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5권 14화 – 치매대장

비뢰도 25권 14화 – 치매대장

치매대장

-제육번대

쾌검동자 장소옥.

그는 키가 작았다. 하지만 작다고 무시하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었다. 작다고 성질까지 온순한 건 아니었다. 생김새도 상당히 귀여운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지 만, 이 생김새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작지만 그는 육번대의 어떤 거구보다 강했다. 때문에 그는 실력으로 마천 제육번대의 부대장이 될 수 있었다. 그를 땅꼬 마라 놀린 기백 명의 인간들의 입을 꿰매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지금도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대장실로 가는 중이었다. 그의 손에는 첩지가 하나 들려 있었는데, 긴급을 다투는 붉은 봉투였다. 때문에 다른 때보다 짧은 다리를 더 빨리 움직였다.

드르르르르르렁! 퓨우우우우우우! 드르르르르르렁! 퓨우우우우우우!”

언제나처럼 문을 두드리려던 장소옥의 손이 우뚝 멎었다.

‘또 처자고 있군.’

이 문이 떨릴 듯한 코골이 소리는 대장 특유의 것이 분명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하긴 그 인간은 틈만 나면 잠만 자니까…….?

그리고는 항상 일어나면 뭔가 횡설수설 꿈 이야기를 해댄다. 그것이 옛날 기억인지 꿈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 몽상인 게 분명했다. 한 번에 천 명을 상대 했는데 아무도 자기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장소옥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 다음 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쾅쾅쾅쾅! 쾅쾅쾅쾅!

“대장님! 무명(無名) 대장님, 일어나세요! 긴급 통지입니다! 대장님! 대장님!”

큰북을 세차게 치듯 문을 두드린다.

“드르르르르렁! 퓨우우우우우우! 드르르르르르렁! 퓨우우우우우우우!”

이렇게 크게 문을 두드리는데도 일어나지 않다니, 흑도의 무인이란 자고로 언제든 암습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잠을 잘 때도 삼 푼 정도는 의식을 남겨두 어야 하는 법이 아닌가. 자기 부대 대장이긴 하지만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저러고도 잘도 여태까지 암습 한 번 안 받고 살아 있다니까.?

그 점이 오히려 더 신기했다.

하지만 내 할 일은 완수해야지.’

그가 부대장에 오르기 전 흑천맹으로 전출을 가게 된 전 부대장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었다.

“우리 육번대의 부대장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가 뭔 줄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말야, 바로 잠들어 있는 대장님을 깨우는 거야. 두들겨 패든 입맞춤을 하든 방법을 가리지는 말고.”

전 부대장은 여자였다.

“뭐하면 칼을 써도 돼. 도끼를 써도 되고. 깨울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어차피 죽진 않으니까. 상처 입지도 않고, 궁금하면 시험해 봐도 돼.” “그… 그런..

“내 전임 부대장도 그랬고, 전전 부대장도 그랬고, 전전전 부대장도 그랬어. 그게 백 년 동안 바뀌지 않은 이 육번대의 규칙이자 가장 중요한 임무야.”

처음에는 그게 뭐가 그리 힘든 일인가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았다. 한 번 잠이 들면 마치 죽은 듯이 잠을 잔다. 그런 주제에 코골 이는 또 얼마나 심한지. 결혼했다면 분명 코 고는 소리 때문에 파혼당하고 말았을 게 분명하다. 여기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어본다. 그러나 역 시 잠겨 있다.

철컥철컥철컥철컥!

대침입자용이 아니라 자신의 수면을 방해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잠가놓은 자물쇠를 차례차례 풀어낸다. 오늘은 총 여섯 개다. 이런 열쇠 따기 기술도 육번대 부대 장에게 요구되는 주요 능력 중 하나였다.

재빠르게 열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침상에서 태평하게 코를 골고 있는 대장의 옆모습과 백발이 흐트러져 있는 뒤통수가 보였다. 정말 태평하다.

한 걸음 한 걸음 빠르게 다가간다. 보통 대장 급이면 삼 보 안에 접근하기 전에 칼이 날아온다. 그러나 이 대장한테는 그런 것도 없다. 무기조차 옆에 두고 있지 않 는다. 어디까지나 태평하기만 하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 잘도 여태까지 대장질을 할 수 있었구나 하고 어떤 의미에선 감탄하게 된다.

