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16화 – 수상립, 수상보

수상립, 수상보

수면 위를 흐르듯 떠 있는 태양 아래에서 한 사람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누군가 그의 몸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듯이 한없이 느리고 지루해 보였다. 그의 이름은 현운. 신주제일도가라 불리는 검(劍)의 명가(名家) 무당파의 미래를 이끌어 갈 기재라고 불리며 온갖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들어가길 갈망하는 천무학관에 단 한 번에 떡하니 붙어 강호에 그 실력을 확인시키기도 했다.

천무학관에서는 날고 긴다는 9파와 1방, 5대세가, 그리고 기타 문파들의 인재들을 누르고 최고 중의 최고라는 구룡의 일 인이 되어 강호를 꿈꾸는 모든 젊은이들 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 그 능력을 인정받아 무당(武當)에서 함부로 전하지 않는다는 비전 중의 비전 태극검을 장문인으로부터 전수받았다. 그 태극검이 마 치 구름과 같아 잡을 수도, 누를 수도, 벨 수도 없다 하여 유운검이라는 명호까지 받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움직임은 지금 너무나 엉성하고, 힘겨워 보였 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두 눈동자는 답답함을 호소하는 모양이 아무리 봐도 무언가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 장난이 아니군!”

현운은 지금 뼈가 에일 듯한 냉기와 더불어 물의 무게가 주는 거대한 압력과의 힘겨운 싸움을 지탱하고 있었다. 물의 저항, 그 물이 가진 저항력이 지금 검이 나아 가야 할 길을 붙잡아 방해하고 있었다. 이젠 차츰 한계를 느꼈다. 아무리 내공을 이용해 버티려고 해도 이미 한계의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이 차가운 계곡 속에 들어 온 지 이미 반 각, 더 이상 물을 가르며 헤엄치듯 검을 움직이기란 무리였다. 폐로부터 답답함이, 심장으로부터는 터질 것만 같은 압력의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온몸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한계인가.’

아무리 검을 움직여 봐도 태극검의 검로를 따라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천 근의 검을 손에 잡고 휘두르는 느낌이 들었다. 사부는 이 속에서 아무런 저항감 없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를 수 있어야 이 훈련이 끝난다고 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언제 이 훈련이 끝날지 아직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이 훈련이 마지 막 훈련이라고 하니 그 말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아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푸하!”

“헉, 헉, 헉.”

수면을 뚫고 얼굴 하나가 물보라와 함께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인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상당히 고통스러웠는지 숨이 거칠고 불규칙했다. 겨우 반 각 만에 마셔 보는 공기였지만 현운으로서는 마치 백 년 만에 처음 마셔 보는 듯한 한없이 맑고 청량한 공기였다. 누가 그랬던가. 공기가 없을 때 비로소 공기의 소 중함을 알 수 있다고?

아무도 한 적 없는 말을 떠올리며 공기를 들이마시는 현운은 자신이 지금 공기를 마시고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늘에 감사했다. 그런데…….

“안 돼, 안 돼. 어, 이러지 마. 나 떨어져. 이러지 말라니깐. 으앙, 안 된다니깐. 어어, 어머머.”

팔은 허우적허우적, 허리는 흔들흔들, 다리는 부들부들, 몸은 기우뚱기우뚱. 아무리 균형을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고 노력을 했건만 그러한 노력도 끝 내는 무위로 돌아가고 수다스러운 말, 나불거리는 입과 함께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풍덩.”

물보라가 심하게 일면서 수면이 일렁거리고 높은 파문이 생겼다.

“으아아악, 안 돼. 이러면 안 돼, 안 돼. 아악, 풍덩!”

“어머, 어머, 풍덩!”

“엄마야, 풍덩!”

“아빠야, 풍덩!”

“어머니, 풍덩!”

“연수 소저, 풍덩!”

“……, 풍덩!”

“어버버, 어버버. 풍덩!”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비명을 지르면서 계곡 물에 몸을 던졌다. 그렇다고 이들이 세상을 비관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 자살할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 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생존 욕구가 높고 강렬했다.

