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5권 11화 – 윤미의 분투

비뢰도 25권 11화 – 윤미의 분투

윤미의 분투

-납치

“괜찮아요, 윤미 소저?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아니에요, 나 소저. 전 괜찮아요.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어요.”

“걱정이 되나요? 지금 싸우고 있는 연비가 이길지 질지?”

“그, 그런 거죠. 여기서는 밖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으니까요. 참 한심하죠?”

그러자 침상에 앉아 있던 나예린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저도 불안한걸요. 그런 걸로 한심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 하지만 전 겁쟁이인걸요.”

얼굴을 붉히며 윤미가 대답했다. 원래 자신의 본모습인 윤준호는 왕따에다 자타가 공인하는 겁쟁이였다. 이렇게 소심한 자신이 도움이 될 수나 있을지 그것조차 의문이었다.

“연비도 보증했잖아요. 당신의 안에는 아직 당신이 발견하지 못한 당당함과 자신감이 갖추어져 있다고요.”

“그, 그렇지만…….”

정말 그런 게 있을까 수십 번 가슴을 내려다봐도 보이는 건 절벽뿐이었다. 정말 이 안에 그런 게 들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절 부탁하기까지 했잖아요. 연비는 남을 믿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그만큼 당신을 믿기 때문이에요.”

“그런 건 누구랑 많이 닮았네요.”

윤미가 지칭하는 누군가는 당연히 비류연이라는 것을 나예린도 잘 알고 있었다.

“맞아요, 많이 닮았어요. 가끔은 두 사람이 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화, 확실히 그, 그렇네요.”

잔뜩 긴장한 채 윤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나예린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남자들은 비류연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그녀 가까이에 접근하 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위치는 침상 옆에 놓여 있는 의자. 나예린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리고 확실히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것은 단순하게 비율적으로 아름답다거나 하는 정도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이 세상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신비감이 그녀에게는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의 접근을 극도로 꺼리는 북풍한설처럼 차가웠던 예전의 모습과 달라서 윤미는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감히 눈도 잘 마 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저절로 얼굴이 붉어져서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나예린도 그가 여성의 모습으로 있어 조금은 경계를 푼 것 같았다.

천무학관 제일의 미녀 빙백봉 나예린을 호위하는 임무, 만일 그녀의 추종자들인 빙봉영화수호대라면 눈물을 흘리며 영광으로 여길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 자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문제는 그 막중한 책임감이 중압감이 되어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저, 저 같은 게 호위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고쳐지지 않는 윤미였다. 만일 비류연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스스로를 비하하는 건 세상에 맞설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며 엄청 화를 냈을 것이다.

“연비가 당신을 믿듯 나도 당신을 믿어요. 그러니 연비가 이기고 돌아오는 동안 짧은 시간이지만 잘 부탁해요, 윤미 소저.”

“아, 넵!”

윤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 순수함이 나예린의 눈에는 잡힐 듯 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본인이 들으며 무척 싫어할 이야기였지만, 마치 여동생 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나예린의 미소는 곧 차갑게 굳어졌다.

그것은 급작스럽게 엄습해 온 불길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녀의 용안이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주의하라고. 이 정도까지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각은 처음이었다. 너무 강력한 나머지 머리가 순간 지끈거렸다.

“조심해요, 윤미 소저.”

“예?”

“무언가가…….?”

슈우우우우우우우우.

대기실의 어딘가에서 희뿌연 연기가 새어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윽!”

무심결에 한 모금 들이마시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설마 독(毒)?”

그게 아니더라도 거의 그것에 준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은 습격이었다.

윤미는 재빨리 급히 귀식대법을 펼친 후 검을 잡았다.

쾅!

동시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복면인들이 들이닥쳤다.

“나 소저를 지켜야 해!’

윤미는 급히 침상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뽑았다.

칠매검(七梅劍)

오의

매화만조(梅花滿朝)

검향이 피어오르며 매화 빛의 검기가 복면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연기를 마신 탓인지 제 위력이 나오지 않아 복면인들의 칼에 막히고 말았다. 상당 한 훈련을 거친 자들인 듯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예린을 지켜내야만 했다. 아무래도 이들의 목적은 나예린인 것 같았던 것이다. 윤미는 다시 한 번 검을 휘두르며 칠매검을 펼쳤다.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져 파! 하고 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차!’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윤미는 다시 한 모금 연기를 들이마시고 말았다. 정신이 어질어질해지고 다리가 흔들거렸다.

“안 돼, 이대로 쓰러지면! 나를 믿어준 사람을 위해!’

몽롱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을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힘껏 검기를 날렸다.

서걱, 살이 베이는 느낌과 함께 복면인 하나가 쓰러졌다. 그러나 기뻐할 사이가 없었다. 자신이 두 명의 복면인과 싸우고 있는 틈을 타, 다른 두 명의 복면인이 나예 린의 양옆으로 접근한 것이다.

