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5권 20화 – 서해도를 치다

비뢰도 25권 20화 – 서해도를 치다

서해도를 치다

-작전 개시

“네 곳을 동시에 친다!”

비류연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씩 하나씩 섬을 공략해 나가면 힘을 집중할 수는 있지만 너무 느렸다. 그러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 었다. 여전히 그들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다방면 동시 공격이었다.

모용휘와 공손절휘가 동해도, 장홍과 옥유경이 북해도, 유유검 현운과 남궁산산이 남해도, 그리고 비류연은 효룡과 함께 한 조를 이루어 서해도로 향했다.

서해도로 간 비류연과 효룡 쪽은 처음부터 일의 진행이 편하지 않았다.

챠캉!

“멈춰라! 여기서부터는 서해왕님의 영역, 우리 제십번대 철신대(鐵身隊)’의 구역이다.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다!”

독특하게 생긴 은색 갑옷을 걸친 두 명의 거한이 자신들의 몸보다 훨씬 큰 도끼창을 교차하며 비류연과 효룡의 발길을 막았다.

지금 비류연과 효룡이 서 있는 곳은 서해도로 들어가는 입구로, 이 두 명의 거한은 서해도로 통하는 다리를 지키는 자들이었다. 효룡이 급히 전음을 보냈다. “류연, 저들 둘 모두 서열 오위 안에 드는 수뇌부야. 평소라면 다리나 지키고 있을 사람들이 아닌데…… 왜 여기에?”

비류연 역시 전음으로 대꾸했다.

“뭔가 벌써 조치가 취해졌다는 거겠지.”

평소라면 내려져 있었을 도개교도 지금은 전투 태세에 들어간 성처럼 올라가 있었다. 다리는 양쪽으로 하나씩 올리는 형식이었다.

“칫, 이놈들을 쓰러뜨려도 한쪽밖에 못 내린다는 거군.”

이놈들을 쓸어버려 봤자 반쪽짜리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다리를 내리는 도르래 장치는 저쪽 섬쪽 성벽 뒤에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일단 대화를 해야지.”

일단 쓰러뜨려 놓고 보려고 했는데, 잠시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먼저 효룡이 앞으로 나섰다. 비류연에게 맡겼다가는 무슨 험한 말이 나올지 몰라 미리 자신이 앞장선 것이다.

“물어볼 게 있소. 좀 전에 이 다리로 관 하나가 지나간 일이 있지 않소?”

“관?”

“그렇소. 나무로 만들어진 목관이오.”

잠시 상의하던 두 사람이 대답했다.

“있다.”

‘역시!’

비류연과 효룡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비류연이 말했다.

“우리는 그 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 안만 확인하면 얌전히 돌아가겠다.”

효룡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 다리를 내려주시오. 그러면 당신들도 다치지 않고 끝날 거요.”

그러자 폭소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우리들을 다치게 한다고? 누가? 너희들이? 그런 빈약한 몸으로? 강철의 근육을 가진 우리 철갑사패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있을 것 같아? 바보 아냐? 어림도 없는 소리! 푸하하하하하하! 아이고, 배꼽이야!”

자신의 강함에 매우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바보군.”

비류연이 짧게 평했다.

“분명 뇌가 근육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분명해.”

여기서 말씨름이나 하고 있을 여가는 없었다. 비류연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럴지도.”

효룡도 동의했다.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삽질을 지켜본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이 애잔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바보는 많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도 이렇

게 덩치 큰 바보들이 두 마리나 있지 않은가.

“그럼 어떻게 하면 지나갈 수 있지?”

“여기서부터는 힘이 정의다. 스스로의 힘을 증명한 자만이 이 다리를 지나갈 수 있다.”

“힘이 정의라.. 간단해서 좋군. 그럼 어떻게 하면 되지?”

“간단하다. 우리들을 쓰러뜨리면 된다.”

나름대로 거칠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 대장도 너희들만큼 바보냐?”

