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0권 18화 – 폭발 후의 나예린, 깨어나다!
폭발 후의 나예린, 깨어나다!
매몰 1일째!
비류연은 멀쩡히 잘 살아 있었다.
그의 남경충(南京蟲: 바퀴벌레)보다 더 끈질긴 생명력은 겨우 이 정도의
사고에 굴복할 만큼 약하지 않았다.
후드득! 후드득!
뿌옇게 솟아오르던 분진이 가시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먼지가 동굴을 가득 채운 그 순간은 숨쉬기가 무척이나 곤란했었다. 좀 더 편한 호흡을 하기 위해 비류연은 몇 가지 술수를 부려야만 했다. 약간의 수고를 감내하는 편이 흙먼지를 물 마시듯 들이켜는 것보다는 훨씬 수지맞는 장사였다. 먹어도 배부르지도 않는 것 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의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콜록! 콜록! 살긴 산 모양이군.”
사지 중 어느 하나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고, 암석에 뭉개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천운이라 할 만했다. 비류연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나예린이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후우, 위기일발이었어.”
나예린이 위험을 경고하며 달려온 그 순간 비류연도 뇌탄을 보고 있었다. 저게 위험천만한 물건이란 것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예린이 자신의 손을 맞잡 는 순간, 비류연은 나예린을 품으로 끌어안아 보호하고 봉황무 오의 전이(轉移)를 전력으로 전개해 폭발권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완전히 벗어나는 데는 실패해 엄 청난 폭발에 휩쓸렸던 것이다. 아마 반보만 더 늦었어도 둘 다 저 세상행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다.
톡톡.
동굴에 맺힌 이슬이 천장의 갈라진 균열 사이에서 나예린의 초설이 내린 듯한 새하얀 얼굴로 떨어졌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떠지 며 밤하늘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녀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의 눈앞에서 비류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런 엄청난 상황을 겪고도 전혀 기죽지 않은, 오히려 생기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잠시 나예린은 이곳이 죽음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는 환마동 안이 아니라 날씨 좋은 봄날의 정자 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두컴컴한 사방을 확인하고서야 이곳이 아직도 환마동 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전신을 자극하 는 통증에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귀가 멍멍하군요.”
그녀가 말했다. 폭발의 후유증인 모양이었다. 지척에서 그런 굉음이 터졌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아직도 귀가 윙윙 울리는 모양이었다.
“고막이 찢어진 것 같지는 않으니 안심해요.”
소리가 구분되는 것을 보니 확실히 고막에는 이상이 없는 모양이었다.
“비 공자는 다친 데는 없나요?”
공자라니……. 상당히 과분한 호칭이었다. 그러나 나예린은 항상 그를 그렇게 딱딱하게 불렀다.
“글쎄 없는 것 같군요.”
비류연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거짓말은 좋은 습성이 아니지요.”
나예린의 날카로운 시선은 비류연의 팔꿈치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왼쪽 팔꿈치의 붉은 문양, 장식으로 물들인 건 아니겠죠?”
나예린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오호, 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걸 볼 수 있다니 굉장히 좋은 눈이로군요.”
비류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과찬의 말씀!”
비류연은 자신의 팔꿈치를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태껏 그 어떤 비무나 습격에서도 피를 본 적이 없었던 비류연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확실히 피였다.
“훗! 오래간만에 보는 피로군요. 내 고가(高價)의 피를 함부로 흐르게 만들다니……. 만일 이게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저질러진 일이라면 가만 놔두지 않겠어 요.”
비류연다운 말이었다.
“그보다 먼저 상처를 치료해야 해요.”
“이런 건 핥으면 나아요.”
비류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럴 수야 없죠!”
나예린은 주머니에서 금창약과 붕대를 꺼내더니 그의 팔꿈치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이 정도 폭발에서 이 정도 상처면 수지맞는 장사라 할 수 있죠. 너무 걱정 말아요.”
“걱정은 안 합니다.”
나예린의 딱딱한 대꾸였다.
