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19화 –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호적수, 아니 원수

비뢰도 2권 19화 –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호적수, 아니 원수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호적수, 아니 원수

막 호천상이 염도를 향해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달려들려는 찰나,

전각 안에서 외마디 목소리가 들려 왔다.

결코 크지는 않지만,

이 소란스러운 장내에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중인의 귀에 똑똑히 전달되는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정중하고 웅혼한 내가 진기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상대는 대단한 절정 고수임이 분명했다. 그런 자의 목소리만이 이처럼 중인들의 집단 의식을 파고들어 분위 기를 쇄신시키고 주위를 환기시킬 수 있는 것이다. 상당히 고도의 내가 상승 수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염도는 호천상을 뭉개려고 준비중이던 손속을 멈췄다.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팽개쳐진 사람처럼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과 행위를 멈추었 다. 염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의 뇌리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 무덤까지 끌고 들고 갈 목소리, 아니 저승길까지 따라올 목소리 였다. 그의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의 각인을 남긴 자의 목소리였다. 어찌 가슴 속 깊숙한 곳에 각인된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염도의 마음 속 한구석에서 의혹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떨리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만일 그 놈이라면 어떻 게 해야 하나? 그의 시선이 목소리의 출처인 전각에 천천히 못 박혔다. 이윽고 전각 문이 열리며 한 명의 단아하고 귀품 있는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청색 은발에 청염(靑髥), 청미(靑眉). 염도와는 정반대로 온통 파란색 일색인 중년인이었다. 바다처럼 짙은 청색이 아니라, 얼음의 차가움을 연상케 하는 투 명한 느낌을 주는 옅은 은청색(銀靑色)이었다. 그를 본 염도의 눈은 놀란 토끼눈처럼 변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의를 목격한 사람처럼 그의 두 눈은 찢어 질 듯 떠졌다. 부릅떠진 눈에 붉고 가는 가지의 그물처럼 핏대가 서 올랐다. 그의 폐부 깊은 곳으로부터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철 – 수!”

산천초목이 모두 사시나무 떨 듯 떨 것 같은 위용(威容)의 무시무시한 사자후(獅子吼)였다. 대기를 진동시키는 대갈성(大喝聲)에 모두들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정 작 대갈성을 들은 상대, 빙검 관철수 본인은 별로 놀라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일부러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그의 얼굴에선 어떤 마음의 동요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의 동요를 일절 내색하지 않은 채 호수처럼 고요한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한마디로 북해 한설처럼 시 리고 차가운 남자였다. 빙하처럼 얼어붙어 있던 그의 입이 갈라지며, 눈보라보다 차가운 음성이 새어나왔다.

“다시 만나게 되었군, 희(姬)!”

희(姬)란 공주란 뜻의 한자다. 물론 염도의 이름 자는 공주 희(姬)가 아니라 즐거울 희(嬉)였지만, 과거 빙검은 염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를 희(姬)라고 불렀다. “놈! 날 그렇게 부르지마!”

다시 한 번 염도가 대갈성을 터트렸다. 그는 격심한 분노로 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몸은 전율하고 있었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천리 밖 에 떨어져 있어도 저놈의 낌새는 눈치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애도 홍염이 이리도 애절하게 우는 게 당연했다. 놈이 가지 고 있는 애검(劍) 빙루(氷淚). 싸늘할 정도로 시린 한광을 머금은 투명한 푸른 검신은, 월광마저 얼어붙게 만든다는 극음(極陰)의 한기(氣)를 품은 투명한 빙청 색의 검(劍)이었다.

자신의 애도 홍염과 한 치의 길이도 어긋남이 없는 동일한 길이에, 한 푼 한 량의 오차도 없는 동일한 무게를 지닌 검(劍) 빙루(氷淚). 태초에 태어날 때부터 태극 (太極)에서 분리되어 음양(陰陽) 한 쌍으로 태어난 홍염의 쌍둥이 검이었다. 쌍둥이 검은 서로를 부르며 상대를 끌어당기기 마련이다. 그런 둘이 서로 점점 근접하 게 되니 그리도 애절하게 공명(共鳴)하는 게 당연했다.

“과연 너였나? 네놈이었나! 빙검 관, 철, 수!”

염도의 대갈 일후성은 장내를 들썩일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그 목소리는 거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목소리였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만난 사람처럼 염도는 행동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염도는 그를 그렇게 대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둘만이 아는 일일 게다. 그들은 정말 대조적이었다. 기세, 기운, 성격, 생김새, 색깔, 기타 등등 그들은 모든 게 대조적이었다.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극성. 극과 극의 대립처럼 보였다.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극(極)과 극(極) 조화(造化)를 이룰 수 없는 엇갈 림. 이런 말들로 밖에는 달리 그들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빙검(劍) 관철수!