비류연이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북북 긁으며 말했다.

“뭐라고!!!”

“진짜 그 말대로 간단해서 하는 말이다. 바보병은 역시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는 불치의 병이라는 게 사실인 모양이군. 그렇게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지. 그 러면 혹시 바보병이 나을지도 모르니까.”

비류연이 질렸다는 투로 한마디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턱 하고 효룡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다음, 남은 한 손을 쭉 펴며 손가락 끝으로 두 거한을 찌를 듯 가리키며 외쳤다.

“자, 효룡, 해치워!”

“뭐, 뭐? 내, 내가 하는 거야?”

당황한 효룡이 외쳤다.

“그럼, 자네가 해야지 누가 해? 난 싫어. 바보가 옮는다고.”

비류연이 몸서리를 쳤다.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뚱한 표정으로 효룡이 툴툴거렸다.

“난 옮아도 되고?”

“엉.”

참으로 덧없는 우정이었다.

“자, 가라! 효룡! 바보 거한 두 명을 무찌르는 거다! 바보의 무한 증식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거다!”

비류연이 뒤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했다. 효룡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선뜻 움직이지도 못했다.

“뭐 해? 효룡, 가라! 무찔러!”

자기는 편한 곳에 서 있고 효룡 자신 혼자 ‘궂은 일’을 담당하라니, 저 열불받는 뻔뻔함. 확실히 비류연 본인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이렇게 성격 나쁜 인간이 세상 에 하나 이상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말세인 것이다. 한두 달 안 본 걸로 인간이 변할 리 없는 것을……. 인간은 그렇게 편리한 물건이 아닌 모양이다.

“싫어!”

효룡이 삐친 채 말했다.

“난 하나만 맡을 거야. 그러니 류연 자네도 하나 맡아. 그래야 공평하지.”

“이런이런. 친구,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라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공평을 찾다니, 자네가 그런 순진파일 줄은 몰랐군.”

“시끄러, 남이사! 말해두지만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류연 자네야.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고.”

“진리란 때때로 잔인한 법이지.”

비류연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함부로 세상의 진리를 왜곡하지 마!”

그러나 비류연은 하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차이가 변화를 만드는 법이야. 모든 게 공평하다는 건 공평함이란 것 자체가 없다는 거잖아? 그건 공평함이란 걸 알기 위해서는 불공평함이 뭔지 알아야 하는 법 이지. 쾌변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변비의 고통을 알아야 하는 거랑 같은 거야.”

“그런 지저분한 비유 쓰지 말라고. 냄새나는 쾌변, 아니, 궤변이 되었잖아. 난 그런 차이 필요없어. 난 공평한 게 좋아. 그러니 하나씩 나눠 가져.”

“칫, 안 넘어오는군. 좀 쉬려 했더니. 좋아, 하나씩 처리하자고. 사이좋게. 불만없지?”

“누가 먼저 쓰러뜨리나 내기할까?”

효룡이 호기롭게 외쳤다. 둘 다 처리하려다가 하나만 처리하게 되니 왠지 땡잡은 기분이었다.

“좋아, 나중에 쓰러뜨리는 사람이 밥 사는 거다.”

“좋지[好]!”

그리고 그 둘은 나란히 사이좋게 거한들을 향해 걸어갔다.

한편 자신들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한 두 사람의 작태에 거한 둘은 화가 날 대로 나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이들을 짓뭉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드디어 싸움은 시작됐고, 두 거한은 그동안 무시당했던 울분을 한꺼번에 격발시켰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죽어라아아아아아아아아!”

무시무시한 대검과 도끼가 하늘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떨어졌다.

쿵!

삼 장 정도의 지면이 갈라질 정도의 강격(强擊).

굉음과 함께 뭉게먼지가 피어올랐다.

철갑사패(鐵甲四覇)!

