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1권 5화 – 치사한의 상념

비뢰도 11권 5화 – 치사한의 상념

치사한의 상념

‘..를 조심하시오! ‘

치사한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 가지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영상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져 있었다.

‘과연 그것은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었을까?’

그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신마 패천도(覇天갈중혁의 손자인 갈효봉의 죽음이 흑도를 발칵 뒤집어엎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흑천맹주 갈중천이 피의 보복을 천명한 후 흑천맹 최고 무력 집단 중 하나인 철각비마대가 맹을 떠났다가 천무학관 정문도 두드려보지 못한 채 패퇴라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 직후였다.

철각비마대의 패주에 대해 철각비마대주 질풍묵흔(疾風墨痕) 구천학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자신의 참담한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벌을 청했다. 이상한 점 은 그가 누구에게, 어떻게, 왜 졌는지 입에 자물쇠를 걸고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철각비마대 대원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열지 않았다. 홧김에 그의 대주 자리를 박탈해 버리려 하던 갈중천이었지만 주위의 강력한 만류에 3개월간의 독방 근신으로 그 처분을 완화하였다.

치사한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있어 철각비마대의 기창충격(氣槍衝擊)을 유유히 뚫고 질풍묵흔 구천학의 무영창을 수수깡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는 그래서 직접 구천학을 만나보기로 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전(前) 철각비마대주로 불릴 뻔한 구천학은 곰팡내가 코를 찌르는 습기 가득 찬 지하 징벌실 독방에 구금되어 있었다.

“열게!”

이미 절차를 밟아 허락은 받아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그를 만난 사람들도 아무런 말도 전해듣지 못했다고 담당자는 귀띔했다. 끼이익! 거친 마찰음을 내 며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며 짙은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구천학은 딱딱한 돌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머리와 수염을 다듬지 않은 탓에 머리는 산발이었고, 수염이 제멋대로 나 있었다. 그러나 두 달이 넘는 독방 근신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압도하는 기도는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이 어둠 속에서 더욱더 날카롭게 예기가 연마된 듯했다. 마치 한 자루의 예리한 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에 치사한은 전율해야 했다.

구천학이 감았던 눈을 조용히 뜨고 치사한을 바라보았다. 치사한은 순간 그 야수 같은 안광에 흠칫 몸을 떨었다. 도저히 패배자의 눈빛이라 볼 수 없는 그런 강력 한 안광이었다. 오히려 그는 지독한 전의(戰意)로 몸을 떨고 있었다. 생사결에 임하는 무인과도 같은 기도였다. 사방 벽에 새겨진 최근의 흔적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어둠 속에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 같았다.

독방은 꽤 넓었다. 그렇기에 수련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수련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권장되는 편이었다. 이 빛조차 방문을 거부당 한 지루한 암흑 속에서 소일거리가 무엇이 있겠는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것뿐이었다.

아쉽다면 창법의 고수인 그가, 명색이 죄수인지라 무기를 보유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마천각의 군사께서 이 누추한 곳에는 웬일이십니까?”

두 사람은 서로 안면이 있는 처지였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구 대주! ”

두 사람은 소속이 틀린 터라 지위고하를 따지거나, 혹은 서열을 매기기가 애매했다. 그래서 지금 두 사람은 서로 상대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대주라……. 오래간만에 듣는 호칭이로군요. 지금은 그저 일개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이라니요! 곧 풀려날 근신일 뿐입니다.”

치사한이 의례적인 위로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제가 죄인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지요.”

그의 말 속에는 약간의 자조가 섞여 있었다. 지금은 그 주제를 가지고 논쟁해 봤자 헛수고일 뿐이었다. 치사한은 자신이 여기까지 온 목적을 위해서라도 다른 곳으 로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손에 든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젓가락 같기는 한데 지금은 식사 시간이 아닐뿐더러 그것은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한짝뿐이었다. 구천학이 그 외젓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것 말입니까?”

치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젓가락 한짝 가지고 뭘 하려고 저토록 애지중지 품고 있는 것일까 궁금증이 유발되었던 것이다.

“제 창(槍)입니다.”

구천학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창이요?”

구천학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치사한은 그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창이란 자루의 길이가 아홉 자가 넘고, 그 끝에 뾰족하고 날카로운 쇠붙이가 달려 있는 무기를 가리키는 것 아닙니까?”

치사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구천학의 얼굴과 그의 손에 들린, 그가 창이라 명명한 바로 그 문제의 젓가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것도 창입니다.”

구천학은 힘주어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치사한은 자신이 마치 바보 취급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젓…, 아니 창이란 것은 왜? “

창이라는 말을 내뱉기 위해 그는 무진장 노력해야만 했다.

