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대주
-이별
수신: 사십칠호
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다.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 현재의 혼인 임무를 중단하고, 즉시 다음 임무로 넘어가길 바란다. 십이호와 접선 요망!
언제나처럼 차기 임무는 십이호가 직접 전달한다.
건투를 빈다.
-무영대주.
서찰을 든 사내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끝내라고? 무얼? 그녀와 헤어지라는 건가? 나에게 그녀를 떠나라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그녀를? 사납게 굴다가도 때때로 한없는 따뜻함을 안겨주는 그녀를? 겨우 알게 된 행복을 그만두라고? 그럴 수는…… 그럴 수는…….
명령에 거부하려고 하자 심층 의식에 심어져 있던 금제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정신 금제는 암시보다 훨씬 강력한 정신 제재 수법으로 그림자를 속박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자, 명령을 수행하라. 너는 그림자. 빛의 방향에 따라 드리워질 곳을 바꾸는 그림자.
너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명령을 수행하는 행동뿐. 스스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그저 따르라. 그저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 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따르라.
명령을 거부하려 하자 엄청난 반발감과 거부감이 몰려왔다.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고 의식이 멍해지는 듯했다. 숨 쉬기도 힘들었다. 정신 깊숙히 새겨진 금제가 그 의 명령 거부에 반발하고 있었다. 그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서 할 일은 간단했다. 그저 명령대로 따르면 된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그렇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그녀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이제 겨우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사람답게 사 는 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가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탑 역시 모래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 역시 환상이었다고, 신기루였다고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너는 아무것도 쌓을 수 없다. 거짓의 토대 위에서는 아무것도 쌓을 수 없다, 말하고 있었다. 슬픔에 가득한 절망이 그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무력함이 온몸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닌 건가…… 난 거짓의 존재일 뿐인 건가..
“명령에 따르…… 명령에 따르겠…… 따르…… 으아아아아아아악!”
쾅!
왼 손바닥으로 벽을 세차게 때리자 벽이 강하게 진동했다.
푸확!
발작적으로 단검을 뽑아 든 장홍식은 그대로 그것을 왼 손등에 찍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벽을 타고 붉은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따를까 보냐! …이런 명령.. 절대로 따를 수 없어…….”
그날,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명령을 거부했다.
“날 이 먼 강호란도까지 불러내다니… 희한한 일이군.”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 했다.
장홍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 사내의 진짜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무영대의 그 누구도 이 사내의 진짜 얼굴은 본 적이 없다. 매번 만날 때마다 얼굴이 바뀌는 사나이, 본인조차도 스스로의 본얼굴을 잊어버렸다고 일컬어지는 사나이, 언제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어떤 흔적이라도 끝까지 쫓아갈 수 있는 사나이, 지금까지 그 어떤 배신자도 그의 추적을 피하지는 못했다.
백도의 그림자, 무영대를 총괄하는 무영대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있으니 장홍이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게, 남들이 수상하게 보면 곤란하니까. 안 그런가, 조카?”
장홍식이 공손히 대답했다.
“예, 삼촌.”
삼촌과 조카라 부르고 있지만 임시로 만들어진 신분일 뿐, 이 자리를 벗어나면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간다.
“그래, 날 불러낸 이유를 들어볼까?”
잠시 침묵하던 장홍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번 명령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철회해 주십시오.”
예전만큼 명령 거부를 말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그가 명령에 거역하는 의사를 밝히자 무영대주는 상당히 놀라는 기색이었다. 당연했다. 원래대로라면 절대로 있 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명령을 거부한다고?”
“예, 거부합니다. 그러니 철회해 주십시오.”
“정신 금제를 깨다니, 놀랍군.”
무영대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만 대를 떠나고 싶습니다.”
한 번 입을 열기 시작하자 그다음은 거침이 없었다.
“명령 거부 다음에는 은퇴인가? 나도 못해본 걸 자네가 해보려 하는군.”
장홍이 가타부타 대답이 없자 무영대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지금까지 날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지. 언제나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서 나를 기쁘게 했지. 그런데 이번에 임무를 거부하는 이유가 뭔가? 배신 할 생각이었으면 거부한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지.”
“배신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제 그림자를 그만두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얻고 싶었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은퇴는 용납되지 않아.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다니, 이유가 뭔가?”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니…… 자네 너무 어려운 것을 바라는군.”
“빛에… 빛 밑에 서고 싶습니다.”
무영대주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빛이라……. 자넨 그림자야. 그림자는 결코 빛이 될 수 없어. 자네는 그림자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만도 없었잖나?”
“지금도 그 사실에 불만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평생을.”
그것은 그림자로서는 불가능했다. 빛 아래 설 수 있어야 가능했다.