서해왕이 거느린 제십번대 철신대에서도 최고 최강을 자랑하는 네 명의 강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열 일위 서해왕을 제외한 서열 이위부터 오위까지를 메우고 있 는 자들이 바로 이들이기도 했다. 십번대의 주력이자 핵심인 이들은 제십번대 대장 서해왕의 충실한 부하들이자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은 힘을 맹종하는 자들. 때문에 이들은 기교와 기술을 비웃고, 강권, 강격을 숭상했다.

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일격필살(一撃必殺)!

두 번째 공격은 없다는 마음으로 내려치는 전심일체의 공격, 막아서는 방어까지도 함께 깨부수는 무시무시한 일격이야말로 이들이 추구하는 일격필살의 강격(强 擊)이었다.

확실히 끝없는 반복 훈련을 통해 얻어진 일격필살의 공격은 강력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격을 생각해 두지 않는다. 즉, 연결기가 미비하다.

첫 일격이 실패했을 때, 그다음 공격으로 어떻게 몸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고, 발과 손이 꼬이지 않은 채 가장 짧은 순간 넘어갈 수 있느냐가 무공에서는 매우 중 요한 요소였다. 일격필살을 추구하는 자는 그 부분을 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의 위력과 속도를 배가시키기 위해서 이격을 포기한다. 즉, 어느 정도까지만 움 직이고 멈춘다, 라는 과정이 없다. 멈추지 않고 끝까지 내려친다. 이격을 위한 멈춤조차 이들은 망설임이라고 보는 것이다. 움직임에 망설임과 주저가 끼어 있으면 온 힘을 실을 수 없다. 그런 만큼 그 일격은 본인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다. 제어를 위한 여력까지 모두 일격에 쏟아 붓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격필살이란 모 아니면 도.

성공한다면 단 일격에 상황을 정리할 수 있지만, 만일 실패하면,

그들의 균형은 완전히 붕괴되고 단순한 허점덩어리로 변한다.

콰쾅!

바위도 단숨에 쪼갤 정도의 거력이 담긴 강맹한 일격이 대지를 향해 떨어졌다.

고막을 얼얼하게 울리는 파괴음과 함께 토사가 튀어 올랐다. 그러나 비류연과 효룡은 그들의 일격을 정면으로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 일격필살에 목숨을 거는 이 의 첫 일격을 그대로 받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바람을 찢는 듯한 무시무시한 파공성으로 볼 때 속도도 대단했다. 다만 문제는 비류연과 효룡의 눈에는 그 속도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는 데 있었다. 세상일이란 게 모든 게 상대적인 것이다. 특히 무공만큼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도 드물었다.

‘얼마나 강해야 합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한 유명한 고수는 이렇게 답했다 하지 않는가.

딱 ‘적보다만 더’라고.

비류연과 효룡은 그들의 공격을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피해 버렸다. 물론 일격필살인만큼 피하는 것 역시 쉽지는 않다. 그들은 자신의 일격을 살리기 위해 엄청 난 속도로 돌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류연과 효룡에게는 그들의 속도가 굼벵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특히 이미 수많은 수라장을 거쳐 온 효룡의 실력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굉장히 높아져 있었다. 아무리 ‘철갑사패’라 치켜세운다 해도 어차피 효룡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두 거한의 무기가 땅에 박혔다. 땅이 갈라지면 뭐 하나, 구부러진 허리와 땅에 박힌 무기로 제대로 된 방어 초식을 전개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들에겐 공 격이 곧 방어. 방어를 위한 방어 초식 따윈 없었다.

씨이이이익!

비류연이 웃었다.

씨이이이익!

효룡도 마주 보고 웃었다.

순간적이지만 불길함을 느낌 두 거한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정면으로 막아내지 않고 피해내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불길한 미소를 입가에 매 달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두 거한이 외쳤다.

“비겁하아아아아아아안!”

그러자 비류연이 툭 내뱉었다.

“역시 바보였네.” “그러게.”

