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5권 23화 – 남쪽 하늘이 열릴 때 (25권 끝)

비뢰도 25권 23화 – 남쪽 하늘이 열릴 때

남쪽 하늘이 열릴 때

-장막 그 너머

“나백천이 흑천맹으로 향했습니다.”

서천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보고를 받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멸겁이라 쓰여진 장막 뒤에 정좌한 채 그 보고를 들었다.

장막에서 일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부복한 채 보고를 한 이의 등에는 ‘十二(십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철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나백천으로부터의 방문 요청은?”

“없었습니다.”

철가면이 다시 보고했다.

“그의 움직임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설마 ‘천번지복지계’를 멋대로 시행하려는 건 아니겠지?”

처음으로 동요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딸이 납치되었는데 느닷없이 흑천맹으로 향할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그가 손을 쓴 것 같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준비되어져 온 계획이었다. 그 계획을 멋대로 시행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멋대로 그 일을 저질렀다. 자신에 게 일언반구도 없이.

“저지할까요?”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의외성을 최소한으로 줄여놓지 않으면 안 된다.

“……”

장막 뒤의 사내는 잠시 고민했다. 수십 년의 적공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백번천번 신중을 기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 계획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을 뒤집어엎는 계획. 실행에 조금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멈추어놓았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하나의 징조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건 도발인 건가, 한시라도 빨리 천번지복지계를 시행하라는? 이만한 기회는 결코 오지 않을 거라는??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곳에는 부족했다.

“아직 그분이 깨어나지도 않으셨는데…….”

그대로 계책을 진행하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이미 달리기 시작한 전차를 멈추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그 계획은……..”

마침내 북천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그 한 번의 결정을 위해 막대한 심력을 소모한 탓인지, 북천은 의자에 천천히 몸을 묻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조용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다.”

* * *

또다시 명을 받고 지하 접견실에 들어온 은명이었지만, 역시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여기에 올 때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공기가 무거워 숨 쉬기가 힘들다. 이런 압박을 느끼는 것은 ‘멸겁’이라 쓰여진 저 장막 너머에 있는 존재를 강하게 느끼 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피를 나눈 부모 자식 간이지만 그 사이에 애정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제대로 부모의 정이란 것 을 느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는 아직도 저 장막 너머로 넘어가 본 적조차 없었다.

‘자식인데도…….?

어두운 촛불들 저편에 놓여 있는 얇은 검은 장막이 마치 거대한 장벽처럼 보였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아직 철이 들기도 전, 젖먹이일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 일로 아버지 가 슬퍼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백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을 산 아버지. 그러나 그가 도달한 무공의 경지를 보여주듯 아직도 그의 머리카락은 새카맸다. 어머니는 백 년이란 시간 동안 아버지가 스쳐 지나간 여러 여자 중 한 명이었다. 정식으로 혼인을 올렸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그런 것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일곱 살이 된 후였다.

“이제 무공을 배울 수 있겠구나.”

아버지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도 자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공을 가르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너는 천겁의 아이가 된다.”

그 말을 들은 것은 열 살이 되고 나서였다. 그 후부터 끊임없이 천겁혈신의 위대함과 이 강호의 썩어빠진 작태,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해 배웠다. 무공을 끊임없이 연마했다. 천겁의 부활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몸바쳐 일하는 것이 천겁의 아이들 중 하나인 자신의 사명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는 최강 의 전설 천혈신’을 보위했던 네 명의 강자인 ‘사천’의 일좌이자 우두머리인 ‘북천멸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오 년 후였다.

백 년 전에 있었던 동란 때 무신 태극신군 혁월린과 무신마 패천도 갈중혁, 그리고 천무삼성에 의해 동천, 남천이 죽고 서천이 큰 부상을 당해 재기 불능에 빠지고, 우두머리인 북천이 행방불명되면서 이제는 거의 잊혀져 가는 전설이 되어 있던 그 사천멸겁 중 북천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도 마천각 여기저기에서 소곤거리는 이야기로 천겁령에 대한 무시무시한 전설과 공포를 익히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풍화되어 가는 그 전설의 하나가 자신의 아버지라니……. 하지만 소년이었던 그는 그때 생각했다.