“안 돼에에에에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나머지 한 명에게 발이 묶여 도와주러 갈 수가 없었다.

그때 하얀 섬광이 번뜩이며 나예린에게 접근했던 두 명의 복면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어느새 나예린의 새하얀 손에는 그녀의 애검이 들려 있었다. 검을 이불 속 에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나예린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방식은 바로 기습이었다. 두 명의 복면인은 쓰러뜨렸지만, 나예린은 괴로운 듯 몸 을 숙였다.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탓에 내상이 재발한 것이다.

덕분에 자기 눈앞의 적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 윤미는 있는 힘껏 검초를 전개하며 복면인을 밀어붙였다. 무서운지 안 무서운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한껏 복면인 을 몰아붙여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순간, 갑자기 엄청난 충격에 눈앞이 컴컴해졌다. 옆구리가 화끈했다. 복면인의 칼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간 것이다.

휘이이이이이잉!

다음 순간 미친 듯한 광풍이 불어와 윤미의 몸을 휘감더니 벽으로 내동댕이쳤다. 윤미의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벽에 세게 부딪친 다음 바닥에 데구루루 구른 윤 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가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옆구리를 통해 자꾸만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윤미 는 보았다, 붉은 옷의 사내가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그자의 오른쪽 소매는 움직일 때마다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외팔이였다.

붉은 옷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예린은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던 무시무시한 전율을 느꼈다. 검고 사악하면서도 터무니없이 거대한 악이 그녀를 향 해 흉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지?

“난 저자를 알아!’

인정하기 싫지만 나예린은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급작스럽게 자라나고 있는 감각에 나예린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바로 공포였다. 거대한 공포와 혐오감이 그녀의 마음속을 물들여 가고 있었다.

붉은 옷의 사내는 미소를 지은 채 매우 천천히 나예린을 향해 다가왔다. 그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게 두려웠다.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백광이 희뿌연 연기를 가르며 번쩍였다. 하지만 그 검격은 붉은옷사내의 소매에 단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정도로는 무리지.”

검이 봉쇄되자 나예린은 다시 장으로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고, 그녀의 장법 역시 붉은옷사내에 의해 완전히 막히고 말았 다. 그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청동으로 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지만 그녀는 이자를 알고 있다.

“이런이런. 이렇게 버릇없게 굴면 못 쓰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없고 말이야. 참으로 예의가 없구나. 예의가 없는 아이에게는 벌을 줘야지.”

붉은 옷의 사내는 사이한 미소를 지으며 나예린의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이토록 소름 끼치는 악의를 나예린은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다. 이자 는 자신을 완전히 파괴시키고 싶어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까지.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녀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자는 그녀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어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그러진 흉념을 예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다, 당신은…….?”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붉은 옷의 사내가 혈도를 짚은 탓이다. 붉은 옷의 사내는 이불을 걷어낸 다음 나예린을 한 손으로 들쳐 올리더니 어깨에 걸 쳐 메었다.

“자, 이제 파멸의 전주곡을 울려보도록 하자꾸나. 크크크크.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곧 남은 복면인들이 쓰러진 복면인들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윤미는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 * *

약간 정신이 들었지만 의식은 여전히 혼미했다. 몸이 흔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수면향을 너무 맡은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워 사고가 원활하게 되지 않았다.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하는 의식 속에서 나예린은 생각했다.

‘그자는 대체 누구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그녀의 몸이 높은 계단 위로 옮겨졌다. 그러나 여전히 눈꺼풀은 열리지 않았다. 몸이 무겁고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불안했다. 자신이 완전히 적의 수중 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무서운 적의 정체를 아직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그런데 가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이 거무틱틱한 불안감은 대체 뭐 란 말인가? 사고(思考)가 그곳으로 향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누군가가 화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로 보아 무척 살이 찐 사람 같았다. 그녀는 여기가 어딘지 알아내기 위해 필 사적으로 머리를 움직였지만, 두통만이 가중될 뿐이었다.

다가온 살찐 남자가 뭐라고 말을 걸자 그녀를 들쳐 업고 있는 붉은 옷의 사내도 무언가를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말은 굉장히 먼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멀 리 들렸다. 소리가 뭉개져 있어서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의식이 다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때 다시 그녀의 몸이 움직였다. 그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옷의 사내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어딘가에 눕혀졌다.

푹신한 감촉.

아무래도 침상인 것 같았다. 자신을 내려놓은 후, 그자가 부하들에게 무언가를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내용 역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몸 을 움직여 보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몸은 그녀의 의사를 거부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몇 번이고 계속해서 시도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 야만 했다. 이자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악의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조금 더 노력 하자 손목까지 움직였다. 다시 몇 번 더 손가락과 손목을 움직이자 팔꿈치까지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장신구 하 나가 그녀의 손에 닿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그것을 떼어냈다. 손가락이 마음먹은 만큼 움직이지 않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일단 무언가 흔적을 남겨야 한 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를.

