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5권 10화 – 소중한 것을 만드는 것은 후덜거리게 두려운 일?

비뢰도 25권 10화 – 소중한 것을 만드는 것은 후덜거리게 두려운 일?

소중한 것을 만드는 것은 후덜거리게 두려운 일?

-선착장에서

강호란도의 한 선착장.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중년의 무사가 옷깃을 부여잡고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신수가 훤하고 입고 있는 옷이 단순하지만 고급스러워 이런 시장통에서 실랑이를 벌일 사람들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을 검은 옷을 입은 청년 하나와 중년의 미부인이 지켜보고 있었다.

푸욱! 푸욱! 푸욱!

노인의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백염노인의 한 발 한 발에 땅바닥에 발자국이 패일 지경이었다.

푸우욱! 푸우욱! 푸우욱!

중년 무사의 힘도 만만치 않아 전진을 저지하기라도 하듯 땅에 발을 일부러 박아 넣고 있었다. 아무리 중년인의 나이가 한참 젊고 한창 잘나가는 무인이라고 해도, 내공의 깊이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내공 화후가 부족한 그가 노인을 말리기 위해서는 거의 필사적이 될 필요가 있었다.

“놓아라!”

노인이 이마에 핏대를 돋우며 외쳤다. 외치는 목소리에도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안 됩니다!”

“왜 안 돼? 아버지가 납치된 딸을 찾으러 가는데 안 되는 게 어딨어?”

나백천은 말리는 팔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래도 안 됩니다!”

좌호법 남궁진이 다시 한 번 맹주를 말렸다.

“웃기지 마! 안 된다고? 그러고도 자네가 자식을 가진 부모인가? 나는 가겠네.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겠네!”

“절대로 안 됩니다. 가시려면 저를 쓰러뜨리고 가십시오!”

세 번째 말리는 남궁진의 목소리에는 절실함이 배어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자네는 나의 앞을 막는 건가?”

“몰라서 물으십니까?”

“어허, 자네 참 사람을 우습게보는군. 내가 모르니까 묻지, 알면 뭣하러 묻겠나? 안 그런가? 내가 그렇게 실없이 보였나? 당연히…….”

요대를 움켜잡고 있던 양손 중 하나를 떼어내 항구에 떠 있는 배를 거칠게 가리키며 남궁진이 외쳤다.

“저 배가 가는 곳이 어딘지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알고말고! 날 뭘로 보는 건가? 치매 걸리려면 난 아직 멀었네. 저 배는 마천…… 헙!”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나백천이 급히 입을 닫았다.

“그곳에 가셔서 뭘 할 생각이셨습니까?”

“그야 쳐들어가서 우리 예린이를…….

“본인의 입장은 자각하고 계시겠지요?”

“음, 그게 정천맹주…… 지.”

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아직 잊지 않고 계시다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아시겠죠? 지금 이대로 무작정 마천각으로 쳐들어가시면 곧바로 전면전쟁입니다, 전면전쟁!” “아니, 남궁 호법,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아뇨. 누군가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괴로운 일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괴롭습니다. 그놈들을 찢어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십 등분, 아니, 삼십 등분도 모자랍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백도무림 전체를 등에 짊어지고 계시는 분, 수만 명의 백도무림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흑도의 심장 이라 할 수 있는 마천각에 단독돌격해 보십시오. 어떤 변명도 그 사태를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더욱이 그것이 맹주님의 개인적인 문제일 때는 말입니다.”

“하지만 먼저 내 딸을 납치한 것은 그놈들이야!”

“증거가 없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그들이 폐쇄적이기로 이름 높은 마천각이라 해도, 증거만 확실하다면 맹주님 본인의 수색을 거부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증거가 없습니다. 심 증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이대로 여기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라고?”

“지금은 마천각 각주님께 직접 통고를 넣고 답변을 기다리는 것은 최선책입니다.”

그러자 예청이 나섰다.

“진정하세요. 당신은 갈 수 없지만 전 갈 수 있으니까요.”

“어, 어떻게 말이오? 당신은 무림맹주의 아내라는 신분이 있잖소?”