치료가 끝나자 비류연은 자신의 옆에 반쯤 파묻히다시피 한 묵금을 끌어내 어디 손상된 데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시커먼 묵금을 살펴보기는 힘들었다. 물론 비류연의 시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물건의 손상 상태를 알아보기에는 주위가 너무 어두웠다.
비류연이 나예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빛을 낼 만한 물건이 없을까요? 화섭자가 있기는 하지만 공기가 희박한 이곳에서 불을 붙일 수는 없죠. 뭔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물건이 있었으면 하는데.”
나예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애검 한상옥령(寒霜玉靈)을 비류연의 눈앞에 내밀었다.
챙!
아름다운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져 나왔다. 과연 보검은 보검이었다. 검집을 빠져나온 그녀의 검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겨울의 설경같이 은 은하고 차가운 흰색 광채였다.
“오오, 이 정도 빛이면 충분하죠. 좋은 등불이 생겼네요. 이렇게 비싼 등불은 처음 봐요!”
비류연은 차가운 흰색 검광에 의지해 묵금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만일 묵금이 잘못되면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겨날 수 있었다. 비류연은 그것만은 사양이 었다. 꼼꼼하게 묵금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비류연의 얼굴에 흡족한 빛이 떠올랐다.
“역시 명품은 명품! 비싼 값을 하는군요. 그 폭발 속에서도 상처 하나 없다니!”
뇌금 묵뢰는 정말 튼튼하게 만들어진 물건 같았다. 아무런 손상이 없어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네 정말 다행이죠. 혹시나 상처 나서 값이 떨어졌으면 어쩔까 엄청 걱정했거든요.”
비류연은 뭔가 착각한 것 같았다. 나예린이 그것을 정정해 주었다.
“그게 아니라 우리들 이야기에요. 다행히 비 공자 덕분에 목숨을 구했군요. 조금 늦었지만 감사드려요.” 나예린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나 장소가 협소해 인사하기도 무척이나 불편했다.
“목숨을 구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더 알아봐야죠. 우린 지금 매몰되어 있거든요.”
비류연의 말에 나예린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예린의 안색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비류연의 말대로였다. 사방이 모두 집채만한 돌더미로 답답할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그들 주위의 공간이라 해봐야 겨우 몸을 뒤척이고 상체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마치 커다란 뒤주 속에 갇힌 그런 느낌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이제부터 방법을 찾아봐야죠.”
비류연은 사방을 둘러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아직은 뾰족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주위의 공기는 점점 더 줄어가고 있었다. 공기가 모두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과연 이 공기가 얼마나 갈까? 일주일? 3일? 아니면 하루??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우리가 구조받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위에 남겨진 사람들이 얼마나 제대로 잘하는가에 따라 다르죠. 당황해서 너무 우왕좌왕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래봤자 일의 능률만 떨어지니까 요.”
비류연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제자 녀석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지금은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학관 측은 빨리 구조 작업을 속행하라! 속행하라!”
천무전 창문 밖으로 난데없는 시위 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는 어제 저녁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저들 좀 어떻게 조용히 시켜볼 수 없겠나?”
마진가는 골이 지끈거렸다. 그의 집무실 바깥에는 수백 명의 관도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보통 때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이런 비상시국에 벌이다니 괘씸하 기 그지없었다.
머리에 백건을 두르고 있는 그들의 주장은 단 하나! 하루 빨리 환마동 매몰자 구조 활동을 벌이라는 것이었다. 특이한 점은 이들 시위대의 대부분이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시위의 주축은 바로 빙봉영화수호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상인 나예린이 사고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광분하여 저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것 이었다.
빙봉영화수호대는 자신들의 우상이 근본도 모르는 놈과 알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결단코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에게 있어 그녀의 존재는 하 늘의 빛이자 땅의 풍요로움이자 마음의 위안이자 삶, 그 자체였다. 그들의 맹신은 그 정도였다.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말이다.
