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누구?
-추적
일단 달렸다.
마치 도망치듯 달렸다. 시간이 맹렬히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시간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달렸다. 그것을 알고 싶지 않았기에 달렸 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그때’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화 따윈 달리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긴 있는 건가, 류연?”
쾌속하게 달려가면서 효룡이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대답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비류연이 짧게 대답했다.
주변의 경물이 빠르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게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들의 발끝에선 고도의 경공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돈왕의 집무실엔 왜 가는데?”
“당연히 범인을 잡으러 가는 거지.”
“누가 범인인지 알고 있나?”
그러자 전혀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비류연이 힘주어 대답했다.
“뭐라고!! 범인을 알고 있다고?”
그냥 한번 물어본 것뿐이었지, 정말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효룡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래. 아까 얘기했었잖아, 과거의 망령이라고.”
“난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인 걸로 알았을 뿐이야. 아니면 단체 이름이던가.”
“아니, 비유적인 표현도 단체의 이름도 아냐. 난 그놈이 어떤 놈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 예전에 그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 다만 그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것이 문제일 뿐이야.”
“그 범인, 설마 그게 돈왕인가?”
돈왕의 집무실로 범인을 잡으러 가고 있으니 돈왕이 범인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었다.
“아니, 그 돼지는 흉수가 아냐. 하지만 공범이지.”
“그럼 거긴 왜 가는 거지? 자네의 행동을 봐서는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장홍이 경공의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은 채 물었다.
“양편의 선수 대기실에 중독성 강한 독향이 펼쳐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래, 들었지. 좀 전에.”
그전에는 그런 소동이 대기실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중석에 앉아 있던 그들로서는 꿈에도 몰랐었다.
“그 독향은 투기장 내에 설치된 비밀 관을 통해 흘러나왔어. 그것도 양쪽 모두. 그렇다는 건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이 일을 꾸민 범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범인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
효룡도 장홍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자, 여기서 간단한 문제야. 이 투기장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었다.
쾅!
문짝이 부서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문짝이 삼 회전을 하며 벽에 세로로 박혔다.
비류연은 들어 올려져 있던 발을 내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장홍과 효룡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올라온 계단 밑으로 수많은 무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있거나,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거나, 무기가 부러지거나, 옷이 찢어지거나 했지 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비류연으로서는 충분히 참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생활에 지장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들의 뼈와 근육은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최대한 쾌속하게 치고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집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튀었군.”
무수한 경비병들을 공깃돌 집어 던지듯이 해치우고 도착한 돈왕의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뒤룩뒤룩한 비계로 찬 거구가 앉아 있었을 거라 추정되는 의자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책장은 물론 몇몇 서랍장도 모두 활짝 열린 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급하게 떠난 티가 역력했다.
“좋아. 잘됐군.”
텅 빈 집무실을 확인한 비류연의 입가에 무시무시한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는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뭐가 잘됐다는 건가, 류연? 우리는 그를 놓치지 않았나.”
옆에 있던 효룡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좀 전에 장홍이 보내준 전음대로 오늘의 비류연은 어딘가 이상했다. 나예린의 일이 있으니 무리도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만……..
“그가 여기 그대로 앉아서 범행을 부인했다면 좀 더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자리를 떴다는 것은 분명 뒤가 구린 데가 있다는 거 아니겠어?” 뒤가 켕기지 않는다면 이렇게 부랴부랴 짐 싸서 야반도주하는 사람처럼 도망칠 리 없었다. 아마 그들이 무서워서라기보다 다른 노인 한 명을 더 두려워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누구를 두려워했냐 따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무실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현상 자체 가 중요했다.
“여기 없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범인 중 한 명이라고 자수하는 꼴이지. 그럼 이제 우리는 일단 돈왕의 뒤를 추적하면 되겠군. 정체불명의 외팔이보다는 그쪽이 훨 씬 더 수색하기 쉽겠지.”
“외팔이?”
“그래, 범인은 절름발이, 아니, 외팔이야.”
그러나 자세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지금은 한시라도 바삐 돈왕의 흔적을 추적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가장 적임인 것은 장홍이었다. 비류 연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장홍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방심하지 말게. 그는 터무니없는 부자야. 부자는 여러 가지 수단을 한꺼번에 쓸 수 있다네.”
날카로운 시선으로 의자가 바닥에 남긴 흔적과 떨어진 체모, 남겨진 먼지의 흔적 등등을 살피며 장홍이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돈은 안됐군. 곧 자신의 주인을 잃어버리게 될 테니 말이야. 그 돈으로 그의 목숨을 살 수 있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효룡이 주위를 살펴보며 물었다. 무언가 단서가 나오면 좋을 텐데, 급하게 떠난 것치고는 흔적이 거의 없었다.
“기다려, 장홍이 뭔가 찾기를 기대하자고.”
