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에게 대들다
-막무가내
강호란도에서 가장 유명한 숙박업소인 ‘신라각’.
지금 그 신라각 후원에 한 채의 독채를 빌린 채 강호란도에서 가장 유명한 술인 ‘달의 이슬’을 홀짝이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얼마 전 배를 판 덕분에 당분간 술값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지간한 것은 모두 중양표국의 국주 장우양이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덕분에 이 노인이 할 일이 라고는 이렇게 창가에 앉아 호화롭게 꾸며진 후원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투명한 황옥빛 술을 백옥 술잔이 찰랑찰랑거릴 정도로 따른 다음, 찬찬히 그 농염한 향기를 음미하며 입가로 가져가 가볍게 들이켜는 것뿐이었다. 이름한 그대로 달의 이슬처럼 맑은 술방울의 알싸하고 달콤한 맛이 그윽한 향과 함께 혀끝을 타고 달린다. “좋구나! 좋은 여자만큼이나 좋은 술이로구나.”
오랜만의 강호 나들이에 오랜만의 동정호였다. 백 년 전하고 달라진 건 많지만, 마음에 쏙 드는 건 하나도 없었다. 원통투기장이라는 저 웃긴 이름을 가진 곳도 마 찬가지였다. 그 속에는 추악한 인간의 욕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뿐이라, 보고 있어도 어떤 운치도 느낄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백여 년이 란 시간 동안 숙성된 이 ‘달의 이슬만이 그때처럼 이 노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뿐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그 이름을 모르고 마셨고 지금은 그것의 이름을 알고 마신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술맛만은 백 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때 술을 따른 녀석이 그 이쁜이 녀석이었나?”
그 녀석을 만난 것도 아마 동정호 근처였던 것으로 기억났다.
‘그 녀석을 여기 어디쯤에서 주웠었는데…….’
백 년 하고도 십몇 년이 더 흐르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하나뿐인 제자라는 놈이 여장이나 하고 돌아다닐 줄만 알았지 사부를 공경할 줄은 모르는구나. 이럴 때는 와서 옆에서 존경하는 사부님의 술시중도 들고 그래야 지.’
그 제자가 그가 마련해 오라는 비뢰도 대여료’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것은 몽땅 까먹고 있는 노사부였다.
“망할 제자 녀석! 제자라는 것들은 정말이지 키워놔도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
다시 술잔에 술을 따른다. 한 방울도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하지만 술 줄기는 면면부절하게 흐르는 노인의 내공에 의해 보호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거칠게 따라도 튀거나 넘치는 경우가 없었다. 후원으로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백발백염의 노인이 막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들이켜려 할 때였다.
‘응? 저건 망할 제자 녀석이잖아?”
약간 급한 듯한 얼굴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비류연이었다.
막 후원에 들어선 비류연은 사부의 기운을 느끼고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부와 비류연의 시선이 한데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부 쪽이었다.
“응, 웬일이냐? 남장을 다 하고?”
“원래 남자입니다.”
노사부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망할 제자 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놈은 대체 누구지?”
그의 앞에 나타난 제자라는 놈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거두고 가르친 녀석과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제자를 키운다는 것은 육아와 비슷했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어가는 지난한 과정인 것이다. 수많은 외적 요인을 감안하여, 교육의 방향성을 조정해 나가 는 험난한 과정이다. 때문에 항상 상태를 관찰하며 그때그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의 생각 그대로 크는 아이가 없듯, 사부의 마음 그대로 크는 제자도 없다. 그 역시 크나큰 대가를 치르고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 역시, 제자 역시 생물이고 인간이다. 생물이란 거대한 자연 속에서 주고받으며 커나가는 존재 인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되길 바라는 것은 자연, 즉 세계를 거역하는 것과 같다. 부자연스러움은 왜곡을 생산해 낼 뿐이다. 그가 보기에 그의 제자는 아직 미완성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불안정하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 그런 멍청한 낯짝을 하고선. 돈은 준비됐느냐?”
아마 장홍이나 효룡이 옆에서 들었다면 깜짝 놀을 것이다. 아니, 저 비류연에게 돈을 요구하는 간 큰 할아버지가 있다니, 라고 말이다.
“그런 저급한 인질범 같은 말투는 그만두세요. 지금 당장은 안 돼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아니, 이 사부한테 약속한 돈을 가져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냐? 잊었나 본데, 그 돈은 원래 사문의 비보를 빌려간 데 대한 대여 금액이야. 그것도 이 노부가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줄여준 거란 말이다.”
