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권 21화 – 16인 무사의 귀환

16인 무사의 귀환

지금 당장이라도 지상으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어둠의 장막을 수놓고 있는 은빛 별의 바다. 계속 바라보면 그 아름다운 자태에 눈물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우주의 신비 아래에서, 별의 강(星河)이 가로지르는 검은 비단의 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궁상 떤다.’라고 말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청년은 끝없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청년은 계속해서 밤하늘만 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별이 참 아름답네요. 무슨 생각을 그리도 깊게 하고 계시나요, 남궁 공자.”

바람을 타고 들려 온 감미로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는 남궁상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밤의 축복. 별의 강 아래, 아름다운 월광을 받으며 진령이 다소 곳이 서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별천지를 뒤로하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선녀가 지상에 현신한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눈부신 모습이었 다. 남궁상은 잠시 그녀의 자태에 취해 황홀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천상의 선녀 같은 그녀의 미모는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니었고, 그럴수록 그를 더욱 더 끝없 이 매혹시켰다.

“아, 진 소저. 이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여러 생각들이 들어서 잠을 청할 수가 없어서요.”

“오호호, 사실 저도 그래요. 이상하죠? 그 동안 힘든 일만 많았고, 좋은 일은 적었는데. 그때는 언제나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났으면 하고 바랐는데, 막상 내일 떠난다고 하니 왠지 실감이 나지 않아요. 잠도 오지 않고 해서, 별이라도 보려고 나왔는데……. 남궁 공자께서 먼저 선수를 치셔서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시는군요.” 진령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미소에 남궁상은 저절로 마음이 흔들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 서 처음으로 마음을 빼앗은 여인이 지금 자신을 향해,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것인 미소를 보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의 미소는 그의 가슴을 심하게 분탕질 치게 만들었다. 야심한 밤중, 찬란한 별의 강, 보름의 월광 아래에서 이렇게 가슴 속 깊이 사모하는 여인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영혼까지도 그녀의 손길에 속박당한 듯 온몸이 긴장되고 혀가 굳어지며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순간, 남궁상의 머리에서 뇌성벽력이 치고, 땡땡거리며 요란한 경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쉽게 깨닫지 못했다. 그러기에 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황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진령이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았기 때문이다. 그 가냘픈 미혹의 몸을 자신에게 찰싹 붙이면서…….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서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용솟음쳐 올라와, 격류가 되어 격하게 전신을 범람하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알 기나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얼굴로 그의 곁에 나란히 앉은 진령은 여전히 아름다운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보석으로 수놓아진 검은 비단 같죠. 저토록 밤하늘이 맑으니 내일은 분명 날씨가 좋을 거예요.”

“아, 예, 그렇군요.”

우물쭈물하는 남궁상. 여전히 숙맥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진보(進步)라는 단어의 습득과 학습이 여전히 부족한 녀석이었다.

“저, 상처는 괜찮으세요?”

지난 번 숲에서 만난 백호에게서 자신을 지키려다가, 백호의 발톱에 입은 상처를 생각하며 진령이 물었다. 몇 달이나 지난 일이었고, 이제는 상처도 다 아물었지 만, 상당히 깊은 상처였기 때문에 혹시 또 다른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상처요? 예, 멀쩡합니……칵!”

남궁상의 당당한 소리가 끝을 맺지 못하고 멎고 말았다. 동시에 호흡도 함께 멎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궁상이 진령에게 피습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진령이 그녀의 가냘픈 손으로 남궁상의 상처 입었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행동은, 남궁상의 생명 유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아름 답고 가냘픈 옥수(玉)는 남궁상에게 그 어떤 흉기보다도 무서운 것이 될 수 있었다. 당연히 남궁상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상의 전신은 경직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호흡은 아주 약해져 이제는 미약한 숨소리만이 겨우 들려 올 뿐이었다. 흥분한 탓에 피가 얼굴 로 몰렸는지 얼굴이 뜨겁게 느껴졌다.

‘어, 이게 무슨 느낌이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황홀한 환희의 감정과 함께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누르는 감촉이 있었다. 진령이 남궁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온 것이 다. 정적이 찾아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시간 동안,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두 사람은 그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침묵만이 둘 사이를 묵묵히 채우고 있었다. “그땐 정말 고마웠어요.”

침묵의 저울이 진령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녀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땐 고마웠다고…….

“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걸요.”

너무나 감미로운 그녀의 목소리에 남궁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남궁 공자는 나의 생명의 은인인걸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 진정한 생명의 은인은 사부님이십니다. 백호를 물리친 것은 그 분이시지요.”

