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21화 – 두 개를 하나로 만들 태극의 인재

비뢰도 2권 21화 – 두 개를 하나로 만들 태극의 인재

두 개를 하나로 만들 태극의 인재

호아장 방문이 있은 지 일주일 후! 순풍산부이 나중해는 약속을 지켰다. 나중해를 만나고 삼일 후,

그러니깐 호아장을 평화적(?)이고, 우호적(?)으로 방문한 지 이틀 후. 천무학관으로부터 사자(使者)가 왔다.

염도가 제시하는 조건은 어떠한 조건이라도 가능한 모두 들어주겠다는 응답이었다. 물론 기다렸던 일이었으므로 천관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일 은 일사천리로 진정되어 금년 천무학관 입관식 날 염도도 천무학관에서 무사부(武師父)의 자격으로 입관하는 데 의견 절충을 보았다. 최고의 숙소와 최상의 대우가 제공될 예정이었다. 적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염도의 심기가 요즘 계속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협상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사자들은 올 때 그랬듯이 갈 때도 최상의 예의를 표하고 물러갔다.

천무관의 사자가 돌아간 후, 비류연은 조용히 방 안에 앉아 창 밖을 통해 보이는 석양을 배경으로 어떤 물건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황금 수실이 달린 사각 의 녹옥 테두리 안에 한 자루의 검을 타고 승천하는 용이 양각되어 있는 이 옥패는 바로 그 유명한 승룡패였다. 한 문파를 처참하게 뒤엎어 가면서 손에 넣은 천관 입관 추천패 승룡패!

비류연이 이것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뿌렸던가. 하지만 심각함이라고는 모조리 개가 물어 갔는지 태평 작작한 비류연. 그의 기억 속에서 호 아장 식솔들의 피눈물은 이미 까마득한 과거의 잔흔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늘 그렇게 그는 심각함이란 것을 몰랐다.

“이게 그렇게나 대단한 물건인가?”

비류연은 그렇게 굉장한 소란을 일으키며 손에 넣은 승룡패를 무슨 장난감 다루듯 이리저리 휘휘 돌리며 장난을 쳤다. 특별한 생각이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니라 그 냥 심심해서 해 본 짓거리였다. 아무 생각이 없는 건 늘 여전했다.

호아장 방문 다음날부터 시작된 승천무제는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관문이 설치되고 파괴되기를 반복하며 본선 진출 자를 가려냈다. 그런 다음 검장도편(劍掌刀鞭)이 무학(武學)의 이치와 흐름에 따라 난무(亂舞)하는 수많은 비무를 통해 본선 진출자라 이름 붙여진 옥석이 가려졌 다.

마침내 뜨거운 열기와 관심 속에 진행된 무림 최고 최대의 행사 중 하나인 승천무제가 끝나고 일 주일 후. 그토록 목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입격자 발표 일이 돌 아왔다. 구주강호(九州江湖)에 몸을 담고 있는 전 무림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입격 공고장의 모습은 예년의 풍경과 마찬가지로 극도로 혼잡스러웠다. 새까맣게 펼쳐진 검은 모발의 바다.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이 들어찬 군중 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시끄러운 웅성거림. 사람을 흥분시키게 만드는 후끈후끈한 열기가 발표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라면 그 누구라 도 짜릿한 흥분과 열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돌아 버리게 만들던 왁자지껄한 웅성거림도 입격자 발표가 시작됨에 따라 점점 잦아들더니, 종내는 장내가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까지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입격자 발표는 무당파의 명숙인 옥호진인이 맡아 진행했다. 그는 9대 문파의 쌍두마차 중 하나인 무당파의 명숙답게 군중들이 운집한 장소에서도 그들이 정확하 게 들을 수 있도록 내공이 실린 또박또박한 어조로 천무학관 입관자의 출신 사문과 성명을 발표했다.

한 명, 한 명 입격자가 발표됨에 따라 웃는 사람, 우는 사람, 기뻐서 웃는 사람, 허탈해서 웃는 사람, 감격해서 우는 사람, 억울하다는 듯이 우는 사람, 허공 중에 던 져지는 사람을 비롯하여 무인의 생명이라는 검을 내던지는 사람들까지, 별의 별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정말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들을 모두 종합적으로 관 찰하고 목격 비교 분석 연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가 싶었다.

발표장은 이런 여러 사람의 무척이나 다양한 모습들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또한 매년 이날만 되면 으레 생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낙방한 억 울함을 하소연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낙방의 분함을 못 이겨 천무학관으로 항의하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하소연과 항의의 수단으로 검을 뽑아 들거나 주 먹을 말아 쥐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하지만 천무학관이 어떤 곳인가. 그런 놈들은 관내에 엄지발가락의 발톱 끄트머리도 들이밀지 못한 채 문전(門前)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내침을 당하기 일수였다.