스르르르릉!

검이 뽑혀 나온다.

“대장님, 일어나시지요.”

장소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드르르렁! 퓨우우우우!”

대답은 똑같았다.

“안 일어나시면 찌릅니다.”

그러나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란 말야!”

쉐에에에에에엑!

뒹굴!

백발의 사내가 그 순간 몸을 반 바퀴 틀었다. 그러자 칼날을 애꿎은 침상을 쳤다. 헛나간 것이다. 또 실패였다. 이래도 일어나지 않다니,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깨 우려고 휘두르는 칼날에 맞은 적도 없었다. 이번이 첫 시도가 아니었는지 침상 여기저기에는 어지럽게 칼자국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오늘도 실패한 장소옥은 비장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만일을 대비해 비장의 방법을 알려줄게. 이것만 있으면 언제나 성공할 수 있어!”

그의 전임 부대장이 알려준 비법, 그것은 바로 엿이었다.

그러나 이 엿은 보통 엿이 아니었다. 사천성에서 이름 높은 과자점인 ‘파리구랑상점’이라는 가게에서 만든 엿으로, 그 맛이 일곱이 먹다가 연쇄 살인이 일어나면 마지막에 엿을 들고 있는 사람이 진범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맛있는 엿이었다.

움찔!

꺼내 든 것만으로도 벌써 반응이 있었다. 코가 킁킁거려지는 것이 이 엿의 존재를 눈치 챈 듯했다.

“좋아. 이제 이걸로 슬슬 유도를 하면.

그는 파리구랑상점의 엿을 천천히 코 가까이 가져갔다. 너무 가까이 가면 먹혀 버릴 수 있다. 원래 가격이 비싼데 먼 곳에서 사 오느라 붙은 운송비까지 더해져 가 격이 만만치 않았다. 한 번 깨울 때마다 하나씩 써서는 부대 재정이 버티지 못한다.

“킁킁! 킁킁! 킁킁! 킁킁!”

번쩍!

지금까지 잘 자고 있던 대장이 귀신처럼 일어나더니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날아들었다. 대비하고 있던 장소옥은 재빨리 들고 있던 엿을 뒤로 뺐다. 그러자 한바 탕 돌풍이 몰아쳤다.

“악!”

방심한 장소옥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대장은 반쯤 졸린 눈으로 입에 누런 엿을 물고 있었다.

“앗! 절정의 당분 맛을 자랑하는 파리구랑상점의 엿이!”

또 빼앗기고 만 것이다. 어떻게 이럴 때만 이렇게 재빠른지……. 전생에 당분과 무슨 원한이라도 맺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대장은 일단 입에 문 엿을 우물우물 다 먹어치웠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마치 저 엿을 먹는 일 같았다. 눈앞에 있는 자신에게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응? 소옥, 언제 왔어?”

“부대장입니다, 부대장. 소옥이 아니고요. 장 부대장이라고 불러주세요.”

이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무척 싫어했다. 키가 작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러운데 이름에까지 작을 소(小)자가 들어 있어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 다가 너무 여성스러웠다.

“그래, 소옥. 무슨 일이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래, 언제 이 인간이 남의 말에 귀 기울였던 적이 있었던가. 장소옥은 그만 포기하고 자신이 여기에 온 용건인 붉은 서찰을 내밀었다. “긴급 비상 특급 서신입니다. 총대장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무슨 일 있었어? 기억이 잘 안 나긴 하지만 이게 발령된 건 수십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은데? 아니, 수년 만에 처음인가?”

“침입자가 들어왔잖습니까. 좀 전까지 계속해서 비상종이 울렸다고요.”

“그래? 왜 난 못 들었지?”

‘그야 자빠져 쿨쿨 처자고 있었기 때문이죠!’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이죠.”

“수면이라는 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아주아주 중요한 거란 말이지.”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자지는 않습니다.”

백발의 사내는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봉해진 서신을 열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大至急(대지급).

긴급 대장회의 소집.

각 대장은 지금 즉시 총대장실로 집결할 것.

-마천십삼대 총대장 백.

“뭐라고 적혀 있나요?”

“제일번대 총대장실에서 긴급 대장회의가 있다는군. 당장 달려오라는군.”

“그럼 빨리 준비하셔야죠.”

“꼭 참석해야 되나? 총대장이 알아서 잘할 텐데.”

