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0권 1화 – 비류연 입원하다!

비뢰도 10권 1화 – 비류연 입원하다!

“드디어 출발이구나.”

오늘은 매우 뜻 깊은 날이었다.

그는 가슴이 뿌듯했다.

어제 저녁은 너무 흥분해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출발!”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여명이 어둠을 몰아내는 시각,

그들은 그렇게 화산으로 떠났다.

아무래도 비류연 일행의 여정은 순탄치 못한 여정이 될 것 같았다.

마침내 천무학관을 벗어난 그들 앞에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류연 입원하다!

소문!

사람의 입과 귀를 통해 전달되며 때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리도 없이 먼지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것.

발 없는 말을 천 리나 가게 만들며, 때로는 사람들의 상상력의 시험 무대가 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시작과 끝이 터무니없이 변질되어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무시무시한 사신의 칼날이 되어 주인의 혀를 자르거나 무 뽑듯 뽑기도 하는 잔혹함마저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빈번하게 안주 거리를 제공한다는 사실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만일 이 소문이란 것이 없었다면 전 강 호인의 술 맛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이고, 많은 주류 업계의 매상 또한 5분의 1로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소문은 주류 업계에 있어 가히 일등공신이라 할 만했다. 그만큼 이 소문이란 것은 사람들의 귀를 흥미롭게 만드는 비밀스런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천무학관 안은 한 가지 소문 때문에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그 소문의 내용은 9할의 남자 관도 중 6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환호성을 지르게 했고, 2할의 남 자관도들을 광란하게 만들었으며, 나머지 1할의 남자 관도들을 좋아 죽을 뻔하게 만드는 살인 미수를 저질렀다.

여러 가지 억측과 추측과 가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진실은 허망하게 파묻힌 채 이야기는 점점 더 끝 간 데 없이 커져가고 있었다. 근래 들어 터진 사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 중 하나였으므로 사람들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것은 한 남자에 관한 소문이었다.

“소저께서도 그 소문을 들으셨겠지요?”

군웅팔가회 회주의 집무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던 용천명이 군웅회주 철옥잠 마하령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다탁에 앉아 청자색 찻잔 속의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용천명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약 일다경 전이었다. 그의 방문을 전해 들은 마하령은 무척이나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작자에게 이 정도까지 관심을 두고 있었나?”

특별히 긴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그가 이곳을 방문하는 일은 드물었다. 어쨌든 그 둘과 그들이 이끌고 있는 두 집단은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충동적인 수뇌 회동을 전격적으로 갖는 일은 드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추억 때문에 마하령은 용천명을 대할 때 항상 냉랭했다. 자연 히 둘의 관계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자에 관한 깨소금같이 고소한 소문이 용천명을 이곳 군웅회의 회주실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이곳저곳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 귀를 따갑게 만드는 소문이에요. 그 정도면 귀머거리라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일걸요?”

대답하는 그녀의 말은 결코 곱지 않았다. 마치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한 느낌. 어쩌면 자신이 사나운 암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 분이 불현듯 드는 용천명이었다.

“그럼 소저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명확한 목적어가 생략된 질문이었다. 용천명은 자신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다. 질문이 끝나자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예상 밖의 폭언이 터져 나왔다.

“그런 예의라곤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작자가 이번에 임자를 만나 당연히 받았어야 할 천벌을 받았다고밖에는 여길 수 없군요. 매우 당연하 고 통쾌한 일이에요. 빙검 노사께서 타의 모범이 되는 무척이나 올바르고 명예로운 일을 하셨더군요. 제 솔직한 심정은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고 싶을 정도예요.”

