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5권 1화 – 비어 있는 옆 자리

비뢰도 25권 1화 – 비어 있는 옆 자리

비어 있는 옆 자리

-있어야 할 본연의 모습

여기 한 자루의 검이 있다.

날카롭고 예리한, 강철이라도 벨 듯한 그 검은 세상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명검으로 그 명(銘)은 ‘백뢰’라 한다. 이 검을 쥐고 있는 자는 무림에서 손꼽히는 대고수 로, 한편으로는 백도 무림맹인 정천맹의 맹주라는 아주아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최절정의 검객이었다.

단단한 바위도 두부처럼 간단히 벨 수 있을 듯한 이 검의 예리한 날은 지금 한 사람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그에 어울리는 밤처럼 검은색 옷을 걸 친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연비’라 했다. 막다른 곳까지 몰린 탓인지 연비의 등은 벽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좌우로 도망치려 해도 틈이 없다. 회피할 만한 모든 경 로는 백뢰에 의해 사전에 완전히 봉쇄되었다. 과연 명불허전의 검술이었다.

연비는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씁쓸한 시선으로 나백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생기를 잃고 거무죽죽하게 변한 얼굴에 박힌 두 눈동자 속에는 소중한 딸을 잃 어버린 분노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검을 휘둘러 이 현의여자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 나백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신기체(神氣體) 일체(體)의 경지에 오른 검객답게 마음을 품은 것만 으로도 몸이 저절로 마음에 따라 움직이려 한다. 지금 그가 품고 있는 마음의 이름은 ‘살인 충동’. 당장에라도 검을 휘둘러 피를 보고 싶은 충동이 가슴 깊은 곳에서 부터 용솟음쳐 올랐다. 고절한 인내력으로 그 충동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그가 의식의 끈을 느슨하게 푼다면 대항의 의지를 완전히 잃고 있는 연비의 목 은 아마 일검에 잘려 나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연비의 잘려진 목덜미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오더라도 지금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그의 뜨거운 분노를 식혀줄 수는 없었다. 가장 소중한 보물인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에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꽃은 그만큼 뜨거웠다.

“할 말은 있느냐?”

한마디 한마디에 자욱한 살기가 어린 목소리로 나백천이 물었다.

“없습니다.”

대답하는 연비의 호박색 눈동자는 매우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항상 반짝이는 총기와 여유가 가득하던 호안석처럼 투명한 그 눈동자가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부르르르르.

연비의 목에 겨눠져 있던 나백천의 애검 ‘백뢰’가 부르르 떨리며 하얀 목을 조금씩 조금씩 파고들어 갔다. 검은 옷과 대비를 이루던 연비의 하얀 목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오더니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

연비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신음도 내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문 채 침묵할 뿐이다. 목을 파고드는 칼날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 을 정도로 분했기 때문이다.

“크으으으!”

나백천은 당장에라도 검을 휘둘러 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대단한 무인인 그도 지금은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린아…….?

사랑스러운 딸 나예린은 그 천생적인 미모 때문에 어려서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위로부터 뜻하지 않은 위협에 작은 새처럼 떨 때도 얼마나 많았던가. 어린 아이는 어린아이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었다. 때문에 그는 더욱더 그의 능력과 권력 전부를 사용해 딸을 지켜왔다. 아이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은 어른들의 당연한 몫 이자 의무였다. 부모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딸아이의 아름다움은 더해져만 갔고, 그만큼 위협도 더 커져 갔다. 손이 많이 갔지만, 힘든 일도 많았지만, 늙어서 얻는 딸은 그걸 상쇄할 만큼 어 여뻤다. 그리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의 소중하고 귀한 장중보옥(掌中寶玉)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가장 경계하고 있던, 딸에게 가장 크고 치명적인 정신적 상처를 입혔던 자가 그 소중한 보물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보(至寶)를 빼앗아갔 다. 그가 미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연비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은 무림맹주가 아니라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연비는 그 사실을 이해했다. 때문에 연비는 손을 쓸 수 없었다. 피하려는 생 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저 늙은 아버지의 보물은 연비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보물?”

아니, 그런 말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이자 인생의 반쪽이었다.

보물 없이는 살 수 있지만, 생명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겁게 마음을 짓누를 줄이야…….