“너무 넓고 깊어 꼬르륵 익사할 것 같은 마음씀씀이네요.”
예전과 비슷한 말투를 쓰는 것 같지만 힘은 없다. 그 차이를 노인은 예리하게 간파했다. 어딘가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었지??”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이렇게까지 망가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준비된 돈도 없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과 틀림없이 모종의 연관 관계가 있음이 분명했 다.
“뭐냐?”
퉁명스런 어조로 노사부가 물었다.
“뭐냐뇨?”
“돈도 없이 여기 온 이유. 이 ‘달의 이슬 한잔 얻어 마시러 온 거면 포기해라. 어림도 없으니까.”
“절 어디 사는 술주정뱅이 노인이랑 같이 취급하지 마세요. 그런 거 줘도 안 마시니까요.”
“그럼 뭔데?”
“부탁이 있습니다, 사부님!”
진지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그 말에 노사부의 미간이 한가운데로 좁혀졌다.
“부탁? 네 녀석이 노부에게? 별일도 다 있구나.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는걸?”
“해는 내일도 여전히 동쪽에서 뜰 겁니다. 부탁 하나 가지고 너무 과장하지 마세요.”
“그래? 뭐냐, 그 부탁이라는 게?”
이 노부는 아주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는 투로 사부가 말했다.
“필요한 게 있습니다.”
“네 녀석이 단번에 말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 말해야 될 만큼의 물건이란 말이냐? 이거 점점 더 불안해지는구나.” 더 이상 질질 끌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비류연은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시간이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비뢰도가 필요합니다.”
“안 돼!”
“빌려주십시오.”
“안 돼! 불가!”
“빌려주십시오. 저에게 그것이 꼭 필요합니다.”
“안 된다.”
“정말 안 됩니까?”
“정말정말 안 된다.”
“그럼 대여해 주십시오. 대여비는 내겠습니다.”
“대여는 싫다.”
“어째서요?”
“무조건 싫다. 이유가 필요하냐? 노부가 싫다면 싫은 거다. 싫은 데 이유가 필요하냐? 노부가 대여해 주기 싫으니 싫은 거지.”
“정말 하나뿐인 제자한테 이러시깁니까?”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할 수 없죠.”
“드디어 너도 이해했다니, 다행이구나.”
“물론이죠. 더 이상의 대화와 설득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걸 이제야 알다니, 예전에 비해 이해력이 많이 떨어졌구나.”
더 이상 대화가 소용없다고 느꼈는지 비류연은 홱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세 걸음을 걸은 다음 멈추었다.
“왜 멈추느냐?”
“예린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것, 비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 비류연이 말했다.
“노부는 여전히 빌려줄 생각이 없는데?”
“그렇다면.”
“그렇다면? 왜, 힘으로라도 빼앗게?”
피식하고 노사부가 비웃었다.
“……”
비류연은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침묵하는 뒷모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노사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자의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틀림없는 맹렬한 투기였다.
“네 이 녀석! 미쳤느냐?”
비류연이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럴지도요.”
좀 전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마치 감정이 모두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돌아선 제자는 어느새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심이냐?”
“물론이죠.”
무척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네 녀석 목소리가 갑자기 왜 그러냐? 감정은 어디다 팔아먹었느냐?”
““방금 버렸어요.”
무감정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왜? 쓸데없이 그런 건 왜 버려? 환경 파괴할 일 있냐?”
사부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위험하니까요.”
사부의 이죽거림을 보고도 비류연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왜 위험한데?”
“그런 걸 가지고 있다가는 미쳐 버릴지도 모르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미쳤거든?”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하지만 아직 덜 미쳤습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 비하면 정말 별것 아닌 일이죠.”
비류연의 입가에 고소가 맺혔다.
“감정을 버린 게 아니라 이성을 버렸구나!”
노사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두려움이란 감정을 버린 것뿐입니다. 저는 어느 때보다 이성적입니다.”
매우 진지한 어조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노사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놈 진짜로 맛이 갔구나, 라고 노사부는 확신했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것일까? 어지간히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리라. ‘무엇이 이 제자 녀석을 이 정도까지 정신적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걸까??
안 보던 사이에 무언가 소중한 것이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다고 해서 금방 강해질 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어른의 일일 것이다.
“허어, 미친놈이 자기 미쳤다고 하는 거 봤느냐? 네놈이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정상이 아닌 거다, 이놈아!”