자신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증거를 남기려 하는 걸까?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비류연과 연비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얼굴은 이윽고 하나로 합쳐졌다.

그녀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비류연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저 멀리 수천 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왜 자신은 비류연이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 고 믿고 있는 걸까? 왜 이 믿음이 부서지지 않는 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 반드시 비류연이 자신을 구하 러 올 거라고. 그러니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고. ‘절망은 인체에 가장 해로운 맹독’이라고 이야기해 준 사람도 바로 비류연이었다. 마음속의 비류연이 그녀에게 외치 고 있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라고.

그녀는 팔을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풀어낸 장신구를 침상 옆 벽 쪽으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때 그 남자가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를 어딘가 좁은 공간으로 옮겼다. 굉장히 비좁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려 했지만, 팔도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와 함께 뚜껑이 점점 닫혀왔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뚜껑이 마지막으로 닫히기 전, 그녀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크크. 갑갑하더라도 조금만 참아라, 나의 작은 새야.”

순간 정신적인 충격에 그녀는 전율했다.

저 목소리, 저 말투……..

저 소리는…… 저 소리는…….

그러나 그녀의 사고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 남자가 예비로 넣은 수면향이 그 순간 그녀의 의식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던 것이다.

나예린은 다시 깊고 어두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어둠 깊은 곳에서 과거의 악몽이 다시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어느 방 안에 있었다. 제대로 가구가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감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의 자유가 구속되어 있다는 것 을 알았다. 팔목과 발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그것은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나예린은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일단 기를 돌려 몸 상태를 점검할 생 각이었다.

그러나,

“내공이 돌지 않아…….’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온몸을 순환해야 할 기(氣)의 흐름이 완전히 끊겨 있었다. 마치 거대한 둑이 곳곳에서 흐름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기혈이 봉쇄됐구나.’

점혈에 대항하기 위한 해혈술로 막혀진 둑을 부숴보려고 저항했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둑은 단단했다.

“이건 금제인가.’

단순한 점혈이 아니라 금침이나 그에 준하는 도구를 이용한 특수한 폐맥술이 분명했다.

“상당히 강력하구나.’

그냥 순수한 내공의 힘만으로는 이 금제를 푸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무언가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진기를 움직여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진기가 한 발 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기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차갑고 냉정한 그녀의 마음이 조그만 불안으로 살짝 흔들렸다. 이렇게 온몸이 무기력하기는 처음이었다.

‘류연……..

가장 먼저 비류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웃음이 맺혀 있던 바로 그 얼굴. 언제나 그녀에게 용기를 주는 얼굴이었다. 한없이 차갑기만 하던 그녀를 변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위험할 때 누구보다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진가를 모르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진정한 힘을. 그러나 그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아마도 강호란도가 아닌 다른 장소로 옮겨졌을 것이다. 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아버님, 어머님…….’

강호란도에서 뵈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그녀가 사라진 걸 알고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얼마나 상심하고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 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연비…….?

분명 지금쯤 연비는 자신을 찾기 위해 필사적일 터였다. 연비는 그런 사람이었다. 예전에도 자신을 구해줬듯 지금도 자신을 구해주려고 애쓰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하염없이 도움만 기다릴 수는 없어.’

“어떻게든 여기를 빠져나가야 해.’

그래야 부모님과 친구의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지금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철그렁! 철그렁!

양손을 묶고 있는 수갑을 세게 당겨보았다. 그러나 벽에 박힌 쇠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기를 끌어올릴 수 없는 이상 그녀는 지금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몇 번이고 수갑을 당겨본다. 그러나 내공이 금제되어 있는 탓에 나예린의 몸은 금방 피로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붉은 옷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오른팔 소매가 아무렇게나 펄럭였다. 그 모습에 그녀는 그가 외팔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소름끼치는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솟구쳐 올랐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서… 설마…….?

그는 한 발짝 한 발짝 느린 걸음으로 나예린을 향해 걸어왔다. 항상 당당했던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묶여 있는 처지에 뒤는 벽이라 그녀의 그런 행동은 거의 무의미했다.

나예린의 온몸이 마치 뱀을 앞에 둔 다람쥐처럼 세차게 떨렸다. 아무리 억눌러 봐도 소용이 없었다.

‘역시 이자는……!?’

그녀 바로 앞에 멈춰 선 사내가 왼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가면을 벗었다. 나예린은 그곳에서 나타난 얼굴을 보자 숨이 콱 막혔다.

덜덜덜, 온몸에 오한이 돋는 듯했다. 눈앞이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이며 몸이 질척질척한 늪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과거에 입은 마음의 상처가 삐꺽삐꺽 절규 하고 있었다.

악몽이 그녀의 눈앞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혼이 떨릴 정도의 악의를 듬뿍 담은 채.

“구 년 만인가? 오랜만이구나, 나의 작은 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