천성이 순수한 탓일까, 남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려 하지 않고 남궁상은 사실을 얘기했다. 생명의 은혜를 자신에게 돌려 진령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는 행동 이, 그가 잔머리를 굴릴 줄 모르는 정직하고 곧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저를 진짜 위험에서 지켜 주신 분은 남궁 공자시잖아요. 그 때문에 등에 상처도 입으시고…….”

그녀의 미소와 말은 남궁상에게 너무나 부드럽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상처는 별거 아닙니다. 이제는 흔적도 없는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남궁상의 등에는 아직도 백호의 발톱에 의해 길게 찢겨진 세 줄기의 상처가 깊게 남아 있었다.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하 지만 남궁상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사모하고 있는 여인을 지키려다가 얻은 훈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등의 상처가 평생토록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후,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이렇게 선명한데.”

다시 진령이 남궁상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때 입은 상처가 깊었기 때문에 옷 위를 만져도 얇은 천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간단히 아물 만큼 가벼 운 상처가 아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진령이었다. 아마도 평생을 등에 지고 살아가야 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 그 상처가 자신을 지키려다가 생긴 상 처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남궁 공자.”

나직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가 남궁상을 불렀다.

“예.”

남궁상도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듣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모두들 조용히 침묵하고, 잔잔한 고요함만이 두 사람의 주위를 감싸 돌았다.

“다음 번에 또 그런 일이 생겨도 저를 지켜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아주 차분하고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남궁상이 말했다.

“계속해서?”

“예, 계속해서요.”

“평생?”

남궁상이 놀란 눈으로 진령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비쳐 들어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은 깊고 아름다웠다. 심연의 빛을 머금고 있는 까만 눈동자는, 끝없이 깊고 아름 다운 빛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황홀한 눈빛이었다. 이 세상에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매료되지 않는 남자는 아마 없을 거라고 남궁상은 생 각했다.

“영원히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제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남궁상은 그녀의 입술에 맹세의 언약을 담은 입술을 조용히 포개었다. 정말 황홀한 경험이었다. 순간 그의 머리 속은 백지처럼 하얗게 비워졌다. 그리고는 입술부터 시작하여 몸 전체로 퍼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들. 남궁상은 자신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감미로움 에 취해 겨우 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아 버렸다. 첫 입맞춤이었다.

잠시 후, 남궁상이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의 입술은 진령의 입술을 덮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고 왼손은 진령의 하얀 목덜미를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그 녀의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은 것은 아니었다.

앞뒤 없이 끌어안고 있는데도 진령은 반항하지 않았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현재 상황과 행동을 파악한 남궁상은 화들짝 놀라 입술과 손을 허둥지둥 뗀 다음 머 쓱해진 얼굴로 진령에게서 돌아앉았다. 돌아앉은 그의 등에 진령이 자신의 등을 가져다 맞대었다. 그녀의 체온의 등을 타고 남궁상에게 전해졌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침묵의 저울이 남궁상 쪽으로 기울어졌는지 남궁상이 움직였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은 채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섬섬옥수(纖纖玉手)라는 말이 형체를 가지게 된다면 바로 그녀의 손일 것이다. 그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함은 말로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별이 깊어 가도록 두 사람은 여전히 등을 마주대고 앉아 서로의 체온을 음미하고 있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온기(溫氣)를.

주작 단원들은 모두 멍한 얼굴로 하, 하는 짧은 한숨만을 내쉬면서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모두들 연신 하품 을 해 대며 눈물을 찔끔거리는 모습이 밤잠을 제대로 잔 사람들의 몰골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밝은 날, 푸른 하늘 보며 맹한 표정들을 짓는 16명의 처녀 총각들, 그 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본인들 외에는 알 수 없었다. 일렬로 열을 맞추어 서 있는 16명에게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모두 꿈 속을 노 니는 듯한 멍한 표정이라는 것이고, 둘은 모두 눈 밑이 어두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어제 잠들 안 잤냐?”

비류연은 천천히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하긴, 이렇게 훌륭하고 존경스럽기까지 한 사부님의 곁을 떠나게 됐으니, 그 슬픔에 잠이 안 올 만도 하지. 그럼, 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러나 모두 비류연의 말에 긍정의 표현 없이 연신 하품만을 해 댈 뿐이었다. 좀 어처구니없고, 조금은 한심하기 까지 한 그들에게,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래, 다들 소감이 어땠냐?”

잠시 잠깐의 침묵. 무엇을 생각하고 있음인지 모두들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하, 그 친구가 드디어…….”

남궁상의 절친한 친구인 도사(道) 현운이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아아, 난 언제쯤 해 보려나?”

