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주의 정체
– 백도연합무림연맹 정천맹 맹주 집무실
나백천은 손에 들고 있던 정기보고 서신을 자단목 탁상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전서구보다 열 배는 신속한 특급 전서응을 통해 긴 하늘길을 날아온 보고였다.
이 특급 배달부를 이용하면 변방을 제외한 모든 강호 전역의 소식을 한나절 안에 받아볼 수가 있었다. 한 개 성(省)쯤은 두어 시진 안이면 충분했다.
“일단 한 고비는 넘겼군. 과연 무사히 세 관문을 모두 통과할 수 있을까?
걱정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과한다 해도… 정녕 그 아이들이 그 공포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아마 애써 현실을 무시하며 외면하거나 딴청을 피우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기억의 한편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그 불쾌한 기억을 완전히 떼어내고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또한 그 일을 직접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백년 전 화산!
쿵쿵!
그때의 일을 회상하다 보니 갑자기 오른팔이 거칠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얼른 왼손으로 오른손을 세차게 꽉 잡아 눌렀다. 마치 갓 잡은 월척 같았다.
맥동은 곧 진정되었다.
“휴우.”
오른팔이 진정되자 나백천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직도 그때 일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가…….”
집무실의 열린 창으로 조그맣게 보이는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하얀 구름이 보였다. 창을 통해 본 탓인지 하늘이 무척이나 작게 보였다. 소태라도 씹은 듯 입맛이 썼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비한다면 이런 증상쯤은 새발의 피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망령에 심신을 사로잡혀 지금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 노사의 첫 번째 관문은 그나마 세 개의 관문 중 가장 수월한 곳. 두 번째 관문에는 그분이 계시지. 괴팍한 그분의 성격에 휘말려 봉변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좋 겠구나, 예린아…….”
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천하의 무림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딸아이 걱정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맹주! 맹주! 어디 계십니까? 오늘 소첩이랑 한 약속,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갑자기 문 밖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나백천은 화들짝 놀라 혼비백산했다.
정숙하고 아름다우며 기품 있는 중년부인의 목소리였음에도 나백천은 사자의 포효를 들은 쥐처럼 부르르 떨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아차! 잊고 있었다.’
거의 검선지경에 들었다는 평을 듣고 있는 나백천이었지만, 그가 지금 느낀 전율은 공포와 죽음의 예감이었다. 생명에 대한 절박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런데 오늘이 무슨 날이었더라…….?
기념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보니 일일이 주워 삼키기조차 벅찼다.
‘약혼 45주년 기념일인가, 아니면 결혼 40주년 기념일인가. 음, 임신 20주년 기념일인가. 아니면 예린이 첫 걸음마 기념일인가. 아니면…, 으아아아악!’ 그는 얼른 기념일 전용 수책(冊 : 수첩)을 꺼내 서둘러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품속에서 꺼내 든 그 수책은 무척이나 두꺼워 보였는데 단 한 장도 빈 곳이 없이 빽 빽했다.
기념일 전용 비서를 두든지 해야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투덜거리며 나백천은 서둘러 수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생명이 걸린 일!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여보! 어디 계세요?”
다시 문 밖에서 아내 빙월선자(氷月仙) 예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한없이 부드럽고 현숙한 아내이지만 한번 그녀를 화나게 하면 아무리 검선지경에 든 그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나백천은 지금까지 한번도 그녀와의 싸움에서 이긴 적이 없었다.
사실 지금 부인인 예청은 그의 두 번째 처였다. 첫 번째 처와는 사별한 지 거의 백 년 가까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처는 천겁혈세 때 죽었다. 그 뒤로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았다. 자식은 없었다.
처음에 재혼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신경 쓸 시간조차 없었다. 그가 처리해야 할 안건이 날마다 수백 건은 족히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결혼은 다분히 정치적인 냄새가 강했다. 싫다고 싫다고 하는데 주위에서 억지로 재혼을 성사시켰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거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도 무림의 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혼자 궁상떨고 있으면 꼴불견이라는 게 주위 사람들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측근들에 이어 친구들까지 나섰다. 친구가 아니라 웬수들이었다. 다분히 즐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림맹주를 그렇게 골려먹고 싶었나? 마침내 그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두 번째 처는 그에 비하면 너무나 젊었다. 게다가 정말 과분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솔직히 사랑스러웠다. 갑자기 백 년은 젊어진 것 같았다. 늙은이의 주책? 도둑놈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왜 절세고수가 절세고수로 불리는지 신혼초야에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 과연 그는 고수였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게 사실이다. 때문에 업무에만 열중하고 아내에게 소홀히 했다. 장님이 길을 더듬듯 자신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 느 날 그의 아내가 그를 불러놓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당신께서 백도 무림의 제반 대소사를 관장하는 무림맹의 맹주라 하셔도 그 전에 저의 하나뿐인 부군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 하 였습니다. 가정 하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어찌 백도 무림의 안위를 인의(仁義)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일말의 애정도 없다면 모를까 만일 있다 면 최소한 저에 대한 애정을, 그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마디마디 구구절절이 옳은 말인데 나백천에게 무슨 반론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그 순간 나백천은 백기를 올리고 항복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딸 예린이 태어났다. 보물 중의 보물. 너무너무 귀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그 후로 그는 아내에게 절대 복종했 다. 백도 무림맹 최고의 기밀.
벌써 이십 년이나 된 옛날 이야기였다.
“여보, 어디 계시나요?”
다시 한번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 부인! 가오리다! 지금 가리다!’
전 백도 무림은 물론이고 일부 흑도 세력에까지 존경을 한몸에 받는 백뢰진천검 나백천!
보다시피 현재 그는 못 말리는 공처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