“허허……. 이거 참, 의외의 발언이로군. 사랑이라……. 그런 개념이 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네. 어떤 건지 말로는 알아도 이해는 가지 않지만 말이야. 사랑에 관한 우리 쪽의 금언은 알고 있겠지?”
“사랑은 치명적인 독이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갈구하게 만들기에.”
장홍식이 기계적으로 그 말을 읊었다.
“그런데도 사랑을 하겠다는 건가?”
“불가항력입니다. 저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무영대주는 잠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빛 아래에 서고 싶은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림자는 결코 빛이 될 수 없네.”
“정녕 불가능하단 말입니까?”
장홍은 눈은 무척이나 필사적이었다. 빛으로 향하는 길이 점점 막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절망이 점점 커지고 있을 때, 무영대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림자이면서도 빛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긴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각오가 되어 있나?”
쉽지 않은 길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각오는 애초에 되어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 방법은 말이야…….”
장홍은 몸을 더욱더 가까이 내밀었다. 그의 귓가에 대고 무영대주가 아주 커다란 비밀을 말해주기라도 하는 듯 나직이 속삭였다.
“무영대주가 되는 거라네.”
장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영대주가요? 제가 될 수 있는 겁니까?”
“자넨 방금 그 자격을 손에 넣었네. 그러니 무영대주가 되기 위해 도전할 수 있지.”
“자격이요?”
언제 자신이 그런 걸 얻었단 말인가? 장홍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래, 자네는 명령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지? 그건 심층 의식에 걸린 금제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일세. 그만큼 강한 정신력을 가졌다는 뜻도 되고, 더 이상 꼭두각 시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되지.”
그렇다면 그동안 자신은 그저 명령에 반응해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일 뿐이었다는 뜻일까?
“명령을 거부할 수 있게 된 자만이 무영대를 이끌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지. 그리고 방금 자네는 그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여줬고.”
“무영대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을 죽이기라도 해야 합니까? 그래야 능력을 인정받아 무영대주가 될 수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그래도 이쪽은 명색이 정도 아닌가. 우리가 비록 더러운 일을 처리해 주고 있다지만 그렇게 막나가서는 안 되지.”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막나가는 짓을 서슴없이 해치워 온 것은 다름 아닌 무영대주 본인이었다.
“그럼……?”
“연수를 받으면 된다네. 쉽지?”
“연수요?”
어떤 의미에선 맥이 빠질 정도였다.
“대체 어디서 무슨 연수를 받아야 하는 겁니까?”
너무 쉬워서 오히려 불안했다. 뭔가가 분명히 더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처럼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바다 건너에 부상국이라는 곳이 있지. 자기네들끼리는 ‘일본’이라고 부른다던가? 여러 장군들이 땅을 갈라 먹고 맨날 싸우는 땅이 있다네. 수백 년간 계속된 전 쟁 덕분에 ‘인자술’이라는 첩보술이 아주 발달한 곳이라네. 연수 장소는 거기라네.”
바다를 건너가서, 연수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십년.”
“시, 십 년이오?!”
강산이 한 번 바뀔 동안의 일이었다. 강산이 바뀌는데 사람의 마음은 안 바뀔까? 장홍은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자네 하기에 따라 더 짧아질 수도 있지. 잘 생각해 보게.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네의 마음이 변치 않을 자신이 있는가? 설혹 자네 마음이 변치 않는다 해도 상 대는 과연 그때까지 기다려 줄까? 마음이 변치 않은 채? 사람의 마음은 약해. 언제 변해도 이상하지 않지. 그래도 할 텐가? 그 유리처럼 약하디약한 인간의 마음을 믿고서? 이것은 도박이라네. 하지만 그것이 끝나면.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무영대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넨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야. 그림자를 이끄는 빛이 되는 거지. 어떻게 할 텐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빛의 세계에 설 수만 있다면,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결정됐군.”
싱글벙글 웃으며 무영대주가 결론을 내렸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왜 절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거죠?”
그러자 무영대주가 말했다.
“나도 은퇴란 걸 하고 싶거든.”
***
“어느 늙은이 은퇴나 도와주려고 가정을 버렸다는 건가요?”
“아니, 그 늙은이가 꿍꿍이가 있었던 거고, 선량한 젊은이가 어쩌다 보니 피해를 보게 된 거였소. 난 정말 억울하다니까.”
하지만 십 년은 걸리지 않았다.
장홍은 그 기간을 반의반으로 단축했다. 그리고 다시 무림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시련을 통과하고 무영대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안 돌아왔죠?”
“갑자기 무서워졌소.”
“무서워졌다고요?”
“그렇소. 당신이 나를 잊었을까 봐 무서워졌소. 그리고 그걸 확인하는 것도 무서웠소. 내가 아는 당신이 아닐까 봐 두려웠던 거요.”
“그날 이후 난 변했어요. 그러니 당신이 알고 있던 난 아니겠죠. 그래서 내가 싫어졌나요?”