그러자 예청이 씨익 웃었다. 예린을 잃은 후 처음 보이는 미소였다. 과거만큼의 밝은 힘은 없어 그것이 그를 안타깝게 했지만. 그녀 역시 엄마로서 필사적인 것이 다.

“맞아요. 전 당신의 아내죠. 하지만 그전에 그곳의 졸업생이기도 해요. 아무리 폐쇄적인 마천각이라 해도 동문을 내치는 법은 없답니다.”

“부인…….”

“봄 날씨에 홀려 여기 동정호까지 오다 보니 갑자기 옛 사문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군요.”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백천과 남궁 호법은 주먹으로 동시에 손바닥을 탁, 쳤다.

“과연! 우연이군요.”

“네, 우연이에요. 어디까지나 우연. 후배들도 만나고 싶은 거죠.”

그러자 이번엔 비류연이 나섰다.

“당신도 안 됩니다.”

그러자 예청의 고개가 홱 하고 비류연을 향해 돌아갔다. 핏발선 눈이 동공이 열린 채 비류연을 향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박력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림맹주 나백 천도 뱀 앞의 개구리처럼 오금을 저리며 벌벌 떨고 만다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그 눈빛을 받으면서도 할 말을 다 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이미 일개 마천각의 졸업생일 뿐이 아닌 무림맹주의 부인이시기도 하니까요. 부부 일심동체라는 말도 있잖아요? 어느 누구도 당신을 무림 맹주 나백천과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외교 문제로 번지는 건 시간문제죠.”

그러자 예청이 날뛰기 시작했다.

“난, 인정 못해! 난 반드시 갈 거야! 외교 문제가 뭐야? 엄마가 딸 찾으러 가는 데 이유가 필요해? 아빠는 안 돼도 엄마는 돼! 내가 배 아파서 낳은 딸이야. 너희 남 자들은 배 아파본 적도 없잖아? 여잔 말야, 애를 낳으면 한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알간?”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예청이 마치 사나운 암표범처럼 날뛰는 그 모습을 보고, 그걸 쩔쩔매며 말리는 나백천을 보며 비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부부가 똑같군.’

“문제가 생겼네, 류연!”

그때 헐레벌떡 달려온 장홍이 외쳤다.

“문제? 무슨 문제?”

“항구에 배가 없네.”

“뭐?”

깜짝 놀란 비류연이 반문했다.

“돈왕이라는 자가 모두 떠나보낸 모양이야. 어떡하면 좋겠나? 이대로면 계속 시간이 지체될 텐데.

지금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배를 구해 추적을 시작해야 했다. 비류연 일행은 마천각으로, 그리고 나백천은 흑천맹으로 향해야 했다. 먼저 출발한 배를 따라잡아 그 안에 있는 관들도 확인해야 한다. 때문에 지금 필요한 배는 두 척이었다. 그런데 항구는 텅 비어 있었다. 돈왕이 권력과 금력을 이용해 모두 내보낸 탓이었다. 그 배 들이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몰랐다. 한 시진이 걸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하루가 걸릴 수도 있었다. 잠시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초조감이 그들 주위 를 떠돌기 시작했다. 나백천 역시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예청도 날뛰는 것을 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안색이 무척 좋지 않았다. 아무도 해결책을 못 내놓자 분위기는 점점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효룡은 그 분위기에 눌려 위가 따끔따끔해지려 했다. 효룡이 신경성 위염에 걸릴 대위기의 순간, 비류연이 입을 열었다.

“아니, 배는 있어.”

***

마천각 각주 집무실.

제구번대 대장 철가면의 보고를 들은 마천각주는 잠시 어둠 속에 묻힌 채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군. 예상외야, 예상외.”

멈추어져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 속도가 예상외로 빨랐다.

“나백천은 어찌 되었나?”

“보고에 따르면 그는 강호란도에 남아 흑천맹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철가면이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흑천맹이라……. 그것에 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그가 정말로 흑천맹주의 목을 딸까?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서천에게서 받은 통보를 한 손에 흔들어 보이며 마천각주이자 북천멸겁이기도 한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그거 아쉽군. 책임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말이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군. 약간 더 어리석고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으면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야.”

