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자 대 미남자
-미의 호적수, 미의 대전
“여기가 확실히 동해도 맞겠죠?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있다는?”
공손절휘가 심통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 것 같네.”
모용휘가 조용히 대답했다.
연비에게 구혼한 것 때문에 공손절휘는 동해왕이 무척 싫었다. 그 뺀질거리는 면상을 보면 주먹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그래서 동해도 쪽을 지원했다. 그러 자 비류연이 모용휘에게 동해도로 같이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나 혼자서도 충분하오.”
공손절휘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모용휘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모용휘랑 함께하기 싫었다.
짝!
비류연이 거침없이 공손절휘의 뺨을 때렸다. 그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웃기지 마, 이 애송아! 넌 아직 멀었어. 그 자존심만 더럽게 센 형편없는 실력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죽기 싫으면 얌전히 모용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 아, 그리고 존대말 써라. 다 니놈 선배들이니까.”
“이, 이, 이이이이이!”
뺨을 맞는 굴욕과 그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비류연의 말에 발끈한 공손절휘가 비류연에게 달려들려 했다. 이때만 해도 그는 아직 이 비류연이란 인간이 얼마 나 무서운 인간인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그러나 용감하다 해서 꼭 결과가 좋으란 법은 없다. 왜냐하면 무지는 뼈아픈 결과 를 가져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워워, 젊은 친구가 겁이 없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공손절휘를 모용휘와 주작단원들이 뜯어말렸다.
“그만둬. 그러다 죽는 수가 있어.”
“아직 젊은데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지.”
“지금 바빠서 봐줄 때 얌전히 있어. 그러다가 떡이 되도록 얻어맞는 수가 있으니까.”
다들 그의 양팔과 양다리를 하나씩 제압하니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천 근 바위가 짓누르는 듯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자 공손절휘는 또다시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놀랐다.
이 사람들,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이들의 손발을 단 하나도 뿌리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저 친구, 과연 괜찮을까요? 아직 어린데.”
실력이 영 못 미더우니 빼는 게 어떠냐고 노골적으로 묻는 이까지 나오자 공손세가의 후계자로서 그가 가진 자존심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비류연이란 인간의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래도 제법 번듯하잖아. 저 정도면 여자들한테 먹힐 것 같지 않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자, 잠깐! 지금 그 말은 실력이 아니라 얼굴로 뽑았다는 거냐?”
“엉, 당연하지. 뭐, 휘 녀석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그럭저럭이니까.”
그럭저럭은 또 뭐란 말인가, 그럭저럭은.
“내가 누군 줄 알고, 난 공손…….”
짝짝짝짝!
순간 공손절휘의 뺨이 좌로 두 번, 우로 두 번 돌아갔다. 뺨에 불이라도 난 듯 화끈했다. 번개 같은 속도로 따귀를 네 번이나 맞은 것이다.
화를 낼 새도 없이 비류연의 손이 공손절휘의 입을 틀어막았다. 언제 움직였는지 공손절휘에겐 보이지도 않았다.
“닥쳐, 애송아. 난 지금 급하니까 널 교육시켜 줄 시간이 없어. 그러니 잘 들어. 네 실력엔 기대하지 않고 있어. 그러니까 그 얼굴을 잘 이용해서 여자들이라도 꼬셔
봐. 듣자 하니 그곳엔 여자들이 잔뜩 있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명심해. 여기선 네 뒷배경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오직 실력뿐이야, 얼굴이든 검이든. 아직도 가 문의 이름에 매달려 응석 부릴 거면 당장 꺼져. 필요없으니까. 지금 필요한 건 뒷배경이 아니거든.”
순간 공손절휘는 황금색 살기가 자신의 온몸에 꿰뚫는 듯한 충격을 받고 몸을 휘청거렸다. 비류연에게 맞았던 뺨과 잡혔던 턱과 입 주위가 얼얼했다. 몇몇 주작단 원들이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나마 얻어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속닥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공손절휘는 분했지만 반항할 수가 없었다. 좀 전에 자신의 전신을 꿰뚫은 살기에 대항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인간한테 공손세가라는 가 문과 검존이라는 그의 할아버지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그리고 그걸 모두 벗겨낸 자신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명문세가 에서 자라난 그의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어느 천년에 모용가를 꺾고 공손세가의 이름을 강호에 알리겠는가.
“강해지려면 적에게서도 배워야 한다!”