기다려라. 누구보다도 비류연 자신이 가장 하기 싫은 말이었다. 그가 아마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들었다면,
“미쳤냐? 지금 기다리게 생겼냐? 시간이 뒤쫓아오고 있다고. 너, 시간보다 빨라? 시간은 황금빛 잔물결, 시간[時]이 보인다, 라는 말도 몰라? 때를 놓친 사람과 시 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야, 영원한 패배자일 수밖에 없어. 그런 멍청한 패배자들이 시간을 이십 년 전으로 되돌린다고. 주제 파악을 못하면 시간 읽 는 법이라도 배워.’
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장홍과 그의 실력을 믿고 기다려야 할 때였다. 부탁한 사람은 그였으니, 기다려 주는 것은 그의 의무이기도 했다. 안절부절못한 것은 효룡보다 그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기다려야 했다. 그때, 여기저기 흔적을 더듬던 장홍이 멈추어 섰다.
“잠깐. 이것 좀 보게, 둘 다.”
장홍의 한마디에 비류연과 효룡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재빨리 장홍의 곁으로 달려간 두 사람 중 효룡이 먼저 입을 열어 묻는다.
“뭔가요, 장형?”
장홍의 손가락은 집무실 책상 뒤에 놓인 책장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다른 책장은 거의 다 텅텅 비어 있는데 이 책장만은 책이 가득 차 있어.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시간이 없었거나 아니면 빼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비류연이 대답했다.
“책을 빼내지 못할 이유? 그게 뭘까?”
멀뚱히 선 채 두 눈을 끔벅이고 있는 효룡은 아직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 짐작 가는 게 있나 보지?”
그러자 장홍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이 책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들이거나 아니면…… 이 책 뒤에 뭔가 장치가 되어 있을 경우겠지.”
“장치? 무슨 장치?”
“기관 장치.”
장홍의 말에 비류연이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한데 잘못 책을 뽑으면 ‘펑!’ 하고 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는걸.”
그것은 매우 즐겁지 못한 상황이 될 터였다.
“건물의 구성 위치로 봐서는 저 벽 뒤는 단순한 하늘이 아니야. 비밀 통로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그렇다는 건 저 책장은 비밀 통로를 여는 기관 장치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군.”
그렇겠지, 라고 대답하며 장홍은 좀 더 책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평소의 느긋하던 표정이 아닌 긴장되고 진지한 표정으로 책장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 했다.
“아무래도 다중 입력식 시건(자물쇠) 장치인 것 같군.”
“다중 입력… 뭐?”
짧게 이름 붙여요, 혀가 꼬이잖아, 라고 효룡이 항의했다.
“간단히 말해 책을 당길 때 조합을 잘못하면 폭발하는 구조라는 것이지.”
“열 수 있겠어?”
장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단순한 기관이 아니라 함정과 열쇠가 동시에 붙어 있는 장치야. 잘못하면 이 방 전체가 폭발해 날아갈 수도 있어. 그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네.” 평범하게 철사 두어 개를 후비적거려서 열 수 있는 편리한 놈이 아니었다.
“그럼 다른 방법은? 비밀 통로로 들어갈 다른 방법은 없나?”
장홍은 잠시 고민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비밀 통로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자물쇠를 열 수 없다는 이유로 전진을 포기할 비류연이 아니라는 것 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네. 하지만 그 방법을 지금 쓸 수가 없다는 게 문제야.”
“그 방법이 뭔데? 일단 말이라도 해봐.”
“통로의 입구를 벽째로 도려내는 걸세. 비스듬한 방향으로 기관 장치가 없는 방향으로 뚫고 들어가는 거지.”
장홍의 의견은 정말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누가 들으면 놀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무식하군. 하지만 간단해서 마음에 들어. 그렇게 하자고.”
비류연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황당해 보이는 의견을 채택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네.”
그 말에 비류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 뭐가 또 문제라는 건데?”
장홍의 안색이 일순간 침통하게 변했다.
“벽을 단 한 번에 통째로 도려내야 하네. 두부처럼 돌을 자를 수 있는 기량이 필요하지. 적어도 무림맹주 급의 검강을 펼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안 돼. 그러니 불가 능하다 한 걸세.”
침통한 표정의 장홍을 향해 비류연이 말했다.
“뭐야, 겨우 그런 고민이었어?”
“겨우 그 정도라니? 남이 기껏.”
비류연이 그 말은 중도에서 잘랐다.
“마침 딱 잘됐네.”
“뭐가 잘됐다는 건가? 하나부터 열까지 몽땅 다 안 되는 것 같은데?”
“때마침 ‘하나’ 있거든.”
“뭐가?”
“그 무림맹주.”
“말도 안 되는 소리! 무림맹주는 무림맹에 있겠지, 이런 동정호 외딴 섬에 있을 리가 없잖나.”
“있어. 무림맹이 아니라 동정호의 외딴섬에 지금 바로!”