꽉 찬 욕조에 물체를 넣으면 그 부피만큼 물이 넘친다고 했던가? 연못에 돌을 던지면 그 무게만큼의 파문이 생긴다고 했던가? 이와 같은 학설 그대로 진령이 몸을 던지자 그 여파로 수면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덕분에 그녀와 함께 물 위에 겨우겨우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씩 균형을 잃고 물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런데 물 위에 서 있다니? 사람이 어떻게 물 위에 서 있을 수 있는가. 이들에게 어느새 신통방통한 신통력이라도 생겨난 것일까? 사실 그들이 물 위에서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조각의 작은 나무 판자 때문이었다. 그 나무 판자 조각은 보통 사람의 발보다 한 뼘 정도 더 길고 한 뼘 정도 더 넓은 모양의 판자였다. 이걸 이용 해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조그만 나무 판자를 이용해 물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보통의 재주가 아니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각각 한 발에 하나씩 나무 판자를 대고 물 위에 선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 감각이고, 그 다음은 기(氣)를 이용하여 몸을 가볍게 하는 경신의 비술이다. 나무 판자는 두 조각이므로 서로 따로 따로 놀려고 하기 때문에 판자를 지탱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끈이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기(氣)와 육체의 감각으로 해결해야 한다. 물은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변화하고, 이런 물의 유동성에 의 한 변화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조금만 방심해도 곧장 수중(中) 행인 것이다.

물 위에 서 있을 수 있다고 수련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물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단계를 수상립(水上立)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 단계로 수상보(水上步), 또는 수상행 (水上行)이라 불리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판자 두 개에 몸을 의지해 말 그대로 물 위를 걷거나, 움직이는 단계이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수면 위를 미끄러지며 움 직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단계는 그저 일직선으로 앞으로 걷기만 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3단계가 가장 중요한 기술로, 무척 까다롭고 어려운 기술이었다. 그 어려운 기술을 보여 준다며 비류연이 시범에 들어갔다. 비류연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쉽게 나무 판자 위에 섰다. 마치 맨땅에 서 있는 사람처럼 흔들림이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잘 봐.”

비류연의 오른발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앞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왼발 쪽으로 당겨졌다. 동시에 비류연의 왼발이 뒤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오른발 쪽으로 당겨졌다. 그러자 비류연의 몸은 자연적으로 반 바퀴를 돈 상태가 되었다. 비류연은 이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비류연의 몸이 물 위에서 춤추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몸의 회전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계곡의 물이 마치 뱀처럼 비류연의 몸을 감고 말려 올 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물에 마법이 걸려 진짜로 비류연의 몸을 감고 올라간 것은 아니다. 주위에서 볼 때 그렇게 보인 것뿐이다. 실제로는 비류연 주위에 발생한 경력에 의해 만들 어지는 무형의 기둥을 타고 물이 말려 올라가는 것이 옆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물이 비류연의 몸을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회전에 의해 발생한 경기가 수면 위의 물을 끌어당긴 것이다.

이윽고 수면 위에 하나의 물기둥이 생겨났다. 모두들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항상 이상해 보이던 사부가 저런 묘기를 보여 주니 누구 하나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합”

물기둥 안에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펑”

순간 물기둥이 폭파하며 사방으로 비산되었다. 당연히 옆에서 꼼짝 않고 뚫어져라 시범을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예고 없이 날아온 물세례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잘 봤지. 해 봐!”