ᅳ굉장해!

라고.

자신의 아버지가 전설의 인물 중 하나라는 사실에 그는 선과 악을 떠나 ‘굉장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후로, 천겁령을 부활시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가지고 태 어난 사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을 위해 존경하던 사람을 배신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사랑하던 사람의 눈을 빼앗는 마물이 되기도 했다.

모든 것은 ‘천겁’을 위해. 모든 것은 다가올 신무림을 위해.

하지만 예전에는 그 모든 것이 정의라고 생각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뭐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목소리 큰 사람이 검다 하면 검어지고, 희다 하면 희어 지고, 빨갛다 하면 빨개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은 알면 알수록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런 것을 단칼에 잘라 구획을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았다 해도 이제 와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이미 그에 게 돌아갈 길을 남아 있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운명에 그는 끝내 거역하지 못했다. 몇 번의 반항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했다. 저절로 떠올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는 지난 백 년 동안 몇 명의 여자들을 스쳐 지나왔을까? 그중에 과연 단 한 명의 자식도 낳지 않는다는 게 가능할까? 만일 어떤 여인이 그의 씨로 자식을 낳 았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렇게 생겨난, 자신과 같은 아버지를 가진 이들이 어딘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서로가 서로를 모른 채 그저 지내고 있을 뿐은 아닌가 하고. 그들의 신분을 아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 단 한 사람뿐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나는 수백 명의 자식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수백 명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편리한 장기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말이지…….?

그런 불순한 생각을 때때로 하면서도 반항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언제나 그저 복종할 뿐인 꼴 보기 싫은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관심을 갈구하는 어린애 같다. 하지만 그 자신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자식인 자신의 숙명이었다. 아기가 태어 나는 부모를 고를 수 없듯, 숙명에서도 벗어날 수는 없다.

‘역시 운명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몇 번 있었던 운명에 대한 거역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그에게 참담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다시금 그것을 시도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데 오늘 그의 운명이 또 한 번 크게 뒤틀리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변화 역시도 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때가 왔다.”

어느새 나타난 것일까? 어두운 지하실, 멸겁이라고 적힌 장막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기척이 없었는데, 마치 갑자기 그 자리에 나타 난 것처럼 그의 존재가 느껴졌다. 동시에 감지되는 압력이 더욱 증가되었다.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쥐어진 듯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은명은 장막에서 일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 부복한 채 온몸을 긴장시켰다.

무슨 때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질문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때문에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제사십사계(第四十四計)를 실행한다!”

제사십사 계획? 설마, 그 계획을? 이렇게나 빨리?!

“너무 빠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자신의 입장도 잊고 은명이 외쳤다.

“너무 빠르다? 재고하라?”

“네, 아직 준비가 완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이 생긴 다음에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미 늦다. 시급을 다투는 일에서는 생각하는 시간조차 사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여러 책략(策略)들이 순번을 붙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언젠가 쓰여질 때를 대비하여. 상황에 맞추어 책략을 짜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는 책략을 예비된 수백 가지 책략 중에서 고르는 것이다. 상황에 따른 책략이기 때문에 규모나 파급 효과에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난다. 한 사람을 제거하는 책략이 있는가 하면 한 문파를 멸문시키기 위한 책 략도 있다. 그중에서도 제사십사계는 차원을 달리하는 책략이었다. 그것은 지난 백 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강호의 모든 체계를 뒤엎기 위한 계책이었다. 때문에 그 계획의 이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천번지복지계’라고 붙여져 있었다. 하늘과 땅을 뒤집는다는 의미를 지닌 이 계획의 진실한 내용을 알고 있기에 은명은 더욱더 두 려웠다. 정체되어 왔던 지난 백 년의 시간이 단숨에 가속하게 될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시간의 격류는 강호 전체를 집어삼키며 폭주하기 시작할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그분’께서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계획은 원래부터 그때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계획이었다. 시간의 격류를 멈춰 세워줄 존재가 필요불가결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공멸할 뿐이다. 끝없는 피의 소용돌이가 흑백을 불문하고,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휩쓸어 버릴 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가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들아.”