천하 5대 도객과 나란히 칭송 받는 무림의 명망 높은 천하 5검수의 일인이자 현 천무학관 진무전주. 진무전은 천무학관 내의 무사부를 통괄하고 관리하는 막중한 곳이었다. 즉, 빙검은 현재 천관 내에서 무사부를 책임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란 이야기였다. 한마디로 대단한 지위를 지닌 사람이었다. 또한 빙검은 강호인 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인격, 성품, 무공,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무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림에서 가장 검을 잘 쓴다는 심검(心劍)에 가장 가까이 다다른 검객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인이었다.

일부에서는 이미 그가 심검을 터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있었다. 그만큼 빙검의 경지는 자타의 확고한 공인을 받은 놀라운 경지였다. 천하 5검수의 실질 적인 수좌는 빙검 관철수라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런 그도 염도 곽영희와는 물과 불, 아니 얼음과 불의 관계라고 해야 하나? 그의 고귀한 인품도 염도 앞 에서는 발휘되지 않는 모양이다. 물과 불, 물과 기름, 고양이와 쥐, 그리고 개와 원숭이 사이로 표현될 수 있는 원수지간이었다. 두 사람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둘만이 알 뿐.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대립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로가 될 수 있으면 절대로 마주치지 않고 싶은 첫 번째 사람이기도 했다.

“십 년 만인가?”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빙검의 입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북해의 빙하처럼 시리도록 차가웠다. 감정의 잔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하면서도 차가운 음성.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는 꼿꼿한 태도에, 푸른색이 도는 청빛 은발, 같은 색을 띤 단아하게 기른 수염. 염도가 온통 붉은색 일색이라면 그는 온통 푸른색 일색이었다. 특히 모발은 짙은 청색이 아니라 투명한 은발에 가까운 청색이었다.

청은(銀)의 미간, 수염, 머리칼, 거기에 푸른빛이 감도는 은청색 비단으로 만든 무복,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를 내뿜 는 푸른 신검(神劒)! 그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애검 빙루(氷涙)였다.

“큭큭큭. 과연 네놈이었나? 겨우 호아장 따위의 장원이 버젓이 천관(天)의 앞마당인 남창 한가운데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 준 장본인이? 그렇지, 네놈이라면 그 게 가능하지.”

염도가 괴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와는 옛날부터 안면이 있어 약간의 도움을 준 것뿐일세. 나머진 다 저 사람의 노력이지. 난 단지 한 명의 조언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세.”

“흥, 언제나 네놈은 그랬지. 혼자서 고고한 척 온갖 잘난 척은 다하고…….”

염도는 그의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언행에는 빙검을 향한 불만과 적의가 가득 배여 있었다.

빙검을 향한 불만과 적의를 여과 없이 토해 내던 염도가 그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무엇인가를 힘겹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 빙검을 비아냥거릴 때와는 사뭇 다른 작고 진지한 어조였다.

“그… 그녀는 어떤가?”

마침내 염도는 그것을 묻고야 말았다. 둘 사이의 화약고를 건드린 것이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폭발해 주위를 상처 입힐 위험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건드리 고야만 것이다. 즉시 빙검의 눈에서 기광이 흘렀다. 그는 염도가 끝내는 이 이야기를 꺼낼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절대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잘 있네!”

여전히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냉한 어조였다. 염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음의 동요가 나타났음인가. 그의 그런 표정을 읽었는지 빙검도 잠시 말에 뜸을 들 였다.

“십팔 년 전, 서로의 길을 갈라섰던 그때도 자넨 그녀의 안부만을 물었지. 그때 그녀는 임신중이었고……. “삼 개월 째였지. 죽일 놈!”

염도의 얼굴에 언뜻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잊으려고 노력했던 마음의 옛 상처가 다시금 욱신욱신 아파왔다.

“십 년 전 우연치 않게 만났을 때도 자넨 그녀의 안부밖에 묻지 않았어.”

“흥, 삼 일 밤낮을 쉬지 않고 겨루었던 그때 말인가? 그때 살려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끝장을 냈어야 했다고. 그땐 그녀 뱃속의 아이 덕분에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 진 줄 알라구.”