용천명은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마하령의 감정의 폭발 속에 휘말려 버렸다. 그의 질문을 계기로 그녀의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해 그를 순식간에 덮친 것이다. 실제 로 그녀는 빈말이 아니라 빙검 노사 앞으로 정의를 행한 일에 대해 감사하는 뜻으로 선물을 한아름 싸 보낼까 진지한 고려 중에 있었다. 그만큼 그 소문은 그녀의 꽉 막힌 속을 시원스레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그녀는 10년을 달고 산 원수 같은 변비가 한순간에 치유되는 듯한 격렬한 쾌감에 몸을 떨어야만 했 다. 약간의 성의를 표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것은 그녀가 얼마나 이 소식에 기뻐하고 있는가를 나타내주는 반증이었다.

실례로 그녀는 비류연이 빙검 노사와 비무를 하고 의약전 중환자실에 긴급히 입원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 입맛이 되살아났는지 식사량이 전주(前週) 대비 2배로 늘어났으며, 그녀의 거칠어지고 푸석푸석해진 피부 또한 빛을 발하는 듯 윤기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녀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속으로 얼마나 많은 쾌재를 불렀는 지 세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비류연!’

그녀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쓴 채 마치 오물이라도 묻은 것처럼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날의 굴욕이 앙금처럼 남아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비류연… 이 노오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더니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자신을 ‘뚱땡이’라 부르던 그 무례한 낯짝이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는 마하령이었다. 잠재된 분노로 그녀의 옥수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곧 희열로 탈바꿈했다. 현재 그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제가 궁금한 것은 왜 그가 빙검 노사와 맞붙어서 그런 꼴을 당했는가 하는 겁니다.”

잠시 마하령의 행동을 지켜보던 용천명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것은 아직도 용천명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비류연이 세상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라고 해도 감히 천하오대검수(天下五大劍) 중 일인인 빙검 관철수 총노사에게 대들었다고 여기긴 힘들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별게 다 궁금하시군요, 용 공자! 주제를 모르니깐 그렇게 된통 당하고 의약전 중환자실에 입원한 것이겠지요. 주제도 분수도 모르는 놈이 감히 하늘 높은 줄을 모 르고 설쳐대다니……. 불나방이 기름칠 한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 꼴이라니까요.”

여전히 그녀의 어조에서는 찬바람이 쌩쌩 일어나고 있었다. 듣고 있는 이가 창천룡 용천명이 아니라 다른 이였다면 스며드는 오한에 어깨가 으슬으슬했을 터였다. “소저가 그 정도까지 비류연이란 자를 싫어하는 줄은 여태껏 몰랐구려.”

그녀의 분노는 격렬함을 넘어 집요할 정도였다. 그 점은 그로서도 무척이나 의외였다.

“이런 둔탱이!’

용천명의 생각 없는 말에 마하령은 속으로 꿍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눈치코치가 한없이 부족한 남자였다. 그러나 ‘둔탱이’란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 다. 그 정도 분별력은 그녀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저가 그 자를 아직까지 잡아먹지 않은 게 놀라울 뿐이오.”

그녀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질린 용천명이 말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군요.”

“너무 그에게 신경 쓰는 것 아니오?”

순간 마하령이 도끼눈을 하고 그를 째려보았다.

“뭐라고요?”

아직까지도 비류연에게 당한 수모가 계속해서 기억의 한편에 찰거머리처럼 철썩 달라붙어 있는 마하령이었다. 그때의 치욕은 마치 망막에 세공이라도 되어 있는 듯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매일 밤 꿈에, 그것도 날이면 날마다, 장면 장면이 이어지는 연결내용으로 등장하는 것은 약과에 애교라 할 수 있었다. 비 류연 때문에 지금 마하령은 신경쇠약 일보 직전의 중환자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그 존재를 완전히 말살해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두 다리 쭈욱 뻗고 악몽에 시달리지 않으며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을… 게다가 그녀가 받았던 모욕 또한 비류연의 관에 고이고이 접어 넣어 같이 매장시켜 버릴 수 있을 것을. 그 점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나마 이번 희소식이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을 가까스로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죽지 않고 숨이 붙어 있는 게 아쉬울 뿐이에요. 아니 오히려 그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죠. 왜냐하면 아직 제 손으로 그의 최후를 장식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니 까요.”

