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0권 11화 – 윤준호의 검무(劍舞)

비뢰도 10권 11화 – 윤준호의 검무(劍舞)

윤준호의 검무(劍舞)

“류여어어언!”

“효료오오옹!”

“장호오오오옹!”

윤준호는 어둠 속을 걸어가며 계속해서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지 않으면 이 어둠 속에 먹혀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빛 한줄기 들어 오지 않는 어둠이 이토록 공포스러우리라고는 그도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그 중 특히 그를 괴롭히는 공포는 어딘가에서 갑자기 암기 발사 장치가 작동되어 화살이나 독침 등을 자기에게 쏘아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에게는 기습적으로 발사된 암기를 피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이 어둠 속에서는 그런 가능 성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피를 말리고 있었다.

그는 세 번째 갈래 길을 지나 네 번째 갈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기척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벽을 손으로 짚으며 감각에 의지한 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이 암흑 속에 영원히 갇혀 버릴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두려웠다. 그것은 근원적인 공포인지도 몰랐다. 친구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불러 봐도 대답은 없었다. 그저 방향을 알 수 없는 웅웅거리는 반향(反響)만이 공허하 게 그에게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으아아아악!”

윤준호는 갑자기 비명을 터뜨리며 바닥에 한 바퀴 굴렀다.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에서 겁도 없이 몸을 굴렸더니 몸 여기저기가 아파왔다. 어둠 속을 걷다가 부주의 하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난 왜 언제나 이럴까…….’

그는 이런 어리버리한 자신이 싫었다. 그도 남들처럼 굳센 심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그렇게 쉽게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이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윤준호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는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제 되돌아갈 곳이 없었다. 앞으 로 전진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던 어둠 속에 빛이 희미하게나마 돌아오고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 인영을 본 순간 윤준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은 바로 항 상화산에서 그를 괴롭히던 사형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들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윤준호의 몸이 두려움에 파르르 떨렸다.

“으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환마동 안에 울려 퍼졌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이런 바보! 얼간이! 멍청이! 쪼다! 병신!”

“너 같은 놈은 죽어 버려야 돼! 쓸모없는 놈!”

윤준호는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화산에서 항상 자신을 비웃던 사형제들과 사숙, 사백들이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손가락질과 조롱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 사정없는 주먹질과 발길질이 이어졌다.

퍽! 퍽! 퍽! 퍽! 퍽!

윤준호는 괴로움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윽! 윽! 으억! 커억!”

그의 입으로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환상이라고 하지만 본인이 실제라고 인식하면 실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멈춰라!’

그의 귀를 울리는 구원의 목소리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갖은 조롱과 이유 없는 발길질이 우뚝 멈추었다. 한 사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그를 향해 걸어왔다. 윤 준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들의 행동을 멈추게 한 이는 바로 그가 존경하는 태사부 매화검선 유환권이었다.

“태… 태사부님!”

그가 표정을 밝히며 그를 불렀다. 유환권은 그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푹!

귀청을 울리는 섬뜩한 소리! 그것은 바로 지척에서 울리는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온 소리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왜… 왜?”

그의 심장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

아무리 애타게 불러 봐도 그의 존경스런 태사조는 대답이 없었다. 단지 애정 넘치던 전날의 눈과는 전혀 다른 무심한 눈으로 무생물을 보듯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소 닭 보듯.

윤준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바로 태사부 매화신검 윤환권 태사부께 버림받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일이… 하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윤준호가 고개를 치켜들고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하염없는 눈물이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꿈틀! 꿈틀!

너울! 너울!

순간 검을 잡은 그의 오른손이 너울너울,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빈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할 수가 없었다.

그의 검이 지금 허공중에 천변만화의 변화를 일으키며 수천 송이의 매화를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이 환마동 안에 매화 향기가 가득 차고 있다는 사실 을….

“응? 좋은 향기…….”

윤준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환마동의 어두운 통로를 걷고 있던 이진설은 자신의 코를 간질이는 매화 향기를 맡았다. 그것은 왠지 그녀의 가슴을 아련하게 만드 는 그런 향기였다.

“언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혼자 어둠 속에 갇혀 있으니 너무나 불안했다. 갑자기 나예린과 독고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다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효룡의 얼굴이었다.

“흥! 그런 사람… 다시 만나기만 하면 발로 잘근잘근 밟아 줄 테다!”

새침한 얼굴로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짙어지는 검기에 환상이 하나둘 지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광기 어린 검무에 자신이 육체와 정신을 내던지고 있다는 것을 윤준호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이봐요. 효 공자! 효 공자!”