이마에 두른 흰 머리띠가 그들의 굳고 결연한 각오를 나타내고 있었다. 수업은 거부되고 시위는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 잠을 설친 한 노사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난 우리 천무학관의 규율과 규칙 준수가 겨우 이 정도였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지경이오. 저들의 항의 소리에 귀를 틀어막아도 신경 쓰여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소. 저 망할 놈들을 어떻게 처분하면 좋겠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일에 가장 열정적으로 앞장서야 할 수호대주 선풍검룡 위지천이 거의 반쯤 넋이 나가 있는 관계로 부대주가 이 시위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 렇지 않아도 사태 수습으로 골이 찌근거리는 이 판국에 저렇게 신경을 긁어놓으니 마진가의 심기가 편할 리가 만무했다.
“학관 측은 빨리 구조 활동을 속개하라! 속개하라!”
다시 창문을 통해 시위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작업 속도가 너무 늦으니 더 빨리 하라는 채찍질 소리였다. 마침내 듣다 못한 염도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노무 짜식들을! 정 그렇게 구하고 싶거든 가서 삽질이라도 하든가, 수업 거부나 하지 말고! 확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까 보다!”
염도로서는 신경질과 짜증이 뒤범벅되어 홧김에 내뱉은 빈말이었지만 듣고 있던 마진가로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갑자기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는 끔찍한 생각은 아니었다. 마진가는 아직 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 었다.
“일단 파들어 가고 봅시다. 기관진식과 건축에 조예가 있는 전문가를 당장 부르시오! 그렇게 구조 활동을 하고 싶다면 저들도 직접 참가하라고 하시오. 시위에 참 가할 힘이 있다면 구조 활동에 참가할 힘도 있겠지. 인력도 부족하고 작업원도 많이 필요한데 잘되었구려. 구조 작업을 실시하시오!”
마진가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 아이는 내 조카딸 같은 아이요! 이런 일로 그 아이를 잃으면 난 두 번 다시 맹주를 볼 면목이 서지 않을 것이오. 그분 성격에 당장 무사들을 이끌고 이리로 쳐들 어올지도 모를 일 아닌가!”
수련 중에 다친 것도 아니고 천겁우의 암계에 천금 같은 딸이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면 당장 눈에 불을 켜고 강호를 뒤엎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나백천의 남다른 딸 사랑을 두려울 만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숙부가 못된 짓을 저지르려다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딸에 대해서만은 바보 아빠에 팔불출이기까지 한 맹주였다. 이 일에 그의 이성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성 희박한 부질없는 일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일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마진가는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렇게 해서 빙봉영화수호대와 거기에 동조한 남자 관도들을 중심으로 한 구조대가 조직되었다. 그들이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삽질이었다. 왜냐하면 환마동 은 중간부터 연쇄 붕괴의 여파로 완전히 내려앉았던 것이다. 상황은 생각보다 더욱 심각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삽질은 어려웠다.
“이보게 홍, 류연이 무사할까?”
효룡이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효룡은 아직도 자신의 왼쪽 어깨에 감싸여 있는 붕대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언제 화해했는지 이진설이 꼬옥 붙어 있었 다.
환마동 붕괴 와중에 우박처럼 떨어지는 낙석으로부터 이진설을 감싸다가 다친 명예로운 부상이었다. 그때부터 이진설은 지극정성으로 효룡을 보살폈다. 죽을병 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진설의 유난스런 행동은 주위의 눈총을 넘치도록 많이 샀다. 그냥 단순하게 부러진 것뿐인데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진설로서는 이 상처의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코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진설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은설란과 있었던 오해 따위는 이미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이미 그녀는 효룡의 희생정신에 무 한한 감동을 맛본 뒤였기 때문이다. 그의 상처가 결코 헛된 영광으로만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효룡은 자신의 눈앞에 닥쳤던 오묘하고도 난해한 유희(遊戱)인 연애의 첫 번째 시련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연애라는 오묘하고 변덕스럽고 돌발적이며 감정적이며 논리부재하고 비이성적인 유희의 문제점은 또 다른 관문이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고 거기에 이유란 있을 수 없으니 방심은 절대 금물이라는 점이었다.
