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서찰
-아우에게서 형에게
항구는 텅 비어 있었다.
“배요? 방금 모두 떠났는데요.”
“관 같은 걸 본 적이 있냐고요? 물론이죠. 십몇 개나 되던걸요.”
“아, 그 관들이라면 배 네 척에 나뉘어 실렸어요.”
“어디로 가는 건지야 저도 모르죠.”
“그 배들이요? 저기 가고 있잖아요?”
비류연과 그 일행이 나백천과 함께 부두에 도착한 것은 네 척의 배가 모두 동정호의 수평선에 걸려 있을 때였다. 여기저기 그슬리고 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모두들 몰골이 엉망진창이었다. 고명한 무림맹주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예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평선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배를 향해 내공을 실어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 쇠종의 울림 같은 커다란 외침도 드넓은 동정호의 수반 위에선 낱낱이 흩어질 뿐이었다.
“맹주님, 진정하십시오. 그렇게 외치시다가 원기를 상하십니다.”
지극한 분노와 슬픔은 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었다. 원정의 손실은 내공의 손실을 가져온다. 무림인이라면 마땅히 피해야 할 일이었다.
“예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그때 나백천의 외침에 지지 않는 사자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장홍이 귀를 틀어막으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비류연이었다. “예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이쪽은 아버지인 나백천보다 더 심각했다. 거의 악을 쓰고 있었는데, 그 외침에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것처럼 격렬하게 나예린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슬픔으로 차올랐다. 이대로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효룡과 장홍이 그의 어깨 한쪽을 끌어안으며 말렸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류연, 자네까지 이러면 어쩌나? 진정하게. 원정이 상하면 공부가 흐트러지네.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어.”
손상당한 원기는 기혈의 폭주를 가져오고, 그 제어력을 빼앗긴 당사자는 그 사태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폭주한 기가 이리저리 얽은 실타래처럼 엉키 게 되면 기혈이 봉쇄된다.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주화(走火)’다. 그렇게 되면 주화입마의 원인이 되는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게 된다. 슬픔과 분 노가 넘치게 되면 정신이 미치게 된다. 광기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입마(入魔)’다. 주화는 몸이 망쳐진 것이고 입마 는 정신이 망쳐진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는 서로 상통하는 불가분의 관계, 때문에 주화와 입마는 함께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운기(氣) 중에 사고가 나서 기(氣)가 막히는 것을 주화입마라 통칭하는 것이다. 장홍이 걱정하는 것도 비류연이 이대로 넘치는 감정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질까 봐 저 어돼서 그런 것이었다.
“지금 자네가 주화입마하면 누가 예린을 구하겠나? 보다 이성적이 되게. 자넨 아직 할 일이 있어! 내 눈을 똑바로 보게!”
장홍이 비류연의 어깨를 흔들며 외쳤다.
“자넨 아직 그 할 일을 끝내지 못했어. 미치려면 그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 미치게. 내가 아는 비류연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걸세.”
잠시 먹구름이 낀 암천처럼 흐릿해졌던 비류연의 눈동자가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맞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아직 할 일도 잔뜩 남았고 지켜야 할 약속도 있으니까. 게다가 멀쩡한 적을 남겨두고 혼자 여기서 주저앉다니, 수지에 안 맞 잖아! 암, 그렇고말고.”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적에겐 아직 제대로 된 보복도 못해주지 않았나. 적은 아직 건재했다. 계산 하나만큼은 철저한 비류연이었 다.
비류연이 다시 정신을 차리자 장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간이 콩알만 해졌던 것이다.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녀석이 미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저게 뭐죠?”
그때 효룡이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끼익끼익!
그것은 뱃사공도 없는 조그만 나룻배였는데 무언가를 싣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나룻배 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은 분명 ‘관’이었다.
정천맹주 나백천 친전.
관 위에는 붉은 글씨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먹물 대신 피로 쓰여진 글자였다. 그 피가 혹시나 나예린의 피는 아닐까 싶어 나백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갖 나쁜 상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냥 미쳐 버리는 게 차라리 간단할 것 같았다.
끼이이이익!
나백천은 떨리는 손으로 관 뚜껑을 열었다. 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신 그 바닥에 서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정천맹주 나백천 친전’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서찰 위에는 ‘형님 친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찰을 펼치는 나백천의 손이 세차게 떨렸다.
안녕하세요, 형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덕분에 저도 건강합니다. 너무 건강해서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지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조카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더욱 아름답게 큰 것을 보니 숙부로서 참으로 자랑스럽더군요.