“일단 대장님도 마천십삼대의 열두 대장 중 한 분이시잖아요. 참석하긴 하셔야죠.”

보이지 않는 열세 번째 부대는 없는 것으로 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대장의 수는 열셋이 아니라 열둘이 맞았다.

“노약자 우대라는 것도 있잖아?”

“그런 이십대 후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얼굴 가지고 나이 타령해 봤자 안 통한다고요. 어서 준비하세요.”

백발사내는 내가 나이를 안 먹으려고 해서 안 먹은 게 아니라 멋대로 겉만 안 늙은 것뿐이네, 속은 이미 백 살 먹은 할아버지라 뼈마디가 성한 곳이 없네, 삭신이 힘 들다 보니 잠만 늘었네, 엄살을 떨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서 준비하세요. 엄살 떠셔도 소용없습니다.”

“네엥~”

백발의 대장은 풀 죽은 얼굴로 대답한 다음, 아쉬운 잠을 뒤로하며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그리고는 양팔을 쭉 펴며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정말 나이는 마 천십삼대 대장 중 가장 많은 주제에, 정신 연령은 가장 어린 게 아닌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행동들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게 제육번대 부대장의 임무이기도 했다.

쿠당탕탕탕.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또 사고가 터졌다. 침상에서 내려오던 중 몸이 옆에 있던 탁자를 치면서 탁자 위에 있던 집기들이 우당탕탕, 떨어져 내리며 산산조 각이 난 것이다.

“또 저지르셨습니까?”

기도 안 찬다는 투로 장소옥이 외쳤다. 잠시 한눈판 사이를 참지 못하고 또 한 건을 저지른 것이다.

“아니, 그게… 이게 여기에 왜 있지……? 여기에 이런 게 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정말 조심성도 없고 칠칠치도 못하다. 가만히 서 있는 탁자 하나 못 피하면서 적들이 뿌려대는 검기는 어떻게 피해내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의 대장은 정말이지 마천십삼대 열두 명의 대장 중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대장에게 어떻게 이딴 게 대장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심심치 않게 심어주는 장 본인이기도 했다.

대장 전체의 위신을 깎아먹는다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대장들도 있었지만 그 의견은 먹히지 않았고, 어떻게 지금까지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저 칠칠치 못한 행동과 다르게 그는 사실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오래된 대장이었다. 반로환동의 경지인지 아니면 초절정 미용술인지 몰라 도 삼십대 초반의 젊음을 샤방하게 유지하고 있었고, 또한 가장 오래 대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실 그의 나이는 이 마천각 전체의 의문이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 면, 마천각주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지만 그 진위가 확인된 바는 없었다.

간간이 ‘나는 파문전사니까요’라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역시 확인된 바는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괴물이었다. 그 러니 치매 정도는 걸려줘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또 잊어버리셨어요? 그러니까 분명 치매 증상이라니까요.”

“아, 너무하네.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섬세한 나의 마음이 상처받는다고.”

이놈의 대장은 어떻게 된 게 부주의할 뿐만 아니라 치매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다. 뭔가를 곧잘 잊어먹어 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 걸 일일이 챙기는 것도 부대장의 역할이었다.

“부대장한테 상처받는 대장도 있습니까? 수뇌부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일이라고요, 대장님.”

“난 치매가 아니라 오래 기억하기 힘든 것뿐이야.”

“그런 걸 세상에선 치매라고 부른다고요. 자, 서두르세요. 외부 침입으로 비상종이 울린 건 구 년 만에 처음이라고요. 늦으면 총대장님한테 또 잔소리 듣는다고 요.”

“유 총대장이 좀 성격이 급하긴 하지.”

그러자 장소옥이 지적한다.

“지금 총대장은 유 총대장님이 아니라 백 총대장님이라고요.”

“어? 언제 바뀌었지? 난 확실히 유 총대장인 줄 알았는데…….”

“유 총대장님은 ‘얼마 전에’ 행방불명됐어요.”

“그것참 유감이네. 유 총대장, 그 친구도 장래가 꽤 촉망됐는데…….”

잠시 멍해지는 것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두면 또 시간이 세월아 네월아 흐를 게 분명했다.

“무섭기는 지금 백 총대장님이 더 무섭다고요. 얼마나 불같으신데요.”

“그런가?”

“그럼요. 마천각주님이 직접 추천한 분이잖아요. 빨리 안 가면 또 혼나요.”