효룡이 대꾸했다. 이미 그의 손에는 허점투성이를 완전히 두들기기 위한 쌍검이 뽑혀져 있었다.

번쩍!

효룡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번뜩였다.

“받아라!”

오의(奧義)

쌍검혈(血蘭)

쌍검이 빛의 연무를 추기 시작한다.

파바바바바바바바밧!

두 자루의 쌍검이 눈부신 검기를 발하며 화려한 기술과 함께 대검을 든 거한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화려함과 정묘한 기술이 겸비된 미려 한 검초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두 거한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는 정도뿐이었다.

승부는 쌍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이미 갈려 있었다.

찌리릿!

번쩍이는 비류연의 눈은 조금 나른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수상한 빛이 일렁거렸다.

비류연은 기왕 줄 바에는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주는 성격이었다. 그게 더 좋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게 더 잔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힘이 그렇게 좋다면 힘으로 상대해 주지.’

그의 취미 중 하나는 남의 장기로 남을 깨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사람은 다시 재기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적이 재기하든 말든 비류연으로 서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자신의 적을 철저하게 부숴놓는 것, 그리하여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노 력, 우정, 승리를 통해 적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에는 이, 힘에는 힘.

“냠냠쩝쩝! 먹어라!”

특이한 외침과 함께 비류연의 양주먹이 백 개의 유성처럼 뻗어나갔다.

삼복구타권법(三伏毆打拳法)

오의(義)

중복(中伏)

아구창창(狗昌昌) 주구장창

뚜쉬뚜쉬! 뻑뻑! 투박투박! 푹푹! 푹버벅! 퓨욱빼벅!

뻐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벅!

늘어나는 배고픈 개를 두루두루 잡아 오래도록 팬다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초식이 불을 뿜었다.

두 거한은 문자 그대로 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그대로 실신하고 말았다. 걸치고 있던 철갑도 여기저기가 고철처럼 우그러져 있었다. 비류연에게 얻어맞고 효룡에게 베인 탓이다.

“검등으로 쳤다.”

쌍검을 갈무리하며 기절한 상대를 향해 효룡이 말했다. 그러자 비류연이 한마디 찌르고 들어갔다.

“룡룡, 자네 쌍검은 둘 다 양날검이잖아? 검등으로 치면 그냥 죽어.”

“아, 그렇네! 깜빡했어. 버릇이라 그만.

그 버릇이란 것은 쌍검이 아닌 쌍도를 쓰던 때의 버릇이었다. 보통 때는 도가 아니라 검을 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실전에 들어가면 종종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는 효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비록 쌍검을 쥐고 있다곤 하지만 펼치고 있는 무공은 어디까지나 ‘도법’이었다.

“바보병이 옮았군. 룡룡, 이 불쌍한 친구.”

비류연이 눈가를 훔치며 흐느꼈다.

“안 옮았어! 난 깨끗해!”

흘끔 보아하니 그의 쌍검이 흩뿌린 검기에 당한 거한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힘을 좀 뺀 탓도 있고, 걸치고 있는 갑옷이 정도 이상으로 강한 탓 에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효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봐, 죽지 않았잖아. 그러니 됐어, 된 거라고. 됐다고 해줘.”

“뭐, 그럼 된 건가?”

너무나 쉽게 수긍해 버리는 비류연이었다.

목숨을 취하지 않고 제압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둘의 실력이 월등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거참, 튼튼한 놈들이네.”

“동감이야.”

하지만 덕분에 한시름 놓은 효룡이었다.

“자, 그럼 다리를 내려볼까?”

“그러지.”

힘을 숭상하는 만큼 서해도의 인간들은 상당히 단순했다. 이긴 놈이 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머지 반쪽의 다리도 순순히 내려졌다.

양편으로 올려져 있던 다리가 하나로 연결되자, 비류연과 효룡은 서둘러 다리 위를 달려갔다. 곧 서해도로 통하는 송문이 보였다. 이 섬 주위도 높다란 대나무 철 책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정문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굳게 닫힌 철문 앞에 좀 전에 본 것과 비슷하지만 좀 더 화려한 철갑을 걸친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서 있었다. 좀 전의 두 명보다는 좀 더 날렵해 보이는 자들이었다.

