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결성! 비류연과 그 일당들!
-다시 만난 친구들
모든 시합이 끝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텅 비어버린 투기장에서 장홍과 효룡, 두 사람만이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투기장의 시합장에 고정되어 있었고, 마치 바둑의 복기라도 하듯 좀 전에 있었던 연비와 칠상흔의 전투를 되새겨 보고 있었다. 특히 효룡은 아직도 칠상흔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의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 역시 칠상흔과 과거에 깊은 인연으로 얽혀 있던 사이였던 것이다. 효룡이 여지껏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 에서였다.
그들은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주제는 바로 ‘그 인물, 무신마 갈중혁의 제일제자 칠상흔에 관한 것이었다.
“설마 칠상흔의 정체가 ‘그 사람’일 줄이야… 깜짝 놀랐습니다, 장형.”
“나도 마찬가지라네, 룡룡. 그는 대체 왜 모든 영광을 버리고 칠 년 동안 저런 모습으로 살아온 것일까? 더구나 이런 투기장의 노예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효룡의 대사형이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무림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무신(武神魔) 갈중혁의 첫째 제자였다. 그런 대단한 신분에 있는 인 물이 아무리 전락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투기장에서 검투노예 같은 걸 하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일리있는 추리로군. 가능성이 높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곳은 강호란도입니다. 마천각에서 배로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곳이라고요.”
엎어지면 코 닿는 곳으로 도망이라니, 언어도단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이야기지. 실제로 칠 년 동안 아무도 그의 정체를 밝혀낸 사람이 없지 않은가?”
“확실히 그것도 그렇군요.”
장홍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연비와 싸움에서 그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칠상흔의 정체는 여전히 세인들 사이에 비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의문점은 여럿 남아 있었다.
“문제는 그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느냐 하는 것이겠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군.”
“두 가지요?”
“맞네. 첫 번째는 어떤 일로부터 도망쳤을 경우지. 듣자 하니 그가 모습을 감춘 것은 ‘피의 밤’ 이후라고 하더군.”
그날의 일을 생각하자 효룡은 마음이 칼로 찢기는 듯 아파왔다. 유년 시절 벌어졌던 그 일은 그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였다. 확실히 그는 그의 형 갈효봉의 돌연한 광태로 발생한 ‘피의 밤’ 사건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범인이라던가…….”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효룡이 외쳤다. 장홍이 깜짝 놀란 얼굴로 효룡을 바라보았다.
“절대 그가 범인일 리 없습니다.”
효룡이 같은 말을 반복했는데 두 번째는 장홍이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게다가 아직도 마천각 내에서는 그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칠상흔 그가 비록 대제자라고는 하지만, 무신마의 적통을 이은 갈효봉은 커다란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제거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아직 많았다. 그 가 모습을 감춘 것도 그렇게 중첩되어 가는 의혹이 그를 압박해 들어왔기 때문이 컸다. 그러나 효룡은 아직도 그를 믿고 있었다.
“두 번째로, 만일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누군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네.”
“누구로부터요?”
“아마 그가 진짜 그날의 범인이겠지.”
하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는 모든 게 어둠 속에 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천각 제일의 강자에게 그토록 공포를 심어줄 수 있는 게 도대체 누구일까요?”
“보통 고수는 아니겠지. 적어도 사천멸겁에 준하는 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적으로부터 도망친 것만이 아닌지도 몰라.”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래, 그는 스승으로부터도 도망쳤다는 이야기지.”
“무신마로부터…….”
“그래, 그래야 앞뒤가 맞어. 아무리 사천멸겁 급의 고수라 해도 무신마의 명성에 비하면 부족함이 있지. 설마 ‘그’를 두려워해서 도망친 건 아닐 테고 말이야.”
“서, 설마,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아무도 그의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잖나? 세상일이란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백 년 전 천무학관이나 마천각이 세워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나? 무서운 일이지만 ‘그’가 살아 있을 가능성도 영은 아니라는 거지. 뭐,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말일세.”
“……”
효룡은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에 제대로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걸걸세. 그가 이런 데서 검투노예를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뭘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힘을 키우고 싶었던 걸세. 생사가 교차하는 치열한 전장에서 처절한 실전을 통한 단련, 그는 그걸 위해 일부러 이 장소를 택했을 걸세.”
“힘을 키우고 있었다는 것은 쓰러뜨리고 싶은 목표가 있었다는 이야기겠군요.”
“바로 그거지. 문제는 그 누군가가 누구냐 하는 것이겠군.”
“그걸 알려면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는 수밖에 없겠군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왜 자신이 여기에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칠상흔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다. 아직 칠상흔이 독무에 당해 쓰러졌다는 사실을 효룡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효룡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장홍의 등을 치는 손가락이 있었다.