이진설은 애타게 효룡을 불렀다. 그러나 그의 무릎에 쓰러져 있는 효룡은 여전히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진설이 쓰러져 있는 효룡을 발견한 것은 우연 중의 우연이었다. 묘한 매화향에 끌려 걸어가던 도중 우연히 발에 걸린 게 바로 효룡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어두워 돌부리인 줄 알았지만 ‘퍽’ 하는 소리와 물컹 하는 느낌으로 미루어 볼 때 돌멩이는 아닌 듯했다.

그래서 아래를 자세히 내려봤더니 희미하게 윤곽이 보였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지그시 밟고 넘어간 그것은 바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버 지로 받은 아주 값비싼 목걸이가 있었는데 그 목걸이에는 특이하게도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보석인 야광주(夜光珠)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걸이를 그 사람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헉!”

그녀는 하마터면 목걸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 사람은 바로 효룡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계속해서 효룡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깨우려고 했지만 그는 정 신을 차리지 않았다. 게다가 호흡의 간격이 매우 길고 맥박 또한 매우 희미하게 뛰고 있었다. 이러다가 그냥 어느 순간에 숨을 멈춰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녀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효 공자! 효룡! 효룡!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그동안 외면한 거 미안해요. 다 용서해 줄 테니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여긴 어디지??

효룡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식이 맑은 편은 아니었다. 어두웠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시커먼 암흑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이곳은 심연의 깊숙한 밑바닥 같았다.

“난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런 빛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육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 마치 정신만이 홀로 정처 없이 이 암흑의 공간을 부유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난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러다 갑자기 형 효봉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생각하기조차 두려운 그 끔찍한 악몽이 다시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그 기억을 재생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그 것은 끔찍한 기억! 풀어헤쳐진 효봉의 앞섶 안에는 지옥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효룡에게 있어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죄를 명명백백히 나타내주는 선명한 죄의 각인!

풀어헤쳐진 효봉의 상체에는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긴 검흔(劍痕)이 섬뜩하게 나 있었고, 그 사이로 끊임없이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상처는 마치 지옥 의 계곡처럼 끔찍했다. 상처를 통해 흘러내린 피는 이윽고 바닥으로 떨어져 이내 바닥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의 강이 점점 불어나더니 효룡 의 발밑에까지 다다랐다. 효봉은 그 피의 바다 위에 서서 효룡을 향해 씨익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악하게 웃었다. 시야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피의 바다는 점점 더 위로 차오르더니 서서히 그의 몸을 잠식해 갔다. 효룡은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어떠한 도움도 기대하기란 불가능했다. 그의 몸은 점점 더 피의 바다 속으 로 깊숙이 가라앉아 갔다. 그것은 마치 늪과 같아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윽고 얼굴까지 피가 차오르자 갑자기 어둠이 그를 덮쳤다.

암흑(暗黑)이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의식을 되찾자 그는 암흑 속에서 오감을 박탈당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완벽한 이성이 작동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마치 꿈속에 있 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세차게 도리질 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한 머리통이라도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웠다.

‘난 진 거야!’

자조적인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직 자신은 형의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었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두려운 것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

과연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난 이대로 죽을지도 몰라. 아니 나 같은 건 죽어 버리는 게 나아!’

그렇게 생각을 하자 몸이 점점 더 암흑의 늪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효룡의 몸은 점점 더 심연 속으로 침전되어 가고 있었다. 시야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이제 난 편해지는 건가?”

그때 갑자기 얼굴에 차가움이 느껴졌다.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그의 박탈당한 오감이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이었다.

“효룡! 효룡! 효룡!”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효룡은 어둠을 꿰뚫는 한 줄기 빛을 쬐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매우 달콤하고 감미로운 울림으로 다가와 그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 주었다. 그의 시야가 빛으로 가득 찼다.

“괜찮아요? 효룡! 효룡!”

이진설의 얼굴이 활짝 핀 꽃처럼 환해졌다. 마침내 효룡이 눈을 뜬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는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

효룡은 몇 번 더 눈을 깜빡여 보았다. 그러자 그의 망막에 맺힌 흐릿했던 상이 또렷해지며 형체가 갖추어졌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 이 소저?”

그를 암흑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려준 이는 바로 이진설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이진설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윽!”

갑작스레 몸을 일으켜 보려 하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분명 환상과 싸웠음에도 현재 그가 느끼는 통증은 환상이 아니었다.

“효 공자! 정신이 들었군요.”

그녀의 큰 눈동자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안색이 무척이나 창백해요. 순간 숨을 쉬지 않아 죽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아무래도 시련을 무사히 넘긴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효룡은 두려웠다. 그는 아직 여자의 눈물을 그치게 하는 데 서툴렀던 것이 다.

“난 지금 정말 괜찮은가?”

효룡은 그녀의 무릎을 벤 채 자신의 몸을 점검해 보았다. 눈으로는 그녀의 귀여운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고, 귀를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뒤통수를 통해 그녀 허벅지의 부드러움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쿵쿵쿵! 두근 두근, 두근!