잘못된 판정이라는 둥, 억울하다는 둥 하며 의미 없는 칼부림을 부려 보지만 실력이 부족해 떨어졌는데 항의할 실력이나 변변하게 되겠는가. 그것은 한 순간의 객 기(客氣)요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꺼져 버릴 몸짓일 뿐이었다. 그들은 죽지 않고 목숨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좋은 날 피 보기는 싫어 손속에 자제 를 둔 천무학관 관계자께 백 배 감사 드려야 마땅했다.

이처럼 매년 지겹게 발생하는 무력 항의자들에 대한 엄중한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성적 사고 능력과 학습 능력이 치명적으로 결핍되었는지, 다시금 해가 넘어가면 또다시 대량으로 발생하는 난동자를 진압하기 위해 항상 발표 날에는 정문 앞에 난동 군중 전담 진압대가 배치되게 된다. 그리고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해 봤자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최면에 빠진 사람처럼 찾아와 당랑거철(蝶嫏拒轍 : 달려오는 수레 앞을 막아서는 사마귀 같은 무모함을 나타내는 말) 식으로 칼을 뽑아 드는 한심한 녀석들을 처리하고 있다. 이때 가장 골치 아픈 족속이 친구나 소속 문파의 사제, 또는 가문의 고용 무사들까지 이끌고 떼지어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족 속들이다. 이런 때가 가장 골치 아픈데, 이런 무리들이 발생할 시에는 천무학관 측도 인정사정 봐 주지 않는다. 이런 무리들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도 일벌백계 하지 않으면, 혹시나 하는 무리들에게 역시나 하는 매정한 현실을 깨우쳐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 본보기로 이런 어리석은 무리들 중 일부가 엄중 징계를 당하게 되고, 그들이 사지 중 하나가 보기 좋게 부러지거나, 혹은 동료들에게 질질 끌려서 의원으로 실려 가는 끔찍한 장면을 목도하게 되면 사람들은 막혔던 머리가 좀 시원해지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런 후면, 소동도 상당히 가라앉는다. 진압대의 구성원은

모두가 천무학관 상급 관도들로서 하수(下手)는 물론 중수(中手)같은 평범한 무인은 아무리 안구 세척을 하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절정 고수(高手)들로 구성되 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지휘 책임자는 무사부 한 사람이 직접 나서서 한다. 그러니 그런 고수들을 상대로 난동과 행패가 어디 통하겠는가. 어불성설일 따름이다.

천무학관이 설립된 이래로 아직까지 무력으로 천무학관의 정문을 돌파한 예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술까지 쳐 먹고 달려드는 걸 보면 인간이란 참으로 한심 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이런, 머리와 돌을 나란히 놓아도 구분하기 힘든 놈들은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자기 자신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놈이 무슨 놈의 무공인들 제대로 익히겠는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것을..

천무학관의 입관 합격자 발표가 있는 이날은 남창성 내가 가장 소란스러운 날인 동시에, 남창성 유흥가 전체가 가장 두둑하게 장사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한 달 동안 벌어야 하는 돈을 하루에 다 벌어 버리는 날이 바로 이날이었다. 게다가 이 불야성은 적어도 일 주일간은 계속 된다.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술은 퍼마시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격하면 축하 술이라며 퍼마시고, 불합격이면 밤새 화풀이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마시고 또 마시는 것이다. 시험에 떨어진 이들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잊기 위해 술기운에 뇌가 마비될 때까지 계속해서 퍼마신다. 일종의 보상 심리라고나 할까?

거기다 술로서 부족하면 계집을 찾아 옆에 끼든, 아래에 끼든 제 마음대로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유흥가의 매상이 안 오를 수 있겠는가. 일 년 중 가장 대 박인 날을 꼽으라면 남창 내 유흥가 연합회에 소속된 모든 주루와 기루들의 주인들은 이날을 서슴없이 첫손으로 꼽을 것이다. 남창의 밤이 음주 가무로 술렁이는 이 날을…..