조부 검존의 말이 그의 뇌리 속에서 울렸다. 치욕을 감수하고서라도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옆에서 그들의 행적을 눈에 똑똑히 새겨둘 필요가 있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돌아가나 했는데, 다시 옷가지를 바로 하고 서는 것을 보고는 비류연은 히죽 웃었다.
“안가?”
언제든지 꼬리를 말고 물러나도 된다는 얼굴을 하며 비류연이 물었다.
“안 갑니다. 끝까지 남아 있을 겁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존대말이 나오고 있는 공손절휘였다.
“그래? 생각보단 근성이 있네. 이번에 안 죽으면 좀 그럴싸해지겠는걸.”
나름의 칭찬이었던 것 같지만 공손절휘는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그런 공손절휘의 상념은 성벽 위에서 터져 나온 비명 때문에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성벽 위에서 여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들어왔던 그런 비명이 아니었다. 그 비명 안에 든 것은 고통과 공포가 아니라 환희와 기쁨이었다. 모용 휘와 공손절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성벽 위를 쳐다봤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어떻게 해! 여기 본다, 여기 봐!”
“어머머머머머머. 어떡하지, 어떡하지? 빗 어딨어, 빗!” “내 거울, 내 거울!”
왠지 굉장히 어수선하고 적응 안 되는 분위기였다.
“꺄악, 어떡하지? 미남이야!”
“저 백의의 귀공자는 확실히 소문의 그 남자지? 모용세가의 신성이자 천재 미소년, 칠절신검 모용휘!”
비류연이 들었으면, 그 명칭은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맞아, 분명해! 얼마 전에 마천각에 온 걸 직접 본 적이 있어.”
“너, 몰래 가서 확인해 봤구나? 이 배신자!”
“어머, 그냥 호기심이었을 뿐이야, 호기심. 나에겐 자군님, 그분뿐이라고.”
확실히 모용휘는 백옥을 깎아놓은 것 같은 미남자다. 선도 가늘고 얼굴도 무림인치고는 갸름한 편이다. 그림을 그려놓은 듯한 얼굴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 다. 게다가 능력은 또 어떤가? 모범생에 우등생이기까지 하다. 칠절신검이라는 별호를 얻은 장래가 촉망되는 미남자이니 거의 여자들만 모여 있는 이곳에서 단연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 약간 성깔있어 보여도 저쪽도 꽤 반반한데? 게다가 어려.”
“겉보기에는 틱틱거려도 어느 순간에 흐물흐물 부드러워질 수도 있겠네. 그렇게 마음이 굳어 보이지는 않는걸?”
“분명 저쪽이 틱틱거리는 쪽일 거야! 항상 틱틱거리지만, 저 모용휘가 신경 쓰여서 참을 수가 없는 거지.”
여인들의 대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얼굴이 시뻘게진 공손절휘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어머, 화내는 것도 귀엽네. 정곡을 찔렸나 봐!”
“꺄악꺄악!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하잖아. 마음을 들켜서 부끄러운 거지.”
“그럼 어디가 공(攻)이고 어디가 수(受)야?”
“역시 총수는 모용휘, 아니겠어?”
“아냐, 역시 새침데기 어린 쪽이 갑자기 수로 전환되는 거라고!”
“……?”
“공? 수?”
모용휘랑 공손절휘는 전혀 알아들 수 없는, 알아들었다가는 자살 충동을 느끼고 싶어할 만한 이야기들이 저 성벽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
이럴 때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약! ‘이었다. 오늘 무지가 두 사람의 자살을 막은 것이다.
어쨌든 의미를 모른다. 하지만 왠지 부끄러워지고 기분이 기묘해졌다. 그것은 저 여인들이 자신들을 이야깃거리 삼아 질겅질겅 씹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들이 오가고 있기는 한데, 그 내용에 대해서 물을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본능이 강력한 거부 반응을 보이 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용휘는 애써 대화의 내용을 무시하고 자신의 흐름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 그녀들의 흐름에 말려들었다가는 이곳에 선 채 말라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실례합니다, 소저들.”
모용휘가 위에 있는 여인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어머, 부른다. 내가 대답할게.”
“아냐아냐, 내가 먼저야. 넌 저기 구석에 박혀 있어.”
“싫어. 너나 그러셔.”
“아냐, 너희 둘은 찌그러져 있으렴. 내가 말할 테니. 저 모용 공자도 나 같은 이쁜이랑 이야기하고 싶을 거야.”
“너 같은 메주를 누가 좋아하니. 간장이라도 담그게?”