백도도 그렇고 흑도도 그렇고, 양 진영의 두 맹주 모두 책임감이 쓸데없이 높아 사사로운 충돌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 년이라는 지루한 시간 동안 평화 비스무리한 기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기류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은 누구누구지?”

“천무학관에서 온 아이들 몇 명입니다.”

정천맹주 나백천과 빙월선자 예청이 동정호 주변에 접근한 후로 항상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던 터라 그의 보고에는 막힘이 없었다.

“억지로 쳐들어오기라도 할 생각인가? 어린애들이 배짱 한번 좋군.”

듣자 하니 마천각을 출입할 자격이 없는 자도 끼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허가할 생각이십니까?”

“허가라고? 여긴 내 구역이다. 함부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설혹 그가 정천맹주라 해도 말이야. 서천, 그자가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군. 마천각을 자신의 무대로 삼을 셈인가?”

아직은 조용하게 있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어가 안 되는 게 그자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그렇다. 서천, 그는 자신이 지배권을 쥐고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이 마천각에서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다니. 전면전쟁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건가? 그렇게 무책임한 자로는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 그 ‘딸’의 행방은?”

그러자 그의 철가면 뒤에서 무수한 식은땀이 줄줄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마천각으로 들어온 정황까지는 포착했지만 그 후로는……”

감쪽같이 증발했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말을 내뱉었다가는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증발해 버릴 것 같았던 것이다. 타의에 의해서.

“놓쳤다라……..”

아무 두려움도 없을 것 같던 마천십삼대 대장 중 하나가 말 한마디와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는 톡톡 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덜덜 몸을 떨었다.

“그는?”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지금은 자신의 부대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몇몇 대장들과 비밀리에 면담을 가진 듯합니다.”

“대장들과?”

“그동안 포섭한 자들입니다. 서천(西天)’ 쪽에 붙은 대장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 말 없이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각주보다 직접 그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서천’ 쪽이 더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 속에 숨겨진 진짜 힘을 보 지 못하고.

“어리석은 친구들…….?”

그들은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읽히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주고 있는 것을. 이곳의 지배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고, 그 사실은 백 년 전에도, 백 년 후인 지금에도 변함이 없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확실하지만 멀리 있는 것보다는 불확실하지만 가까이 있는 것을 더 선호하지. 그것이 손에 잡힐 수 있는 실체라고 생각하기 일쑤니까. 보는 눈 이 짧아! 근시안밖에 지니지 못한 우민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과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서천 그도 자신에게 감시가 붙어 있다는 것쯤이야 수년 전부터 익히 알고 있겠지.”

그동안은 그의 은밀한 움직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치해 두었다. 강호란도에서라면 몰라도 이 마천각 내에서는 그 역시 함부로 운신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 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이빨을 감춘 채 얌전히 있었다.

“그때부터 구 년씩이나 조용히 틀어박혀 있었으니 더 이상 얌전히 있을 수는 없다, 그 말인가? 절치부심, 와신상담이니 하면서 잘도 지껄이더니……. 그자의 인내

도 여기까지였나 보군.”

“개입하시겠습니까?”

“아니, 당분간 두고 본다. 때때로 밭을 갈고 고여 있던 물을 한 번쯤 휘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 강호란도에서 출발한 배는 잠시 지켜본다. 그건 서천 그 자가 맡아야 할 몫이니까. 단, 감시는 지금의 두 배로 늘리도록. 그리고 ‘서천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전력을 집중시켜라.”

“존명!”

손을 저으며 물러나라는 표시를 하자 철가면은 아무 말도 없이 뒷걸음을 쳐서 그 장소를 벗어났다.

혼자 남은 그는 천장을 보며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좀 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군.’

이 세상에는 우민들의 어리석음이 정도 이상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걸 민감하게 느낄 때마다 그는 몸속의 모든 걸 게워낼 것 같은 구토감에 휩싸이곤 했다. “대중(大衆)이라 이름 붙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무뇌아 우민 놈들!’

미천하고 힘없는 벌레들. 그 수 또한 적지 않다. 그것들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기가 더러워진다. 그런 우민들의 수를 줄이고, 그중에서 보다 뛰어 난 자를 선발하기 위해 행했던 작업이야말로 ‘천겁혈세가 아니었던가!