이런저런 이해타산을 다 따져 봐도 자신에게 오해를 품고 삐져 있는 여인이랑 왼팔 한 번 부러진 걸로 화해했다면 나름대로 싸게 먹혔다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본인은 목숨을 걸었다고 주장하겠지만..
이진설은 효룡이 자신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은 것에 감격했지만 나예린의 생사를 알 수가 없어 안색이 어둡기만 했다. 그녀의 눈은 토끼 눈처럼 빨갛게 충혈되 어 있었다. 계속해서 쉴 새 없이 펑펑 우는 이진설을 효룡이 겨우 달래 놓은 참이었다.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해 지금 의약전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붕괴된 환마동에서는 다치지 않은 사내들의 미친 듯한 삽질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무사함을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쉽게 죽을 녀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이 정도에 죽을 녀석이라면 이미 예전에 죽지 않았겠나? 지금쯤 그 안에서 천하제일의 미녀와 더불어 희희낙락거 리고 있을걸세. 그렇게 믿고 있자고.”
장홍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그의 예상은 반 정도는 맞았다고 할 수 있었다.
주작단도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과연 대사형이 저 지옥에서 살아나올 수 있을까?”
남궁상이 말했다. 이것은 전 주작단 모두가 갖고 있는 의문이었다.
“과연 살아 있을까? 그 안의 끔찍했던 상황은 모두 겪어 봐서 알 것 아닌가?”
노학은 그때가 다시 생각난 듯 도리질쳤다. 정말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었다. 연쇄 붕괴에 휘말리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인명은 재천! 누가 사람의 생사에 대해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사형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올챙이가 나비가 되었다는 이야 기보다, 고약한 노사가 사회 봉사 나갔다는 이야기보다, 부처님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보다 더 믿기 힘들군.”
그동안의 수련 탓인가? 아니면 가르친 사람 탓인가? 도사 주제에 불경스런 발언도 서슴지 않는 현운이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여러 사람을 버려 놓을 수 있는 지 알 수 있는 좋은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역시 죽었다는 건 실감이 나질 않지?”
남궁상이 물었다.
“응!”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비류연의 죽음마저도 그들에게 신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매몰 2일째!
“흐흠.”
비류연은 눈앞에 콩알만한 단환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호 식생활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물건으로 한 알로 한 끼 식사에 해당하는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벽곡단이었다. 무게가 가볍고 부피도 작아 휴대하기 간편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강호에서는 긴 여행 때나 폐관 수련 시 비 상 식량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작 단가가 비싸고 맛이 엄청 없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비류연과 나예린에게는 이 한 줌의 벽곡단이 마지막 남은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식량은 충분한가요?”
나예린이 물었다. 식량은 현재와 같이 고립된 극한 상황에서는 가장 선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반드시 확인 점검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야 했 다. 하지만 걱정하던 것만큼 다행히 빈털터리 가난뱅이는 아니었다. 입동하기 전에 학관 측에서 길을 잃고 헤맬 가능성이 있는 만큼 충분한 벽곡단과 가죽 물주머니 를 나누어 주었었다. 비류연은 거기다 여분의 벽곡단을 항상 준비해 다녔다. 무슨 일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 중 가장 특별한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침낭포(寢囊包)라는 것이었다. 이 물건은 접으면 약간 작은 족 자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펴면 두 사람이 들어가 충분히 잘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방수 방풍 기능과 체온 유지 기능까지 갖추고 있는 여러모로 유용한 물건이었다. 야영할 때 꼭 필요한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비류연이 중양표국의 국주인 장우양에게 선물로 그것을 만일 헌납이라 부를 수 없다면 ᆞ받은 것이었다.
역시 유비무환하면 번거롭기는 해도 최악의 상황에 빠지는 경우는 없었다. 나예린은 비류연의 의외의 준비성에 무척 놀랐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준비할 생각을 했죠?”