“믿을 수 없네. 무림맹주가 둘로 분열이라도 됐단 말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림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지금 이 시각 이곳에 있다면 그것 직무유기밖에 되지 않아. 왜냐하면 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서 있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좋은 말이네. 그런데 그 말 그대로 본인 앞에서도 할 수 있는 거야?”
“날 뭘로 보는 건가? 당연히 그럴 수 있지. 바른말을 하는데 본인 앞이라고 꺼릴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할 수 있다는 얘기?”
“물론!”
그렇게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호언장담을 들려준 장홍이었으나 실제는 많이 달랐다.
“….. .!”
장홍은 물 위에 머리를 내민 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거릴 뿐 한마디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왜? 말 안 해? 말할 수 있다며?”
“말? 무슨 말 말인가?”
급하게 끌려온 나백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 몹시 심기가 불편한 상황이기도 했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고말고요. 아하하하하하!”
장홍이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비류연 앞에서는 호언장담을 했지만, 진짜로 무림맹주 본인이 나타날 줄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확실히 마천각의 영역 안 에 들어온 이후 자기에게 그림자들로부터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가 늦어진 것 같다고 속으로 탄식했다. 아무래도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필요할 것 같았다.
“실없는 사람이군. 그것보다 나를 급작스럽게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뭔가?”
비류연이 눈짓하자 장홍이 차근차근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벽을 뚫으라고?”
애검 ‘백뢰’로 책장을 가리키며 나백천이 물었다.
“네, 길쭉하게 뽑은 검강으로 될 수 있으면 단번에 부탁드립니다. 잘못하면 불꽃 통구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니까요.”
장홍이 손바닥을 비비면서 웃으며 말했다.
“내 검강이 무슨 가래떡인 줄 아나?”
“하지만 되도록 길게 부탁드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벽에다가 미리 표시를 해놨으니 그대로 자르시면 됩니다. ‘썩둥!’ 하고.”
단단한 돌벽을 무슨 두부라도 되는 듯 말하는 장홍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정천맹의 맹주, 백도무림의 최강자 중 한 명인 진천뢰 백검 나백천이었다. 천무삼성에 비해서도 그 무위가 전혀 꿀릴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천무삼성 본인들이 들으면 콧방귀를 뀌겠지만 말이다. 옥에 티라고 할 만한 유일한 문제인 ‘딸에 대한 팔불출’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잠재력을 극도로 끌어내 주는 불씨가 될 터였다.
“하아아아아아아…….”
길게 내뱉는 호흡과 함께 시퍼런 검날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새하얀 검기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실처럼 뽑아져 나온 검기가 한 덩어리가 되면서 더욱더 단단한 형 태를 유지하며 길어지기 시작했다.
한 자… 두 자… 세 자…….
검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기는 점점 길어지더니 또 하나의 거대한 빛나는 검을 만들어냈다.
“엄청난 내공이군…….”
점점 더 길어지고, 견고해지고, 강렬해지는 검강을 보며 효룡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저 정도 검강을 뽑아내면서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다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 내공을 물 쓰듯 하는 상태일 텐데…….
하지만 이미 자신의 눈앞에는 벌써 그 경지에 올라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광경을 망막에 새기며 효룡은 마음속으로 생각했 다.
‘저것 역시 벽이구나, 내가 넘어야만 할 벽…….’
백뢰진천검(白震天劍)
오의
뇌광참影)
만월(滿月
새하얀 뇌광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내달렸다. 바람을 찢는 검풍음이 고막을 때렸다.
찰칵!
어느새 다시 검집에 꽂힌 백뢰를 쥔 채 나백천이 몸을 돌렸다.
비류연과 장홍과 효룡은 숨을 죽인 채 책장이 놓여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저 벽이 멀쩡한데요, 라고 딴죽을 거는 이는 없었다. 모두들 알고 있었다. 방금 걸 못 알아봤다면 그런 동태 눈깔은 차라리 뽑아버리는 게 나았다. 쓸데없이 박혀 있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도움이 될 터이니 말이다.
즈즈즈즈즈즈즈즈즈즈!
눈에 착각인가, 벽이 앞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그러나 착각도 착시도 아니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벽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커다란 원형을 그린 채. 마치 거대한 마개가 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쿵!
둥글게 도려내어진 거대한 돌덩어리가 앞쪽으로 넘어지며 요란한 굉음을 울려 퍼뜨렸다.
“과연, 대단한 검기(劍技)였습니다. 오늘 눈을 다시 한 번 개안했습니다.”
보통 주먹으로 때리면 사람은 뒤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검에 베인다 해도 마찬가지다. 옆으로 넘어가면 옆으로 넘어갔지, 앞으로 넘어지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저 벽은 뒤로 넘어가지 않고 앞으로 넘어졌다.
