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13화 – 지옥의 합숙 훈련장
지옥의 합숙 훈련장
지옥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다시는 발을 뺄 수 없는 깊은 수렁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했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타오르고 뜨거운 열기가 대지를 달구는 여름날, 숲 속에 숨어 있는 매미들은 온통 숲이 떠나갈 듯 큰소리로 울어 대고 있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놓여진 길을 따라 남녀로 구성된 한 무리의 일행이 터벅터벅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일행의 선두에 서서 걸어가고 있던 두 명의 젊은이는 무료함을 달래듯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한 명은 옷에 청룡이 수놓아져 있는 백색의 무 복을 입고 있었고 그 옆의 젊은이는 차분하고 조용해 보이는 청색의 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도복(道服)의 소매에도 푸른 용 한 마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소매에 푸른 용 한 마리를 감고 있는 푸른 도복의 사내가 그의 옆에서 함께 산길을 걸어가고 있던 백색 무복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말투로 보아 둘은 친구 사이인 듯싶었 다.
“이보게, 남궁. 아직도 멀었나?”
“이제 곧 도착할 걸세. 산을 오른 지도 꽤 되지 않았나.”
“아무튼 이 찌는 듯한 날씨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좋겠군. 이 땀 좀 보게. 난 지금 땀으로 목욕하고 있는 듯한 기분일세.”
“하하하, 동감일세.”
백색 무복의 청년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밝게 웃었다. 청년의 이름은 남궁상이라 했다. 이 짧은 몇 마디를 나눈 후 다시 묵묵히 산을 올라가던 남궁상은 자신을 누 르고 있는 침묵이 무료했던지 자신과 같은 구룡 중 한 명이며 현 무당파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절친한 친구 유유검(流劍) 현운(顯雲)에게 말을 건넸다. “이보게 현운, 자네 이번에 교양 과목으로 무엇을 들을 예정인가? 수강 신청은 끝냈나?”
“아, 그거? 일단 문(文) 쪽으로는 「노장 사상의 이해와 철학의 이해」, 그리고 「사상과 인간의 이해와 제2외국어를, 무(武) 쪽으로 「권(拳)의 사용」, 「쌍검학(雙劍 學)」 등을 들을 예정이야. 자네는?”
“호오, 대단하군. 역시 도사 지망생(道士志望生)다운 선택이야. 나는 문(文) 쪽으로는 「유가 사상의 이해」, 「중용주해(中庸註解)와 우주의 이해, 그리고 제2외국어 로 천축어를 수강할 예정이네. 무(武) 쪽으로는 「비도(飛刀)」와 「편법(鞭法)」 등을 들을 예정이지. 그런데 현운, 자넨 제2외국어로 무얼 들을 생각인가?”
“아, 나도 자네와 마찬가지로 천축어를 신청했다네. 천축어가 제2외국어 중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과목 아닌가. 수강 신청 인원도 많고 장래성을 생각해도 역시 천 축어지.”
“하지만 천축어는 어려운 과목이야. 점수 따기도 힘들고……. 그건 그렇고 자네 이번에 학점이 상당히 높다더군? 학관 내에 소문이 쫙 퍼졌단 말이야. 열심히 수 련을 했나 봐?”
“하하,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남궁, 자네 역시 평점도 상당히 높다고 관내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딴소리하긴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번엔 심 노사(老師)의 『원론 무도론(原論武道論)』에서 별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어. 그 선생, 점수 짜게 주기로 소문난 선생 아닌 가.”
“후후, 나도 강 노사의 『고대 유가 사상론(古代儒家思想論)』에선 별로 좋은 점수를 기대하기 힘드네. 그 선생 별명도 짠돌이 아닌가. 정말 짜지, 정말 짜. 자넨 절대 강 노사가 담당하는 강론은 듣지 말게나 후회한다네, 암 후회하고말고.”
“후후, 그렇게 하지. 내 자네 충고 명심하지. 그리고 이번엔 자네한테 지지 않을 거야. 이번 승리는 내가 가져가도록 하겠네.”