지난 백 년간, 그는 마천각 각주로서 조금도 업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직책을 맡고 있는 이유 역시 열성한 ‘우민(愚民)’과 ‘열등자(劣等 者)’를 배제하고 우수한 우성종을 고르기 위한 중요한 분류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지배당할 가치조차 없는 인간들, ‘적(敵)’조차 될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한단 말이지.’

자신의 선별소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또 하나의 ‘선별’이 될 수 있겠지.’

이 선별을 통해 또 다른 우수한 적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큭큭큭큭! 그로부터 백 년! 그동안 뿌린 씨에서 얼마나 싹이 자라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었을까?’

그건 상당한 기대가 아닐 수 없었다.

‘백 년 전에 뿌린 피와 살이 얼마나 튼실한 열매를 맺었을까…… 이제 곧 수확의 때!’

그의 기다림에도 곧 결실을 있을 거라 생각하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귀환의 때는 멀지 않았다!”

그때야말로 새하얀 백지로 머물러 있는 ‘신무림기!’의 서장이 시작되는 때!

그때야말로 세계는 멸망하고, 그 파멸의 잿더미 속에서 신세계가 다시 태어난다.

이 위대한 재생을 위한 영광스런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구차하게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면 신속하게 제거, 박멸할 뿐.

손을 뻗자 접인지기가 발휘되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서찰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손목을 가볍게 당기자 서찰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아귀 안으로 빨려 들어왔 다.

허공섭물로 받아 든 서찰을 다시금 펼쳐 보았다. 바로 서천이 보낸 것이었다.

“신무림기의 탄생에 ‘무림맹주’만큼 어울리는 제물도 없지.”

찢어진 하얀 서찰이 조각이 되어 꽃잎처럼 바람에 날려 방 안에 가득 찼다. 마치 봄날에 흩날리는 꽃잎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화르르르르륵!

드넓은 집무실 가득 펼쳐져 있던 하얀 꽃잎들이 일제히 불타올랐다. 그리고는 재가 되어 허공중에 덧없이 스러졌다. 마치 무림의 앞으로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한 불길한 광경이었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그의 입가에 처음으로 보일락 말락 한 광기에 찬 미소가 번뜩였다.

“잠시 외출을 해야겠군.”

***

중양표국 국주 장우양은 표물 인계와 기타 잔업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천무학관 사절단이 쓸 물건과 기타 표물들을 내려놨으니, 돌아갈 때 남 창까지 옮길 만한 표물을 물색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빈 배로 돌아갔다가는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요즘 적당한 계약거리를 찾아 여기저기 동 분서주하고 있었다. 지금도 숙박하고 있는 신라각의 별실에서 사무 처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밖이 잠시 소란스러워지더니 그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느 놈이 감히 국주의 업무를 이따위로 방해한단 말인가! 업무 과중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장우양이 호통을 치기 위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나 타난 사람을 보자 치켜올라 갔던 눈썹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래로 주저앉았다. 대신 눈이 화등잔만 하게 휘둥그레졌다.

“비, 비 공자! 여, 여긴 어떻게?”

나타난 것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크, 큰일 났다!’

장우양은 속으로 기겁했다. 노사부만이 아니라 이 막무가내의 비류연까지 나타나다니, 무언가 커다란 풍운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더욱더 문제는 그 풍운이 자신 의 소중한 중양표국까지 휩쓸어 버릴 것 같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이 끝나지는 않겠지??

약간 체념하자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배 있죠??

비류연이 대뜸 물었다.

“배요? 물론 있습니다. 표물을 싣고 온 표선이……..”

더 들을 것도 없이 장우양의 말을 자르며 비류연이 말했다.

“배 좀 빌려갈게요.”

“어디다 쓰시려고요?”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그곳이 어딘데요?”

“마천각!”

“……!”

마천각에 자신의 표선을 타고 가겠다는 말에 장우양은 경악했다.

“거긴 표선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번에 저희 표국에서 마천각으로 배달할 표물들을 가지고 왔는데도 접근조차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강호란도에 배를 댄 것이 아닌가.