그녀에게도 몇 알의 벽곡단과 물통은 있었지만, 비류연만큼 완벽하게 철저히 준비해 오지는 못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면 약간 번거롭기는 해도 해(害)가 되는 경우는 없죠. ‘준비성 없어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는 약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 다!’ 우리 악덕 사부의 말씀이에요.”
비류연이 그녀를 뚜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참 특이한 사부님이로군요.”
비류연의 말로 미루어 보아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데 나예린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비류연은 일단 바닥에 침낭포를 펴서 깔았다. 바닥에서 냉기가 계속 올라오고 있어 그냥 맨땅에 누워 있으면 몸에 안 좋기 때문이다. 침낭포는 다행히 2인용이었다.
“자 들어오세요.”
비류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예린에게 말했다. 그러나 나예린으로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외간 남자랑 같은 이불에 그것이 비록 침낭포라 해도 – 눕는다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비류연이 망설이는 나예린을 보며 한마디 했다.
“지금은 비상 사태예요. 예의나 규칙을 따지기에는 너무 극한의 상황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지금은 어떻게든 체력을 보존해서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을 우선적 으로 해야죠. 생명 앞에서는 남녀의 구별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불과해요.”
청산유수 같은 언변이었다. 나예린은 감히 반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도 그렇군요.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잠시 머뭇거리던 나예린이 머뭇머뭇거리며 침낭포 안으로 들어왔다.
‘이럴 수가!’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신기하군요!”
“그렇죠?”
과연 이 침낭포란 것은 신기한 물건이었다. 조금 전까지 피부로 전해지던 냉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따뜻한 온기까지 느껴졌다. 범상치 않은 물건임이 분명했다.
매몰 3일째!
“무공이란 것이 이렇게 편리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정말 그녀의 말대로였다. 몇 날 며칠을 버텨도 물 한 모금 없이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지(天地) 일월(日月) 성신(星辰)에 가득 차 있다는 기의 존재와 지금껏 꾸준히 수련과 단련을 통해 쌓아 놓은 몸 안의 내공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한 알의 벽곡단이면 하루의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애초에 40 알의 벽곡단이 있었다. 둘이서 나눠 먹으면 20일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이걸로 어떻게든 연명해야 했다.
내공이 체력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침낭포는 보온의 효험마저 있어 체력 유지가 더욱 용이했다. 이 뒤주같이 좁은 공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생리현상의 처리 문제였다.
사실 두 사람에게 식량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급선무였다. 사람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이 좁은 공간에서는 따로 은밀하게 생리현상을 처리할 공간이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다. 현재는 무공을 통해 생체 흐름을 조정하고 있지만 그것도 만능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흘이 가고 닷새가 가고 여드레가 와도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비류연은 다른 방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매몰 7일째!
날이 지나갈수록 나예린의 마음속에 싹트는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 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구조의 손길이 없으니 불안감이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반면 비류연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의젓한 건지 철이 없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우린 이대로 죽는 걸까요?”
나예린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의 죽음이 그 눈에 보이나요?”
대답 대신 비류연이 질문했다. 미래를 예지한다는 눈을 지닌 그녀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모르겠어요. 제 눈앞은 지금 온통 어둠으로 덮여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더 이상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없다면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죠.”
나예린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점점 더 비관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이럴 땐 어떻게든 삶의 희망을 가지게 해 주는 게 중요했다.
“사람의 운명은 자기 스스로 개척하는 거에요! 그리고 삶은 한번 살아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산다는 건 즐거운 일이거든요.”
“정말 그럴까요?”
나예린이 물끄러미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한데 어우러졌다.
이때 비류연의 머릿속에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아직 비장의 패가 하나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패를 꺼내 보일 때였다.
‘좋아!’
비류연이 크게 결심했다.
“좋은 걸 줄까요?”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은 거요?”
이 상황에서 좋은 게 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네! 아주 좋은거죠.”
비류연은 그렇게 대답하곤 그녀의 앞에 불쑥 물통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그냥 물통이잖아요? 전 지금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에요.”
동굴 안에 맺힌 이슬만으로도 갈증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너무 많은 물을 먹으면 강제로 제어하고 있는 생리 현상을 조절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자! 받아요!”
