1냥이면 은자 20냥. 황금 10냥이면 은자 200냥. 거기에 덤으로 은자 30냥을 더하면 은자가 물경 이,이백삼십 냥. 내 2년 3개월치 월급! 2년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뜨겁고 거친 대장간에서 뼈가 빠지게 일해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다니! 이게 웬 횡재냐? 하늘님이 보우하사 나에게 이런 거액의 돈을
내리셨도다.”
기뻤다. 한순간에 이런 거액을 벌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이야!’
라는 흐뭇한 생각마저 드는 게 아닌가.
미친 듯이 방방 뛰면서 ‘만세, 만세, 만만세’를 연달아 외치고 있는 비류연의 눈에 한 장의 하얀 서찰이 들어왔다. 서찰의 겉면에는 ‘철담비환(鐵潭飛環) 진조운(湊 釣雲) 친전(展)’이라는 서(書) 한 줄이 멋들어지게 적혀 있었다.
친전(親展)이라는 말은 편지를 받는 분이 몸소 펴 보아 주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었지만 이미 그 편지를 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이제 다시는 편지를 몸 소 펴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므로 비류연은 자기가 대신 펴 보기로 했다. 혹시 돈 받은 값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러면서도 자신은 너 무 양심적이고 도덕적이라 늘 손해라는 생각을 하는 비류연이었다.
서찰
철담비환 진 노사(湊老師) 친전(親展)
저희 천무학관(天武學館)의 연례 행사이며 가장 중요한 전통인 하기 합숙 훈련(夏期合宿訓鍊)에 진조운 노사를 스승으로 초빙하고자 합니다. 지금이 그 아이들에 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무궁한 발전의 시기이지요. 저는 지금 그 아이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 정도(正道)를 이끌어 나갈 출 중한 인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노사의 높은 실력은 익히 알고 믿고 있으니 알아서 가르치십시오.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모 든 행위를 인정하는 바입니다. 혈연, 지연 등에 구애됨이 없이 공정하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특정 인물이 혜택을 입 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은 본신의 실력이 증명해 줄 겁니다.
장소는 아미산 천무 아미 수련원이고, 도착 예정 일자는 7월 15일입니다. 운용 지원금으로 황금 10냥을 함께 보내니 유용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지원금 이 모자란다면 무림맹 산하의 은장(銀莊)에 추가 지원을 부탁하십시오. 그리고 그때는 반드시 패를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기간은 3개월입니다. 아무쪼록 16명의 아 이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천무학관주(天武學館) 철권(鐵拳) 마진(眞)
“마진가(眞)? 이상한 이름이군!”
편지의 맨 끝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름 석 자를 보며 비류연은 중얼거렸다. 편지의 내용은 별로 분위기(?) 있는 내용의 글은 아니었다. 예법이나 격식도 일체 무 시한 용건만 간단한 이 서신은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쓰여진 글이었다. 뭐, 편지 쓴 사람 이름을 보니 분위기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마진가(馬眞 家)!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아도 역시 이상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야 어찌 되었건 쓰여진 편지의 내용은 비류연의 흥미를 솔솔 자극하고 있었다. ‘흠, 이거 재밌겠는데!’
지금 현재 비류연의 눈 속에 들어오는 글자는 ‘가르침을 베풀어’와 ‘지원금 황금 10냥’, 그리고 ‘추가 지원’이라는 글귀였다. 비록 앞의 두 글자보다 뒤의 ‘추가 지 원’이란 글자가 3배는 더 크게 보이기는 했지만 앞의 두 내용에 대해서도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재미있을 것 같다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무 미건조하고 따분하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비류연에게 이번 일은 한 모금의 청량제와도 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돈을 받았으니 대가를 지불해 야 되지 않겠는가.
‘가르친다……. 후후후, 킥킥. 그래, 가르쳐 주마. 사부가 나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철저하고 뼈저리게… 드디어 분풀이를 할 곳이 생겼군. 가르쳐 주겠어. 배운다 는 것이 얼마나 뼈빠지는 일인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뼈저리게 가르쳐 주겠어. 그리고 난 다음 하나씩 고수로 만들어 주겠어. 크큭큭.’
비류연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수련과 수행이라는 명목으로 혹사를 당해야 했던 자신의 처절한 과거를. 그때 그는 하늘에 두고 맹세했었다. ‘절대 배우는 사람은 되지 말자. 가르치는 사람이 되자.”
흔들리는 별을 바라보며 피 끓는 맹세를 했던 자신이었다. 비류연은 그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곧 알게 되리라.
그러나 결심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했다. 비류연의 머리가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어떻게 가 르칠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정체가 발각되지 않을지도……. 그런 그의 눈에 사체의 품에서 꺼낸 인피 면구가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 고 세밀한 인피면구였다.
순간, 비류연의 머리 속으로 하나의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졌고, 계획은 완성도를 더해 갔다. 아마도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필요하게 될 것 같았다. 더불어 긴 시간도 필요하리라. 어느 정도 아깝기는 했지만 자신의 놀이를 겸한 사업을 위해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결심한 이상 이젠 실행만이 남 았을 뿐이었다.