검강으로 벽을 도려냈을 뿐만 아니라 힘의 방향을 조절해 뒤로 넘어가게 하지 않고, 앞으로 넘어오게 만든다는 것은 네댓 가지 수법을 단 일 초에 펼쳐 보였다는 뜻이었다.
“감탄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자,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가자고.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그제야 비류연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한 나백천이 다그치듯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자네가 왜 여기 있나? 지금쯤 천무학관에 얌전히 감금되어 있어야 할 사람이?”
비류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감금이라뇨? 그 정도로 나쁜 일은 한 적이 없는데요? 누명을 썼을 뿐이라고요. 일종의 억울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죠. 저 같은 선량한 사람에게 자주 있는 일이 죠.”
“억울한 피해자가 자네에게 다 몰살당한 모양이군.”
나백천이 코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지금은 비상사태잖아요. 그런 사소한 건 나중에 차분히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얘기해도 될 것 같은데요?”
“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네, 비류연 군.”
나백천은 비류연의 얼렁뚱땅에 넘어가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예린이 납치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게다가 연비가 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두 분께도 이미 허락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확실히 도움을 청하겠다는 말에 급한 마음에 허락은 했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비류연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사소한 일은 그냥 넘어가죠.”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닐세.”
“아뇨, 예린의 구출 문제에 비하면 사소하죠. 아닌가요?”
반박할 말 있으면 반박해 보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백천은 평소 자신 스스로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공평무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래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사소하지.”
공평무사함과는 한 수만 리쯤 떨어진 대답을 들으며 장홍과 효룡은 잠시 회의에 잠겨야만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나? 그냥 이름을 부르다니, 보통 사이는 아닌 듯하군.”
딸의 사생활에 조금만 관련될라 치면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나백천이었다.
“조금 아는 사이죠. 그리고 사소한 얘기지만 이쪽에는 특수한 비밀 임무를 받고 온 겁니다. 확실히 허가를 받고 온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것보다 지금은 이런 재미 없는 심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검강으로 휑하게 도려내어진 통로를 가리켰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되찾아야 할 게 있지 않나요? 한 걸음 지체하면 한 걸음 더 멀어질 뿐이에요.”
더 이상 지체해 봤자 서로에게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분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더 얘기하도록 하지.”
“물론이죠. 예린을 되찾은 다음에요.”
의견 일치를 본 두 사람은 비밀 통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깐!”
그때, 그들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뭔가?”
나백천이 물었다. 그러자 장홍은 두 사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적의 비밀 통로입니다. 어떤 기관이 장치되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맹주님께서는 만에 하나라도 다치셔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부탁하네, 홍식.”
“홍~식?”
나백천의 말에 비류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제야 나백천은 ‘아차!’ 하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미안하네, 내가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 같군, 장홍 군. 미안하네.”
그러자 장홍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아닙니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죠. 절대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러면서 그는 비밀 통로로 들어가 내려가는 계단 바로 앞에 서둘러 섰다.
마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이.
“자자, 비전문가는 물러나 있어요. 이제부터는 전문가의 영역이니까. 자칫 기관 장치를 잘못 건드리면 죽창이나 쇠화살에 항문을 꿰뚫리는 수가 있어요. 그랬다가 는 평생 치질로 고생하게 된다고. 뭐, 안 죽었을 때 얘기지만.”
전문가적인 예리하고 날카롭고 뾰족한 감각을 발동시키며 장홍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난 척하네, 저 아저씨.”]
[“그러게. 그래도 장 형, 오랜만에 나온 나설 자리잖아.”]
[“그래서? 눈감아주라고? 눈꼴신데?””]
[“개도 자기 영역에서는 자기가 왕이라고. 누구나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구역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법이야.”]
[“룡룡, 방금 자네 장 아저씨를 개랑 동급 취급했어. 아저씨가 들으면 슬퍼할걸?”]
[“자네 특기 있잖나?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말자고, 서로서로.”]
“이봐, 다 들리거든? 아저씨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좀 닥치고들 있어. 전음으로 얘기하는 척하면서 소곤거리지 말고! 다 들리잖아! 아저씨 상처 입는다고!” 장홍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어두운 통로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의 실수도 곧바로 황천행 직행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일할 때는 좀 신경질이 되는군.”
“그러게.”
“시끄러, 둘 다! 전문가가 전문적인 일을 할 때는 누구나 섬세해지는 법이라고. 이런 작업은 매우 예민하고 민감해서 칼날 위에서 춤추는 거랑 비슷해. 나예린 소 저를 빨리 구하러 가고 싶으면 모두 다 조용히 해.”
“미, 미안하네. 방해 안 할 테니 열심히 하게나.”
정작 사과한 것은 나백천 혼자였다.
조금 조용해진 작업환경에서 장홍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남아 있는 흔적과 그 흔적을 토대로 기관들의 종류와 위치를 살폈다. 그런 다음 품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푸른 비단 주머니에 붉은 끈이 매어져 있는 주머니였는데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그게 뭔가?”
