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18화 – 주인 된 자가 차지해야 하는 것
주인 된 자가 차지해야 하는 것
자신의 처소인 묵호전에서 식후 수련에 열중하던 호아맹검 호천상.
항상 이 시간은 정기적인 그의 식후 수련 시간이므로
항상 조용히 하고 방해하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밖이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총관 서문기가 가지고 온 전언으로 그의 수련은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총관 서문기가 가지고 온 전언은 그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엄청나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지금 장의 외원(外院)이 두 명의 괴침입자에 의해 풍비 박살났고 그 두 침입자는 벌써 내원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빈객들과 내원 무사들이 모두 나서 막아 보 려 했지만 도무지 역부족이라는 믿을 수 없는 보고였다.
호아장은 크게 외원과 내원으로 나뉘는데, 내원 무사는 외원 무사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난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원을 지키는 호법들도 이미 상당한 경지 에 올랐다고 평가되는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무림 각처에서 초빙해 온 빈객들도 그 실력이 적어도 일류라고 평가받고 있는 무사들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단 두 명을 막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고 있다니, 호천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총관이 다른 이들과 작당하고 지금 자기를 놀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쩍은 생각마저도 들었다. 하지만 총관의 얼굴에 떠오른 화급함과 그의 온몸을 적시는 땀으로 볼 때 결코 장난은 아닌 것 같았다.
호천상은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내원(內院)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마음이 급하기는 급했는지 수련중이라 벗어 놓았던 상의도 걸치지 않은 맨몸 이었다. 마당으로 헐레벌떡 뛰어나온 호천상은 두 불청객을 보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두 명 중 한 명의 중년인에게 집중되었다. 바닥에 기절한 채 짐짝처럼 차곡 차곡 쌓여 있는 내원 무사들도, 코피를 줄줄 흘리며 기절한 빈객들도, 샘솟는 공포심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대치하고 있는 아직은 멀쩡한 내원 무사들과 호법들도 눈 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한 명의 중년인에게 그의 모든 시선은 집중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방금 전 그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는데, 지금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 두 명 중 한 명이 바로 명성도 자자한 염도 곽영희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본 때문이었다. 물론 염도의 특색 있는 형색을 보고도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 마 호아장의 바보 제자 감운수 정도일 것이다. 제대로 보는 눈이 있었다면 감히 자기 분수도 모르고 무모하게 달려들었겠는가.
호천상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장원이 백주 대낮에 습격을 당해 외원이 뚫리고 침입자가 내원에 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었다. 그 많은 제자들과 밥만 축내며 들어앉아 있는 빈객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심심하게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단 말인가?’
이런 짙은 의구심도 든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침입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물론 비류연과 염도 쪽에서는 단순한 방문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호천상 자신이 허둥지둥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업무를 수행중이던 장 내의 장로와 호법들도 모든 업무를 내팽개치고 뛰쳐나와 침입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 러나 아무도 섣불리 먼저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침입자 중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내원에 쓰러져 있는 무사들은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었다가 초상을 치룬 경우가 되고 말았다. 침입자 중 한 명이 염도란 걸 확인했을 때 는 이미 수십 명의 무사들과 서너 명의 빈객들이 의식 불명의 상태에 빠진 후였다. 잘못하면 장의 기반이 완전히 거덜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이었다. 그래서 모두 들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며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아연 팽팽해져 갔고 어쩔 수 없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비류연과 염도는 이런 소란함과 긴장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단한 일이 괜히 복잡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사람들이 자신들을 너무 귀찮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이 이미 꼬일 대로 꼬인 난마(亂麻)의 상황임을 두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상황 이 뒤얽힌다 해도 단칼에 처리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느긋한 건지, 신경이 둔한 건지 두 사람 모두 일반인의 상식을 훨씬 뛰어 넘는 족속들이라는 사 실만은 틀림없었다.
