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휘의 고민
ᅳ아직도 풀지 못한 화두와 아직도 갚지 못한 외상값
그 시각, 비류연들은 열심히 제십삼 기숙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단 거점을 확보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오지에 가까운 곳에 외따로 떨어져 고립되어 있다 보면 평소보다 유대가 늘어나는 법이었다. 천무학관 사절단 전체가 말려들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 걱정은 이미 늦었다. 모두들 이미 자의든 타의든 말려들고 만 것이다. 장홍은 이 일이 결코 단순하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을 받았다.
“그러니까 육번대 대장은 범인이 아니라는 거지?”
경공을 멈추지 않은 채 비류연이 물었다. 지금 그들은 전각들을 지나 자신들의 숙소인 제십삼 기숙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장홍과 효룡이 일단 그곳에서 챙겨 올 것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류연 역시 가져와야 할 것이 있었다.
“그래, 될 수가 없어. 그분, 무명 대장님은 나이가 너무 많거든. 거의 마천각 칠대불가사의 중 하나라 불릴 정도로 나이가 많은데 얼굴만은 젊어. 진짜 나이가 얼마 인지는 아무도 몰라. 이곳 마천각이 창설되었을 때부터 대장이었고 지금도 대장이야.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지? 아마 그분보다 이곳에 오래 계신 분은 마천각주 한 분뿐일 거야. 농담 삼아 우린 그분이 초대이면서 말대가 될 거라고 얘길 하지. 마천각의 ‘두 명의 불사신’ 중 하나야. 시간을 멈춘 자, 늙지 않는 괴물, 파문전사, 혹은 탱탱피부라고도 불리고 있지. 그 고절한 피부 관리와 노화 관리 덕분인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지.”
“흠, 그렇다면 그 사람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어야겠군. 그럼 이제 몇 명 남은 거지, 장홍?”
“이제 몇 사람 안 남았네. 사천왕은 모두 학생 신분이니까 뺐어. 칠번대도 여자라서 뺐네.”
“의심스러운 사람은 일번대, 이번대, 삼번대, 사번대, 십이번대, 이렇게 다섯 사람인가?”
“아니, 광랑은 빼도 된다고 봐요. 그 사람은 확실히 외팔이가 아니거든요.”
“그걸 효룡 자네가 어떻게 아나? 설마 자네와 뜨거운 사이라도……”
“절대 아닙니다! 무슨 그런 난폭한 미친 늑대랑! 게다가 남자잖아요. 다만 그 친구, 취미가 몸에 입은 무수한 상처들을 자랑하는 거라 시도 때도 없이 훌렁훌렁 웃 통을 벗어젖혀서 알고 있는 것뿐이라고요.”
효룡의 말에 장홍은 눈을 가늘게 뜨며 농을 건넸다.
“흐음, 수상한걸?”
“나, 화냅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농담이었네, 농담. 정색하기는.”
장홍은 두 손을 들며 포기 선언을 했다.
“하지만 주의할 게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건, 나머지 대장들이 비록 범인은 아닐지라도 꼭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안 된다는 거야.”
“일리가 있군.”
“지난 수년 동안 충분히 포섭됐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방심하면 안 돼. 어느 누가 적으로 돌아서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십이번 대장도 무척 수상하다. 그리고 수수께끼의 십삼번대 대장도 용의 선상에 올라가긴 하지만, 백 년 동안 공석이었으니 일단 한쪽에 미뤄두었다. 요는 구 년 안에 새로 대장이 된 나이 많은 이가 용의자인 것이다. 얼굴을 변하게 하는 수법은 여러 개 있다. 신체의 체형조차도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 지 않다. 목소리도 바꾸면 된다.
“이제 어쩌지?”
“일단 휘 녀석을 찾아야겠어.”
“그 친구는 왜?”
“구출대에 합류시켜야지. 결벽증은 있지만 실력은 쓸 만하니까.”
“최근 들어 더 나아진 것 같던데. 본인은 숨기려 하지만 연마되어지는 무인의 예기는 쉽게 숨겨지지 않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그 녀석도 아직 멀었다는 얘기군. 뭐, 비밀 특훈 중인 모양인데, 성과가 있어야지. 없으면 본인도 곤란하지 않겠어?”
땡땡땡땡땡땡!
***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요란스런 종소리에 모용휘는 명상을 풀고 눈을 살며시 떴다. 마천각 전체가 술렁이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소란스럽군.”
고요하던 호수에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풍덩 던져지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그에 관해서 신경을 껐다. 그의 앞에는 지금 더 중요한 과제가 놓여 있 었다.
건곤조화경(乾坤造化鏡).