“흔적분입니다. 이걸 이렇게 계단 위에 살포시 뿌려주면…….”
장홍이 소지하고 있던 특수 가루를 뿌리자 통로를 갈지자로 사람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이 뚜렷한 형태를 지니며 나타났다. 무척 신기한 가루였는데, 어디서 났는 지는 묻지 않았다.
“자, 가시죠.”
장홍이 앞장서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 뒤를 따랐다. 장홍이 밟은 곳만 밟자 신기하게도 기관이 작동하지 않았다.
“과연, 전문가! 나이는 헛먹은 게 아니었어.”
만일 그가 없었다면 벌써 비류연 일행은 몇 번이나 작동되는 기관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 힘과 신경을 소모해야 했을 것이다.
“느리군.”
전진은 더뎠다. 함정을 일일이 찾아내면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다 밝아버려!
라고 비류연이 생각없이 외치면,
─좋은 생각이다.
라고 딸바보 아빠가 맞장구를 쳐서 사태는 최악의 최악으로 굴러갔을 가능성이 심히 높았…..
딸깍!
“아, 미안. 밟았다.”
비류연이 밟은 계단이 움푹 꺼져 있었다.
“아하하하하!”
비류연은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으나, 나머지 세 사람의 안색은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핼쑥해졌다.
“달려어어어어어어어!!!”
낯빛이 흑색이 된 장홍이 소리쳤다. 말을 마치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파바바바바박!
슈슈슈슈슈슉!
푸샥푸샥푸샥!
일제히 작동된 기관으로부터 무수한 수의 화살들, 암기, 죽창, 쇠 꼬치 등이 날아오거나 솟아오르거나 푹 꺼지거나 했다.
그런 것을 나백천은 검강으로 검막을 펼쳐 모두 쳐냈고, 효룡은 현란하게 쌍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비류연은 비 사이로 막가는 사람처럼 그 무수한 공격들을 미꾸 라지처럼 피해냈다.
“일부러 그랬지! 일부러 그랬지! 분명 고의였어어어!”
휘두르고 구르고 달리며 장홍이 외쳤다.
“실수야, 실수. 미안.”
그의 뒤쪽 사선 방향에 바짝 붙어 달리며 비류연이 말했다.
“사과에 마음이 안 담겨 있어, 마음이!”
“장형, 그건 사치예요, 사치! 누구한테 뭘 바라요.”
여전히 풍차처럼 쌍검을 휘두르면서 날아오는 화살비를 막으며 효룡이 한마디 했다. 그러자 잘한 것도 없으면서 비류연이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어쨌든 빨라졌잖아.”
확실히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빠른 속도로 그들은 통로를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건 확실히 그렇군.”
문자 그대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나백천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 너무 긍정적이야, 너무 긍정적이라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다른 이들이었으면 이미 화살 꼬치가 되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웃음이 나 오냐고! 장홍으로서는 그 정신세계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작 사과한 것은 나백천 혼자였다.
조금 조용해진 작업환경에서 장홍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남아 있는 흔적과 그 흔적을 토대로 기관들의 종류와 위치를 살폈다. 그런 다음 품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푸른 비단 주머니에 붉은 끈이 매어져 있는 주머니였는데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그게 뭔가?”
“흔적분입니다. 이걸 이렇게 계단 위에 살포시 뿌려주면…….”
장홍이 소지하고 있던 특수 가루를 뿌리자 통로를 갈지자로 사람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이 뚜렷한 형태를 지니며 나타났다. 무척 신기한 가루였는데, 어디서 났는 지는 묻지 않았다.
“자, 가시죠.”
장홍이 앞장서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 뒤를 따랐다. 장홍이 밟은 곳만 밟자 신기하게도 기관이 작동하지 않았다.
“과연, 전문가! 나이는 헛먹은 게 아니었어.”
만일 그가 없었다면 벌써 비류연 일행은 몇 번이나 작동되는 기관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 힘과 신경을 소모해야 했을 것이다.
“느리군.”
전진은 더뎠다. 함정을 일일이 찾아내면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다 밝아버려!
라고 비류연이 생각없이 외치면,
─좋은 생각이다.
라고 딸바보 아빠가 맞장구를 쳐서 사태는 최악의 최악으로 굴러갔을 가능성이 심히 높았…..
딸깍!
“아, 미안. 밟았다.”
비류연이 밟은 계단이 움푹 꺼져 있었다.
“아하하하하!”
비류연은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으나, 나머지 세 사람의 안색은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핼쑥해졌다.
“달려어어어어어어어!!!”
낯빛이 흑색이 된 장홍이 소리쳤다. 말을 마치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파바바바바박!
슈슈슈슈슈슉!
푸샥푸샥푸샥!
일제히 작동된 기관으로부터 무수한 수의 화살들, 암기, 죽창, 쇠 꼬치 등이 날아오거나 솟아오르거나 푹 꺼지거나 했다.