푸념하듯 당철영도 한마디했다.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는 가지 않았으니 뭐…….”

청성파의 제자 청문이 아쉬운 듯한 어투로 말했다.

“갔으면 일났지. 쩝, 거지는 그런 거 못 해 보나?”

한 번쯤 꼭 해 보고 싶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학이 말했다. 거지라는 직업은 그런 로맨스를 갖기 힘들게 한다는 사실이 그를 불만스럽게 했다. 하지만 내심, 그 언젠 가는 꼭 해 보리라 단단히 결심해 보는 노학이었다.

“어머, 부끄러워.”

노학 옆에서 난 소리였다. 화산에서 매화 향기 맡으며 자랐다는 화설영이, 얼굴을 매화 꽃잎처럼 붉게 물들였다.

“달콤할까? 시큼할까?”

단목수수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여자였다.

“누군 좋겠다. 그런 것도 해 보고.”

“…..”

까까머리 소림 땡중 일공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원래 말이 없는 녀석이었다.

“나도 해 보고 싶은데…….”

황보가(家)의 여식이, 얼마만한 의미가 담긴 말인지 알고서나 뱉는 것인지 문제 발언을 했다.

“아, 그럼 나하고…….”

“퍼.”

노학의 눈이 부풀어올랐다.

“그 실력으로 볼 때 처음이 틀림없어.”

음,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중대한 문제를 토론하고 있는 사람처럼 금영호가 말했다.

“어머, 정말. 누군 좋겠네.”

단목수수가 말했다.

“나라면 그대로 눌렀을 텐……악.”

금씨 집안의 장자가 발등을 부여잡고 깡충깡충 뛰었다. 깡충거리는 그의 옆에서 남궁산산이 도끼눈을 치켜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의 발등을 무자비하게 가차없 이 찍은 것도 아마 그녀이리라.

동료들의 목격 소감을 듣는 남궁상과 진령의 얼굴은 정말 볼 만했다. 잘 익은 홍시처럼, 검이 되기를 기다리는 달구어진 쇳덩이처럼 붉게 달아올라 붉어진 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히 담겨 있는 표정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이, 야!”

잠자코 잠시 애들이 하던 짓거리를 지켜보던 비류연이 눈웃음을 멈추고 버럭 외쳤다.

“이것들이 하라는 사부 예찬은 안 하고 뭐 하는 짓이냐, 소란스럽게. 어제 다들 잠 안 자고 뭐 했어? 다들 눈 밑에 기미가 끼어서는, 쯧쯧쯧.’

비류연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셨다. 그리고는 입술이 약간 말려 올라간 강렬한 눈빛으로, 두 눈을 힘껏 부라리며 고압적인 자세로 제자들을 노려보았다. 주 작 단원 16명은 찍소리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 그러나 잠시 동안의 침묵은 식탁에서 떨어진 찻잔처럼 금방 깨져 버렸다. 비류연의 갑작스럽고 느닷없는 행동 때문이었다. 비류연 자신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행동…….

“하~암!”

느닷없는 하품.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하품에 놀란 비류연이 다급하게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하품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 돌이킬 수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현운이 치고 올라왔다. 현운은 매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매우 정중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사부님, 웬 하품이십니까? 밤잠을 설치셨나 보죠? 건강을 생각해야죠.”

빈정거림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말투였다.

“험험, 아니 난 그저 사랑하는 제자의 어깨가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이상이 생길까 봐서……. 검객에겐 어깨가 중요하잖니. 그래서 걱정이 되어서.

그러나 물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토를 달았다 간 무사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자꾸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제자들의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비류연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현운을 쏘아보았다. 두 눈에 광채가 번득거렸다.

“난 그렇다 치고, 네놈들은 도대체 어제 뭐 했냐?”

순간 모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위기를 타개하고 전세까지 역전시키는 질문이었다. 이번에는 현운이 할 말이 궁색했다. 비류연의 의미심장한 눈동자가 남궁상을 향했다. 남궁상의 빨간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러자 대표로 현운이 나서서 말했다.

“아, 저희들이야 물론 존경해 마지않는 훌륭하고 위대하신 사부님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밤잠을 설친 것이죠.”

도사 신분에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잘도 능청스럽게 거짓을 말하는 현운이었다.

“호, 그래?”

이번에는 비류연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눈빛은 ‘웃기지 마.’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럼요.”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현운이 말했다.