툭툭!
장홍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다가 그만 화들짝 놀랐다.
“누, 누구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생각했다. 은신잠행의 대가인 자신의 뒤를 이렇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온 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보통 놈은 아니었다. 조금 전 적의 손 에 만일 무기라도 들려 있었다면 그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그의 목숨은 아직까지 붙어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상대가 악의를 품고 있었다면 큰일 날 뻔한 것이다. 조그만 방심이 험난한 무림에서는 곧장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상대에게 살의가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서야 비로소 장홍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허걱!”
장홍의 무거운 엉덩이가 의자로부터 붕 떠올랐다. 그 모습에 효룡의 고개도 덩달아 돌아갔다.
‘뭐가 있기에 그렇게 놀라…….’
그리고 그 역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류연!”
장홍과 효룡의 입에서 동시에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나예린의 납치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비류연 개인의 힘만으로는 벅찼다. 그도 만능은 아니었다. 그리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은 무리를 이루고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이 사태를 한시라도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쌓아놓았던 모든 힘과 인맥을 총동원해야 했다. 그동안 조용히 축적해 놓았던 자신의 저력을 끌어내 보일 때였다. 그렇다면 이 ‘연비’라는 모습은 방해였다. 이 모습이 쌓은 역량은 거의 전무에 가까웠다. 지금 그 모습으 로는 예린을 도울 수 없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는 주작단원들을 찾은 다음, 곧바로 장홍과 효룡을 찾았다.
추적술에 대해서만은 장홍이 자신보다 우수했다. 본인은 숨기려 애쓰고 있긴 했지만, 이미 주변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의 실력에 대해서. 그렇다면 그에게 맡기는 게 나았다. 흔적을 추적하려면 오랜 시간에 걸친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데, 상대가 전문가라면 이쪽도 전문가가 필요했다. 당장에라도 강호란도를 뒤엎고 싶은 것을 참고 장홍과 효룡, 이 두 사람을 찾아온 것은 비류연에게 남아 있는 최후의 이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 떨어질 뻔했네. 그런데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런 술에 전 간은 주워봤자 별로 소용도 없어.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비류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가 귀신처럼 이곳 강호란도에 나타난 것 말고 그럼 뭐가 중요한가?”
“한 여인.”
“한 여인? 무슨 일 있나? 왠지 오늘은 평소의 자네답지 않군.”
먼저 이상을 눈치 챈 사람은 장홍이었다. 뭐가 다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는 지금 비류연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멀쩡한 것은 겉보기 뿐이다. 저 속에선 지금 무언가가 들끓고 있었다. 언제나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거나 따분해하던 비류연은 지금 여기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정사대전이라도 벌어졌나? 자네가 갑자기 귀신처럼 뜬금없이 나타났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증거로 봐도 되겠지. 난 자네가 평온과 함께한다는 말을 믿지 않아. 자넨 언제나 산더미 같은 문제의 폭풍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이른바 자연재해 같은 친구지.”
“비슷한 말, 옛날에 종종 듣고는 했지. 그립군, 이라고 태평하게 말하고 있을 때는 아니지만 말야. 아, 자네 말이 맞아.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지. 이 세상에서 벌
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 말야!”
그리고 비류연이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그때마다 가슴을 비수 끝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묵묵히 듣고 있던 장홍과 효룡의 표정이 여러 번 급변했다.
“그럴 수가…… 나 소저가…….”
좀 전까지 저 투기장에서 화려한 한 마리 봉황처럼 싸우던 여인이 납치당했다니. 장홍으로서는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어떤 놈이 감히……”
“과거의 망령이지.”
분노가 깃든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도움이 필요해.”
조금의 주저도 없이 비류연이 말했다.
“자네한테서 그렇게 순수하게 도와달라는 말이 나올 줄을 몰랐군. 예상외라서 좀 당황스럽네, 솔직히.”
“그래서 안 도와줄 건가?”
“물론 도와줘야지. 자네에게 빚을 만들 기회가 그리 흔한 게 아니니까.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미리 말해두지만, 쉽지는 않아.”
“어련하시겠나. 이미 각오하고 있는 바이네. 그렇지 않나, 룡룡?”
“아, 물론.”
잘나갈 때는 개나 소나 다 함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울 때 역경에서 함께할 수 있는 친구는 몇 없다. 그런 친구가 진짜 친구인 것이다. 시원시원한 두 사람의 대답에 비류연은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좋아. 그럼 비류연과 그 일당들 재결성이군!”
왜 네 이름만 걸려 있고 우린 뭉텅이냐? 우린 덤이냐, 는 효룡의 항의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다.
“자, 그럼 어디부터 가야 하지?”
“이미 정해놨어.”
“어딘데?”
“돈왕의 집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