이 대치 상황을 깨기 위해 호천상이 염도에게 정중히 포권지례를 하며 먼저 말을 건넸다. 호아장의 장주로서 그는 상황을 수습하고 타계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제가 바로 본장의 장주인 호천상이라 합니다. 과분하지만 동도들은 부족한 저를 호아맹검이라 추켜세워 주고 있습니다. 무림에 명성이 자자하신 천하 5대 도객 의 일인이신 염도 곽 대협을 뵙다니 삼생의 영광입니다.”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 가며 호천상이 말했다. 비록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지만 강호 무림에서의 염도의 위치를 생각할 때 절대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용무로 폐장을 방문하셨는지요, 곽 대협?”
염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했으니 그의 기분이 담담할 리가 없었다.
“곽 대협, 폐장을 방문한 용건을 일러주십시오.”
호천상이 다시 한번 정중히 물었다. 그의 심기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재차 정중히 물었는데도 아무 반응 없이 무뚝뚝하게 서 있기만 하는 염도의 옆구리를 비 류연이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빨리 대답하라는 재촉의 의미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둘 사이의 관계를 비밀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비류연은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둘 사이의 관계가 탄로 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비류연에게는 별로 심각한 일이 아니지만 염도에게는 매우 낭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염도도 그런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염 도의 입이 열렸다. 낮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한 가지 받을 물건이 있어서 왔네.”
“물건? 무슨 물건을 말씀하시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호천상으로서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불초는 도저히 알 수가 없소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해 하는 호천상의 궁금증을 염도가 해결해 주었다.
“자격이 없는 자가 주인 됨을 칭하고 있는 물건일세. 바로 승룡패(乘龍牌)지.”
“승, 룡, 패(乘龍牌)!”
호천상은 물론이거니와 주위를 둘러싸고 대치중이던 장내의 모든 무사들의 입에서 똑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승룡(昇龍牌!
일류라 인정된 소수의 문파에게만 주어지는 특혜권. 엄선된 일류 문파의 제자 한 명이 일 년에 한 번 있는 승천무제를 거치지 않고 천무학관 특별 전형 시험에 응 시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하는 패(牌), 승룡패(昇龍牌)!
용문을 넘어 검을 타고 승천하는 용를 조각해 놓은 이 패는 미래를 꿈꾸는 젊은 무인들에게는 목숨과도 진배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을 지금 염도는 아무렇지 도 않게 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들어보아도 상식 밖의 무리한 요구였다. 제정신이 박힌 상식적인 사람의 입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요구였다. “곽 대협! 그 말씀은 농담이시겠지요? 그 물건은 이미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 내가 알기로는 승룡패의 주인은 없다고 들었는데. 분명히 내가 듣기로는 오직 실력만이 승룡패의 주인 될 자격을 논하는 척도라 들었는데 아니었던가? 아 니라면 본인의 귀가 잘못된 것이겠지.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지?”
염도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천무학관에서 세운 규칙에 따르면, 실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누구나 정당한 비무를 통해서 승룡패의 소유권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단, 생(生)과 사(死)를 가르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였다. 만일 비무 도중 생사가 갈리는 일이 발생할 시에는 쌍방 모두 자격을 박탈당한다고 관규(館規)에 명시되어 있었다. 이런 규칙을 단서로 단 것은 그렇지 않으면 승룡패를 둘러싸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정도의 단서라도 달려 있지 않다면 피를 부르며 유혈의 강을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승룡패가 가진 가치였다. 분하지만 염도가 한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저희 둘째 놈인 운수의 것입니다. 지금 그 소유권의 향방을 가르자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부당하신 처사가 아닐는지요?”
“운수? 아, 아까 맥없이 쓰러진 풋내기 말인가? 형편없는 놈이었지. 검법의 껍데기인 검형(劍形)만을 익혀 놓고 검법을 다 익혔다고 좋아하고 있더군. 검의(劍意) 가 담겨져 있지 않은 검법을 검법이라 할 수 있겠나? 그래서 훈계를 좀 내려 줬지. 좋은 교훈이 되었을 걸세. 우리에게 감사해야 할 걸. 망신살이 뻗칠 걸 구해 주었 으니 말이야. 세간에선 이런 걸 구사일생이라고 한다지? 자네들은 이번에 억세게 운이 좋았네.”