놀랍게도 비류연의 몸에는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모두들 넋을 빼고 말을 잃었다. 방금 전의 물기둥 현상, 즉 물이 경기에 의해 말려 올라오는 현상은 봉황무 를 극성으로 펼쳤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봉황무의 화후가 높을수록 물기둥의 크기는 커진다. 그것으로 봉황무의 발생 영역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수상립(水 上立)과 수상보(水上步)는 바로 비류연이 사부에게서 비뢰문의 비전신법인 봉황무를 배워 익힐 때 받은 기초 단련 훈련법이었다. 그것을 지금 자신의 제자들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익힐 때 받았던 고통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그 다음이 바로 물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수련이었다. 꼭 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도(刀)를 쓰는 사람은 도(刀)를, 창(槍)을 쓰는 사람은 창(槍)을, 암기를 쓰 는 사람은 암기를 이용해 휘두르고, 찌르고, 던져야 했다. 이 두 가지 훈련이 바로 이들의 수행 마지막 단계였다. 비류연이 그들에게 해 줄 마지막 수련이 될 것이다. “현운, 넌 너무 빨라. 너무!”

호통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부의 목소리였다. 이계(異界)에서 돌아와 공기를 마시는 기쁨의 순간도 잠깐. 다시 불행의 시간이 찾아왔다.

“야, 겨우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나오는 거냐. 적어도, 최소한 일 각 이상은 버텨야 할 것 아니야. 너 일 각만 싸우고 칼 놓을래? 일 각 후엔 그냥 콱 남의 칼에 맞고 죽어 버릴래? 그렇게 죽고 싶어!”

“아니요.”

풀이 죽은 얼굴로 현운이 대답했다.

“그럼 냉큼 들어가.”

“예에.”

힘없이 대답하고 현운은 다시 물 속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당분간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너! 당삼(唐三)이.”

비류연의 손가락이 손빠르고, 독(毒)하다는 당씨네 셋째 아들 당철영을 가리켰다. 원래 그의 이름은 당연히 당삼이 아니었다. 그래도 강호의 명문가이자 5대세가 의 일문인 당문(唐門)이 가난한 천민들이나 잡놈들이 애가 나오는 순서대로 성만 붙여 주고, 순위대로 일이삼사(一二三四)로 이름 붙이는 것처럼 자식들 이름을 정 할 리는 천(千)에 하나, 만(萬)에 하나, 천만(萬)에 하나도 없었다. 비류연이 자기 맘대로 당철영의 이름이 부르기 귀찮다고 그냥 당씨네 세 번째라고 당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불리는 당사자 당삼, 아니 철영의 입장으로는 기껍지 않은 일이었지만 힘없는 자의 설움을 곱씹으며 참아야 했다.

“예? 저요?”

지금 댁이 가리킨 사람이 내가 맞소? 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얼굴에 갖다 댄 당씨네 셋째 아들이 확인하는 듯한 말투로 응답했다.

“그래, 너 말야. 너 말고 땡삼이가 여기 또 있어? 모른 척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예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한껏 소태 씹은 얼굴로 힘없이 대답한 후 당삼이 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계속해서 한 명씩 한 명씩 차가운 계곡 물 속에 집어넣었 다가 빼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여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남녀 불문하고 누구나 다 집어넣었다. 자신이 예전에 당했던 일들을 자신의 제자에게도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비류연의 철학이자 지론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부에게 그런 꼴을 당했으니 내 제자들도 이 사부가 겪어야 했던 일들을 고스란히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쉽게 말해서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있는 것이요, 화산에서 뺨 맞은 놈이 숭산 가서 화풀이하는 꼴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씩 물 속으로 사라져 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악질 사부 비류연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에는 남궁상이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온 몸이 물 먹은 이불처럼 축 처져 있는 것이 죽었는지 살았는 지 생사가 묘연하였다. 아까 전에 숙달된 조교랍시고 너무 들락날락하다가 진이 빠져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해는 중천, 시간은 많았다. 저기 하늘 위에 걸린 해가 저쪽 서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을 때까지 이들은 계속해서 물 속을 들락날락해 야만 했다. 물 위에 서 있는 연습을 하다 빠지면, 빠진 김에 물 밑에서 휘두르는 연습을 해야 했다. 물 위에서는 하체를, 물 밑에서는 상체를 중점적으로 단련하는 것 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오고가야만 했다. 차가운 물 속과 위태로운 물 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