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2화 – 사부님 전상서
사부님 전상서
제자 장성하여 나이 스물.
사내 나이 스물에 세상을 보지 못했다 함은 실로 부끄러운 일!
제자, 이제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보고,
다시 나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제 세상에 나아가 사부님의 이름을 떨치고,
사문의 이름을 빛내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니, 말리지 마십시오. 전 갑니다.
제자 비류연 서(書)
추신 : 요 아래, 청룡 은장 아미 지점에 사부님 명의로 절대 노후 보장 연금을 들어 놓았으니 노후 생활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노후 대책은 확실히 세워 놓고 가니 깐 괜히 쫓아오지 마세요. 도장과 입금 증표는 편지 옆에 두었습니다.
계좌번호는 241052-52-021455입니다. 비밀 번호는 편지 뒤에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술은 좀 자제해 드세요! 지출의 가장 큰 원인이니까요.
그리 길지 않은, 제자의 가출 신고서 전말이었다. 본문은 그런 대로 나은 편인데 추신은 정말로 버르장머리없게 썼다고 사부는 생각했다. 그나마 ‘절대 노후 보장 연금’이라는 단어가 그 화를 조금이나 삭혀 주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는 녀석은 아니었는지, 사부 생각은 있는 놈이었는지, 아님 추적 방지용인지, 아부 아 첨용인지 절대 노후 보장 연금까지 들어 놓고 가출한 것이다.
‘절대 노후 보장 연금’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상당 액수의 돈을 넣어야 하는 청룡 은장의 전문 은자 상품이었다. 청룡 은장은 청룡 은장주 유재룡이 맨 처음 장 가 밑천을 탈탈 털어 시작했다고 알려진 은장으로, 당시 모두들 미친 짓 하지 말라면 짐 싸 들고 다니면서 말렸지만, 현재는 강호에서도 난다 긴다 하는 은장을 제치 고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청룡 은장은 돈을 빌려 주고 보관하는 것 이외에도, 매달 일정량의 은자를 저축하여 정해진 일정량을 채우게 되면, 매달 정해진 이자를 평생 지급하는 연금이라는 상품이 있었다. 물론 당사자가 죽으면 예치되어 있던 돈은 당연히 청룡 은장의 소유가 된다. 그 중에서도 ‘절대 노후 보장 연금’은 청룡 은장의 대표적인 연금으로 50대 이후를 대비하기 위한 확실한 생활 대책으로, 중산층 이상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기 상품이었다. 그러므로 비류연이 이 연금에 가입했다는 것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가출을 준비해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울러 상당한 액수의 금액이 들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무슨 수로 그만한 액수의 은자를 모았는지 사부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전, 비류연이 계곡에서 하룻밤 자고 돌아왔을 때부터 제자의 낌새가 좀 이상했었다. 징후는 그때부터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이 터지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해 보지 못 한 사부였다.
제자라는 놈이, 하나뿐인 유일무이의 제자라는 놈이, 요 며칠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더니 끝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동안 아는 건 돈밖에 없는 녀석인 줄 알았었 는데 산 속이 갑갑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사부 알기를 쥐뿔로 알고 있던 녀석인 줄 알았는데, 참으로 용의주도하게 사부 노후 대책까지 세워 놓고 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부가 자기를 쫓아가, 다시 잡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라도 한 듯이…….
‘가는구나, 가. 이것도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못된 놈, 나쁜 놈, 싸가지가 바가지 같은 놈, 사부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가다니, 그렇게 가다니…….” 제자를 향한 사부의 욕지거리와 한탄은 겨울 바람에 묻혀 산을 울리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정월 초, 새로운 해의 시작인 날들 중의 하루였다.
사부가 한탄하며 푸념을 늘어놓을 무렵, 이미 비류연은 중양표국의 표사 일행들과 함께 표행 길에 올라 있었다. 또다시 중양표국, 궁하면 아니 사사건건 중양표국 을 부려먹고 우려먹는 비류연이었다. 그렇게 우려먹고도 지치지 않았는지, 아니면 아직 덜 우러난 국물이 남아 있는 것인지 비류연은 또다시 며칠 전 중양표국의 정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곧바로 들어갔다. 그의 기별을 듣고 국주 장우양이 즉시 뛰쳐나왔지만, 기별을 전해 온 사람이 예의 그 ‘노사부님’이 아닌 것을 보고는 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장우양이었다.
이때 비류연은 지난 5개월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얼굴에 땀띠 나게 쓰고 다니던 인피 면구를 벗고 맨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우양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다. 본래의 모습을 하고 있던 비류연의 품에서 한 통의 서찰이 나왔을 때, 순간 장우양은 긴장한 듯 보였지만 편지의 내용을 보고는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 찰의 내용이 별 거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나의 애제자인데, 이번 남창행 표행에 같이 데려가 주기를 부탁하네. 물론 저번처럼 표사로서 데려가라는 것이니 임금은 잊지 말게나. 저번보다 특히, 더욱 두둑한 임금을 부탁하네. 그 정도 의 가치는 충분할 거 야. 엄청 강하다네. 함부로 했다가는 신상에 안 좋은 일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게나.