“백 총대장…… 백 총대장…… 백 총대장…….”

“뭐 하세요, 대장님?”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리는 대장을 향해 장소옥이 외쳤다.

“아, 또 잊어버릴까 봐 잠시 연습해 봤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백발의 대장이 말했다. 부대장 장소옥은 골이 지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자자, 그런 건 가면서 하고, 어서 무기 챙기세요.”

“무기? 나 그런 것도 썼었나?”

장소옥은 잠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절망감을 느꼈다. 이제 끝장이야. 더 이상은 수가 없어. 파멸이라고,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연하죠!”

장소옥이 버럭 소리쳤다.

“자신이 무기를 쓰는지 안 쓰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둔 것을 잊은 것도 아니고, 썼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다니.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황당하기 짝이 없는 대장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뭐 굳이 무기가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아무거나 들어도 되고…….

“자기 무공이 뭔지는 기억합니까?”

“……”

대답이 당장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 더 무서웠다. 이럴 때는 좀 ‘물론이지, 그런 걸 잊을 리가 없잖아, 아하하하!’ 하고 웃으며 불안을 해소시켜 주면 어디가 덧난 단 말인가. 이 치매 대장은 기억력은 안 좋은 주제에 쓸데없이 정직했다. 전혀 흑도인답지가 않았다.

“음.. 기억이 안 나네.”

장소옥은 뒷골이 당겨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한 부대의 부대장이 정신적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졸도라니, 타 부대에 알려졌다가는 놀림감이 되기 딱 좋았다. “이, 얼굴만 나이를 먹지 않는 괴물이!!’

아아, 자기가 무기를 쓰는지 안 쓰는지는커녕 무공까지 기억이 안 난다고!!

“죽어! 죽어! 죽어! 이 치매 대장아! 죽어버려! 영원한 망각의 세계로 사라져 버려!”

그는 어느새 대장의 멱살을 엇갈아 잡고 목을 조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성이 끊어진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지만 백발의 대장은 죽어버리라고 멱살을 잡고 흔드는데도 사람 좋게 웃을 뿐이었다. 목을 조르는데도 안색이 파리해지지조차 않는다. 뭐가 좋은지 마냥 웃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손자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 같고, 어떻게 보면 미친놈 같기도 했다.

“괜찮아, 괜찮아. 무공은 기억 못하지만, 자기 이름도 하나 기억 못하니까.”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게다가 용법도 틀렸다고요. 무공은 기억 못하지만 이름 하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해야죠. 앞이 부정이면 뒤는 긍정이어야죠!” “하지만 전혀 기억이 안 나는걸. 그래서 지금 내 이름이 뭐지?”

“그것도 또 잊어먹었습니까? 무명(無名)이시죠.”

그렇다. 이 망할 대장의 이름은 무명이었다. 이름을 버려서라는 그런 거창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단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무명일 뿐이다. 분명 치매 때문에 잊어버린 게 확실하다는 게 마천십삼대의 중론이었다.

“것봐. 이름까지 무명이잖아. 난 대체 무엇을 잊어버렸을까? 과거의 나는 누구였을까? 뭔가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그거에 비하면 무 공이나 무기 같은 건 아주 사소한 문제지.”

잃어버린 과거는 언제나 그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 외에 백도니 흑도니 하는 것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장님…….”

장소옥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무명은 다시금 파안대소했다.

“아하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무공 같은 건 머리는 기억 못해도 몸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분명 좀 전까지 대장의 멱살을 잡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장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의 대장이 변함없는 웃음을 지으며 그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고 있었다.

“어? 이, 이럴 수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소옥은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멍한 심정으로 텅 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이 손으로 멱살을 움켜잡고 있었 는데……. 옷깃 조르기는 확실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반의반 각도 되기 전에 졸도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느새 조르기가 풀려 있었지? 마치 기억이 도려 내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나, 나도 설마 치매인 건가……? 대장의 치매는 설마 전염성?!’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올려다본 대장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별생각없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어, 어떻게? 방금 분명 무공이 기억이 안 난다고…….”

“아, 그거? 걱정할 거 없어, 잊어버린 건 초식뿐이니까.”

“잊어버렸다고요? 무공 초식을요?”

“응, 깡그리.”

아주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무명이 대답했다.