“상관없어요. 난 꼭 그곳에 가야 하니까요. 안 되나요?”

장우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 거절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잠시 그 생각을 하자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안 좋은 예감이 뭉게구름처럼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자신의 온몸을 꿰뚫는 시선. 도저히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한 표국의 국 주로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음, 그렇지만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저희 표국에도 피해가…….”

마천각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영업을 하는 데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비록 중양표국이 백도에 속한다 해도 강호에 미치는 그 영향력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걱정 말아요. 무림맹주님이 뒤를 봐줄 테니까요.”

“정말입니까?”

“물론 정말이죠. 그분도 지금 누구보다도 배가 필요하거든요.”

여기서 무림맹의 가장 높은 분과 인연을 맺는다면 여러모로 앞으로의 표국 운영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만일 배를 잃는다 해도 결코 손해는 나지 않으리라. 마침내 장우양은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빌려가십시오.”

***

먼저 주작단이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비류연이 우뢰매를 통해 날려 보낸 서찰을 받고 급히 되돌아온 것이다. 아직도 거동이 불편한 남궁상과 진령은 들것에 실린 채 배에 올랐다. 환자는 환자답 게 의원에서 치료나 받으라는 말을 그는 듣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어도 마천각에 도착할 때쯤에는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남궁 상이 가는데 자기가 안 갈 수 없다고 진령도 따라나섰다. 바람을 피우지는 않나 옆에서 감시하겠다는 게 진짜 본심인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알았는지 류은 경이 따라나섰다. 앞으로 지아비가 될 사람의 간호를 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진령이 간호는 자신이 하면 되니까 됐다고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환자가 환자를 간호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언니는 쉬고 계세요. 모든 건 이 동생이 알아서 할 테니까요.”

진령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더 이상 말릴 만한 거리도 없었다. 장홍과 효룡도 배에 올랐다. 윤미로 분장했다가 큰 상처를 입은 윤준호는 이곳에 남겨야 했다. 혼자 남겨지는 것은 위험했지만, 함께 가는 건 더 위험했다. 나백천이 남궁 호법을 붙여주기로 약속했다. 나백천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야 했다. 서찰에 적힌 내용대로 흑천맹을 향해 출발해야만 했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배가 들어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비류연은 갑판에 서서 부두에 서 있는 나백천 부부를 내려다보았다. 비류연과 두 사람의 시선이 한데 마주쳤다. 한참을 침묵한 다음, 약간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동정호에 눈길을 주며 비류연이 입을 열었다.

“원래 전 소중한 것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소중한 것은 소중하기 때문에 때에 따라 약점이 되니까요. 그래요, 그건 정말 커다란 약점이에요. 그 때문에 꼼짝 못 하게 될지도 모르죠. 지금처럼 안절부절못하게 될 수도 있고요. 마음의 균형 상태가 무너지고, 자칫하면 이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죠. 이미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 르고요.”

“그래서 후회하나?”

나백천이 반문에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사실 후회하지 않아요. 아주아주 커다란 약점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죠. 소중한 약점 하나 못 만들고, 그 소중한 약점 하나 지키지 못해서야 어떻 게 진짜 사나이라 할 수 있겠어요? 하긴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죠. 그게 삶을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요? 그걸 지킬 수 있는 것도 바로 능력이죠. 애초에 그게 없어질까 봐 만들지 못한다면 그건 단순한 겁쟁이일 뿐이에요.”

지금까지 비류연은 누구 앞에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본 적이 없었다.

“네놈의 소중한 약점이 바로 내 딸이라는 것이냐? 네놈에게 과분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느냐?”

“소중한 것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만들고 버리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죠. 예린은 이제 제 미래의 일부예요. 지금이라는 현재부터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그 최종의 순간까지 쭈욱 이어질 내 미래의 일부죠. 아무리 무림맹주님이라 해도 제 미래에 간섭하실 수는 없어요.”

고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옆에 서서 비류연의 말을 듣게 된 주작단원들은 속으로 경악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이 돈만 밝힐 것 같고, 항상 가볍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자존심과 그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것 같 던 이 남자가?”