독기와 냉기가 한데 어울려 뿜어져 나오는 지독히 독살스런 한마디였다.

파삭!

그녀의 손에 있던 찻잔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비류연의 그림자를 분쇄시키기라도 하듯! 그녀의 분노에 의해 내용물은 이미 증발되어 버리고 난 후라 뜨거 운 찻물이 그녀의 손을 타고 흐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이를 빠드득 갈고 있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위로 분노가 치솟는 모양 이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마하령의 무시무시한 반응을 지켜보며 용천명은 여인을 상대할 때 좀더 주의해야만 신상에 이롭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는 자비와 불심(佛心)으로 가득 찬 소림사의 제자답게 비류연에 대해 명복을 빌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과 소림의 신물 녹옥여래신검(綠玉如來神劍)이 받은 모욕을 돌려줄 기 회는, 앞으로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듯했다.

‘차라리 그 자는 이대로 중환자실에 누워 일어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겠군.’

자신도 비류연에게 모욕을 받았지만, 마하령이 내뿜는 독기에 비하면 자신의 분노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는데 그는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역시 여자는 약하면서도 강하고, 온후하면서도 잔인하며, 선하면서도 악하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이런 여자랑 원한을 맺느니 차라리 귀신하고 원한을 맺는 게 좀더 나을지 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를 않았다.

빛[光]이 있으면 그림자[影]가 따르고, 음(陰)이 있으면 양(陽)이 있다.

물론 그 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뻐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개중에는 기뻐하고 축하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의 부상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아무리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아직 실감이 안 나!’

범상한 일반 대중들에 포함되지 못한 그들은 바로 주작단의 구성원들이었다. 남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그들은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비류연이 언제 강시처럼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급기야 그들은 혼자서 끙끙거릴 것이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데 합의했다. 왠지 아무리 상대가 빙검이라지만 그 천방지축 막무가내 우주광오한 비류연이 맥없이 당했다는 게 도무지 신빙성 있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 은 현재 비류연에 관련된 어떠한 상황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의심병에 걸려 있었다. 그동안 비류연이 착실히 교육시켜 온 결과였다.

“진짜일까?”

열여섯 명의 주작단원 중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남궁상이었다. 요즘 들어 무공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그였지만, 여전히 눈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글쎄…….”

현운은 이도저도 아닌 답변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솔직히 안 믿어지기는 해. 그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음험무쌍한 대사형이 아무리 상대가 빙검 노사라지만 그렇게 쉽게 당해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군. 이미 우리는 대사형에 대한 어떠한 일이든 의심부터 하고 보질 않나. 그저 냉큼 믿어버리기에는 그동안 우리가 당한 게 너무 많지. 우리가 대사형 에게 어디 한두 번 당했었나?”

그것이 현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비류연에 대한 무한의심병(無限疑心病)은 그들의 방어본능이 낳은 사생아였다.

“정말 두 사람이 비무를 하긴 한 건가요?”

남궁산산이 물었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녀의 의문은 정당하다 할 수 있었다.

“물론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나예린 소저와 진설이가 이미 증명했어요. 어떤 이유인지는 분명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겠죠- 모르겠지만 그 두 사람이 비무 를 벌였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남궁산산의 의문을 진령이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의문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보아 왔던 것이다. 자신들의 대사형인 비류연의 괴물 같은 신위(神威)를…..

가만히 앉아 있던 남궁상이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리 빙검 노사랑 붙었다고 해도 그 괴물 같은 사형이 그렇게 맥없이 당했을까? 그 무시무시한 공포의 명성을 자랑하던 철각비마대 앞에서도 멀쩡히 상 처 하나 없이 살아 돌아온 그 대사형이?”

남궁상은 결코 그날 있었던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얼굴이 금세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 날의 일만 떠올리면 주작단원 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직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 역시 그 빌어먹을 대사형이 그렇게 맥없이 당했을 리가 없어. 이번에도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야. 아주 구린 냄새가 나.”