참다못해 화가 폭발한 노사부가 일갈했다.
“홰까닥하면 노부에게 덤빌 수 있을 것 같았느냐, 이 망할 제자 녀석아? 웃기는 소리! 노부에게 덤빌 생각이면 처음부터 기습을 했어야지!”
휘익!
말이 끝나자마자 노사부의 검지손가락이 번개처럼 움직여 공간과 함께 비류연의 몸을 허리로부터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린 손속이었다. 스르륵!
허리가 잘려 나간 비류연의 신형이 아지랑이처럼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 광경을 본 노사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스윽!
비류연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노사부의 등 뒤였다. 신출귀몰한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다름 아닌 노사부였다.
번쩍!
빙그르르 반 바퀴 몸을 돌린 노사부가 다시 한 번 망설임없이 지검(指劍)을 날렸다.
“그 정도 잔상으로 이 노부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무르구나!!”
검지손가락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가늘고 희뿌연 빛무리가 검날처럼 비류연의 몸을 절단했다.
츄와아아아아아아악!
비류연의 신형이 다시 한 번 어깨부터 허리까지 정확히 갈라졌다.
스르르르륵!
비류연의 신형이 다시 안개처럼 흩어졌다.
“아니! 설마!”
이번에 벤 것도 허상이었다.
“그게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죠!”
스윽!
비류연의 신형이 다시 나타난 것은 사부의 왼쪽이었다.
봉황무(鳳凰舞) 오의(義)
삼첩영(三疊影) 비의(秘)
삼재(三才)의 장
천지인(天地人)
이 기술은 단순히 세 개의 잔상을 일직선으로 겹쳐 내보이는 기존의 삽첩영과 다르게 삼각형 모양으로 천지인 세 방위에 차례대로 허상을 만들어내는 보법으로, 봉황무의 극의였다. 세 방위의 허상과 실상이 교차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허상이고 어느 것이 실상인지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침내 노사부의 몸에 빈틈이 드러났다.
“허점!”
찰나에 드러난 그 틈을 향해 비류연은 혼신의 힘을 다해 현천은린을 찔러 넣었다. 역시 맨손으로는 힘들 것 같아 준비해 온 것이었다. 차칵!
현천은린의 꼭대기에서 창날이 튀어나왔다.
파지지직!
창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불꽃을 튀기며 일어났다. 바로 창강이었다. 비류연은 진심이었다.
척!
그러나 그 일격은 너무나 간단하게 사부의 오른손에 잡혀 버렸다. 혼신의 힘이 담긴 찌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낸 것이다. 그런데도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 다. 게다가 무쇠도 두부처럼 자른다는 창강이 어린 창날을 맨손으로 잡아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금종조나 철포삼 같은 외가호신기공을 익혔다 해도 ‘검강’나 ‘창강같은 강기는 맨손으로 잡아낼 수 없다. 피부와 근육이 숯처럼 타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강을 뿜어내는 창을 잡고 있는 노사부의 손은 멀쩡 했다.
“노부에게 양손을 다 쓰게 하다니, 기특하구나! 하지만 이 정도 실력으로 어디 노부에게 이길 수나 있겠느냐? 비뢰도도 없이? 물론 비뢰도가 있다 해도 이 사부에 게 이길 리는 만무하지만 말이다.”
사부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맺혔다.
“말도 안 돼!”
비류연은 그만 기함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명명백백한 실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의표를 찔러야 할 사람이었지, 찔려서 안 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를 생각하기 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번의 공수가 교차하는 이런 공방 중에 한가롭게 수수께끼를 풀 시간은 없었다.
분해하는 비류연을 아랑곳하지 않고 노사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방금 쓴 삼첩영 비의 천지인(天地人)은 일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의 구도로 차례차례 허상과 실상을 교차시키는 봉황무의 비전 오의. 잘도 거기까지 터득했구 나.”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얘기지만 일직선으로 잔상을 만드는 것보다 도형을 그리면서 여기저기 잔상을 만드는 게 더 어렵다. 이 기술을 쓰기 위해서는 훨씬 더 초인 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노부에게 빈틈을 보이게 한 것은 칭찬해 주마. 하지만 지금 네 녀석의 상태로 그렇게 계속 몸을 혹사해도 괜찮을까? 너, 아직 내상도 회복 못했잖느냐?”
“그걸 어떻게?”
“다 알지. 제자의 상태조차 파악 못해서야 사부라 할 수 있겠느냐?”
사부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포기해라.”