결코 염도 답지 않은 긴 비아냥거림을 들은 호천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자신의 애도 노호도의 검병(劒柄 : 검의 손잡이)을 으스러지도록 꽉 움켜쥐었다. 당장 이라도 검을 빼 들고 생사(生死)를 가를 듯한 패도적인 투지가 그의 전신에서 물씬 풍겨 왔다. 검병을 움켜진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우리 운수에게 훈계를 내린 게 곽 대협이셨소?”
“아니, 훈계를 내린 건 내가 아니라 이쪽일세.”
염도의 손이 옆에서 잠자코 서 있던 비류연을 가리켰다. 자연히 호천상의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호랑이 눈처럼 매섭게 번뜩이며 내리 꽂히는 호천상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도, 비류연은 연신 태연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떠 웃음까지 지으며 호천상을 향해 반갑다는 듯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비류연으로서는 전혀 악의 없이 행한 순수한 행동이었지만, 호천상으로서는 속이 뒤집어지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중인들이 보기에도 비류연의 어처구니없 는 행동은 제 무덤 삽질하는 형상과 다를 바 없었다. 호천상의 부리부리한 호목(目)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새파란 애송이가 자신을 능멸했 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천하 5대 도객의 일인인 염도라는 초절정 고수가, 겉보기에 영락없는 풋내기 애송이인 비류연에게 패해 그의 제자로 전락한 사실을 꿈에도 알 리가 없었다. 그가 신이 아닌 이상 그런 강호의 숨겨진 비사를 어찌 알겠는가? 만일 알았더라면 비류연을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그런 섣부른 생각은 품지 않았을 것이다. 호천상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가 저놈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라며 호천상은 결심을 굳혔다.
“그렇다면 그쪽에 불초가 책임을 물어야 되겠군요?”
그쪽에서 우리 애한테 징계를 내렸으니, 이쪽에서도 같은 값으로 징계를 내려 처벌하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음성에는 진 빚은 이자까지 쳐서 갚겠다는 의지가 분 명히 담겨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염도가 피식 웃었다. 다분히 네까짓 게라는 의미가 담긴 비웃음이었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자신조차 당해 내지 못한 괴물을 무 슨 수로 호천상이 감당한단 말인가.
호천상은 제 무덤 삽질하고 있는 장본인이 비류연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염도는 그러한 사실들을 일일이 호천상에게 가르쳐 줄 만큼 자상한 마음씨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런 추태가 알려져 봤자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조롱과 멸시의 물벼락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만에 하나 비류연이 호천상에게 박살이 난다 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아니 오히려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지겨운 놈을 손 하나 쓰지 않고 제거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염도가 갑자기 의외의 행동을 했다. 호천상의 행동을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호오? 할 수 있다면 해 보시게. 하지만 먼저 날 쓰러뜨려야 될 걸세.”
호천상은 염도의 이 발언에 흠칫했다. 별 것 같지도 않은 풋내기 놈을 위해 염도 자신이 나서겠다고 하다니. 풍문에 듣던 것과는 영 딴판인 염도를 대한 그의 놀람 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을 귀찮게 하는 무리들과 그런 행위들을 가장 싫어하는 염도가 스스로 자청하여 도를 휘두르는 수고스러움을 감당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저 나이 또래에 염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다시금 비류연을 훑어보아도 호천상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연 심각해진 장내의 분위기 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를 즐기기라도 하는 듯 비류연은 유유자적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여 유였다. 비류연은 어린 나이에 벌써 그러한 무소 무위의 경지에 이른 것인가? 아니면 단지 그의 바보스러울 정도로 낙천적인 성격에서 기인된 것인가? 아직은 확인 된 바가 없다.
“본인께서 직접 하시겠다고요?”