무신 태극신군 혁월린이 남긴 마지막 오의가 담겨져 있다고 전해지는 보물. 그 보물은 지금 두 조각으로 나뉘어져 어느 인물들에 의해 보관되어지고 있었다.
염도와 빙검, 이 두 사람이 어째서 그런 강호의 보물을 지니고 있는지 모용휘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다만 두 사람이 태극신군 혁월린의 숨겨진 제자가 아닐까 어 림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염도와 빙검, 그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 확인해 주려 하지는 않았다.
그 거울은 나뉘어진 이래 한 번도 합쳐진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염도와 빙검, 이 두 사람은 견원지간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매우 사이가 나빴기 때문이다. 만나기 만 하면 싸우고, 서로의 신경을 긁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듯했다. 과연 이 두 사람이 동문이 맞긴 한가, 혹시 철천지원수지간은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 유에서였다. 동문이면서도 한쪽은 불의 속성을 연마했고, 다른 한쪽은 얼음의 속성을 연마했다는 것도 수상쩍은 대목이었다.
지금 모용휘는 이 두 사람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몰래몰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한 성질 하는 이 두 사람도 혁중 노인의 말만은 거역하지 못했다. “가르쳐라!”
이 단 한마디만으로 충분했다. 왜냐고 물었을 때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아마 이 녀석이 태극의 인재 같으니까.”
인재이면 인재인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아마~ 같으니까, 라니! 모용휘에게 있어선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아무런 단서도 없 었던 두 사람은 혁중 노인의 보증만으로도 해볼 의향이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단 한 가지에 대해서만은 혁중 노인에게 거역했다.
“건곤조화경은 아직 보여줄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이것만은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보여줄 테냐?”
“저 녀석이 저희들을 쓰러뜨린다면 그때 보여 드리겠습니다.”
“정말이냐?”
“약속드립니다.”
혁중 노인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유명한 천하오검수의 일좌인 빙검 관철수와 천하오대도객의 일좌인 염도 곽영희를 상대로 이기라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모용휘, 그가 아무리 강호상에서 칠절신검이라는 별호를 얻고 천재라고 칭찬이 자자해도, 염도와 빙검에 비하면 아직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했다. 본인 역시 그 부 분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혁중 노인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검성을 넘어선다는 녀석이 산 초입부터 포기해서야 쓰겠느냐? 저 두 놈도 못 이기면서 어떻게 검성을 능가할 수 있겠느냐? 평생 넌 네 할아비의 그늘에서 살고 싶으냐? 검성을 죽인다는 각오는 어찌 되 었느냐? 신화가 될 각오가 없다면 애시당초 포기해라.”
그런 말을 듣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하겠습니다.”
“하겠느냐? 아니, 할 수 있겠느냐?”
“네, 할 수 있습니다. 꼭 해내겠습니다!”
그러나 모용휘는 곧 그렇게 대답한 것을 후회했다. 그날 이후 모용휘는 자신의 말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시험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수십 번의 시험을 거치고도 아직 모용휘는 자신의 장담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번지르르한 말이나 의지만 가지고 이 세상의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지지부진한 상태로 마천각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염도와 빙검 노사도 함께 왔기 때문에 아직도 기회는 많았다. 언제나 시험해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자격을. 그러나 이 상태로는 백 년이 지나도 불가능하다 하고 있을 때, 혁중 노인이 나타났다.
전해준 말은 단 한마디.
“삼재(三才)의 이치(理致)를 깨달아라.”
우물가에서 은설란에게 ‘바보!’ 소리를 듣고 당황하고 있던 그에게 불쑥 나타났던 혁중 노인이 던져 준 화두(話頭)였다.
혁중 노인은 그것을 가리켜 염도와 빙검, 두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한 비책이라고 했다. 무신 태극신군 혁월린이 남긴 깨달음이라 했다. 즉, 그렇다는 것은 이 말이 단지 한마디 문장이 아니라, 이 말의 배경 뒤로 우주만큼 넓은 사고 과정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문장 그대로가 아닌 숨겨진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다는 뜻 이기도 했다.
삼재의 이치, 그것은 무신 태극신군의 정신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여정을 거쳐 도달한 종점(終點)이었다. 그 의미를 음미한 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을 알아야 만 한다. 이 화두가 나오게 된 그 과정, 그 과정에 바로 이 깨달음의 진수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려면 먼저 화룡이 필요한 법. 그 후 모용 휘는 밤낮없이 이 ‘삼재의 이치’라는 화두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무신의 깨달음을 쫓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 사고의 폭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라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렴풋이 깨닫는 것도 있었다.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삼재가 삼재검법의 그 삼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천과 지, 인은 어떤 다른 것을 비유하는 것이다. 아니, 어떤 것이라기보다 어떤 현상을 비유하는 것이다. 하늘이 라는 의미가 단순한 하늘로써 쓰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地)와 인(人)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생각하느라 오십만 냥 대회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런 소동 이 있었는지조차도 알이지 못한 채 모용휘는 마천각에 남아 수련에 골몰했다. 그리고 현재, 드디어!!