“누가 메주라는 거야! 그리고 간장이 어때서!”
“자자, 그러지 말고 가위바위보로 정하자고.”
잠시 후 성벽 위에서 가위바위보 소리가 여러 번 들려왔다. 큭, 꺄악, 윽, 이겼다라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잠시 후 성벽 위로 빼꼼 머리를 내미는 여인이 있었다. 녹색 경장을 입은 꽤 귀엽게 생긴 아가씨였다.
“안녕하세요, 모용 공자님. 전 주영이라고 해요.”
“아, 처음 뵙겠습니다, 주 소저.”
모용휘가 덩달아 인사했다. 그러자 위에서 ‘꼬리 치지 마, 이것아!’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주영이라는 소녀가 생긋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여기 무슨 일로 오셨나요, 모용 공자님?”
“안에 계신 ‘자군 대장님께 용건이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모용휘가 정중하게 부탁했다.
“어머? 어떡하지? 미남자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든데.”
“하지만 들여보내지 말랬잖아, 특히 남자는.”
남자라는 부분을 특히 강조하며 다른 여인이 말했다.
“하긴, 그분은 남자들은 싫어하시니까.”
“하지만 말야, 그분하고 저 모용 공자하고 나란히 서 있으면 그림이 될 것 같지 않아?”
“꺄아아아악! 난 상상만으로도 쓰러질 것 같아.”
“난 코피!”
정말로 주르륵 코피가 나온 모양인지 급히 손수건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상의 힘은 정말로 굉장했다.
저 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왠지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모용휘였다. 어쨌든 도검창칼에 둘러싸여 있을 때보다 지금 상황이 더 불 편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
처음에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전의에 불타고 있던 모용휘는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들어가는 걸 거절당한다면 강행돌파할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 런데 지금 자신들은 완전히 그녀들의 혀 위에서 노니는 장난감이었고, 끌어올려야 할 전의는 점점 더 깎여 내려갈 뿐이었다.
이것이 의도된 정신 공격에 계획된 함정이라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그녀들의 진심이라면.. 그건 더 소름 끼치게 두렵기 짝이 없는 충 격과 공포였다. 결벽증이 있는 그의 마음은 그걸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무지’라는 방패와 애써 ‘외면’이라는 창이 그의 마음과 더럽혀지지 않은 영혼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보다 훨씬 성격이 급한 공손절휘는,
“닥치고 문이나 열어!”
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줄 그녀들이 아니었다.
“어머, 입이 험하네. 얼굴은 귀여운데.”
“저런 것도 개성이야. 약간 틱틱거려야 귀엽잖아.”
“그런가? 하지만 내 취향은 아냐.”
““나도.”
“난 좀 취향일지도.”
공손절휘의 존재는 또다시 완전히 무시되었다.
“지나갈 수 있게 해주시겠소, 소저들?”
“꼭 들어오셔야 하나요?”
주영이 대표로 물었다.
“꼭 들어가 봐야 하오.”
거절당하면 힘으로 부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여자다 보니 무턱대고 힘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좋아요.”
다른 여인들과 한참을 수군거린 주영이 다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정말이요, 주 소저?”
“네, 물론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뭐요, 그 조건이란 건?”
그러자 주영이라는 여인이 생긋 미소를 띠며 말했다.
“둘이 뽀뽀라도 하면 열어주죠.”
“뭐뭐뭐, 뭐라고오오오오오오오!”
기절초풍할 듯 놀란 공손절휘가 펄쩍펄쩍 뛰었다. 그가 너무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모용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때를 놓치고 말았다. 엄청나게 황당한 제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녀들이었다.
“하,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소. 그리고, 남자랑 남자가 그… 그… 입… 입맞춤이라니… 이상하오. 아니, 괴상하다고까지 생각되오. 그건 정상이 아니오.” 모용휘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바른 생활 사나이였다. 결벽증이 있는 그에게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 정상이 아닌 게 바로 핵심이에요. 우린 정상인 것엔 별로 관심이 없거든요. 호호호.”
주영이란 아가씨는 입심이 대단해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하, 하지만. 역시 안 되겠소. 다른 걸로 부탁해 주시오.”
차라리 문을 부수고 강제로 뚫고 들어가는 게 더 나았다.
“정말정말정말 안 되나요?”
“정말정말정말 안 되오.”
모용휘의 의사는 명확했다.
“음, 그럼 옷을 벗는 건 어때요?”