비류연이 염도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의 두 눈에는 별빛처럼 무수히 반짝이는 기대가 가득했다. 자신에게 수고 끼칠 것도 없이 본인 선(線)에서 직접 해결하겠다니. 드디어 마음으로부터도 승복했구나, 하고 얼토당토않은 지레짐작을 하며, 그는 떡 줄 사람은 생각 안 하고 혼자서 흐뭇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내가 하지……요!”
호천상의 결투에 염도 스스로가 직접 나서서 상대해 주겠다고 한다. 자신에게 번거로움 끼칠 것 없이 그 스스로 비류연은 정말 흐뭇해졌다. 염도는 자신의 솥뚜껑 만한 커다란 손으로 비류연을 밀쳐내고 한 발짝 앞으로 걸어나왔다. 비류연은 옆에 서서 열심히 박수를 쳤다. 힘을 내라는 응원인 모양이다. 하긴 별 효과도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러나 염도가 이 비무를 맡은 것은 결코 비류연 좋으라고 한 짓이 아니었다. 마음으로부터의 승복?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비류연의 제 자로 전락하면서 은연중으로 알게 모르게 받아 왔던 셀 수 없이 많은 정신적 육체적 울화를 이번 기회를 통해 조금이라도 풀어 보자는 의도에서 염도는 이 싸움을 받고 나선 것이다. 즉 호천상이 알면 놀라 뒤로 까무러칠 사실이지만, 그는 염도의 마음 속에 그동안 층층이 쌓여 왔던 울화를 조금이라도 해소시키기 위한 단순한 화풀이 감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염도는 전부터 겨우 이 정도 수준으로 검(劍)의 명문을 자처하는 호아장이 맘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당연히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호아장주 호천상이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거기에 더한 이유가 한 가지 따로 있었다. 이 호아장의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계속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찜찜한 느낌 때문에, 지금 그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 호아장과 그곳의 주인인 호천상에 대한 인상을 더욱 더 나쁘게 만들고 있었다. 현재 염도의 기분은 완전 개차반인 상태였다. 그래서 울화 해소를 겸해서, 이번 기회 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 주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하늘 위에 하늘, 천외천(天外天)이 있음을 알게 해 주리라 결심한 것이다.
물론 염도에 의해 하찮고 시시하게 비하(下)되었지만, 호천상도 엄연한 일문의 주인(主人). 결코 얕잡아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둘 다 검과 도를 잡는 품세 와 기도가 범상치 않음이 무공의 깊은 곳을 경험해 본 절세 무인다웠다. 쌍방이 부딪친다면 절대 시시한 싸움으로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호천상 쪽이 부족한 감이 많았다. 기세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염도의 상대가 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염도 또한 호천상 을 단순한 화풀이 대상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고 있었다. 약간 반응이 있을 법한 화풀이 감. 물론 호천상도 뒤늦게나마 그런 낌새를 느꼈고, 그것이 그의 분노를 더 욱 부채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강렬한 분노와 피끓는 투지와는 달리 그의 애검(劍), 성난 호랑이 이빨(노호아 : 怒虎牙)을 움켜진 그의 우수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검병(劒柄 : 검의 손잡이)을 움켜진지 벌써 상당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여태 미세한 잔 떨림이 가시지 않았고, 두 손에는 진땀이 베여 있었다. 내재된 본능의 어쩔 수 없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의 형세는 철저한 배수진(背水陣),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기꺼이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호천상이 법도대로 예의를 갖춰 말했다. 하지만 씹어 뱉듯이 말하는 게 절대 눈곱만치도 배우고 싶은 의사(意思)는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한 수 가르쳐 보이겠 다는 기세(氣勢). 그 패기(覇氣)만은 높이 평가해 줄 만했다. 염도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올 테면 언제든지 와 보라는 의미(意味)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동시에 검과 도를 뽑아 들었다. 선수 양보(先手讓步), 염도는 자리에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자연 호천상이 먼저 도약 해 와 염도를 향해 무서운 힘으로 검을 내리쳤다. 힘과 파괴를 중시하는 패도(覇道)의 강검(强劍)! 과연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순간 검(劍)과 도(刀)가 맞부딪쳤다. “쾅!”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검과 도가 부딪쳤는데 쇳소리는 나지 않고 폭발음이 울린 것이다. 검과 도가 격돌한 곳에서부터 발생한 강력한 기(氣) 의 폭발의 여파로 먼지와 자갈이 분분히 날리고, 성난 바람이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하던 중인들의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하고, 그들의 장포를 세차게 펄럭이게 만들 었다. 중인들의 전신을 타고 찌릿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모두들 기(氣)의 격돌과 그 여파를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첫 격돌이었다.