“그걸 잃어버린 다음에야 그 진실한 가치를 깨닫게 되다니…….’

이 얼마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인가. 스스로에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때문에 박제된 시체처럼 못 박힌 듯 서 있을 뿐, 어떤 반항도, 반응도 할 수가 없었 다.

“모두 너 때문이다. 네가 이런 쓰레기 같은 대회에 나오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린아는 무사했어!”

검을 쥔 손이 격정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건 가정일 뿐입니다.”

연비가 말했다.

“아니, 가정이 아니라 확신이다. 모두 자네 책임일세. 각오는 되어 있겠지?”

어떻게 책임을 지란 말인가? 지금 이 사태에 대해 책임질 수단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녀 없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한데 말이다.

“제가 책임질 부분은 제가 모두 책임지지요. 하지만 모든 원망은 린을 되찾은 다음에 듣겠습니다.”

“찾는다고? 어떻게?”

나백천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문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 그런 알량한 변명으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분노에 가득 차 있던 나백천은 연비의 말을 쉽사리 믿어주지 않았다.

“변명이 아닙니다. 린이 위험에 처했는데 그런 한가한 짓이나 하고 있을 틈은 없으니까요.”

연비의 목소리는 무척 단호했다.

“일단 들어보도록 하죠.”

수심에 잠겨 있던 예청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아무리 증오스런 원수가 있다 해도 말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말해보거라.”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나백천이 말했다.

“그가 필요합니다.”

연비의 대책은 무척이나 짧았다.

“그? 누가 있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연륜 깊은 두 눈동자에 불신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있습니다. 그 사람만이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연비의 어조는 확고했다.

“진짜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이냐? 그게 대체 누구냐?”

연비는 한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비류연!”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침묵 후에 터져 나온 반응은 엄청났다.

“비류연이라고라고라고라고라고라고?!”

나백천이 체통도 잊고 길길이 날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로 인정 못해!”

“나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침중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던 예청도 거들었다.

“당연하오! 어떻게 그런 망할 놈을!”

나백천이 보기에 비류연은 현장에 없었다 뿐이지 또 다른 원흉에 불과했다. 아니, 사건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모든 잘못이 그 녀석에게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다. 역시 그놈이 모두 나쁜 게 틀림없었다. 지금 나백천은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연비는 꿋꿋했다.

“지금 저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사람이 필요합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

“왜 안 됩니까?”

“무조건 안 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린을 구하는 것 아니었나요?”

“그, 그건…….”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 따위를 모두 제쳐 두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비류연이란 녀석은 지금 천무학관에서 근신 중이 아닌가? 불러오는 데만 해도 왕복 한 달은 족히 걸릴 텐데? 지금 한가하게 그런 시간 낭비나 하고 있을 틈이 없어! 절대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습니다.”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예, 왜냐하면…… 그는 이곳에 있으니까요.”

나백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엥? 그 녀석이 왜 여기에 있어?”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다만 이곳에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천무학관으로부터 비밀 명령이라도 받았겠죠.”

절대로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이유에 대해서는 대충 얼버무리는 게 가장 좋았다. 나백천과 예청도 마음이 급하니 깊이 캐묻지는 못했다.

“진가 녀석!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을 벌였단 말이지~”

나백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부분이 약간 분한 모양이었다.

“당신한테 말했으면 승낙하지 않을 걸 뻔히 아니까 그랬겠죠.”

한마디 가볍게 툭 던진 예청의 말이 나백천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카롭게 박혀들었다.

“그건 내가 신용이 없다는 소리요?”

“아뇨, 단순한 팔불출이란 뜻이죠.”

“……”

더 이상 팔불출 짓 그만 하고 무림맹주답게 행동하라는 속뜻이 담긴 그녀의 말에 나백천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한데 왜 하필이면 그 자식인가?”

이번에는 연비를 향해 묻는다.

“그자만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난 믿을 수 없다.”

“아뇨,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린을 구하는 길만이 반쪽으로 쪼개진 그의 세계를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그는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겁니다.”

“무슨 일이든?”

“무슨 일이든!”

나백천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녀석 따위는 꼴도 보기 싫다는 감정과 일단 상황이 이러니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돼, 라는 이성이 내면 속에서 치열 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원망이나 책망은 린을 구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

그 누구도 이 질문에 ‘틀렸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