그런 것을 나백천은 검강으로 검막을 펼쳐 모두 쳐냈고, 효룡은 현란하게 쌍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비류연은 비 사이로 막가는 사람처럼 그 무수한 공격들을 미꾸 라지처럼 피해냈다.
“일부러 그랬지! 일부러 그랬지! 분명 고의였어어어!”
휘두르고 구르고 달리며 장홍이 외쳤다.
“실수야, 실수. 미안.”
그의 뒤쪽 사선 방향에 바짝 붙어 달리며 비류연이 말했다.
“사과에 마음이 안 담겨 있어, 마음이!”
“장형, 그건 사치예요, 사치! 누구한테 뭘 바라요.”
여전히 풍차처럼 쌍검을 휘두르면서 날아오는 화살비를 막으며 효룡이 한마디 했다. 그러자 잘한 것도 없으면서 비류연이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어쨌든 빨라졌잖아.”
확실히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빠른 속도로 그들은 통로를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건 확실히 그렇군.”
문자 그대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나백천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 너무 긍정적이야, 너무 긍정적이라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다른 이들이었으면 이미 화살 꼬치가 되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웃음이 나 오냐고! 장홍으로서는 그 정신세계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역시 일부러 그랬어!”
장홍의 안타까운 비명이 어두운 통로 깊숙한 곳까지 울려 퍼졌다.
“헉헉헉! 일단 살아 있군.”
기관을 있는 대로 몽땅 작동시켜 놓고도 상처 하나 없이 도착하다니…….
“봐, 아저씨. 무사히 도착했으니 됐잖아. 안 그래?”
이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우연의 우연, 결코 임의적으로 바라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 무모무도무리의 향연이라 할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목숨을 노리개 삼아 한바탕 연회를 벌이고 만 장홍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안 그래!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 이 아저씬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단 말이야. 난 방금 주마등(走馬燈)을 봤다고!”
지나온 인생을 한순간에 돌려본다는 것은 결코 상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소심하기는.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말라니까.”
“인생이 끝날 뻔한 게 사소한 일이냐, 이 막가파 녀석아!”
멱살을 잡으러 달려들었지만, 잠자코 잡혀줄 비류연이 아니었다. 달려드는 장홍을 살짝 피하며 말한다.
“자자, 다시 활약할 시간이라고.”
그러면서 무언가를 손으로 가리킨다. 계단이 끝나자 그들 앞에 또다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피처럼 붉은 문 하나였다. “또 문이군.”
지겹다는 듯 나백천이 한마디 했다.
“장 형, 여기도 기관 장치가 되어 있을까요?”
문을 살피고 있는 장홍을 향해 효룡이 물었다. “아마도.”
장홍이 대답했다.
“장 아저씨가 한번 열어봐. 난 여기서 기다릴게.”
저만치 물러난 곳에 서서 비류연이 말했다.
“남의 불행을 먼 곳에서 지그시 지켜볼 생각이면 집어치워. 왜 내가 해야 되는데? 자네가 하게.”
“아니지, 이런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라고 했잖아? 나 같은 비전문가가 나서면 장 아저씨를 무시하는 처사지.”
“……”
노골적으로 장홍이 싫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좀 전에 했던 말을 전면 철회하고 싶은 장홍이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엇이 기다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장홍은 자신이 실험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좀 더 신중하게 붉은 문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꾸물거림이 나백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키게.”
“예?”
“거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비키게, 도려낼 테니.”
여기서 얼쩡얼쩡 시간 낭비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철컥!
검이 뽑혔다.
우우우우우우웅!
검이 하얗게 운다.
“아, 잠깐만요, 잠깐만! 피합니다, 피하…… 으헉!”
장홍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한 바퀴 굴렀다. 좀 전까지 그의 목이 있던 곳 위로 하얀 뇌광 같은 검강이 훑고 지나갔다.
하마터면 문짝과 함께 같이 베어질 뻔한 장홍이 벌떡 일어나며 항의했다.
“주, 주, 죽을 뻔했잖습니까! 아무리 맹주님이라지만, 아무리 급하다지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러자 나백천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지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난 자네를 믿고 있었네!”
“뭘 말씀이십니까?”
“자넨 이 정도로 죽을 사람이 아니란 걸!”
빠직!
아니, 이 아저씨가 지금 시비 거시나! 저기, 방금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거든요, 엉? 맹주면 다야, 맹주면? 확 담가 버린다, 라고 외치고 싶은 장홍이었으나, 봉급 받 는 처지에 있는 몸이라 할 수 없이 참고 말았다.
스르르르르륵! 즈즈즈즈즈즈—즈! 쿵!
문은 붙어 있던 벽째로 쓰러졌다. 이번에는 앞이 아니라 뒤쪽으로 넘어졌다.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혹시 기다리고 있는 적이 있다면 문째 찌부러뜨릴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과연 유명한 딸바보 아빠, 딸에게 위해를 가한 놈들에게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들어가 보세. 홍, 자네가 앞장서게.”