“누가 할 소리. 그녀가 그때 나타나지만 않았던들 자넨 이곳에 멀쩡히 서 있지도 못했을 걸세. 자네야말로 구사일생이었지. 십팔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그리고 오늘 이 순간에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네. 그녀는 잘 있네!”

“그놈의 말은 십팔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구만. 신빙성이 떨어지는 건 여전하고. 다른 할 말은 없나?”

“아, 딸아이가 아주 예뻐졌지. 엄마를 닮아 미인이 되었어. 그녀의 소싯적보다 더 예쁘다네.”

감정이란 물건 따위는 갖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란 얼굴과 어조로 잘도 말을 내뱉는구나 씹어 죽일 놈이라고 염도는 생각했다. 빙검의 그 한마디는 염도의 염장 을 지르는 말이었다. 염장이란 고기를 골고루 상처 내어 그곳에 소금을 뿌려 절이는 일련의 장기 보관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산 채로 염장 지짐을 당하면 그 고통이 어떻겠는가?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그런 고통일 것이다. 염장 지짐을 당하고도 염도는 그의 인내심의 끝을 짜내어 태연한 척 말했다.

“그래? 좋겠군. 그럼 이제 사양하지 않지.”

“스르릉.”

애도 홍염이 저절로 뽑혀 나와 염도의 손에 걸렸다. 주인의 마음을 읽은 것이리라. 빙검의 애검 빙루 역시 스르릉 맑은 검명을 울리며 검집에서 빠져나와 빙검의 손에 잡혔다. 두 사람은 절대로 양립이 불가능한 사이였다. 둘 사이에 양보란 있을 수 없었다. 같은 하늘을 이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러운 두 사람 이었다.

각자 움켜잡은 자신의 애검과 애도를 휘두른 것은 일 각 일 초도 틀리지 않은 동시였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일 초. 염도가 지닌 홍염에서는 무서운 화기를 띤 적색 무지개가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이에 지지 않으려는 듯 빙검의 애검 빙루로부터도 달빛마저도 얼릴 듯한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청백색 무지개가 허공을 갈랐다.

불꽃의 잔영을 쾌적 속에 남기며 뻗어 가는 홍광(紅光)의 도기(刀氣)는 멀리 떨어져서 이 사태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 비류연과 호아장 무사들에게도 확연 히 느껴질 정도의 강력한 화기를 띄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비류연도 염도의 이 한 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폭발하는 화산 같은 맹렬한 기세가 들끓는 무시무 시한 일도(刀)였다. 그 기세가 너무나 무시무시하여 절대 막을 수 없을 거라고 중인들은 모두 생각했다. 아무튼 염도의 도에서 뿜어져 나온 도기가 이글거리는 폭염 같다면, 빙검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는 차갑게 휘몰아치는 매몰찬 북풍 한설을 연상케 했다. 달빛도 빙루의 검기에 닿으며 당장에 얼어붙어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꽈쾅!”

상극의 기(氣)가 허공 중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폭염과 북풍한설의 격돌! 진기가 검기의 형태로 날아가 허공 중에 얽히게 되면, 시전자의 공력으로 승패의 향방 이 판가름나게 된다. 둘은 하나의 스승으로부터 하나의 수업은 받은 동문 사이. 그 실력의 고하를 가리기란 언제나 요원한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 일격에 혼신의 진기를 모두 집중시켰다. 그러나 승패는 끝내 가려지지 않았다. 맞부딪친 두 개의 기는 허공 중에서 상쇄 소멸해 버린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그동안 쌓아 놓은 내공 수위도 막상막하였던 것이다. 완벽한 상쇄(相殺)였다.

“슈우우우!”

힘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분진이 사방천지를 휘감아 중인들의 시야를 가렸다. 엄청난 돌풍을 동반한 분진 속에 중인들은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모두 들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상황을 알아보려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잠시 후, 먼지가 걷히면서 시야가 확보되었고 둘의 대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빙검은 중인들의 기대를 싹 무시해 버렸다. 빙검의 전신 어디에도 피해를 입은 흔적은 없었다.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청백색 무지개 같은 극음의 검기(劍氣)가 무시무시하기 그지없던 도의 공격을 너무도 쉽게 막아낸 것이다. “흥, 과연 썩을 놈이 아직 솜씨는 녹슬지 않았구나!”

염도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불쾌하기 그지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염도의 전신에서도 상처는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오직 상대를 능가하기 위해 무공에 전념해 온 두 사람의 입맛은 몹시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힘이 기울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인정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네도 마찬가지!”

빙검은 여전히 안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은 냉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