아들. 그가 이 지하 접견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때로부터 백 년, 여지껏 우리는 기다리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우린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주인, 아니, 이 무림의 진 정한 주인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분이 오시기에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다시 돌아오실 계기를 마련 해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서 그분이 영접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그래, 우리가 먼저! 누구보다도 빨리. 평화에 찌들어 있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아직도 그분이 건재하심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이 썩어빠진 낡은 역사를 거두고, 새로운 신무림의 역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제사십사계. 지리와 인화는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필요한 것은 천시(天時)뿐. 그리고 드디어 지금, 이 천시가 갖추어졌다. 천지인(天地人)이 갖추어졌으니, 남은 것은 실행뿐!”

은명은 자신도 모르게 전율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는 이 떨림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흥분인지, 아니면 현재의 익숙한 상황이 바뀌는 것을 저어하는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나 역시 ‘화산지계’가 실패한 이후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두려우냐?”

은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북천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두려우냐, 무림의 운명에 네가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이? 하지만 누구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너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겠느냐?”

은명은 무릎을 꿇은 채 더욱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의 운명은 천겁과 함께 있습니다. 전 무림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입니다. 아무리 두렵다 해도 전 결단을 내릴 것입니다.” “좋다! 가까이 오너라.”

그 말에 은명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뭐 하느냐? 어서 가까이 오지 않고.”

우물쭈물 자리에서 일어난 은명이 장막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장막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이 검은 장막은 언제나 거대한 벽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 다. 이 이상 앞으로 간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뭐 하느냐? 더 가까이 오너라.”

망설이는 은명을 향해 북천이 말했다.

“하, 하지만…….?”

이 멸겁이라 적힌 장막 이후는 넘어가서는 안 되는 절대금역(禁域)이었다.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은명이 알기로, 그 장막을 마음대로 넘어도 되는 사람은 딱 두 종류뿐이었다.

하나는 천겁의 주인이자 지배자인 분이시고, 다른 하나는…….

“상관없다. 넘어오너라.”

은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운명이 삐걱삐걱 거대한 굉음을 울리며 비틀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바뀌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무의식중에 깨달았다. “이 장막은 경계선(境界線)이다!’

이 선을 넘으면, 아마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있는가? 이미 그는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던 여인의 눈을 잡아 뽑고, 그녀의 존재를 살해 하기까지 했다. 독고령이라는 여인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런 그에게 돌아갈 곳 따위는 없었다. 그 자리는 그 스스로가 부숴 버렸으므로.

“두려우냐? 그렇다면 돌아가거라. 운명에 벌벌 떠는 겁쟁이는 필요없다.”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강력한 의지가 없으면 어디 제대로 쓸 수나 있겠냐는 뜻이었다.

솔직히 은명은 두려웠다. 뭔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숨에 은명이란 존재와 대공자 비라는 존재를 사라지게 만들고, 새로운 그를 만들어 버릴 것 같은 무언가가 자기가 더 이상 자기가 아니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겁쟁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쓸모있는 아 들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은명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아버님!”

설령 그것이 모든 무림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라 해도 그는 이미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장벽을 넘었다.

그 안의 광경을 보는 것은 그로선 처음이었다. 항상 이곳은 어둠으로 감싸여 있는 미지의 장소였다. 은명은 작은 동작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양편에는 빛을 발할 만한 물건들이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빼놓고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앞쪽은 조금 달랐다. 그곳은 그의 예상과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둠의 심처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아버지가 앉아 있는 ‘권좌’가 보였다. 그런데 그 권좌는 하나가 아니었다. 세 단 높은 곳에 네 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고, 각자의 의자에는 ‘동남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북(北)이라고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바로 그의 아버지이자 사천멸겁 중 우두머리 인 북천이었다. 그리고 이 네 의자 뒤, 여섯 단 더 높은 안쪽 깊숙한 곳에 여전히 어둠 속에 묻힌 옥좌가 하나 보였다. 그 옥좌는 지금 텅 비어 있었는데, 반투명한 장 막 하나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장막 한가운데는 크게 용사비등한 붉은 글씨로 ‘천겁(天劫)’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 뒤에 바로 그분이…….’