“또 접니까?”
“자넨 전문가잖나.”
말 한마디의 업보에 다시금 대열의 선두에 서게 된 장홍이었다.
***
“실패했다고? 그건 칠상흔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냐?”
붉은 옷을 걸친 주군 앞에 꿇어앉은 채 돈왕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예, 하지만 독무를 마시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신마의 방해로 숨을 끊지는 못했습니다.”
일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으니, 자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파기한다.”
붉은 옷의 외팔이 남자가 위엄있는 어조로 명령했다. 돈왕은 깜짝 놀랐다. 그 말인즉 그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돈왕이 실패한 것에 대한 벌을 청했다. 죄를 면해주겠다는데도 벌을 청하다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보일 필요 가 있었다. 책임을 회피해서는 신뢰를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쓸모가 있었다. 그의 주군은 단순한 분노만으로 그를 처벌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됐다. 어차피 그자의 입막음 같은 건 부탁받은 일이었을 뿐이니까. 이유를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지. 본좌는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지금 그와 같이 있는 갈중혁 그자를 얕봐서는 안 돼. 그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낼 것이다. 그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무신마랑 부딪쳐 봤자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지금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는 무신마가 아니라 나백천과 그의 부인 예청이었다.
“저 침상 위에 눕혀져 있는 여자 아이는 어쩔까요?”
“옮겨야겠지. 사람들을 준비시켜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폭염진을 준비시켜라. 이 비밀 방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발동하도록. 여기까지 온 사람들에게 선물이 없다면 실망하겠지.”
***
비밀 통로 끝에 위치한 밀실은 상당히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음침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벽에는 그 비싸다는 야광주가 아낌없이 박혀 있었고, 가구나 기물들 모두 최상품들이었다. 게다가 지하에 있는데도 공기가 답답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환풍이 잘되도록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많은 정성과 그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대체 뭐지, 이 방은?”
방 한가운데는 태사의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금과 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매우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딱 보기에도 정말 화려했다.
“지나치게 고급스럽군. 돈왕의 집무실보다 훨씬 더 고급이야.”
어떻게 하면 돈을 지나치게 쓸 수 있을지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방이었다. 좀 전에 봤던 돈왕의 집무실하고는 그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아무래도 이 방의 주인은 돈왕이 아닌 것 같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이 방은 한 개인에게 딱 맞춰 제작된 것입니다. 저 태사의만 봐도 어느 한 사람만이 가장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만든 특상품. 돈왕의 체형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의자에 맞지 않습니다. 모든 가구들이 돈왕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호화스러움은 돈왕의 집무실의 수배. 그렇다는 것은…….?”
“이곳이 바로 돈왕의 주인이 지내던 곳이란 말이군. 하긴 내 집무실 보다 열 배는 더 화려한 것 같군.”
“예, 이번 납치를 획책한 자가 있던 곳이 틀림없습니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 사람이 머물렀던 듯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습니다. 뭔가 남겨진 단서가 없나 한번 찾 아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장홍은 신중한 발걸음으로 방 안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방은 하나가 아니었다. 벽 두 곳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보였다. 문은 달려 있지 않고, 수정 주 렴이 내려져 있을 뿐이었다. 장홍은 혹시 모종의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건 아닌지 주의하며 건넛방으로 넘어갔다. 그곳은 침실이었다. 침상 역시 역시 꽤 호화스러 운 물건이었는데,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약하지만 남겨진 흔적들로 보아 한두 사람이 아니군요.”
나름대로 흔적을 지운다고 한 것 같지만, 장홍은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쓸려 나간 먼지들의 형체로부터 어림대중으로 인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텅 비어 있는 침상에는 조금 전까지 누군가가 누워 있었던 듯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그윽하고 부드러운 향기, 이건 분명 여성의 체향이었다.
“예린의 체취야, 이건!”
어느새 장홍의 옆에 다가와 침상을 살펴보던 비류연이 미간이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확신하나?”
“물론! 내가 그녀의 체취를 틀릴 리가 없잖아?”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뭐, 뭐, 뭐, 뭐, 뭣이라!! 네, 네, 네놈이 어떻게 예린이의 체향을 아느냐! 어떻게 감히! 우리 딸애의 냄새를 알아!”
나백천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길길이 날뛰었다. 외간 남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소중한 딸에게 꼬이는 구더기를 절 멸(絶滅)시키는 것이야말로 아버지 된 도리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 사태는 용납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비류연은 못 들은 척했다. 이런 일에 일일이 상대했다가는 끝이 없었다.
“이건……!”