“이 거짓말쟁이! 방금 전에 제 손을 빠져나온 건 분명 무공이었다고요!”

“잊어버렸다고 해서 꼭 쓰지 못하란 법은 없잖아. 초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 틀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어. 그럼 키 가 안 큰다고.”

“누, 누, 누가 걱정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전 키 안 작아요! 전 다만 어디까지나 우리 대를 위해서…….”

“그래, 그래. 난 행복한 대장이라 그 말이지.”

“크아아아아악! 사람 말을 좀 들어요, 이 치매 대장아!”

장소옥이 다시금 폭발했다. 그러나 대장 무명은 여전히 웃으며 받아줄 뿐이었다.

“자, 갈까? 더 이상 기다리게 하면 싫어할 테니까.”

“아, 예. 대장님.”

제육번대 대장 무명(無名). 자기가 무슨 무기를 쓰는지 무슨 무공을 쓰는지도 잊어버렸고,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지만, 그가 누군가에게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기 억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역시.

“꿀꺽!”

장소옥은 잔뜩 긴장한 채 총대장실 앞에 섰다. 문 하나를 경계로 두고 있는데도, 문 너머의 긴장감이 여기까지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역시 제일 꼴찌인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다 망할 대장 때문이었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제육번대 무명 대장님 입실하십니다!”

정문 양옆에 서 있던 호위무사 둘이 큰 소리로 고하자 서서히 문이 열렸다.

무명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방 안에는 이미 각 기숙사를 담당하고 있는 대장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 다. 그중 몇 개의 빈자리를 본 무명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이야, 내가 꼴찌인 줄 알았는데 아직 안 온 사람들이 있었네. 이거 운이 좋은걸.”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무명을 향해 화살처럼 꽂혔다.

‘히에에에에에엑!’

이런 게 처음인 장소옥은 저절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늦으셨군요, 무명 대장님.”

도열하고 있던 삼번대 부대장 전총이 맨 처음 말을 걸었다.

“이야, 이거이거, 미안합니다. 하지만 아직 다섯 자리나 비어 있는데…….”

확실히 그러했다. 오번대, 팔번대, 구번대, 그리고 사번대. 모두 무교관 출신이 아닌 현 학생 출신이 대장을 맡고 있는 부대였다.

“그들은 이미 맡은 임무에 임하고 있네. 침입자들이 사해도로 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세.”

잠자코 있던 총대장 백천절이 입을 열었다. 단지 한마디 입을 연 것만으로도 엄청난 박력이 전해졌다. 장소옥은 부끄럽지만 오금이 저릴 정도로 온몸이 떨렸다. 등 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존재감만으로도 이런 위압감을 줄 수 있다니……. 과연 마천십삼대를 통솔하는 총대장다웠다.

“아, 그런데 칠번대 옥유경 대장 자리도 비어 있는데, 그녀도 임무를 맡았나요?”

“아니, 그녀는 단순히 지각일세.”

“그래요? 거참, 성실한 그녀답지 않군요.”

“침입자와 맞닥뜨렸는지도 모르지.”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유 총대장.”

“또 틀렸다아아아아아!!’

기절초풍한 장소옥이 속으로 비명을 터뜨렸다.

“유 총대장이 아니라 백 총대장일세. 자네 기억력은 여전하군, 무명 대장.”

“아참, 그랬지. 이거참, 미안합니다. 자꾸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냥 쉴까요?”

그는 오히려 이 회의장에서 쫓겨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앉게. 어차피 들어도 잊어버릴 테지만, 일단 자네도 들어둬야겠지.”

그러자 여기저기 쿡쿡 하는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옥이 화난 시선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경멸스런 시선만 돌아올 뿐이었다. 분하고 분하고 또 분 했지만, 약하디약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대장은 이런 명명백백한 비웃음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저 싱글벙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점에 또 배알이 뒤틀렸다.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육번대 부대장이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로 ‘극한의 인내’가 있는 것도 무 리가 아니었다.

쿵!

그때 총대장이 가볍게 들고 있던 검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가볍게 내려친 것 같은데도 엄청난 내공이 실린 음파가 총대장실을 가득 채웠다. 공부가 약한 부대장 몇 몇은 고막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러나 대장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제 좀 조용해진 것 같군.”

주위를 한번 둘러본 후 총대장이 개회를 선언했다.

“자, 그럼 사람도 모두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