“멈춰라!”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멈춰 섰다. 참으로 말이 짧은 놈들이었다.

“누구냐?”

비류연이 물었다.

“서열 사위와 오위를 쓰러뜨렸다고 우쭐대지 마라. 서열 이위와 서열 삼위인 우리들을 이기지 못하면 문은 열어줄 수 없다.”

“그만두지? 그러다 다칠 텐데?”

“그건 우리가 할 소리지 너희가 할 소리가 아니다. 무서우면 그대로 돌아가라.”

“그럴 순 없지. 저 안에 꼭 볼일이 있거든. 나야말로 좀 언짢긴 하지만, 이대로 얌전히 문을 열어주면 다 없었던 일로 해줄 수 있어. 난 너그러우니까.”

효룡은 조용히 혼잣말처럼 ‘거짓말’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십번대의 규율대로 ‘힘’으로 정하도록 하지.”

“규율까지 힘에 의존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원래 규율이란 것을 정하는 이유는 제멋대로 넘치는 힘을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기 십번대의 규율은 마치 불난 곳에 기름을 끼얹은 듯한 그런 규율이었 다. 힘을 제어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부추기고 있었다.

“힘이야말로 정의, 십번대에겐 강한 자의 말이 곧 법이다. 너희도 이곳을 통과하려면 스스로의 힘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걸 그렇게 단순화시키다 보면 언제가 된통 당하게 되어 있어. 세상이란 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

“우린 입만 산 놈은 좋아하지 않는다. 약한 개가 자주 짖는다고 하지 않는가.”

방금 말은 비류연을 멍멍이 취급한 것이었다.

“오우, 이거 기분이 좀 상쾌해지는걸.”

비류연의 입가에 상큼한 미소가 맺혔다.

“무식하지만 간단해서 좋군. 멍멍이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도 같고. 이럴 때 몽둥이 찜질이 약이지. 얘들아, 약 먹을 시간이다!” 장난치는 멍멍이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듯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외쳤다.

“잠깐, 류연! 약물 과다복용은 죽음의 지름길이라고.”

비류연의 이상을 눈치 챈 효룡이 은근히 손 조절하라고 암시를 주었다.

“딱 좋네. 괜찮아, 괜찮아. 건강한 폭력이 건강한 정신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있잖아?”

“아니, 그런 말 없거든. 폭력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야!”

“폐허 속에서 새로운 새싹이 자라는 법이지.”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철갑사패가 좋아하는 말이 일격필살이라면, 지금 비류연이 좋아하는 말은 속전속결이었다.

겉으로는 있는 여유 없는 여유 다 부리고 있지만 속은 엉망이었다. 단시간에 회복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효룡에게 다 맡길까도 생각했었는데 그것 도 여의치 않았다.

‘쩨쩨한 녀석.’

최소한의 힘으로 승리를 거머쥘 필요가 있었다. 너무 잦은 충돌은 그의 힘을 깎아먹을 뿐이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내공을 쓰지 않는 부분의 능력을 좀 더 개방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바로 감각이었다.

비류연은 오감을 활짝 연 채 철갑일호와 철갑이호의 움직임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철갑이호의 신경은 온통 효룡을 향해 쏠려 있었다. 효룡이 저런 근육멍청 이한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자기 몫으로 배정된 철갑일호만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좀 전에 고철로 만들어놓은 철갑삼, 사호와 이 녀석 둘의 행동으로 미 루어볼 때, 대충 부대와 대장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을 알 만했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을 쓰러뜨리고 가도 대화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도대체가 ‘대화’가 뭔지 모르는 족속임이 분명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근육과 병장기로 하는 대화가 고작이었다.

‘골치 아프군.’