그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은명은 두려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 마지막 장막 너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기 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어 있구나……. 역시…….’

옥좌는 백 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텅 빈 채 자기 위에 앉기에 합당한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몸을 간신히 억누르며 은명은 더욱 더 태사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삼층짜리 계단 바로 아래에 멈춰 다시 부복하려 했다. 그러자 북천이 그것을 저지했다.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다. 올라오너라.”

은명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올라오라니? 왜? 어째서?”

이미 멸겁막 뒤의 이곳 자체도 그가 올 곳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이 엄청 들고 있었는데, 이 계단 위는 더더욱 그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높지 않은 이 계단 세 개 위는 전혀 다른 별세계였다.

“왜 그러느냐? 저 장막을 넘은 의미, 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역시! 그런 건가!’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를 기다리는 운명은 생각 이상으로 무거워 은명은 간신히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기가 자기가 아니게 되어가 는 듯한 그런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누르며 은명은 계단을 올랐다.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될 것이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예.”

“그전에 너에게 이것을 전하겠다.”

옆에 ‘남(南)’이라고 적혀 있는 자리 위에서 상자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 고절한 허공섭물의 수법이었다. 북천의 시선은 전혀 상자를 보지 않고 있었다. 상자는 저절로 움직여 은명 앞으로 나아갔다. 은명은 떨리는 손으로 그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자에는 커다랗게 ‘남천’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회수한 남천의 비급과 그의 독문무기다. 그리고 연성을 위해 필요한 영약이 들어 있다. 너는 천겁의 무공에 대해 충분히 기초를 닦았으니, 비급만으로도 어 느 정도 성취가 가능할 것이다. 나머지 진전은 네 하기 나름이다.”

“예, 감사합니다.”

“일어나라!”

은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천도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남천좌를 감싸고 있던 천을 들어 은명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그 의 얼굴에 동으로 만든 가면을 씌워주었다.

동가면이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그 순간,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은명은 자신이 이제 이 운명의 굴레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의식을 마치자 북천이 선언했다.

“오늘부터 네가 ‘남천(南天)’이다.”

처음으로 그 울림에서 자랑스러움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천겁혈세 혈신재림! 신명을 바쳐 천겁의 세상을 위해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은명이 외쳤다.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나는 너를 남천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가르쳐 왔다. 너의 무공 역시 남천의 무공에 기초하고 있지. 그러니 상성이 좋을 것이다. 비전과 비전 무기를 손에 넣은 이제, 넌 진정한 남천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너의 무공 역시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향상될 것이다.”

북천은 그것이 참을 수 없이 기쁜 듯 홍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남천을 끝으로 이제야 사천멸겁이 모두 모였다. 이제 천겁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신무림기를 쓰기 위해서. 이제 낡은 무림의 역사는 종 지부를 찍는 것이다.”

뜨겁고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어느 정도 식고 조금 차분해지자, 그제야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동과 서라고 적힌 두 개의 자리였다.

“저 자리의 주인들은 대체 누구지??

좀 전의 얘기로 미루어보아 사천멸겁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가 최고 말단이라는 이야기였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그 건 당연했다. 그것에 불복할 마음은 없었다. 아직도 자신이 남천의 좌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은명이기에. 그것은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채워진 동천과 서천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비어 있는 두 자리를 보며 은명은 그들이 누군지 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걸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비록 방금 남천의 지위를 받았다 해도, 그는 아직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남천의 진전을 얻지 못하면 그는 버려져도 할 말이 없었다. 지위가 아닌 실력, 그것이 천겁의 가르침이었다. 약한 자는 도태되는 것이 천겁의 진리였다.

당분간 저 두 자리는 누군지 수수께끼로 남을 듯했다.

사천멸겁의 자리가 모두 채워짐으로써, 마침내 천겁의 후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 년간 유지되던 평화.

그 평화라는 둑에 금이 가더니, 그것이 갈라져 터지며 격류가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지금 무림의 운명은 격렬한 탁류 속으로 흘러들어 가려 하고 있었 다.

<비뢰도』 제2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