나예린은 마지못해 비류연이 건네준 물통을 받아들었다.
“마셔요!”
그녀의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비류연은 그것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다.
나예린이 그가 건네준 물통의 마개를 열자 코를 자극하는 향긋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나예린은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물통에는 물 대신 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거 술 아닌가요?”
비류연의 계속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한 모금 마신 그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술이 분명했다.
“이런! 우연찮은 실수로군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나..
비류연은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 그는 우연으로 가장하려 했지만 나예린은 이것이 절대 고의로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에 내기를 걸어도 좋을 만큼 확신하고 있었 다.
“이런 것은 규칙에 위배되는 일이에요.”
시험장에 술을 반입하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 소저도 공범이에요. 하하하하!”
비류연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나예린은 뭐라고 변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규칙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군요.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진다 한들 무의미한 일이로군요. 이제 우린 공범이 된 건가요?”
“이제 우린 공범이죠.”
비류연은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예린이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모금 마셔도 되겠군요?”
“그럼요. 비밀은 반드시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미 우린 공범이잖아요?”
비류연이 다시 물주머니로 위장된 술주머니를 건네주자 나예린은 그것을 받아 다시 몇 모금 들이켰다. 현재의 극한 상황은 날카로운 이성의 소유자인 나예린에게 도 술을 찾게 만들 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강력한 술기운이 그녀의 전신으로 퍼져 갔다.
그녀는 의외로 술에 약했다. 게다가 그가 지닌 술은 달콤해서 마시면 마실수록 사람을 끌어당겼고, 결국엔 취하게 만드는 독한 술이었다.
벌컥 벌컥!
다시 나예린이 술을 물 마시듯 들이켰다.
“저… 저런!”
비류연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설마 나예린이 저렇게까지 마실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저 가볍게 마시고 긴장을 풀라고 준 것이었는
데…….
“몰래 얻어온 비싼 천일취(千日醉)였는데…….”
시험 전날 염도를 협박해 얻어낸 고급주였다. 하지만 대작 상대가 천하제일미 나예린이라면 그리 아까운 것도 아니었다. 비류연이 술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예뻤다. 그렇다고 그녀가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천일취는 달콤하긴 하지만 엄청 독한 술이었다. 얼마나 센 술인가 하면 한 모금을 마시면 천일 을 잠잔다는 이름만으로도 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공도 외공도 이 술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 극한의 상황이 그녀를 더욱 빨리 취하게 만든 것 같 았다.
그녀의 총기 가득한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취한 게 분명했다.
“류연… 류연…….?
자리가 비좁다 보니 나예린은 자연스럽게 비류연에게 안기게 되었다. 게다가 비 공자라고 부르지 않고 류연이라고 이름을 불렀다. 확실히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 다.
“우리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비류연은 조용히 나예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갑자기 그녀는 십대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정말이죠?”
“그럼요. 그러니깐 편히 쉬어요. 우린 반드시 살아나갈 테니깐! 걱정 말아요! 우린 여기서 절대로 죽지 않아요! 벌어 놓은 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저승에 갈 수야 없지요. 저승과 이승에서 통용되는 가치 측정 체계가 다른 게 분명한 이상, 이 세상에서 번 것은 이 세상에서 모두 소모하고 가야죠. 그동안 모아 놓은 게 얼만데 여 기서 포기할 수는 없죠. 전 그런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랍니다. ”
비류연의 전신에서 살려는 의지가 용천수처럼 샘솟아 나왔다. 그는 포기도 두려움도 모르는 인간 같았다.
나예린이 활짝 웃었다. 술은 그녀의 차가웠던 웃음에 온기와 화사함을 더해 주었다. 주위의 칠흑 같은 어둠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왜 안심이 되는 걸까요? 왜……?”
그제야 나예린은 눈을 감고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후후, 아무래도 이 술은 얼음을 녹여내는 마법의 힘이라도 있는 모양이로군.”
비류연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나예린을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삶을 위하여!”