아, 이렇게 서신을 올린 건 다름이 아니라 부탁이 하나 있어서입니다. 별거 아닌 부탁이니 분명히 들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가지고 싶은 게 하나 생겼거든요. 그게 뭐냐고요? 바로 흑천맹주 갈중천의 목입니다.
그걸 형님이 좀 가져다주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예린이를 죽이겠습니다, 라고 하면 놀라시겠죠? 하하하. 하지만 그렇게 놀랄 것 없습니다. 이 사랑스런 아이를 제가 어떻게 당장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는 언제나 저의 숨겨진 본모습을 자각하게 해줍니다. 제가 얼마나 추악하고 잔인한 놈인지를 제 영혼이 얼마나 깊은 어둠 속에 떨어져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 아이의 새하얀 피부를 볼 때마다, 갈기갈기 찢어서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적셔 버리고 싶습니다. 그건 무척이나 황홀하고 흥분된 일이겠죠? 상상만으로도 불끈불끈합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예린이 의 목숨을 거둬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다만 이 아이의 너무나 사랑스러워 분질러 버리고 싶은 새하얀 백옥 조각 같은 손가락을 하나 잘라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 아이가 저 곱고 붉은 입술로 울부짖는 비 명은 얼마나 절 기쁘고 황홀하게 만들어줄까요? 벌써부터 그 비명이 듣고 싶어져 심장이 뜁니다.
그러니 이 서찰에 적힌 일을 전혀 시행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어느 길이든 이 동생에게는 한없는 기쁨이 될 테니까요 사랑스런 손가락을 받아 든 형님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손가락 다음은 어 디를 잘라내 보내 드릴까요? 가지고 싶으신 부위가 있으시면 미리 알려주세요.
하지만 이 아이의 지고의 보석 같은 눈동자만은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혼자 보관하고 싶군요. 그러니 그것만은 제외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 저의 검은 영혼을 자극하는 이 아이의 눈동자가 평생 저만을 바 라보기를 바라니까요.
ᅳ격조했던 동생으로부터.
추신: 흑천맹의 옆에 있는 주점인 ‘흑상루’에 두 번째 서신을 보내두겠습니다. 만일 그 서신을 받아보시지 않는다면, 저에게는 무척 행운이 되겠죠. 제 날뛰는 심장을 감미로운 비명으로 진정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서찰을 읽는 순간, 나백천은 구역질이 나고 온몸이 불타는 듯한 분노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었다. 뇌가 타버릴 듯 뜨거워지고 현기증이 나는 듯했다.
그 서찰을 낚아채듯 받아 든 비류연은 천천히, 한자한자 빠짐없이 그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한자한자 다음 글자로 읽어 내려갈 때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빠져 나갔다. 마치 생명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 마지막 한 줄까지 읽은 다음 비류연은 잠시 석상처럼 서 있었다. 분노도 격정도 울분도 눈물도 없었다. 다만 한줄기 피가 그의 입가를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을 뿐이다.
방금 그는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했다. 하늘이 거부한다 해도 그는 그 운명을 그 사람의 운명 위에 덧씌워줄 작정이었다. 그것은 아마 지금까지 그 누구도 경험하 지 못했던 가장 잔인한 운명으로 기록될 터였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잠들어 있던 모든 자비와 용서를 버리고, 차분하고 묵묵하게 결정했다. 그리고 각오했다, 그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만일 내세에 천국도 지옥도 없다면, 지금 이 현세에서 충분히 지옥을 경험시켜 주마. 죽어서 네놈이 떨어질 지옥 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두 번 다시 환생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만일 지옥이 떨어졌을 때, 그 십팔층 무간지옥조차 편안하 게 느껴지게.”
그렇게 조용히 맹세했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쫓아가고 싶어도 쫓아갈 수도 없고, 애초에 어느 쪽으로 쫓아가야 하는지도 문제였다.
“단서가 모두 끊겼네.”
장홍이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가 네 군데로 향했다면 그 네 군데 중 어디에 나예린이 들어 있는 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씩 하나씩 쫓아가기에는 시 간이 부족했다. 그러는 동안 납치범은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어쩌면 좋겠소, 부인?”
나백천이 예청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는 이쪽 마천각과 강호란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표적을 줄일 수만 있다면…..
“음…..”
잠시 고민하던 예청이 말했다.
“두노이한테 가보죠.”
“그 늙은 정보상 말이오?”
“네, 그는 비록 늙었지만 여전히 유능한 정보상이랍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곳 강호란도 곳곳에는 그의 눈과 귀가 숨겨져 있 으니까요. 그리고 항상 돈이 될 것 같은 정보를 놓치는 법이 없죠. 분명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린 그에게 많은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으니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