비류연의 쓰다듬어 주는 자상한 손길에 여러 번 당한 전과가 있는 노학이 남궁상의 의견에 적극 동조했다. 거지 생활로 단련된 생존 본능이 그의 정신과 신경을 맹 렬히 자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게 좋겠어. 좋아서 기뻐 날뛰는 모습으로 있다가… 물론 기쁘기야 한량없지만 말이야. 만에 하나라도 대사형 의 눈에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터였다. 다들 그런 상상만으로도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창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노학이 호쾌하게 탁자를 내리쳤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사실 당한 걸로만 따지면 열두 번도 넘게 속았었다.

“절대 대사형에게 방심해서는 안 돼. 그는 괴물이라고! 평범한 인간의 잣대로 재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우리가 그 사악한 꼬임에 넘어간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동안의 경험이 그들에게 가르쳐준 진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겉만 보고 판단하다가는 큰코다친다는 사실이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은 자신의 눈과 귀로 보 고 들은 것만이 궁극적인 진실이며, 특히 비류연과 관계된 일은 결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떠한 감언이설 하에서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사형이 사탕을 준다 해도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표면(表面)이 아니라 그 이면(裏面)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측면을 읽어라!”

그것이 바로 그들이 지금까지 비류연에게서 배운 최고의 교훈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교훈을 현실에 성공적으로 적용한 적이 없었다. 그 들이 지금 이렇게 둘러앉아 진지한 자세로 토론에 임하고 있는 것도 이번 사태의 진실 파악과 앞으로 그들이 취해야 할 행동 강령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비류연이 붕대를 둘둘 감고 병상에 누워 있다 하더라도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중에 돌아올 후환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천무학관 전체를 휩쓸고 있는 기쁨의 물결에 몸을 맡길 수가 없었다. 그 행동이 야기할 뒷감당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으음…….”

“……”

“크흐흐흠..”

천무학관의 총노사 직책을 맡고 있는 희대의 검호(劍豪) 빙검 관철수는 몇 번씩이나 철제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는 행위를 반복했다. 마치 문고리가 불에 달구어져 있기라도 한 듯 그는 쉽사리 그것을 잡지 못했다. 천하에 명성을 자자하게 떨치는 검의 고수가 지금은 분명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콰악!

다시 한 번 굳게 결심을 한 듯 그가 문고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마치 만근 철벽이라도 되는 양 의약전의 나무문은 열리지 않았다. 물론 그 문이 진짜 만 근 이나 나간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싶어도 제작 공정의 난해함으로 인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수십 개의 침입방지용 자물쇠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무쌍한 문임에도 불구하고, 빙검은 그 문에 마치 지옥문의 빗장이라도 걸린 것처럼 좀처럼 열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음…….?

다시 한 번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발바닥에 아교라도 붙어 있는 듯했다. 아직도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막대한 심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대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몸을 돌려 이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할지……. 그는 아직 마음의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빙검은 마침내 결심을 한 듯, 단호하게 얼굴을 굳히고 의약전의 문을 힘껏 잡아 당겼다.

끼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의약전 문이 열리며 짙은 약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다. 빙검은 곧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텅!

힘겹게 열 때와는 달리 문은 너무도 쉽게 닫혔다.

진주빛같이 하얗고 섬세한 가는 손가락이 한 지점을 향해 다가가다가 흠칫 멈추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움직임을 거부한 채 허공에 정지했다.

“으음…….?”

섬섬옥수의 주인이 지금 서 있는 곳은 바로 비류연이 집중 치료받고 있다는 의약전 앞이었다. 그녀의 손 또한 조금 전의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문고리를 잡는 것 을 무척이나 망설이고 있었다. 오늘 의약전 문은 아무래도 사람을 고민하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모양이었다. 아까는 얼음덩어리를 연상케 하는 차가운 인상의 사내더니 이번에는 찬란히 내리비치는 햇빛의 편린마저도 무색케 만드는 황홀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이런 여인의 병문안을 받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호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 걸까?”