“누가 할 소리, 자네야말로 조심하게. 이번에도 자네 코를 납작하게 해 주지. 내가 저번 평가 때 자네보다 순위가 밀린 탓에 밤잠 여러 번 설친 거 아나? 이번에는 좀 편한 숙면을 기대하고 있다네.”
“이거, 세속의 인연을 끊고 진리만을 탐구한다는 신주제일도가(神州第一道家) 무당파(武當派)의 제자 분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언이구먼. 하하하!”
“그런가? 하하하!”
남궁상의 장난스러운 말에 현운은 약간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잘 나가는 무림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둘째 아들 남궁상과 무당파 2대 제자 현운, 두 사람은 학관(學館) 2년차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구룡 중에서도 항상 앞뒤를 다투는 경쟁자였다. 이렇듯 가장 강력한경쟁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가 좋은 것을 보면 상당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잘 가르치는 선생은 누구이고 수업만 들으면 졸리는 선생은 누구며, 들을 만한 과목은 무엇인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 던 그들의 뒤에서 발랄한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들떠 있었고 생기가 가득 흘러 넘치는 맑은 목소리였다.
“아이구, 진 소저께서는 그때 이후로 여전히 힘이 넘치는군. 정말 기쁜가 보이.”
뒤에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현운이 남궁상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 날 자신들의 수련 장소가 아미산이라는 것을 들은 직후 아미파가 자랑하는 속가 제자 출
신의 진령은 꿈속을 뛰어다니는 소녀처럼 생기발랄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아미산(峨嵋山)이겠나. 기쁜 게 당연하겠지. 자네도 합숙 훈련 장소가 무당산이었다면 기쁘지 않았겠나? 마찬가지일세.”
“후후, 그렇군.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겠지 나도…….”
순간, 현운이 말끝을 약간 흐렸다. 안색이 어두워진 것이 아무래도 합숙 훈련지가 무당산이 아니라 아미산으로 결정된 것에 대해 다소 마음이 상했던 모양이다. 자 신의 불행과 맞바꾸어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은 그들의 목적지가 아미산이라는 것을 안 다음부터는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고 생기발랄하게 움직이고 있는 아미파 속가 제자 진령이었다. 그녀는 일행이 아미산의 경계에 들어서자 더욱 힘이 솟는지 일행에 속해 있는 여자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귀향(歸鄕)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진령도, 합숙 훈련 장소가 아미산으로 정해져 약간 상심한 현운도, 앞으로 다가올 현실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있는 이 는 아무도 없었다. 지옥이라고 불리게 될 앞으로의 시간을.
한 식경쯤 더 걸어 올라갔을까? 사실 그들의 걸음 속도를 일반인이 보았다면 웬 사람들이 험한 산길을 겁도 없이 뛰어 올라간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늘이 그 정성 에 감동했는지 산 위쪽에 가려진 수림(樹林) 사이로 희뿌연 건물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모두들 들뜬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눈 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때였다.
“우수수…….”
갑자기 길 옆에 있는 곧고 높은 나무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위로부터 하나의 검은 인영(人影)이 떨어져 내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등장에 주작단 일행은 순간적으 로 검 자루에 손을 올리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인영은 수염이 없었지만 흰 머리카락에 얼굴은 가늘게 주름져 있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노인치고는 허리와 다리가 너무 꼿꼿했고, 아울러 전 신에서는 생기와 힘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언뜻 느낌으로 봐도 도저히 50대 노인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갑작스러운 등 장과는 다르게 별 특징 없는 얼굴의 소유자였다.
“누구시오?”
선두에 서 있던 남궁상이 상당히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다짜고짜 ‘누구냐?”라고 소리치지 않는 것을 보니 상당한 정신수양을 쌓은 녀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아마도 버릇없게 ‘누구냐?”라고 소리쳤다면 상당히 무시무시한 일이 자신의 신상에서 벌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남궁상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하리라. “잘 왔다. 환영하지.”
노인은 입가에, 그 자신은 상냥하다고 생각하지만 남이 보기에는 퍽 괴기스런 미소를 지으며 컬컬하고 탁한 목소리로 그들을 맞이했다. 아무도 그 미소가 악의 없 는 미소라는 것을 순진하게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때만 해도 자신들이 방금 들은 이 목소리가 16명의 일행을 지옥으로 안내할 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누구 도 알지 못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와 그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 안에 실린 불길함을 읽어 내지는 못했다.