“오, 옷을 말이오?”
당황한 모용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 그래요. 그럼 들여보내 주죠.”
어떻게 이 여인들은 그런 부끄럽고 남세스런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모용휘는 계속되는 정신적 연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 로 휘말리면 끝장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남세스러운 짓을 할 수 있겠소. 거절하겠소.”
모용휘는 혼란스런 정신을 수습하며 간신히 거절했다.
“으음…… 안 돼요?”
“안 되오.”
“어머, 그럼 상의만이라도 좋아요.”
두 눈을 먹이를 노리는 살쾡이처럼 빛내며 여인들이 합창했다.
“상체만 말이오?”
“네, 상체만 우린 아쉬운 대로 목선이랑 쇄골 정도로 만족할 수 있어요. 어때요?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닌 것 같은데? 남자들은 수련할 때도 곧잘 웃통 벗고 하 잖아요?”
어느새 여인들의 대표가 된 주영이 아주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확실히 그 정도라면, 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게다가 그녀들이 면죄부까지 던져 주지 않았나. 그가 아닌 사람 중에도 수련하기 위해 웃통을 벗는 이들은 많았다. 다만 모용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수련할 때 그렇게까지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도 아니었고, 내공으로 어느 정도 신진대사의 조절도 가능한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육체의 단련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느 경지 이상에 가면 정신과 기의 단련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온다. 모용휘는 이미 그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수련할 때 굳이 웃옷을 벗을 필요가 없었다.
모용휘의 망설임을 감지한 주영이 뒤쪽에 포진하고 있던 여인들을 향해 신호를 넣었다. 여인들이 알았다는 신호를 보낸 다음 일제히 손을 치켜들었다.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여인들이 일제히 손을 위로 치켜들며 외쳤다. 모용휘는 점점 더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자, 당신도 사내대장부라면 결단을 내리세요. 웃통을 벗을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인가!”
참으로 괴상한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 같은 아녀자들과 드잡이질을 벌이고 싶나요?”
사실 그 부분은 모용휘에게 있어 상당히 꺼려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싫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으음…….”
고뇌에 찬 신음 소리가 모용휘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선택했다.
“좋소. 하겠소!”
“꺄아아아아아악!”
좋아 죽을 것 같은 함성이 성벽 위에서 터져 나왔다.
“얘들아, 한대!”
“어쩜어쩜어쩜!”
위에서 그런 외침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우르르 소리가 들리면서 성벽 위에 불쑥불쑥 십수 명의 여인들이 나타났다. 대여섯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인원 이 세 배로 불어나자 모용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성벽 뒤에서 몰래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는 사람이 적다고 생각하는 편이 결단을 내리기 편하기 때문이다. 그제야 모용휘는 자신이 완전히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십수 명의 여인들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따끔할 지경이었다.
“진짜 하려는 겁니까?”
떨떠름한 얼굴로 공손절휘가 물었다.
“……어쩔 수 없잖나?”
약속은 약속. 그는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만큼 그리 요령 좋은 사내가 아니었다.
“미쳤군요!”
공손절휘가 소리쳤다.
“그럴지도…….”
확실히 지금 자신은 제정신이 아닌지도 몰랐다. 지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엔 상황이 너무 가혹했다. 섬세한 그의 정신은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 멀쩡할 만큼 강 하지 못했다. 위쪽에서는 기대에 가득한 시선들이 화살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마침내 모용휘의 손이 옷고름으로 다가갔다.
“꿀꺽!”
여인들의 침 삼키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스르르르륵!
풀썩!
긴장과 흥분을 참지 못하고 한 여인이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진 동료에게 신경 쓰는 여인은 아무도 없었다. 쓰러진 동료를 방치한 채 여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모 용휘가 벗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런 구경, 좀처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윗옷이 하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면서, 우아하게 휘어진 쇄골이 드러났다. 그의 피부는 백자처럼 새하얗다.
“꿀꺼덕!”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여인들이 다시 한 번 일제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들의 눈이 점점 더 충혈되어 가기 시작했다. 눈에 힘을 줘서 안력을 잔뜩 높이는 바람에
눈에 피가 몰린 탓이다. 아무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지금 그녀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모용휘를 보는 일이라고 말 할 터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푸슉! 푸슉!
“아아아아아!”
풀썩!
“나 쓰러진다…….?
매우 특이한 음향이 성벽 위에서 울려 퍼졌다.
여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차례차례 기절했다.