사실 지금 비류연은 봉쇄된 현천은린을 타고 전해져 온 반탄력 때문에 기혈이 뒤틀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피를 한 움큼 토해낼 것만 같았다. 몸이 만전(萬全)일 때 도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데, 지금처럼 내장이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싸워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두는 건 더더욱 할 수 없었다.
파악!
사부의 손에 잡혀 있던 현천은린이 활짝 펴졌다. 우산의 그림자가 월식 때의 달처럼 비류연의 몸을 숨겼다.
“어디서 하찮은 장난 짓을!”
노사부가 손아귀를 움켜쥐자 펴졌던 우산이 강제로 접혔다. 그러나 그 뒤에 비류연의 모습은 없었다. 비뢰도가 없는 지금 유일무이한 무기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 다. 이 대범한 시도에 노사부는 ‘나름’ 놀랐다. 제자 녀석의 각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녀석 보게!’
비류연의 사라졌던 신형이 다시 나타난 것은 노사부의 등 뒤였다. 다시 한 번 삼첩영 오의 천지인이 펼쳐진 것이다.
또다시 사부의 뒤를 잡는 데 성공한 비류연의 손에는 현천은린의 우산대가 들려 있었다.
삼복구타봉법
천지무견 구구절절
파바바바바밧!
비류연이 손에 들린 봉이 수백 갈래로 갈라지며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사부의 저 손이 강기마저 맨손으로 잡을 수 있다면, 잡을 수 없는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변화무쌍한 공격을!
쐐쇄쇄쇄쇄색!
사부의 신형이 흐느적거리는가 싶더니 비처럼 쏟아지는 봉영 사이를 유유히 걸어가든 피했다.
봉황무 오의
우중거 불점의
쏟아지는 빗속을 걸어도 옷이 젖지 않는다는 극상의 신법이었다. 과거 비류연도 이 신법을 이용해 …한 적이 있었다.
“개 패기에 딱 좋아 보이는 몽둥이질은 어디서 배웠느냐?”
쏟아지는 봉 그림자 속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사부가 물었다. 말속에 비웃음이 섞인 것으로 보아 여유가 만만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세요? 개 패는 데 가장 풍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 한테서 보고 배웠죠.”
손속을 멈추기는커녕 더욱 가속하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게 어딘데?”
전개한 보법을 멈추지 않은 채 사부가 물었다. 봉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는데도 발걸음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일 없이 일정했다.
“개방이오. 아실란가 모르겠네요?”
“몰라.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천하의 개방이 개무시당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비류연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저 망할 사부의 쫀쫀한 눈에 드는 문파가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사부가 여유만만할수록 반대로 비류연은 초조해졌다. 아직 옷자락 한 번 스치지 못했던 것이다.
불가에 이런 말이 있다.
옷자락 스치는 것은 삼생의 인연이라고. 그만큼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실감하고 있는 비류연의 입장에서는 그 말의 무게가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아직 그는 사부의 옷자락조차 만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자기만큼 사부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건 사실이지만, 그런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그동안 몰래 영투(影鬪)도 해보았다. 가상 으로 머릿속에서 싸워본 것이다. 일종의 일인 논검이었다. 사부와 싸우는 것을 정신적으로 게을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바닥을 모른다는 것은 그 진가를 완전
히 파악해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숨겨진 부분이 있다 해도 오 할은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즉, 자신이 알고 있는 전력은 사부 실력의 칠 할 정도라고 가정했었 다. 사부니까 그만큼 신경을 쓰고 주의를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싸워보니 어떤가? 필살의 각오로 덤비는 만큼 숨겨진 부분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었다. “모르는 부분은 삼 할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있는 게 삼 할이었단 말인가??
무한의 양파처럼 껍질을 계속해서 벗겨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다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었다. 그러나 두렵다고 그대로 주저앉는다는 것은 도망치 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 두려운 감정을 극복할 수 있어야만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스슥!
다음 순간 비류연의 신형이 일적선으로 겹쳐서 세 개로 불어났다.
“천지인도 통하지 않았는데 일반 삼첩영이 통할 거라 생각했느냐?”
아직 여유가 있는지 노사부는 비뢰도를 쓰지 않은 채 다시 지법을 날렸다. 그 말은 반대로 비뢰도를 쓰게 하지 못하면, 패배는 확정이라는 뜻이었다. 아니면 얕보 고 비뢰도를 쓰지 않는 동안에 어떻게든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노사부의 검지 끝에서 번쩍인 뇌신지가 섬광처럼 세 겹의 잔상을 일직선으로 꿰뚫었다. 첫 번째 잔상부터 세 번째 잔상까지 정확히 심장이 일직선으로 관통당했 다.