어쨌든 대화란 걸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에 맞는 대화 방식을 고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경우, 올바르고 합당한 소통 방식은 바로 ‘폭력’이었다.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또한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에 맞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비류연은 언제든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화를 잘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ᅳ첫 번째,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비류연은 철갑일호의 공격을 귀기울여 들었다. 공격이 궤도가 눈에 잡히는 듯 보였다.

ᅳ두 번째,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대화한다.

비류연은 냉철한 이성을 발휘하여 침착하게 대응하며, 어떤 공격이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일지 판단했다. 역시 이번에는 첫수는 회피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쾅!

철갑일호의 거도가 땅을 내리찍었다. 그러나 대화라는 것은 상대와 공명하는 것이다. 비류연은 상대의 움직임에 몸을 맞춰 공격을 완벽하게 피해냈다.

이성적으로 적의 허점을 간판하고, 반격 초식을 정한다. 그러나 역시 서열 이위답게 일격필살의 절초가 실패했는데도 다음 공격으로의 전환이 빨랐다. 하지만 이 건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이격으로의 전환이 빠르다는 것은 일격에 전심이 실리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ᅳ세 번째, 말에 진심을 담아야 한다.

이 부분도 비류연은 자신있었다. 이번 대화에서 쓰는 말은 바로 주먹이었다. 철갑일호는 일도에 진심을 담는 데 실패한 듯했지만, 비류연은 그러지 않을 자신이 있 었다.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주겠다는 진심이 듬뿍 담긴 주먹을 안겨주었다.

정확히 빈틈을 찔러서.

“비겁하아아아아아아아안!”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왠지 기시감이 좔좔 흐르는 비명을 지르며 두 남자가 도끼에 찍힌 거목처럼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효룡도 거의 동시에 철갑이호를 쓰 러뜨린 모양이었다.

“…이놈들, 정말 단순하군.”

대화를 마친 후 질렸다는 투로 비류연이 한마디 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유익한 대화는 아니었다.

“우아함이 부족했어.”

그러나 그걸 설명한다고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하는 걸 뻔히 보고도 다시 일격필살 전법이라니. 이놈들은 학습 능력도 없나?”

쓰러진 두 거한을 보며 효룡이 질렸다는 듯 한마디 했다.

“뭐, 원래 일격필살이라는 게 그렇지. 오직 그것만 연마한 사람들은 다른 초식을 쉽게 쓸 수 없어. 그들의 사고방식과 수백 개의 근육 모두가 필살의 강격을 휘두르 기 위해 존재하니까.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의식을 했다 해도 아마 몸이 못 따라주었을 거야. 일격필살의 폐해 같은 거지.”

“그럼 이들이 그동안 해온 그 기나긴 수행들은 뭐지? 오직 일격에 목숨을 걸었던 이들의 수행의 나날들은?”

약간 감상적인 마음이 된 효룡은 친구에게 한마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삽질이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확답.

“자넨 정말 잔인한 친구야, 류연.”

“정직하다고 해줘, 룡룡.”

그동안 쌓아온 고련의 세월을 단 한마디로 뭉개 버리는 잔인한 처사도 서슴없이 해치워 버리는 비류연이었다.

“자, 이제 대빵을 만나러 가볼까.”

그들의 지나간 세월이 어떻게 평가되든 말든, 지금은 나예린의 행방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쏠리지 않는 비류연이었다.

그리고, 그 단서 중 하나를 잡고 있는 이가 이 성문 너머에 있었다. 망설일 이유 따윈 전혀 없었다. 힘을 숭상하는 만큼, 또 단순무식한 만큼 한 번 내뱉은 말은 잘 지켰다. 철갑사패의 나머지 둘을 쓰러뜨리자 성문은 저절로 열렸다.

‘열려라, 참깨!’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꽤 정직한 사람들이군.”

“단순한 거겠지.”

비류연과 효룡은 열려진 성문을 통과해 서해도의 심처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