간신히 한 여인이 일어났는데, 그녀는 왼손으로 코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직도 떨리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으 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훌륭해!”
끼이이이이이이익!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그러나 모용휘는 어쩐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왠지 정신적으로 능욕을 당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공손절휘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가죠.”
“으… 음, 그러지.”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고, 화끈해진 얼굴을 식히며 모용휘는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여자들은 때때로 정말 무섭구나…….?
지켜줘야 할 존재였던 여인들이 뭔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변해 버린, 그런 기분이었다. 특히 일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뭉쳐진 여인들은 정말 다른 세계에서 온 괴생 물처럼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저는.
그러자 동해왕자군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네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각 내의 여자들이 술렁이고 있다는 것이 나의 귀에도 들어왔으니까. 분하게도 나의 친위대 사이에서도 자네의 소문 이 돌고 있다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네. 미를 위협할 자가 누구인가 하고 말이야!”
“미?”
“아, 날 부를 때는 ‘미(美)’라고 불러주게! 나의 아름다움, ‘나의 미(美)’, 줄여서 미(美)라 하지. 굳이 ‘나’라는 수식을 안 붙이고 아름다움이란 말만 붙여도 되는 건 이 무림에서 나 동해왕 하나뿐이니까. ‘미’야말로 정의, 고로 이 몸이야말로 정의 그 자체라네. 왜냐하면 난 아름다우니까!”
“미친놈.”
어이가 없어진 공손절휘가 중얼거렸다.
모용휘는 굉장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사람, 위험해. 별로 관여되지 않는 게 좋겠어. 하지만 생각만큼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러고 싶지는 않군요. 사양하겠습니다.”
모용휘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싫다고? 왜? 나의 미를 인정할 수 없다는 건가?”
왜 세상의 진리를 거부하느냐는 투로 자군이 반문했다.
“글쎄요, 그건…… 뭐랄까, 어쨌든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모용휘가 다시 한 번 거절했다. 아까부터 자꾸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냥 칼을 들고 서로의 무를 겨루면 안 된단 말인가?
“흠, 과연 그럴 생각이군!”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자군이 갑자기 외쳤다.
“그럴 생각이라니요?”
“자넨 나랑 미를 겨룰 생각이군. 음, 그래, 틀림없어. 나의 미로 자네의 미를 쓰러뜨려 보라는 뜻이지? 음음. 이해했네, 이해했어!”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도대체 뭘 이해했다는 건지…….?
모용휘가 보기엔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을 뿐이다.
“자네의 아름다움은 나의 적수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걸 인정하지! 자네를 인정하겠어, 나의 ‘미(美)의 호적수’로!”
자군이 스스로에게 도취된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인정받지 않아도 좋은데…….”
그런 걸로 호적수로 인정받고 싶진 않았다. 무공도 아니고, 얼굴 반반한 정도로 싸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길이 아니었다.
“무공은 얼굴로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아니, 얼굴이야! 무(武)란 곧 아름다움, 그 자체라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해왕은 그렇게 말했다.
“이 무식하게 힘만 판치는 무림이란 세상에서 그다지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지. 우락부락한 근육덩어리 같은 형편없이 조형미에 감동하는 미맹(美盲)들이 판치는 세상이니까! 아름다움도 모르는 천박한 것들! 하지만 인생이란 싸움에 있어서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매우매우매우 중요한 것이라네! 인생이란 싸움에서 승리 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 그대도 아름다운 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숙지할 필요가 있네! 왜냐하면 나와 자네는 ‘미(美)의 사도(使 徒)’라 할 수 있는 존재니까!”
‘미의 사도라니, 이 사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모용휘였다.
어째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느꼈다. 아니, 확신했다.
‘저자랑 오래 이야기해서는 안 되겠어…….’
그랬다가는 자기마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사고방식이 너무 달랐다. 그리고 그 격차는 거대한 절벽과도 같아서 노력으로 메워질 만한 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미(美)의 대전을 펼쳐 볼까!!”
다시 한 번 그가 과장된 몸짓을 취하며 말했다.
“좀 봐주시죠. 사양하고 싶습니다.”
모용휘가 사정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아니, 사양할 것 없네. ‘미(美)’야말로 정의! 누구의 정의가 옳은지 여기서 가려봐야 하지 않겠나?” 무림에서 힘이 정의라는 말은 종종 들어봤어도 미가 정의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모용휘였다. 괜히 동해도로 왔나, 후회가 막심인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