“크윽!”
비류연이 고통스러운 듯 심장을 움켜쥐며 허리를 숙였다.
“아차! 손속이 너무 과했나?”
거울처럼 살기를 반사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지나치게 반응한 듯싶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스르르륵!
그런데 그때 허리를 반쯤 숙인 비류연의 신형이 안개처럼 흐트러졌다. 그리고는 사부의 오른쪽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셋으로 분리된 신형 모두 방금 전 노사부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현천은린의 검은 우산갓을 들고 있었다. 현월이라 이름 붙인 그것을.
현천은린
삼월야
세 개의 신형이 동시에 현월을 날렸다.
촤라라라락!
비류연의 손을 떠난 검은 만월이 허공 가득히 검은 달 그림자로 채웠다. 해가 가려지고 밤이 찾아온 듯했다. 삼월야를 전개한 직후 비류연의 신형은 다시 사라졌고, 이번에는 노사부의 왼쪽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의 천지인의 ‘천(天)’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봉황무오의
천지인
변형
삼중 천지인
천지인만으로 사부를 깰 수 없다고 생각한 비류연이 천지인과 삼첩영을 동시에 섞어 펼친 것이다. 육체의 부담은 보통을 천지인보다 당연히 세 배는 더 힘들었다. ‘천’의 위치에 나타난 비류연의 그 신형 역시 세 개의 잔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그 손에는 모두 현천검이 들려 있었다. 이 검으로 펼칠 수 있는 검법은 오직 하나 였다.
심검
삼중 묵뢰살
세 개의 신형에서 동시에 펼쳐진 묵뢰살이었다. 검은 번개와 은색 번개가 뒤섞인 뇌광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웠다. 어디에도 노사부가 피할 곳은 없어 보였다. 이 심검 묵뢰살을 깨뜨릴 수 있는 초식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하아, 할 수 없군.”
노사부가 약간 체념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노인의 동작 역시 완전히 멈춘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 전의 고요에 불과했다. 노사부의 입술이 살짝 달 싹였다.
“풍신(風神)!”
아무런 사전 동작도 없었다. 어떤 기척도 없었다.
파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엄청한 폭음과 함께 폭풍이 몰아쳤다. 그것은 단순한 회오리가 아니라 은빛으로 빛나는, 하늘과 땅을 잇는 듯한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쿠콰콰콰콰!
처음에는 단 한줄기였던 용권이 두 가닥으로 나뉘어지더니 서로를 집어삼킬 듯이 나선을 그리며 서로의 몸을 꼬았다.
풍신
오의
쌍용권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은빛의 용권풍은 천지간에 가득하던 검광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그 다음 그 주위에 남은 것은 진공뿐이었다.
쾅! 쾅! 콰콰콰쾅!
쾅! 쾅! 콰콰콰쾅!
동시에 두 가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의 북이 울리는 듯한 요란한 굉음과 함께 비류연의 몸이 뒤로 날아가 담장 벽에 그대로 ‘퍽!’ 처박혔다. 벽이 진동하며 거 미줄 같은 자글자글한 금이 벽 전체를 완전히 뒤덮었다.
거대했던 두 줄기의 용권의 기세가 점점 사그라지더니 완전히 소멸하자 비로소 노사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노사부는 한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잔상이 아니라 실체인 것 같았다.
봉황무극오의
쌍신(神)
이 보법은 삽첩영 천지인보다 훨씬 상위의 보법으로 둘 모두 허상이면서 둘 모두 실체였다.
스르르르르륵!
비류연의 양쪽에 나타났던 노사부의 신형이 사라지며 한데 모였다.
“에구구구, 오랜만에 했더니 하마터면 발이 꼬일 뻔했네.”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하는 품새가 여유가 흘러넘쳤다. 반면 벽에 푹 틀어막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비류연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뽀안 먼지만이 아지랑이처럼 그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제자가 생매장당한 돌무더기를 바라보는 사부의 눈은 냉정하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 이렇게 어디서 대충 주워 배운 것들 가지고 노부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돌무더기에서 대답이 있을 리 없었지만 노사부는 상관하지 않았다.
“노부에게 풍신까지 쓰게 한 것은 칭찬해 주마.”
원래는 비뢰도를 쓸 생각이 없었는데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쓰고 말았던 것이다. 스스로의 규칙을 어기고 만 것이다.