그는 어둠을 향해 호리병을 뻗어 경의를 표하고는 다시금 한 모금 마셨다. 술 맛이 배로 좋아진 듯한 느낌에 비류연은 흡족했다. 아직 죽음의 그림자는 그에게 일 격을 가하지 못하고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매몰 10일째!
우지직! 후두둑!
두 사람의 오붓한 보금자리(?)는 생각보다 안전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금이 가고 돌가루가 떨어질 때마다 두 사람은 점점 더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 불 안감을 안고 한 알의 벽곡단으로 하루를 연명한 지도 벌써 10일째였다.
후두득 하고 돌가루가 떨어지고, 쩌적 하고 암석이 갈라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결코 반길 수 없는 소리였다.
“이러다가 무너지는 거 아닌가요?”
동굴의 흔들림이 점차 심해지자 나예린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비류연은 점점 불안해하는 나예린을 보자, 진즉부터 생각해 오던 최후의 수단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생명을 저에게 한번 맡겨 보겠어요?”
비류연이 물었다.
“무슨 좋은 수라도 있나요?”
“어제부터 계속 생각해 오던 게 있죠. 이대로 있다가 허무하게 깔려 죽느니 생사를 하늘에 맡기고 모험을 하는 게 나을 듯해요.”
나예린은 밤하늘을 볼 때의 눈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지금 진지하다!’
그녀는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좋아요! 한 번 이 생명을 구해줬으니 한 번 더 믿어 보죠.”
나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류연! 지금부터 잠시 동안 제 목숨은 당신 꺼예요.”
그녀는 “어떻게?”라고 묻지조차 않았다.
지난 10일 동안 두 사람의 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나예린이 비류연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깊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장소가 협소하고 침낭포는 하나이다 보니 잘 때는 바르게 자도 일어나면 자신도 모르게 비류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그녀는 무척이 나 당황했지만 비류연은 그것에 대해 별 다른 내색을 하지 않아 그녀를 안심시켰다. 비류연이 자꾸 그 일에 대해 걸고 넘어가고 그걸 빌미로 그녀를 놀렸다면 두 사 람의 관계는 더욱더 서먹해졌을 것이다. 비류연의 선택은 훌륭했다.
나예린은 자신이 비류연에 대해 신뢰라는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워했다. 그건 정말 놀라운 기적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불확실하고 무책임해 보이고 제멋대로고 때때로 이기적이기까지 한 남자에게 신뢰라는 고결한 감정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나예린 자신도 이해되지 않을 때가 가끔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장 큰 변화는 어느새 서로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게 된 것이었다. 생사 고비를 함께 넘어가는 두 사람에게 1년차의 공백 따위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저쪽 벽으로 기를 보내본 결과 분명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빈 공간이 느껴졌어! 공기도 희박하고 구조의 희망도 이제 없다. 굼벵이보다 느린 구조대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스스로 살 길을 찾는 게 현명할 듯해! 이제 남은 건 이 방법뿐이야! 생명을 건 도박은 필승의 확신이 없으면 하지 않지만… 이번만은 예외다!’
비류연은 자신의 기와 정신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비류연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발산되어 나왔다. 그가 뇌령신공(雷靈神功)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 천하의 날카로운 보검이 되었다. 그 보검은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도려내고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나예린은 놀라운 눈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기운이 비류연의 주먹 끝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의 주먹 끝에서 기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마침내 비류연의 눈에서 황금빛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하압!”
퍼엉!
비류연의 주먹에 맞은 암벽이 마치 도려내어지듯 부서졌다.
‘성공이다!’
비류연의 눈빛이 빛났다. 분명 감촉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저 벽 뒤에 빈 공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우르르르릉!
아무리 조심했다 해도 한쪽 벽이 부서지는 충격을 이 위태위태한 매몰 장소가 견뎌낼 리가 없었다. 비류연은 재빨리 나예린의 허리를 껴안고 자신이 주먹을 내지 른 곳을 향해 뛰어들었다.
콰르르르르릉!
천둥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그들이 10일간 지냈던 공간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