“그래요, 사부님. 현운 도사 말대로 사부님과의 이별 때문에 잠을 못 이룬 거예요. 사부님 곁을 떠나야 하는 이 마당에 어찌 잠이 제대로 올 수 있었겠어요.” 단목수수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무사히 넘어갔음인가, 비류연의 눈빛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생글거리는 미소와 더불어 초승달처럼 그어진 눈으로 제자들을 훑어보며 비류연이 말했다.

“오호, 그럼 어젯밤 지붕 위에 있던 여인네 3명은 누구였더라? 지붕 위에서 보니 더 밝은 빛을 내더냐?”

여인네들, 남궁산산, 단목수수, 당문혜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내심 더욱 뜨끔뜨끔했을 것이다.

“그리고 푸른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서 올빼미 흉내를 내던 남정네 둘은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전망이 좋더냐?”

남정네, 노학과 현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떻게 알았지?” 라는 의미를 담긴 시선을.

“이끼 낀 바위 뒤에 찰싹 달라붙어 기척 지우기 연습을 하던 두 사람은 또 어디 사는 누구였지?”

“수풀 뒤에서 빼꼼하게 눈만 내놓고 있던 놈 둘은? 벌레 소리가 귀에 듣기 좋았나 보지?”

하지만 움찔거린 건 놈 둘이 아닌 여자 둘의 어깨였다. 화산(華山) 산다는 화설옥과 모용씨 집안의 여식 모용취였다.

“변소 지붕 위에서 냄새 맡고 있던 놈, 부엌 건물 모서리에서 고개 빼꼼 내밀고 있던 놈.”

비류연이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사람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비류연이 꼬집어 낸 사람의 수는 모두 14명. 남궁상과 진령, 두 명을 제외한 14명 모두는 어젯 밤 저녁 어딘가에 숨어서 무엇인가를 지켜보았다는 이야기였다. 남궁상과 진령의 얼굴빛은 이제 이 세상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찌 붉은 피가 돈다는 인간의 얼굴이, 어떻게 이토록 하얗게 될 수 있겠는가. 진령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째서 알아채지 못했을까? 14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모두 그들 주위에 은신한 채 있었는데, 강호 삼류 잡배도 아니고 일류라는 소리를 들어도 부족함이 느껴지는 자신이 14명이나 되는 대인원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하다 니.

그 이유의 하나는 남궁상과 진령이 그때의 상황에 너무 집중하여 주변 일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은신한 사람들 역시 일류라는 소리가 부족할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당분간 얼굴 제대로 들고 돌아다니기 어렵게 되었다. 무슨 배짱으로 낯을 들고 다닌다는 말인가. 몇 달 간, 아니면 몇 년 간 땅만 보고 걸어야 할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백한 얼굴, 새파란 입술, 굳어진 몸,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눈웃음을 지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더 이상 곯려 먹었다간 오늘 시체 치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 시체는 부끄러움을 못 이겨 자해한 시신일 수도 있고, 참다 못 참아 폭발해 칼부림하는 인간의 칼에 맞아 죽은 시체일 수도 있었다.

“험, 그 얘긴 이제 그만 하자꾸나.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니 이런 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며 소란 떠는 것이 우습구나.”

비류연은 잠시 몸가짐을 가다듬고는 무게 있는 목소리로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만 산을 내려가도록 하자.”

하산의 명이 떨어졌다. 다시 사부의 면모를 보여 주는 비류연이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 개 3년이면 배달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5개월이란 기간 은 인간에게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지난 5개월 동안의 사부 노릇으로 인해 비류연의 연기력도 많이 숙달되어, 이제는 의젓하고 기품 있는 무게 잡는 연기도 무난히 해 낼 수 있는 정도가 되어 있었다. 사부의 품격을 느끼게 해 주는 조용하지만 무게 있는 말에 제자들은 사부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로 서, 아미산에서 달이 넘고, 해가 오르는 것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 아침마다 정상을 향해 달리던 일도, 폭포 위에서 뛰어내리던 일도, 매일 매일 나무 해 가지고 와 장작 패던 일도, 그 외 다수의 잡스러운 일들의 작업량 달성도, 오늘로서 마지막이었다.

헤어짐이 약속된 이별의 아침, 묘시면 떠나야 될 시간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수(魔手)에 발목 잡힌 사람들처럼 누구 하나 떠나질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 이었다. 중양표국 앞에서, 16명의 제자들을 일렬로 세워 놓은 채 비류연이 서 있었다. 그리고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진 곳에는 연꽃과 검이 수놓아져 있고 그 위에 가운데 중(中)자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는 중양표국 독문의 깃발을 꽂은 12개의 마차가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질서 정연하게 서 있었다.