남궁상 이하 주작 단원 16명은 노인의 손짓에 이끌려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상당히 넓고 컸다. 건물의 입구 위에는 ‘천무 아미 수련원(天武峨嵋修鍊院)’이라고 적혀 있는 고풍스러운 편액이 묵직하게 걸려 있었다. 특별히 낡거나 상한 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관리가 잘 이루어지 고 있는 듯싶었다.
현재 이 천무 아미 수련원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원래는 철담비환 진조운이 되었어야 했지만 그 운명의 화살은 이미 빗나간 지 오래였고, 지금 이곳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방금 전의 노인으로 변신한 비뢰문의 계승자며 밥줄이고 문파 운영 유지 관리인을 겸하고 있는 비류연(飛流沇)이었다. 그의 계획은 현재까지 차근차근 별다른 이상 없이 진행중이었다. 지금 비류연은 앞으로 석 달 동안 함께 지내게 될 귀여운 제자들과 상견례(相見禮)를 치를 예정이었다. 아직도 그의 입가에는 가느 다란 미소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특정 인물들을 향한 이 불길한 미소는 한 장의 인피 면구에 가려져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내 이름은 없다. 아니, 없다고 생각해라.”
주작 단원 16명을 모아 놓고 비류연이 던진 첫 말이었다.
앉아 있던 단원들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비류연을 쳐다보았다. 난데없고 두서없는 그의 말에 모두들 열심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적극적인 의문 표현을 하 지도 못한 채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들에게 비류연이 다시 한 번 폭탄 선언을 했다. 이번 폭탄 선언은 전번 것보다는 알아듣기 쉬웠지만 그만큼 사람들을 더 놀라게 하는 힘이 있었다.
“노부의 지금 이 얼굴은 진짜 얼굴이 아니다. 왜냐하면 난 지금 얼굴에 인피 면구라는 껍데기 하나를 쓰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앉아 있던 주작 단원 중 몇 명은 엉덩이까지 들썩들썩거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을 가르칠 선생이 지금 가짜 얼굴을 하고 있다는데 놀라는 게 당연했다. “놀랐나? 후, 놀라는 게 당연하겠지. 지금부터 노부가 왜 이 인피 면구라는 껍데기를 쓰고, 이름도 없는 무명인이라고 지칭했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주마.” 늙기는커녕 아직 20세도 넘기지 못한 미성년자(현재 비류연은 19세이다!) 주제에 지금 비류연은 노부라는 단어를 마구 남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쓰 다 말다, 또는 쓰지 말아야 할 때 쓰거나 써야 할 때 안 쓰는 등의 두서없는 어휘 사용이 마구 남용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은 아직 비류연이 완성된 사기꾼은 아니 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 가지 학문(사기술)에 매진한다고는 했지만, 역시 2개월이란 기간은 그 깊고 넓은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세계를 완전히 독파, 이해, 습득, 응용하기에는 좀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으므로 비류연의 사기 행각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다.
“이것은 모두가 나의 지고한 교육적 배려에 의해 창출되어진 일이다. 지금 현재의 노부의 신분과 지위를 볼 때 나는 여러 가문이나 문파와 매우 긴밀한 친분을 맺 고 있다. 너희들 중에서도 나를 매우 잘 아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인연으로 인해 너희들 중 특정 개개인에게 개인적 특혜를 베풀어 주기는 싫 다. 배움이란 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숨겨, 이번 가르침에 공정을 기하고자 한다. 내 비록 얼굴과 이름을 숨겼지만 혹시라도 너희들 중
에 나의 신물처럼 생각되어지는 독문병기나 무공으로 노부의 정체를 혹 눈치챈 사람들이 있다면 그대로 모른 척하도록 해라. 과거에 맺어졌던 나와 너희들과의 인 연은 지금 이 순간을 경계로 소멸되고 나와 너희들 사이에 남는 것은 사제(師弟)라는 인연 그 하나뿐이다. 명심해라. 나는 너희들과 아무런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 고, 일면식도 없는 처음 만난 사람이다. 앞으로의 일은 모든 것이 너희들의 실력에 달렸다. 너희들은 앞으로 나를 오직 사부님으로만 부르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나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너희들의 사부이다.”