“하아, 그냥 포기할까?”
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안개처럼 뿌옇기만 할 뿐 뭔가가 짠, 하고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흩어져 있는 구슬을 단번에 하나로 꿰는 듯한 그런 번쩍임이 도저히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답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정답에 집착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어져 가기만 하는 기분이었다.
“고약한 수수께끼도 아니고……. 덕분에 은 소저랑 제대로 이야기할 시간도 거의 가지지 못했고, 친구들은 어느샌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이래서는 왕따나 다름이 없었다. 혼자 외딴섬에 고립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은설란하고도 다시 한 번 시간을 가지고 지난번 우물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찬찬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얘기해야 ‘바보’라 불렸던 게 취소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화를 다시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야기로 들은 적은 있었다. 중요한 무공의 요체나 오의를 설명할 때, 이번처럼 수수께끼나 화두 형태로 가르침을 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설마, 내가 그 당사자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말이야.”
이런 복잡한 과정을 채택하는 이유는 비의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전승자의 재능을 시험하기 위한 시금석이기도 했다.
그 정도 화두를 깨우칠 수 없을 정도면 가르침을 사사해도 그 오성으로는 오의 전체를 습득하기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배후에 깔려 있는 것이다. 중도에 가르치길 그만둘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가르치지 않는 게 낫다는 뜻이기도 했다.
“난 또다시 시험받고 있는 건가…….”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에겐 무신의 진전을 이을 자격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자격이 있고 없음은 이 시험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즉, 이것은 그에게 있 어 할아버지 검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한계에 왔다는 사실 역시 절감하고 있었다.
“하아, 이럴 때 의논이라도 좀 할 친구가 있으면 좋으련만. 응? 왜 류연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이해를 못하겠군. 상의해 봤자 선불부터 내라고 손을 내밀 게 분명한데…… 응? 류연?”
어째 눈앞에 나타난 비류연의 형상이 매우 또렷했다. 아무리 봐도 순간적으로 떠오른 환상이 아니었다.
“진짜 류연?”
그러자 그의 앞에 나타난 비류연의 형상이 입을 열었다.
“아니, 자넨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거야. 요즘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지.”
“가짜라고?”
“가짜라니, 듣기 안 좋군. 그것보다는 심신탈락에 의한 일종의 의존적 환각 증상이라고 해줘. 왜, 그러잖아? 간절히 원하면 실제로 없는데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말야.”
“내가 뭘 간절히 바라는데? 자네한테 별로 간절히 바라는 건…….”
그러자 비류연의 형상이 말했다.
“그야 당연히 그동안 밀린 외상값을 갚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지.”
그 말에 모용휘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 진짜군, 진짜 류연이야.”
역시 저렇게 돈에 집착하면서 뻔뻔한 인간은 이 세상에 비류연 말고는 있을 수 없었다.
“무슨 잠꼬대를 하는 거야, 휘? 당연히 진짜지.”
좀 전에 자신의 입으로 환상이라고 이야기했던 건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다. 역시 저 뻔뻔함과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낯가죽의 두꺼움은 틀림없는 비류연이었다. “여긴 어떻게?”
질문을 던진 모용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흠칫 몸을 굳혔다.
‘뭐지, 이 기운은?”
모용휘는 속으로 기겁했다.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하는, 의식의 밑바닥까지 얼어붙게 하는 차가운 한기가 그의 심장을 서늘하게 얼리고 있었다.
“설마, 이게 류연의 기운?”
그가 언제 이런 기묘한 기운을 뿌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흘깃 쳐다본 비류연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와 후회, 기쁨과 슬픔, 그 어느 것도 지금의 그에게선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모든 감정이 빠져나가 버린 듯했다.
‘마치 텅 빈 껍질 같군.’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해서 주변에 민폐를 끼칠 정도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란 말인가? 이게 정말 그 비류연이란 말인가? 이런 넋이 나간 듯한 면 상을 하고 있는 인간이? 이런 걸 비류연이라고 인정해도 된단 말인가? 좀 전까지 자신에게 농담을 하던 그 친구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좀 전까지 억지로 가면 을 쓰고 있었던 듯한 이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런 건 결코 류연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러자 한참의 침묵 후 비류연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외상값을 갚을 때가 왔네, 친구.”
“외상값이라니, 무슨 소린가? 자넨 언제나 갑작스러운 데가…….”
“예린이 납치됐어.”
모용휘는 할 말을 잃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다음에 이어진 말에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도움이 필요해, 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