선두에 있는 마차는 움직일 때 몸체가 상하로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된 특수 수레였는데, 깨지기 쉬운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수레였다. 아니,

전체가 밀봉한 상자처럼 만들어져 있으니 수레라기보다는 마차에 가까웠다. 특별히 심혈을 기울이고 특별 주문 제작에 의해 돈도 상당량 들어간 이 작품이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비류연은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 왔을 때 국주 장우양에게 다 들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가르쳐 주지 않을 것처럼 우물쭈물거리던 녀석이 눈 한번 부릅뜨고 눈깔 한번 부라리니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이 마차에는 이번 표행에서 가장 중요한 역 할과 비중을 가진 것이 들어 있었다. 표행을 떠날 준비는 이미 모두 끝나 있었고, 신호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었다. 이번 표행은 중양표국의 사활을 건 표행인 만큼 국주 십팔검 장우양이 직접 표행을 지휘하게 되고, 동원된 표사의 수만도 기백 오십을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규모의 표행도 지금 누 군가 한 사람에 의해 출발하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 있는 중이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비류연이었다.

앞에 제자들을 줄줄이 세워 놓고는, 마지막 석별의 정을 나눈다며 두서없는 강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 하나 나서서,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니 빨랑빨랑 끝내고 출발합시다.”

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자는 없었다. 국주 장우양이 체념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겁대가리 없이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국주 장우양과 그의 졸개들, 즉 중양표국 무리들은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섭섭한 표정의 비류연은 이제는 떠나야 할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가르침을 내리기로 하였다. 마지막 가르침이란 바로 여태까지 자기가 가르쳐 왔던 모든 것 들의 정화(精華)요, 자신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깨우쳐 주고,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고자 했던 사실이었다. 다른 것은 배우지 못하고 가더라도 이것만은 배우고, 느끼고, 깨우치고, 뼛속 깊숙이 새겨 두어야만 했다. 마지막 가르침은 정신 교육이라는 형태를 통해 베풀어졌다.

“하늘보다 높은 건?”

조용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그 동안 그의 제자였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스승님의 은혜.”

모두들 똑같은 높이, 똑같은 크기, 똑같은 길이의 큰 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많은 연습 없이 이렇게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은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바다보다 깊은 건?”

“스승님의 사랑.”

다시 모두들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는 것은?”

“사부님의 은혜.”

“이 세상에 끝이 없는 건?”

“사부님의 은혜.”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것은?”

“사부님의 은혜.”

열두 고개 같던 수수께끼 문답이 끝나고, 다시 비류연이 말했다.

“그래, 이제는 드디어 헤어져야 할 시간이구나. 그 동안 고생 많았다.”

“그래요, 당신 때문에 무지무지 죽을 고생 많이 했지요.’

하지만 속마음이 어떠하든, 가슴 속 깊은 곳에 쌓인 것이 아무리 많다 해도, 여기서 속마음을 내비치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모두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사부님이야 말로 우둔한 저희들을 가르치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지요.”

“나도 너희들을 보내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저희들도 사부님 곁을 떠나기가 싫습니다.(제발 빨리 보내 주세요.)”

모두들 겉과 속이 따로 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비류연이 자신의 소매를 걷어 제자들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 묵룡환은 나의 신표다. 다음에 언제 어디서라도 이 묵룡환을 보거든, 그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이 사부처럼 받들거라. 그게 신상(身上)에 이로울 거다. 알겠느 냐!”

“예, 사부님!”

마지막으로 비류연이 듣는 사부님 소리였다. 이제 당분간은 이 황홀한 사부님 소리 듣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 당분간은…

“가거라!”

이별을 선언하는 한마디. 비류연의 눈에서 무엇인가가 빛을 받아 빤짝였다.

“옥체 보존하십시오.”

헛것을 보았겠지,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십중팔구 틀림이 없었다. 이제야 이 지옥을 벗어나게 되는구나. 모두들 눈에 이별에 대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5 개월 동안 자신들을 지옥 속에서 살게 한 장본인인 사부를 향해 마지막으로 땅바닥에 9번의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지체없이 걸어갔다.

모두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가볍기만 했다. 그들이 걸어가는 곳, 저 앞에는 아까 전부터 그들을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는 중양표국의 표사들이 모여 있었다. 국주 장 우양의 출발 신호와 함께 표행은 출발했고, 떠나가는 무리를 앞으로 하고, 뒤로는 비류연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표행이 저 땅 끝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

지, 비류연은 묵묵히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이렇게 그들은 떠나가고 이제 다시 비류연은 혼자가 되었다.

“후, 허전한데….”

약간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비류연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시리도록 높고 푸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