아무래도 변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들을 변화시켜 주던 비류연 역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이지 모 르겠지만, 변하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왠지 그들에게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그야말로 ‘만물유전(萬物流轉)!’,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다.

“겁이 없다 못해 네 녀석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예린이는 내 딸이다! 네놈에게 넘겨줄 것 같으냐? 그렇게는 못한다.”

“그거야 장인어른이 결정하실 게 아니고 예린이 결정할 문제죠. 설마 부모니까 자식의 운명을 이리저리 좌우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그, 그건……. 어, 어흠. 그, 그게 뭐가 나쁘다는 거냐?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부모도 있단 말이냐? 다 자식 잘되라고 그러는 거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라 는 거다! 그리고 누가 네놈 장인어른이라는 거냐!”

“선의를 지니고 있다 해서 꼭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아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이 세상은 그렇게 편리한 구조로 되어 있지 않아요. 그렇게 단순하지 않 다고요.”

“그게 어쨌다는 거냐?”

“부모의 선의가 자식의 마음을 짓밟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는 거지요.”

“자넨 지금 내가 딸아이의 마음을 짓밟고 있다는 건가?”

“아직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죠. 부모의 역할이라는 건 자식이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까지가 아닐까요? 부모의 품을 떠 나 높은 하늘로 날아가려고 자식의 날개에 족쇄를 채우는 것은 부모의 할 일이 아니죠.”

“부모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효(孝)’다!”

“아뇨,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립하는 것, 그게 바로 진짜 ‘효(孝)’예요. 자신의 운명을 부모에게 의탁하는 건 효가 아니라 ‘불효(不孝)’예요.” “그게 부모에게 상처를 입힌다 해도 말이냐?”

딸이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슬픔이 몰려오는 나백천이었다.

“집착과 사랑을 혼동하시면 안 되죠.”

“네놈은 어르신의 자식 사랑이 집착이라는 거냐?”

“그럼 아닌가요?”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못하는 말이 없구나. 노부는 네놈 따위 절대로 인정 못한다!”

나백천이 입에서 불을 토할 듯 길길이 날뛰었다. 비류연도 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건 장인어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예린이 결정할 문제란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그 결정을 내려야 할 예린 본인이 여기 없다는 거 “구요.”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거냐?!”

화를 참지 못하고 나백천이 버럭 소리쳤다. 스스로 대단하다 생각하던 자식 사랑이 완전히 부정당하고 있는데 그가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분노가 폭발하는 것도 당연했다.

“당연히 돌려받아야죠. 이제 그녀가 없으면 나의 미래는 불완전해지고 말아요. 나의 미래와 예린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그런 결락 따위, 난 인정 못해요, 절대로! 마천각을 뒤엎고 전 무림을 적으로 돌려서라도 나는 예린을 돌려받겠어요, 나의 품으로!”

임계점을 넘어 폭발한 화산의 용암처럼 터져 나온 진심을 의심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다면 한다! 안 한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하도록 만드는 남자! 그게 바로 비류연이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비록 두 분이 가시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예린을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요. 부탁하지 않으셔도, 하지 말라 말리셔도 전 꼭 그렇게 할 겁니다. 반드시 예린을 되찾아 돌아오겠습니다, 제 미래와 함께.”

결의에 가득 찬 말이었다. 그러자 아직도 화가 삭지 않은 나백천이 한마디 했다.

“그렇다고 아직 내 딸을 준 건 아냐. 난 아직 인정 안 했어!”

그러자 비류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인정은 갔다 와서 받도록 하죠, 아버님!”

“누가 네놈 아버님이냐! 엉? 엉??

나백천이 부두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예청이 방방 뛰는 남편을 진정시킨 다음 비류연을 올려다보았다.

“자네, 재미있군. 조금 마음에 들었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예린이를 부탁한다.”

비류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드넓게 펼쳐진 동정호를 보며 외쳤다.

“돌아간다, 마천각으로!”

“예!”

일제히 대답하는 주작단의, 각오로 벼리어진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네 개의 섬을 모두 침몰시켜서라도 예린을 되찾는다.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그동안 자신이 알아왔던 절망이 얼마나 얄팍했던 것인지를 알게 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