그러나 이러한 난리 법석을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란 듯 한쪽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바로 비류연이었다. 지금 비류연의 심기는 승룡패를 손 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편해 있는 상태였다,

호아장을 방문한 날로부터 열흘. 아직도 염도는 빙검 관철수를 만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입을 꾹 다문 채 묵비권이란 이름의 돛배에 몸을 의지 해 침묵이란 이름의 강을 하염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입과 혀를 전면 봉쇄한 상태에서 시위하듯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이런 염도의 음침한 모습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비류연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마음이 답답해지기 전에 이미 그 답답함의 제공 원인을 제거해 버리는 성격의 염도에게 있어, 이러한 행동은 극 히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비류연은 그런 모습을 지켜보기가 답답하고 싫었다. 평소에 생각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과격하게 행동하던 놈이 어울리지 않는 침묵을 동반한 사색 활동을 소름 끼치도록 하고 있으니 보는 이의 마음이 오죽이나 답답하겠는가. 그냥 패 죽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비류연이었지만 그의 인내력도 이제는 한계에 달해 있었 다. 결단을 내기 위한 날잡을 일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염도가 항상 생각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 것은 빙검 때문이었다. 최강의 힘과, 최강의 기술, 그리고, 최강의 정 신을 지닌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천무학관, 그 천무학관에서 자신의 원수 같은 동문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기 자신이 그곳에 들어가려고 한 다. 그와 같은 입장과 같은 위치를 지닌 무사부로서! 아니, 그는 대노사의 직위이니 자신이 그보다 아래인가.. ? 이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로군.

‘사부!’

갑자기 죽은 사부가 떠올랐다. 자신과 빙검 둘이서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감히 상대가 될지 아직도 의문스러운 사부. 천하 제일이란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무인 이었다. 그 공부와 절기가 너무나 뛰어나 자신과 철수 역시 사부의 모든 것을 물려받지 못한 채 반쪽으로 나뉘어진 무공을 전수 받아야만 했다. 그때 사부가 얼마나 탄식했었던가. 아직도 그때 사부의 참담한 실망은 가슴 속 깊은 곳에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잊혀지지 않는다. 그 반쪽이나마 다듬고 발전시킨 것만으로도 각기 천하 5대 도객과 천하 5검수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천하제일인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았던 사부. 그런 사부에게 죽음이 찾아오리라 누가 예상했었던가. 나보다도 더 오래 사실 분이라 생각했었는데……. 비록 누군 가에게 상처를 입긴 했지만 아직도 그 사부가 다른 사람의 손에 음해 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사실 사부의 죽음은 죽음이라 할 수 없었다. 전신의 상처 에서 피가 배어 나왔으면서도 사부의 얼굴은 기이하게도 평온하기만 했다. 그리고는 여느 날과 같이 단정히 정좌하신 다음 한 잔의 용정차을 음미하신 후 조용히 우 화등선하셨다. 스스로의 의지로 속세를 떠나신 것이다. 두 개를 하나로 만들 태극의 인재를 꼭 찾으라는 게 사부의 마지막 유언이었는데 끝내는 지켜 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앞으로 지켜질 가능성은 더욱 전무(全無)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오랜만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으니 문득 사부의 생각이 떠올랐다. 근래에 들어 떠올린 적이 없었는데……. 결국엔 그녀도 함께 떠올랐다. 정말 그 녀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의 저편에서 묻어 두고 싶었는데 불현 듯 떠올려진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옥죄이는 듯 아파오고, 지독한 상실감과 고독이 그를 방문했다.

잊자, 잊자, 수천 번은 이렇게 더 되뇌고서야 비로소 그녀의 영상을 뿌리칠 수 있었다. 사부의 죽음은 무인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슬픔 을 참지 못했었다. 그 옥 같은 얼굴에 수정처럼 맑은 눈물을 흘려 보내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또다시 가슴이 뜨끔뜨끔 아파 왔다. 제기랄, 더 이상 생각했다가는 더 큰 상처를 입는다는 경고음이었다. 잔혹한 마음의 상처. 마음에 받은 상처는 생을 넘겨도 지워지지 않는다 하였다. 내세에까지 짊어지고 간다 는 지독한 상흔(傷痕)을 남긴 그녀. 치유될 수 없는 아픔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던가. 지금의 불같은 성격도 이에 기인한 점이 많았다.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가장 소중한 것이 상처를 받았다. 그의 마음에 화인 같은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흔적을 남긴 채 떠난 그녀. 이제 더 이상은 그녀 의 잔영으로 인해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절대 사양이었다.

빙검(氷劍), 그놈에게서도 해방되고 싶었다.

“난 천하 5대 도객의 일 인(人), 화령염천탈혼도(火靈焰天奪魂刀) 곽영희다. 한월빙청낙백검(寒月氷淸落魄劍) 관철수! 그 놈과는 조만간 결판을 낸다. 더 이상 녀석의 잔상이 나의 발목을 붙잡고 나의 마음에 쉬지 않고 상처를 내며 괴롭히는 것을 방관하진 않을 것이다.’

마침내 염도는 단호한 행동 지침을 결정했다. 그 결정은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굳은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애써 고민해 왔던 여러 생각의 꾸러미들을 모두 털 어 버렸다. 이제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그의 면전 앞에서 주저하거나 꺼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