비류연은 우선 마을 서점을 찾았다. 왜냐하면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지식이 필요했고 지식은 책이라는 공간 속에 대부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가르침만 그걸 만일 가르침이라 부를 얼간이가 있다면 – 당해 왔지 가르쳐 보지는 못했기에 가르치는 것에 대한 정보와 인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래서 비류연은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교습 요령과 사사 방법이 들어 있는 책을 사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현재 비류연은 특별한 자료가 필요했다. 자신의 계획 을 완벽하게 실행시키기 위한 자양분이 되는 그런 정보와 자료들 말이다.
자신의 상식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아마 천무학관이란 곳에서 애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은 무공 초식 따위가 아닐 것이다. 이미 죽어 버린 노인도 무림인일진 대 함부로 자신의 절기를 남에게 선뜻 전수해 줄 수야 있겠는가. 그러니, 단순한 무공 초식이나 구결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무리(武理), 즉 무학(武學)의 이 치(理)를 가르치라는 뜻일 것이다.
그 정도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주도면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하지만 계획을 짠다는 것만으로도 비류연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비류연의 전신에서는 활기가 넘쳐흘렀고 그의 눈은 영롱한 빛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제 곧 그의 삶에 변화를 주고 즐거움을 줄 존재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 구워삶아 먹을지 면밀하 게 고민하는 비류연의 얼굴엔 한줄기 득의만면(得意滿面)한 미소가 번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한가득 담아 머리 속을 무수히 굴리면서도 비류연의 몸은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화살의 목적지는 마을의 한 서점이었다.
‘근데? 천무학관이 뭐 하는 데지??’
산을 내려가면서 비류연의 뇌리 속에 문득 의문 하나가 스쳐 갔다. 생각해 보니 그는 천무학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어디에 위치하며 그 구성과 세력이 어느 정 도인지도 모르면서 일을 벌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 천무학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억지로 뜯어서라도 말렸겠지만 비류연의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마을에 내려가 일을 해 돈을 벌기는 했지만, 대부분 폐쇄적인 생활만을 계속해 온 비류연은 현재 강호의 정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천무학관은 물론 이고 심지어는 그 유명한 구대 문파가 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사부는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는 배우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퀴퀴한 종이 냄새가 풀풀 풍겨 나오는 책방을 나서는 비류연의 손에는 두 권의 낡은 고서(古書)가 쥐어져 있었다. 오랜 시간 그 안에 있었는지 어깨와 머리 위에는 뿌연 먼지가 소복이 앉아 있었다. 세 시진 가량 먹물과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먼지 구덩이 속을 꿋꿋하게 뒤진 대가로 비류연는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자료를 찾 아 낼 수 있었다.
한 권은 당나라 시대에 쓰여졌다는 유명한 고서(古書)로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사기술』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었고, 다른 한 권 역시 같은 시대에 쓰여진 『당신도 고수가 될 수 있다』라는 유혹적인 제목을 가진 책이었다. 두 권 모두 같은 저자(著者)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 비류연이 알아 본 바에 의하면 그 사람의 성은 ‘사(詐)’, 이름은 ‘기군(欺君)’으로 사기군(詐欺君)이라는 당 시대의 저명 인사였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이 두 권의 책을 차디찬 감옥 속에서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의 사상과 행위가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을 부당하게 감옥에 처넣은 국가에 대한 울분을 삭이며 침통한 심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이 두 권의 책에 담았다고 한다.
비류연은 책방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필승 사기론(必勝詐欺論)』, 『비법 공개 절대 사기법(秘法公開絶對詐欺法)』, 『입문 사기 완전 초보(入門詐欺完全初步)』, 『대중 사기론(大衆詐欺論)』, 『강호 사기 대백과(江湖 詐欺大百科)』, 그리고 『백일 고수 완성(百日高手完成)』, 『완전 해부 고수란 무엇인가』, 『고수 탄생 이론(高手誕生理 』등의 관련 서적을 탐독해 보았지만 지금 자신의 손에 있는 두 권의 책보다 쉽고, 우수하며, 뛰어난 책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두 권의 책을 그 쓰레기 더미 같 은 책방 안에서 발견이 아닌 발굴(發掘)해 낸 것은 정말이지 비류연의 노력과 근성이 가져온 빛나는 성과였다.
이제 자료가 마련되었으니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고민하던 비류연의 얼굴이 가볍게 찌푸려졌 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료와는 달리 이것을 준비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는 판단이 서자 비류연의 입맛은 썼다.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귀하다고 해도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계획은 계속 진행되어야만 했다. 주욱~.
돈은 다시 구해야 했고 현재로서는 예산 초과라는 최악의 위기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만일 예산 초과라는 불의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모든 걸 다 때려치워 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준비는 지금부터다. 이제부터는 바빠지겠군.’
붉은 노을이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서 서서히 부서지며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비류연은 철화장이 위치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