여전히 노발대발 날뛰는 나백천을 무시한 채 침상의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비류연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한 손으로 입에서 불이라도 토할 것 같 은 나백천의 발작을 제지한 다음, 신중하게 접근했다. 조심스럽게 그것에 다가간 다음 무릎을 꿇고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뻗는 손이 조금 떨린다. 조금이 라도 눈을 떼면 그것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비류연은 침상의 한곳에 떨어진 그것을 주워 들었다.
“여, 역시.
그것은 ‘뿔 모양’의 조그마한 검정색 장신구였다. 비류연이 이 장신구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가 자기 손으로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만들어서 직접 건네주 었던 물건이다. 사십사 일 동안 동굴에 갇혀 있다 무사히 귀환한 기념으로 동굴 안에서 때려잡은 묵린 혈망의 검은 독니를 뽑아 은과 보석으로 세공하여 정성스레 만들었던 바로 그 장신구였다. 이것은 그가 나예린에게 준 세계에서 단 두 개뿐인 장신구였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그의 품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이것이 이런 곳에 떨어져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예린은 이곳에 있었어.”
조금 전까지 이 침상 위에 누워 있던 것은 나예린 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텅 비어 있었다.
“……”
가슴이 들끓어 미칠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한바탕 고함이라도 고래고래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든 나예린의 단서를 쫓아왔다. 여기서 그 실 을 놓칠 수는 없었다.
“힘내게, 류연. 아직 그녀는 무사하네. 무언가를 하기에는 그들도 시간이 부족했어. 그들 역시 우리의 추적 때문에 급히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네.”
장홍이 비류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풀 죽어 있는 모습은 자신의 친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항상 안하무인격인 미소가 훨씬 더 어울렸다. “많은 자들이 이곳에 들어와서는 무언가를 옮겨갔네. 남겨진 흔적으로 보아 적어도 네 명이 들어야 될 정도로 큰 물건이야. 그럴 만한 물건이 무엇이 있지?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데? 눌린 흔적으로 봐서 적어도 열대여섯 개는 되어 보이는군.”
“커다란 물건……
눌린 흔적…… 열대여섯 개…… 큰 장소…… 예린…… 납치…… 퇴거…….”
흩어진 정보는 쓸모가 없다. 정보란 취사 선택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장홍이 얻은 정보들이 비류연의 머릿속에 서 하나하나씩 연결되며, 마치 한 줄의 실에 꿰인 구슬처럼 하나의 고리를 이루었다. 생각을 마친 비류연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예린을 어딘가로 옮기려 하고 있어. 그런데 그녀를 눈에 안 띄게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린 정도의 미모라면, 기절하고 있다 해도 눈에 확 띌 게 분 명해.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해도 그 미모를 숨길 수는 없지. 그렇다면 어딘가에 숨길 수밖에 없는데… 그럴 만한 물건이 뭐가 있을까?”
“그렇다면…… 음…… 관이 아닐까?”
“맞아, 관이라면 얼굴을 보이지 않고도 옮길 수 있지. 힘센 장정 네 명이서 옮길 수 있는 크기라는 이야기와도 맞아.”
“일리가 있군.”
그러자 효룡이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관 자체도 눈에 띌 텐데? 옮기는 데 많은 인원이 필요한 만큼 눈에 띄는 건 인지상정이라고.”
그러자 장홍이 말했다.
“만일 그 관이 하나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 모두가 똑같이 생겼다면?”
“…….!!”
“좀 전의 열대여섯 개의 물건이 그럼 모두…….”
장홍의 말대로라면 어떤 관 안에 나예린이 들어 있는지 알기엔 무척이나 지난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을 관을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홍이 팔짱을 낀 채 고민하며 말했다.
“적어도 이 강호란도를 벗어나야겠지. 이곳은 좁은 섬이니까.”
“그렇다면 단 한 곳뿐이군.”
그렇다. 역시 그곳 이외에 다른 곳은 생각할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한 도주 경로란 역시…….
“항…….”
장홍이 입을 열어 한마디 하려는 찰나, 비류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뭔가 묘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나?”
그러자 당황한 장홍이 하던 말을 멈추고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다.
“아, 아냐! 난 항문에 힘준 적 없다고!”
그러자 비류연이 다시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런 구린내 말고, 다른 냄새 말야.”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한 장홍이 따라서 코를 킁킁거렸다. 의혹에 가득 차 있던 얼굴에 핏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창백하게 변해 중얼거렸다. “공성계(空城計)……..
“응, 공성계? 옛날 제갈공명이 썼다던 그거?”
“어, 그렇지……. 예전에…… 라고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지금! 뛰어! 폭탄이다! 적은 비밀 통로 전체를 폭발시킬 속셈이야!”
너나 할 것 없이 네 사람은 달리기 시작했다. 모든 내공을 경공에 쏟은 채 바람을 가르듯 달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이!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시뻘건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비밀 통로 뒤에 있던 비밀 밀실도, 돈왕의 집무실도 단숨에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 다.
‘폭염진’이 발동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