“아니오, 절대 그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돌아오지 않은 거잖아요? 모르는 여자랑 바람이나 피면서!”
“바, 바람이라니. 당치도 않소! 난 결백하오.”
장홍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글쎄요, 과연 어떨지? 당신은 그냥 단순한 겁쟁이였을 뿐이에요. 이번에도 그저 도망치기만 했을 뿐이잖아요.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칠 년 사 개월 만에 만났 는데! 내가 그렇게 하찮은 여자인가요?”
“당신은 절대 하찮지 않소!”
장홍이 소리쳤다.
“그럼 증명해 봐요!”
옥유경도 소리쳤다.
“어, 어떻게 증명하란 말이오?”
“흥, 역시 못하겠죠? 당신의 마음은 겨우 그 정도에 불과했단 말이군…….”
와락!
장홍이 갑작스럽게 옥유경을 껴안았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옥유경은 깜짝 놀랐다.
“자, 잠깐! 이러면……..
찰칵!
그 순간 혈린갑이 작동했다.
혈린갑(血鱗鉀.
‘혈옥가’의 가보 중 하나로, 그녀가 혼인할 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어지간한 도검창은 다 막아주고, 적이 손을 대면 바늘이 튀어나와 적을 찌른다. 살상력은 없지 만 무턱대고 만지게 되면 몸이 상하고, 그러다 보면 빈틈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장홍도 그걸 알고 있었다. 혼인 예물을 그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혈린갑 을 입고 있다는 걸 알면서 왜…… 왜 그랬죠? 빨리 놓아요.”
옥유경의 목소리가 세차게 떨렸다. 검을 제대로 잡고 있기도 불편해 보였다.
장홍은 고통스러웠다. 타인을 거부하는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거부하는 그녀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몸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장홍은 그녀를 놓지 않았다. 옥유경이 그의 가슴을 양손으로 두드리며 빨리 놓으라고 외쳤다.
“놓지 않겠소.”
“뭐라고요?”
“놓지 않겠다고 했소. 더 이상 놓지 않을 거요.”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유를 묻고 있었다.
“더 이상 당신을 잃을 수 없기 때문이오. 지금 놓치면 영원히 멀어질 것 같아서 두렵소.”
그녀를 만나기도 두려웠지만, 그녀가 없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나락에 빠질 만큼 더욱 두려웠다. 그 공포에 비하면 이런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랑하오.”
그의 가슴을 때리던 옥유경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석류하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혈나찰이라고 불리던 여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바보!”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어깨에 묻었다.
***
비류연은 두 명을 데리고 다시 일행에 합류했다. 원래는 모용휘 하나만 데려올 예정이었으나 덤이 하나 붙고 말았다. 예기치 못한 그 덤의 이름은 공손절휘라 했 다. 그는 비류연이 모용휘와 이야기를 끝내고 움직이려고 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왔다. 숨죽이고 있다가 튀어나온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흠어흠, 굳이 가고 싶지는 않지만, 도움을 청한다면 돕는 게 협의를 지향하는 무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지요.”
“필요없는데?”
비류연이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잘 생각해 보시오. 분명 도움이…….”
“필요없어.”
“아니, 분명 지금 오판하는 거요. 여기 있는 모용휘보다 더 활약할 자신이 있소.”
“그럴 리가.”
비류연의 대답은 냉담하기만 했다.
“저 모용휘가 가니 나도 꼭 따라가야겠소. 말려도 꼭 따라갈 거요. 그 왜,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나도 끼워주시오. 아니, 끼워주세요.” 마지막이 상당히 비굴했다. 그제야 비류연이 말했다.
“싫어.”
비류연의 인정사정없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공손절휘는 두 사람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따라오지 마, 라는 말에도 꿋꿋이 뒤를 따라와 끝내 일행에 합류했다. 찰거머리처럼 모용휘의 옆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기가 귀찮아진 비류연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죽든 말든 난 신경 안 쓴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기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공손절휘의 하찮은 합류는 잠시 후 벌어진 일대 사건에 의해 금방 묻혀 버렸다.
장홍이 칠번대 대장 옥유경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설마 칠번대 대장을 직접 데리고 올 줄은 몰랐던 사람들은 그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몇몇은 자동적으로 임전 태세에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은 마천각과 전쟁 중인 처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가로막을 가장 큰 적은 마천십삼대의 열두 대장 들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바짝 긴장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비류연이 앞으로 나섰다.
“장 아저씨, 어찌 된 거야? 몸이 엉망이네?”
피에 물든 상의를 벗고 상처를 대충 수습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장홍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움직임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웠고 안색도 창백했다. 혈 린갑에 당한 상처를 응급처치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했던 것이다. 걸을 때마다 그의 몸은 붕대 밑의 상처 때문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아니, 그게 좀… 사소한 오해가 있어서…….”