심장 박동도 약간 심박수가 빨라진 것 빼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형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캄캄한 암흑 속에 갇혀 있었거늘……. 그녀가 없었어도 내가 그 암흑 속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그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그는 정신 상태에 엄청난 타격을 입고 외부로부터의 모든 문을 닫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진설의 목소리가 없었으면 그는 영원히 마음의 감옥에 스스로를 유배시켜 버렸을 것이었다.

“정상인 것 같군요. 폐를 끼쳤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만약 이진설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폐증 환자가 되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최소한의 가정이고 심하면 백치나 광인이 되어 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눈부시게 보였다.

효룡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진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렇다면…….?”

“네! 무슨 일이든지 주저 없이 말씀하세요.”

갑자기 그녀의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

“그럼 저… 이제 그만 일어나 주시겠어요?”

이진설은 간신히 목적한 바를 말할 수 있었다. 그 순간 효룡은 정신이 멀쩡하게 든 주제에 그녀의 보드라운 무릎을 베개 삼아 뻔뻔스럽게 누워 있는 파렴치한이라 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그는자리에서 튕겨지듯 벌떡 일어났다.

“꺅!”

너무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녀의 얼굴과 부딪칠 뻔 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효룡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의 얼굴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홍시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사과는 사과고 감정은 감정인 모양이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뭔가 왠지 매우, 매우, 매우 아쉬웠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엉큼한 놈이었나…….’

자기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듯했지만, 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꿈을 꾸셨기에 그런 슬픈 표정을 지으신 거죠? 그렇게 눈물까지 흘리면서요?”

효룡이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자 눈가로부터 이어지는 말라 버린 눈물의 흔적이 촉각을 통해 느껴졌다. 다시 효룡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말하기 껄끄러운 일이라 대답하기 싫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진설에게는 왠지 숨기기가 싫었다.

“‘…제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보았습니다. 저의 손에 묻은 그 피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겠지요.”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는 효룡의 얼굴에 회한(悔恨)이 흘렀다.

“우애애애애애앵!”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효룡은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어?

“아니 이 소저,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느닷없이 주저앉아 빽빽 울기 시작하는데 어느 남자가 놀라지 않겠는가. 효룡은 거의 혼란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 때문에 효룡 공자가 슬퍼하잖아요. 잊고 싶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면서요. 우애애애앵!”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진설이 띄엄띄엄 말했다. 목이 메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효룡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푸하하하하하! 그렇다고 이 소저가 울 필요는 없지요. 자 어서 울음을 그쳐요. 예쁜 얼굴이 망가지잖아요?”

갑자기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효룡의 말이 약발이 먹힌 모양이었다.

“정말요?”

“예? 뭐가요?”

“정말 제 얼굴이 예뻐요?”

아직도 눈물이 가득 담겨 있는 호수 같은 눈을 반짝이며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정말 그런 문제가 중요한 모양이었다. 효룡은 대답하기가 난감했 다. 그러나 어쩔 수 있겠는가?

“그럼요! 이 소저는 정말로 예뻐요! 정말입니다. 제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정말이죠? 정말? 진짜로? 가짜 아니고 정말로요?”

“아! 물론이죠.”

“진짜, 진짜, 진짜로요?” 

“글쎄 그렇다니까요.”

이제 슬슬 효룡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효룡은 이진설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진장 진땀을 빼야 했다.

“으으으….”

윤준호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악몽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직 하나가 남 아 있었다.

“흑흑흑! 흑흑흑!”

그의 눈앞에 땅바닥에 웅크린 채 바들바들 애처롭게 떨고 있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는 그 아이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바로 따돌림 당하고 무시당 하던 바로 자신이었다.

‘저것이……. 저 애처로운 인간이 바로 나 자신이란 말인가?”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너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리고 너의 몸을 옭아매는 공포는 바로 너 자신이야. 너의 내면에 너의 공포가 있어! 항상 그걸 잊지 마!’

비류연이 언제나 그에게 하던 말이었다.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공포란 것은 무척이나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의 마음은 그의 연약함과 소심함 때문에 항 상 상처받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긴장과 초조 속에서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면서…….

“모든 것이 내 탓이었어!’

윤준호는 한 걸음 나아가며 자신의 공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마음속 깊이 결심했다.

“이제 다시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겠어. 그 어떤 험악한 일이 나에게 닥친다고 해도 말이야.”

진실을 보는 눈을 지닌 자에게 공포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공포마저도 보듬어 안을 수 있다. 공포를 외면하는 자가 진정으로 약한 자였다. 그 리고 불쌍한 자이기도 했다. 윤준호는 두려움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내면의 자아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손을 잡았다.

그 아이가 그 순간 웃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새 아이는 사라지고 그만 홀로 서 있었다. 순간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