나예린은 무엇보다 그것이 의문이었다.

그녀는 지금 의약전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었지만, 그것에 선행하는 의문은 바로 자신이 지금 이곳 이 자리에 서 있는 정당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이유였다. 그녀의 차가운 이성으로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그 어떠한 이유도 의무도 책임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녀는 이곳에 서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를 고민케 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어떠한 설명으로도 자기 자신의 이성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비류연이 빙검 총노사에게 까불다가 된통 당한 다음 꼴좋게도 의약전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는 소문은 마른 겨울의 산불처럼 거세고 무절제한 속도로 학관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다들 입을 모아 당연한 운명의 수순, 즉 천벌을 받았다 고 입을 모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집에 모여 자축하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동안 쌓아온 비류연의 업적과 훌륭한 인간관계를 여실히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러 번 본의 아니게 비류연과 얽혀야 했던 나예린의 현재 입장을 굳이 밝히자면 그녀 또한 주작단과 마찬가지로 그의 중상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 지만 이번 일이 매우 당연하고 어떠한 불가능성을 잡아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즉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이 자 리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으면서…….

나예린은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질문해 보았다.

‘과연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인가? 난 지금 왜 여기 있는 것인가? 난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인가? 난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인 가?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지금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가??

그녀의 마음은 짓궂게도 그녀의 많은 질문들 하나에도 응답해 주지 않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지금 현재 그녀 자신이 이곳 이 장소에 서 있다는 것뿐이었다. 다음 행동을 결정하기에는 불확정적인 요소가 너무 많았다.

“돌아갈까?”

일생처럼 긴 기다림과 고민 끝에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래! 이것이 최상의 선택일 거야!’라고 나예린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끝내 문고리를 잡지 못했다. 의약전의 문은 바로 지척에 한 자(약 3.3cm) 거리밖 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마치 만장단애(萬丈斷崖)가 그 앞을 가로막기라도 한 듯 그녀는 그것을 잡지 못했다.

‘그래!’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다. 그녀는 휙 등을 돌려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본의 아니게 오게 된 그 장소를 미련 없이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지 못 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비류연이 못 견디게 보고 싶다든가 하는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은 다행히도 아니었다. 그것은 심리적인 장애가 아닌 물리적인 장애 때문이었다. 갑자기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뒤돌아서서 걸어 나가지 못한 이유! 그것은 그녀 앞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한 사람의 거한 때문이었다. 그 거한이 그녀가 걸어가야 할 길을 코 앞에서 정면으로 막고 있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케 하는 붉은색 일색의 사내! 그는 바로 염도였다. 나예린과 염도가 나란히 마주서고 보니 마치 ‘미소저와 야수’ 같았다. 염도는 나예린 보다 훨씬 큰 키 탓에 나예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보이던 사나운 안광은 빛을 발하고 있지 않았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의아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염도였다. 그가 알기로는 나예린이 여기 올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예린은 그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그 녀의 마음은 얼음을 탄 찬물이 끼얹어진 듯 싸늘하게 식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침묵 속에 꽁꽁 얼어붙었다. 이것은 그녀로서도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었다. “이런! 아무리 방심했기로서니……. 이럴 수가!’

나예린은 잠시 동안 완전 무방비 상태에 놓였던 자기 자신에 대해 어이가 없었다. 평상시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상대가 아무리 천하 오대도객 중 일인이라는 염도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응?”

나예린의 갑작스런 침묵에 염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매우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워 보였다.

“내가 이렇게 간단히 뒤를 잡히다니…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의 간격 안에 타인이 침범하도록 방치하다니… 아무리 그 상대가 염도 노사라 할지라도 내가 이렇게까지 정신적으로 방심 상태에 놓여 있었단 말인가??