“예, 사부님!”
모두들 우렁찬 목소리로 복명했다. 비류연은 귓가를 울리는 사부님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비류연은 특히 사부님이라는 단 어를 매우 강조했다. 사부님이라는 이 단어야말로 비류연이 이번 계획을 감행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짜 선생 비류연의 입에서는 강렬한 열변이 토해졌고, 우렁찬 목소리의 화답이 들려왔다. 아는 사람들이 봤다면 저놈 도대체 혀에 뭘 발랐기에 저렇게 혀가 유연 하게 잘도 돌아가느냐고 놀라 물었을 그런 상황이었다. 앉아 있던 16명의 주작 단원 중 순진한 애들 몇 명은 이미 비류연의 불꽃과도, 화산과도 같은 연설에 꼴딱 넘 어가,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는 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비류연이 그들을 만나자마자 자신이 인피 면구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고도의(?) 사기술 중 하나였다. 비류연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인피 면구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미리 만인에게 공개해 오히려 약점을 피해 가는 고도의 기만술 이었다.
만일 비류연이 자신이 인피 면구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하자. 만에 하나 실수하여, 또는 더러 눈치 빠른 사람이 있어 자신이 인피 면구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그들은 왜 인피 면구를 쓰고 자신들을 속여 왔느냐고 추궁할 것이고 그때 “그냥, 심심해서…….” 라는 등의 실없는 대 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비류연이 인피 면구를 쓰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약점을 지니게 되는 행 동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처음부터 왜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인피 면구를 쓴 채 그들을 가르치는지를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납득시켜 둔다면, 나중에 가서 그들은 비류연의 인피 면구의 착용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할 수 없게 된다. 혹시라도 제3의 인물이 나타나 “당신, 왜 인피 면구를 써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오?”라고 묻는다 해도, “그게 어쨌다는 것이야. 이유는 모두에게 이미 다 가르쳐 줬는데 말이야!” 하며 퉁명스럽게 한마디해 주면 끝나는 것이다.
이미 드러난 사실은 더 이상 비류연의 약점이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그 사실을 소재로 멋들어진 연설을 함으로써 이미 몇몇 애들에게는 존경심까지 심어 주는 데 성공했다. 존경심에 가득 찬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애들을 바라보며 – 다분히 착시 현상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다 – 비류연은 2개월 동안 열심히 공 부한 것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 흥에 겨운 비류연은 역시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사기술』은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숨을 고른 비류연은 더욱 차분한 표정과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서로의 통성명 시간을 갖도록 하지. 너부터 자기 소개를 해 보도록 해라.”
비류연의 검지 손가락 끝이 맨 앞에 앉아 있던 남궁상의 얼굴로 향해졌다. 지명을 받은 남궁상은 벌떡 일어서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모범생의 표본 같은 사내였다.
“전 남궁세가의 둘째 아들이며, 현재 주작단의 단주를 맡고 있는 남궁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 드립니다.”
남궁상은 정중히 포권의 예를 취하며 자신의 소개를 끝마쳤다. 인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는 표본을 보여 주는 것 같은 인사였다. 물론 이런 예의 바르고 정중 한 인사를 받은 비류연의 기분은 쭈욱 째지는 것 같았다. 기분 좋았다는 이야기이다.
남궁상을 시작으로 주작 단원들은 차례대로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주작단은 다양한 신분과 다양한 문파의 구성원들이 모인 집합체였다. 남자 제자 로는 무당파(武當派) 제자 현운, 사천당문(泗川唐門)의 셋째 아들 당철영, 청성파(派) 제자 청문, 화산파(華山派) 제자 조천우, 곤륜파(崑崙派) 제자 이자룡, 소 림사(少
까까머리 일공, 무림 최대의 상회라는 금호상회(金虎商會)의 외동아들 금영호, 개방의 제자 알거지 노학, 그리고 남궁상까지 남자는 모두 9명이 제자 었고, 여자 제자는 사천당문(泗川唐門)의 둘째 딸이며 당철영의 누이동생인 당문혜, 아미파(峨嵋派) 제자 진령, 남궁세가의 장녀이며 남궁상의 쌍둥이 누나인 남궁 산산, 단목세가의 장녀 단목수수, 모용세가의 외동딸 모용취, 화산파(山派)제자 화설옥, 그리고 황보세가의 장녀 황보옥연까지 모두 7명이었다.