“창법을 배웠으니 창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제 애창이 없으니 이것으로라도 연마를 대신해야지요.”

그 왜소한 나무젓가락이 그의 창 대용인 모양이다.

“그게 가능하단 말씀이시오?”

“물론입니다.”

대답과 함께 구천학의 손가락이 한쪽 벽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걸어간 치사한은 코가 뭉개질 정도로 벽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눈알이 찢어질 정도로 두눈을 부릅뜨고 나서야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벽에는 개미집처럼 깨알만 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 수를 센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치사한은 갑자기 소름이 오싹 끼쳤다. 갑자기 눈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 아 있는 이자가 두렵게 느껴졌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갇혀 지내는데도 불구하고 이자의 무공은 약해지기는커녕 더욱 강해졌구나.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인물이다. 이런 자가 나중에 대업의 장애물이 되면 무척이나 일이 고달퍼지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정말 놀라운 자다.’

치사한의 마음속에 구천학에 대한 경계심이 싹텄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수련을 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일거리로는 절대 이 정도 수련을 쌓을 수가 없었다. 치사한은 구천학이 매우 필사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반드시 내 손으로 쓰러뜨려야 할 자가 있습니다. 그자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순간 구천학의 눈에서 번쩍이며 기광이 발해지더니 엄청난 전의가 그의 몸에서 폭사되어 나왔다. 그 치열한 기세에 치사한은 움찔했다.

‘그럼 이런 무서운 자가 이끄는 그 강력한 철각비마대를 패퇴시킨 인물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구천학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자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자는 괴물이란 말인가? 어떻게든 그자의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

치사한의 머릿속이 빠른 속도로 맹렬히 회전했다. 그가 다시 한 번 입을 열려고 한 바로 그 찰나였다.

“그럼, 이제 돌아가십시오.”

갑작스런 축객령에 치사한은 당황했다.

“무…, 무슨 말씀이시오? 전 아직 아무것도 묻지 않았소이다, 구 대주.”

이런 축객령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날 일에 대해 물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의 어조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맞소이다!

그것 말고 자신이 이런 곰팡내 풀풀 나는 곳에 올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치사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제 대답은 지금까지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지견정한 묵비권 행사였다. 한눈에 척 보기에도 그는 자신의 의지를 꺾을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 같은 자는 천하의 고집불통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강경 대응 은 좋지 않았다. 이런 유형의 자는 휘어지기보다는 차라리 부러지기를 택하는 족속이었다.

치사한은 우회책을 써보기로 했다.

“구 대주, 이제 곧 화산규약지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그것이 우리 흑천맹과 마천각, 그리고 나아가 전 흑도에 얼마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인지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구천학은 긍정의 표시로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극히정상이었다. 그 중요함을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현 강호에서는 비정상인 것이다.

“에취!”

그때 저 멀리 위치한 파양호의 호숫가에서 재채기를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의 너무 긴 검은 앞머리가 찰랑이며 코를 간질였기 때문이다.

치사한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중대차한 일이 곧 다가오는데 뭔가 변수가 있다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의외의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사람들이 얼마 나 당황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당황은 결코 우리 흑도에 유리하게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우리 흑도가 만일 저 백도 놈들에게 패배라도 한다 면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면 정말 떠올리기조차 끔찍스런 악몽일 겁니다.”

지금 당신의 대책 없는 침묵이 우리 흑도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이적 행위이며, 그것은 조직에 대한 배신일 수 있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뜻의 완곡한 우회적 표현이었다. 치사한이 다시 한 번 구천학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그가 그의 말에 숨은 의미를 알아챘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었다.

“만일 내가 겪은 게 꿈이 아니라면 그 어떠한 대책도 무용지물일지 모릅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 정도의 남자가 환상으로 치부하고 싶은 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치사한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불안하기 도 했다. 그만큼 그 변수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치사한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눈을 가릴 정도로 긴 앞머리의 소년을 조심하시오. 그를…….”

푸드득!

‘도대체 긴 앞머리의 소년이 위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수수께끼 같은 구천학의 마지막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던 치사한의 상념은 전서응의 도착을 알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끊기고 말았다. 비합전서를 담당하는 통전 당을 거치지 않고 자신 앞으로 직접 도착한 밀서였다. 매의 다리에 매달린 통에서 전서를 꺼내 펼쳐본 치사한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이 왔습니까?”

차갑고 냉정한 시선이 치사한을 향했다.

“예! 지금 적혈(血)로부터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내용은? “

“드디어 사슴과 접촉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은밀히 추적을 개시한다 합니다.”

대공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추후 지시를 요청해 왔습니다.”

“작전 2단계를 실시하도록 하시오. 일단 실력을 한번 보지요.”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