사소한 오해치고는 상처가 가볍지 않았다. 옥유경은 괜히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찔리는 게 있는 탓이다.
“저분은?”
비류연이 옥유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우릴 도와주기로 했네.”
“마천십삼대의 대장 중 한 사람이 우릴 도와준다고?”
비류연이 믿겨지지 않는 듯했다. 지금 그들은 마천십삼대 대장들을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대장들 역시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게 분명했다.
“정말 도와줄 생각 있어요?”
비류연이 옥유경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마천각 사람이 정말로 납치를 했다니, 난 믿을 수 없다. 그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그게 진짜라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지. 특히 여
성을 납치하는 일은 절대로 용서가 되지 않는다. 용서할 수 없다. 그 일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그대들을 잠시 도와주는 것뿐이다. 만일 그대들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때는 그대들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
옥유경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흐음,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구요? 혹시 여기 장 형 때문이라던가…….”
“관계없다.”
칼로 자르듯 단호한 대답이다.
“칼로 물 좀 베다 온 모양이군. 좀 적당히 할 것이지.”
비류연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 그걸 어떻게…….”
화들짝 놀란 장홍이 반문했다.
“그걸 꼭 들어야 아나?”
속으로 ‘딱 걸렸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그걸 내색하지 않은 채 비류연이 말했다. 심증이 확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부부 싸움도 좋지만 적당히 해, 적당히.”
“적당히 할 걸세, 앞으로는.”
장홍이 과거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이름도 아마 가짜이리라. 분명 과거 역시 범상치는 않을 것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잠재해 있는지는 본인밖에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 비류연은 남의 과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나예린의 행방뿐이었다. “필요한 정보는?”
“모아왔네. 하지만 쉽지는 않겠어. 아무래도 네 개의 섬을 하나씩 뒤져 봐야 할 것 같거든.”
“왜?”
“여기 실려온 관은 각 섬에 하나씩 흩어졌다는군.”
어느 쪽에 진짜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차례대로 뚜껑을 열고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번거로운 절차도 절차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으리라. 이미 비상종이 이리도 요란히 울린 뒤에 침입자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얼빠진 대장은 단 하나도 없을 터였기 때문이다.
“저희들 모두 따라나설까요?”
남궁상을 대신해 주작단 단장 직을 임시로 맡고 있는 현운이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아니, 구출대는 소수 정예로 구성할 것이다. 모두 나를 따를 필요는 없다. 너희들 말고 필요한 사람을 두어 명씩 붙여서 구성할 생각이다. 점찍어둔 사람도 이미 다 모았고, 의외의 덤들이 딸려오긴 했지만. 하지만 너희들에게는 너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궁상과 령이는 지금 쓸 수 없는 상태이니 대신 너희들이 한 가 지 일을 해줘야겠다. 이건 임무다.”
“어떤 임무입니까?”
비류연이 목소리를 낮춘 채 대답했다.
“두 가지 임무를 주겠다. 우선 첫째는 사대섬을 제외한 다른 마천십삼대의 시선을 묶어놓을 것. 사대섬에 들어갔다가 뒤에서 공격당하면 골치 아프니까.”
“이쪽에서 소란을 일으키라는 거군요.”
“그래. 너희들 쪽으로 이목을 집중시켜 사대섬에까지 신경을 못 쓰도록 만들어놔라. 단, 정면으로 부딪칠 필요는 없다.”
“이럴 때 염도 노사님이랑 빙검 노사님이 계시면 좋을 텐데…….’
지금 그들은 아직 강호란도에 남아 있었다. 너무 급하게 출발하느라 함께 오지 못했던 것이다.
“일단 중양표국을 통해 기별을 넣어놓긴 했다. 하지만 올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아. 배도 문제고.”
“…….”
약간 자신이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충분히 가르쳤다. 너희들은 충분히 강해졌어. 여러 번의 지옥을 넘어왔으니까. 그러니 자신을 가져. 여기 마천각의 애송이들 중에 너희들을 이길 수 있을 만한 놈들은 없어. 알겠지?”
“예, 대사형! 알겠습니다. 지옥의 특훈에서도 살아남은 저희들인데요,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좋아. 그럼 두 번째 임무다.”
첫 번째가 그 정도인데 두 번째는 어떨까? 주작단은 신경을 바짝 세웠다.
“만일 쓸모없어진다면 그보다 더한 다행이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미리 대비해 두는 거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다. 알겠느냐?”
비류연의 한 자 한 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현운은 경악했다.
“그런 준비까지 필요한 겁니까?”
그렇다는 것은 최악의 최악을 상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사태는 여기서 더 심각해질 모양이었다.
“그래, 꼭 필요해. 절대 착오가 있어서는 안 돼. 그랬다가는 우리 모두 죽을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