‘이런!’
주작단의 남녀 구성 비율을 살펴보던 비류연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천무학관에서 이 주작단을 구성한 놈은 바보였단 말인가? 남자 아홉에 여자가 일곱, 남자가 여자에 비해 2명씩이나 많았다. 합숙 훈련 기간중에 사고(?) 일어나기 딱 좋은 구성 비율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상하기조차 찜찜한 불미스런 사태를 미 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여자 인원이 남자 인원보다 많거나 아니면 최소한 동수를 이루었어야 했다. 물론 동수도 짝이 맞으니 위험하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았다. 사내자식이 여자들보다 1명도 아니고 2명씩이나 많다니. 최악의 구성이라 평할 만했다.
“끌끌끌.”
비류연은 아쉬운(?) 마음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달이 뜨면, 아니 달이 안 떠도 밤만 되면 솟구치는 늑대의 본성을 제어하는 일은 이제 비류연의 몫이 된 것이 다. 그래서 정력 왕성해 위험천만한 늑대에게는 족쇄를 채울 필요성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무거운 족쇄를…….
“어험, 만나서 반갑구나. 이제 너희들과 나는 일시적이나마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다.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배움에 있어 한 번 사부는 영원한 사부님인 것이다. 앞 으로도 나는 너희들의 영원한 사부님이며, 너희들은 나의 영원한 제자들이다. 누군가에게 그 어떤 무엇이라도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미 끊을 수 없는 사제의 연이 맺어졌다는 것. 그러니 이를 명심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사부님!”
“허허허, 그래그래. 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내 너희들에게 선물 겸 기념품을 하나씩 주도록 하겠다. 고맙게 받도록 해라.”
비류연은 무지무지하게 돈 들어간 물건이다, 라는 말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으며 목구멍 뒤로 삼켰다. 선물을 준다는 비류연의 말에 단원 모두는 얼굴에 기쁨 의 빛을 띠었다. 자고로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비류연은 자신의 옆에 놓여 있던 큼직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거무튀튀한 나무로 만들어진 아무 런 문양이나 장식도 없는 평범한 상자였다. 언뜻 보기엔, 아니 실제로 평범한 상자였지만, 상자 안에 든 물건은 결코 평범하거나 범상한 물건이 아니었다.
검은 상자 안에는 현재 비류연의 손목에 차여 있는 묵룡환과 똑같은, 짙은 검은색을 띤 팔찌 모양의 묵환(墨環) 수십 개가 들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상자 안
에 든 묵환에는 양각된 용의 조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량 생산품이었기 때문에 용 조각까지 해 넣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던 탓이다.
비류연은 이 묵환(墨環)들을 각각 네 개씩 주작 단원 전원에게 나누어주었다. 주작 단원은 모두 16명이니, 상자 안에는 모두 64개의 묵환이 들어 있었다. 이 64개 의 묵환을 만들기 위해 비류연은 2개월의 시간과 황금 5냥이라는 거금을 투자해야 했다. 제작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묵룡환이 싸구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게 된 비류연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덤으로 쇠도끼 2개와 무쇠로 만든 강철 빨래 방망이 3개도 함께 만들었다. 피 같은 예산의 반이 날아가는 작업이었다. 더군다나 다시 회수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웠다.
각각 4개씩의 묵환을 받아 든 주작 단원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악, 억, 우욱! 하는 각양각색의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무심코 받아 든 묵환 4개 의 무게는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순간 어깨가 빠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묵환은 비류연의 묵룡환 만큼 무겁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무게가 50근, 4개 도합 200근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무지막지한 선물이었다. 그러니 모두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겁하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이 처음 묵환을 받았을 때처럼 기겁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비류연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