노사부로부터
약간의 협박을 띤 편지였지만 장우양으로서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인간의 환경 적응력을 얕보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남경충(바퀴벌레)보다 질긴 생명력을 가진 게 바로 인간이라는 생물이다. 그동안의 일들로 인해 장우양의 신경도 상 당히 굵고 튼튼해진 듯했다. 덤으로 위장도 함께 튼튼해졌는지 혈색도 좋아 보였다. 장우양으로서는 이번 일은 지난번 두 일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다. 폭력과 협박 으로 점철되었던 앞의 두 경우와 비교한다면 이번 건은 아무 것도 아닌 가뿐한 일이었다.
오히려 환영 행사라도 하면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장우양이었다. 지난번, 표국의 운명을 건 고려 청자와 기타의 고(高) 가치 표물을 남창까지 운반하는 표행을 무 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그들, 즉 노사부의 제자들 덕분이었다. 녹림 72채의 산채 두 채를 상대로, 단 16명이서 괴멸시킨 그 신위(神威), 만약 그들이 없었 더라면 무사히 남창까지 표물을 운반하기는커녕 중간에 몰살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또다시 그 노사부님의 제자가 자신의 표행에 따라나서다 니, 싫기는커녕 감지덕지한 장우양이었다.
중양표국은 지난번 표행 이후 몇 주일 끙끙거리는 것 같더니만 이제는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부상으로 인한 빈 자리를 다시 채우고 수익과 지출을 정리하느라 표국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다행한 일은 부상자가 하급 표사에 국한되어 인원 보충에 큰 지장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중상급 실력자들 중에 큰 부상자가 나와 빈 자리가 생겼더라면 인원 보충에 힘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일류 수준의 고수를 표국에 영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번 남창행 표행에서 있었던 중양표국과 녹림 산채의 충돌 이후 중양표국의 이름은 더욱 높아져 지원자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원 보충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그 중에는 상급으로 분류되는 실력자들도 자주 눈에 띄어 요즘 장우양을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이러한 중양표국의 사정에 즈음하여 비류연이 말 대신 편지로 의사를 전한 것은 역시 말보다는 편지가 여러모로 좋았기 때문이다.
말보다는 글의 심리적 신빙성이 한층 더 높았다. 아무리 국주가 노사부의 필체를 모른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국주 장우양은 노사부라는 인물의 존재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의심하거나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
비류연이 인피 면구를 쓰고 노사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귀찮았기 때문이다. 노사부의 모습으로 나서면 중양표국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때문에 그것 이 싫었던 것이다. 만일 장우양이 의심을 품고 믿지 아니한다면 그 다음엔 실력 행사라는 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비류연으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어쨌든 국주 장우양은 이번 일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고, 이야기는 거침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며칠 뒤 남창행 표행이 출발했고, 비류연은 일행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번 표행에는 국주 장우양도 직접 따라나섰다. 사실 이번 표행의 표물이 국주가 따라나설 만큼 중요한 표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우양으로서는 상당히 위험천만해 보이는 노사부의 제자가 따라붙는 표행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자기 자신도 남창에 볼 일이 있었던 탓에 이번 표행을 함께 한 것이다. 남창을 거점으로 하는 중원 십대 표국 중 하나인 대호표국의 국주와 만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약속된 일이 많이 남아 있어 며칠 뒤에나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이번 표행에 비류연이 따라나서는 바람에 급히 예정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표국 신참자들과 비류연 사이의 문제 발생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중양표국은 지난번 사건 이후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여, 많은 표사들을 새로이 뽑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너무나 많은 수가 부상을 당해 표국이 제대로 돌아 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상자가 없었던 것만 해도 놀라운 기적이었으니 그 이상을 바란다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너무나 많은 부상자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려 청자를 무사히 운반한 성과 덕분에 엄청난 양의 돈을 사례로 받아 표국을 증축할 수도 있게 되었다. 녹림 72채 중 둘을 박살낸 표국으로 이름이 더욱 높아져 엄청난 지원자와 수많은 표물 의뢰가 들어온 탓에 표국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자들은 대부분 중양표국과 노사부 사이의 일들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혹여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 재 강호에는 호사가의 입과 재담가들의 혀를 통해, 중양표국에는 엄청난 실력의 고수들이 있어 비밀리에 표물을 수호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강호(江湖)에서 제대로 진실을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그들 16명도 입을 다물고 있었고 중양표국 사람들도 모두 입을 다물고 있어, 진실을 정확히 아는 자는 매우 적었다. 때문에 새로 들어온 신참자들에게 진실을 얘기해 줄 마음이 없는 장우양이었다. 노사부와 그의 제자들에게 깨진 이야기는 더욱더 그러했다. 표국 내에도 이 에 관해 특명을 내려 모두 입을 봉(封)하도록 했다. 함부로 발설하는 자는 용서치 않고 엄히 다스리겠다는 엄명을 내려 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신참들이 노사부 및 그의 제자와 중양표국의 미묘한 관계를 알 리 없으니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엄명을 내려 놔 도 모르는 것이 사람 일이라 장우양이 일정을 앞당겨서까지 이번 표행에 따라나서게 된 이유였다.
어쨌든 강호에는 중양표국에 표물을 맡기는 것이 다른 어느 표국보다 안전하다는 이야기만 파다하게 퍼져 있는 실정이었다. 이대로는 중원 십대 표국 중에서 1~2 위를 다투는 표국이 되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생각에 요즘 나날이 즐거운 장우양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이번 표행 길에 오르면서 생긴 걱정거리가 마음을 무 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바로 그의 아들에 관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