격돌로 인해 발생한 분진(粉塵)이 두 사람의 시야를 가렸지만, 염도가 손을 한 번 스윽 휘두르자 신기하게도 일진 광풍이 불어와 자욱한 먼지를 걷히게 했고, 이윽 고 두 사람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 앞에 드러났다.
“아차! 이런!”
호천상은 내심 경악했다. 상대인 염도는 그 자리에 붙박은 듯이 한 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데 반해 본인은 어떤가? 바닥에 깊고 선명한 족적을 남겨 놓은 채, 먼지를 풀풀 날리며 뒤로 여덟 발자국이나 후퇴를 한 것이 아닌가. 깊고 선명한 족적이 그가 당한 낭패를 여실히 들어내 주고 있었다. 바닥에 찍힌 선명한 발 도장은 그가 한 수의 겨룸으로 인해 받은 낭패의 정도만큼, 그 자신의 몸이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열심히 움직인 명백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공수(攻守)였지만, 이 한 수의 겨룸으로 인한 무공의 우열은 확연했다. 호천상 쪽에만 찍혀 있는 족적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시커멓게 그을려진 면상과 화기(火氣)에 상해 버린 꼬불꼬불한 머리카락, 그리고 시커멓게 그을려지고 흐트러진 의복(衣服)은 두 사람의 실력 차를 여과 없이 극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호천상은 염도와 검을 섞을 때 받은, 마치 화약이 폭발하는 듯한 거센 충격에 하마터면 손아귀가 찢어질 뻔했다. 폭발과 함께 화기(火氣)가 충천하고 폭염의 폭풍 이 회오리처럼 그의 전신을 거칠게 휘감았다. 몸을 빼기에도 급급했다.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든 지경에 반격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과연 방금 전의 것이 바로 염도의 주특기라는, 소문의 ‘검격 폭염기(劍擊 暴炎氣)’. 줄여서 검염기(劍焰氣)라 불리는 희대의 절기였다. 풍문으로 들었을 땐 과장된 소문이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직접 마주치고 보니 이건 소문 이상이었다. 다시 검을 섞을 생각을 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자신의 실력이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 던가 하는, 그동안 자신만만해 했던 자신의 무공에 대한 회의(懷疑)도 들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호천상은 알고 있었다. 염도가 일부러 검과 도가 격돌하는 순간에 손속을 늦추었다는 사실을. 봐 주고도 이만큼의 낭패를 자신에게 안겨 준 것이다. 검을 뽑아 들
기는 호천상이 먼저였다. 발검과 동시에 스친 일 검. 그런데 얕보는 건지 선수 양보한답시고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염도. 그런 염도가 호천상의 공세를 똑똑히 보고 확인한 다음 자신의 도를 뽑아 들어 방어했다. 완벽한 후발제인(後發制刃). 그리고 완벽한 실력 차였다. 속도, 힘, 내공, 모든 면에서 그는 염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단일 검의 교환, 단 한 수의 공수 전환으로 호천상은 밑천이 모두 거덜나 버렸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하지만 죽을 땐 죽더라도 체면상 이 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대로 물러서기엔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했다. 호천상은 필살의 각오를 다졌다. 최후의 몸부림이라고 평해도 좋았다. 남자의 자존심이었 다.
이때, 그런 그를 구원해 준 구원의 목소리가 있었다. 하늘에서 찾아온 광명이었다.
“멈추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