나예린은 경악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초고수에 속하는 염도라고 하지만 이토록 사람이 가까이 다가올 동안 기척을 느끼지 못한 적 은 없었다. 아무리 야비하게 상대가 기척을 죽이고 있다고 해도 그녀는 확실히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등 뒤를 허용하고 만 것이다. 상대가 염도였기에 망정이지 만일 적이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 세상 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인이 자신의 등을 내준다는 것은 ‘나 죽여 주세요’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였다.

그녀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견고한 얼음의 결정에 작고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동안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조차 잊어버렸단 말인가??

점점 더 그녀의 마음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갔다.

“괜찮으냐? 안색이 좋지 않구나.”

걱정스런 얼굴로 염도가 물었다. 이것은 평소 그가 취하던 일반적이면서도 평범한 행동이 절대 아니었다. 보통 남자 같았으면 예의가 부족하다고 귀싸대기를 한 대 얻어맞았을 것이다. 아니면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 땀을 양동이로 흘리며 고생깨나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나예린 앞에서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고, 관 도들에게 평소 ‘불타는 개차반’이라 불리던 그가 온화한 옆집 아저씨나 인자한 선생처럼 변모한 것이다. 그제야 염도의 존재를 의식한 나예린이 서둘러 인사를 했 다.

“노사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그녀의 인사를 받는 염도의 얼굴에 주책 맞은 웃음꽃이 활짝 폈다. 점점 더 행동이 수상해지는 염도였다. 방심은 위험할지도 몰랐다. 원래 가뭄 때의 작은 우물 바 닥같이 말라붙어 있던 그의 인내심이 갑자기 온천수처럼 샘솟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그는 똑같은 질문을 사랑스런 여제자에게 세 번째로 묻고 있었다. 그 것은 염도에게 있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저…….?”

나예린은 대답하기가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이제 와서 비류연을 문병 왔다가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아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 던 것이다. 망설이던 그녀는 염도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바구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보통의 검객이나 도객들은 오른손에 도나 검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오른손에 물건을 드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그래서 염도도 왼손에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들고 있었다.

나예린이 유심히 바구니의 속 내용물을 살펴보자 곧 그 정체가 드러났다. 그녀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 내용물들은 무척이나 염도와 어울리는 않는 물건들 이었다. 최근 제철인 싱싱한 과일들에 가지각색의 전병들과 한과들, 그리고 그 옆에는 통째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닭고기와 술병이 위치했다. 그 외의 각종 먹거리 들도 수북이 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염도는 분명 그것을 비류연의 병문안용 위문품으로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더 의아하게 만들었다. “집중 치료를 받아야 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것이 아니었나??

그 정도까지 상태가 나쁘다면 죽이나 미음으로밖에 식사를 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염도가 싸들고 온 것은 일반인도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고 풍 성한 먹거리들이었다.

“저…….”

그러나 그녀의 상념과 의혹은 염도의 한마디에 단숨에 깨지고 말았다. 그가 만면에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오, 웬일인가 했더니 류연이를 만나러 온 모양이구나. 기특하게도!”

잠시 나예린이 머뭇거리는 사이 평소 쥐꼬리만큼도 없었던 염도의 눈치가 용의 수염처럼 길쭉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점점 더 상궤를 벗어난 행동을 마구마구 서슴 지 않는 염도였다. 그리고 은근슬쩍 사부 이름을 함부로 부를 기회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뭘 망설이느냐? 어서 들어가지 않고? 자, 어서 들어가자꾸나. 지금쯤 정신을 차렸을 게다.”

“아무리 지금 막 정신을 차렸다 해도 중환자가 이렇게 위에 부담이 가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나요?”

그 정도 중상을 입은 환자라면 탕약을 식사 삼아 먹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의혹을 완전히 풀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염도의 행동이 너무나 갑작스 러웠던 것이다. 스스로 나예린의 목적을 단정 지은 염도는 그리 틀린 단정은 아니었지만 – 의약전 안으로 나예린을 적극적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거부하고 사 양할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염도의 행동은 명백히 안내라 규정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예린은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염도에게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의약전 안으로 내 키지 않는 발걸음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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