“하지만 풍신에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바보같은 녀석,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아직 뇌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모양이구나. 쯧쯧.”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자 노사부가 냉소하며 말했다.
“아직 안 죽은 거 안다. 나오너라.”
그제야 돌무더기에서 반응이 있었다.
“쿨럭! 쿨럭!”
투둑투둑, 돌멩이 수십 개가 이러저리 굴러 나오더니 비류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 발짝을 걷지 못하고 급히 몸을 숙였다. “우웩!”
비류연이 참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역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부가 손에 사정을 봐줬다 해도 풍신은 풍신 얻어맞고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아야야, 피났잖아요. 어떻게 책임지실 거예요?”
비류연이 투덜거렸다.
“그래, 맞았더니 정신이 좀 드느냐?”
“때린다고 다 정신 차리면 세상의 선생들이 다 필요없게요? 몽둥이만 들면 누구나 다 교육잔데 뭐 하러 굳이 선생을 갖다 쓰겠어요? 안 그래요?”
“안 때리고 오냐오냐한다 해서 정신을 차리는 것도 아니지. 사람을 망치려면 원하는 것 다 들어주면 된다는 옛말도 모르느냐?”
“폭력사부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죠.”
이죽거리는 제자를 향해 사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멍청한 놈! 아직도 왜 맞았는지 깨닫지 못한 모양이구나! 처음 보는 신선한 무공이라면 노부의 의표를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느냐? 웃기지 마라! 아무리 신선해도 깊이가 없으면 결코 노부를 이길 수 없다! 잊었느냐? 비뢰문의 제자를 이길 수 있는 무공은 비뢰문의 무공뿐이라는 사실을. 날 쓰러뜨리려면 비뢰문의 무공을 사용 했어야지!”
물론 그런다고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라고 한마디만 더 덧붙이지 않았어도 훨씬 좋았을 것이다. 참지 못한 비류연이 소리쳤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도 할 말이 있었다.
“젠장! 비뢰도도 없이 비뢰문의 무공을 펼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말이 안 되지.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짐짓 시치미를 떼며 사부가 말했다.
“상관없다고요?”
비류연이 어이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물론! 그건 네 녀석이 해결할 문제지 노부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뻔뻔하기가 피하지방강철강화신공을 익혔다고 소문이 자자한 비류연이 울고 갈 정도였다. 자신은 아직도 사부의 뻔뻔함을 뛰어넘을려면 멀었구나, 묘한 패배감 에 사로잡히고 만 비류연이었다.
“비뢰도가 없어도 몸 상태만 멀쩡했다면 지지 않았다고요.”
계속 사부에게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무척 싫은 비류연은 뭐라도 말해야만 했다.
“풋, 결과가 나온 다음에 가정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과거로 돌아가기라도 할 생각이냐? 아니면 현재를 부정할 생각이냐? 변명 따위로 니 마음이 편해진 다면 백날 그렇게 변명이나 하고 있어라. 하지만 네가 진짜로 해야 하는 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아니었냐?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순간의 너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 “이냐?”
“크윽. 젠장!”
지극히 맞는 말이었기에 비류연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비뢰도를 얻지 못한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며칠 뒤에 몸조리하고 와서 재도전이라 도 할 건가?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을 터였다.
“그래서는 평생이 가도 노부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한다.”
그러자 비류연이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툭 내뱉었다.
“했어요.”
“뭐가?”
“옷깃 스쳤다고요.”
흠칫 놀란 노사부가 팔을 들어 소맷부리를 확인해 보았다. 어느새 그의 소매 부분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어때요? 정말이죠.”
잠시 뜯겨진 소매를 보며 한참을 생각하던 노사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옷 꽤 맘에 드는 옷이었는데, 망쳐 놓다니……. 조금은 나아졌구나.”
제자가 너무 지지부진해도 못마땅한 게 바로 사부의 마음이란 것이었다.
주섬주섬 흐트러진 옷을 바로 하며 비류연이 일어났다. 소매로 입가를 훔치자 붉은 피가 묻어났다. 하지만 검은 무복을 입고 있는 탓에 그렇게 티가 나지는 않았
다. 게다가 내부는 오히려 더 심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 눈빛만은 영롱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게냐?”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전투 의지를 거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포기라뇨? 그게 뭐죠? 그런 건 가르쳐 준 적도 없잖아요?”
비류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랬었나?”
“포기, 불가능. 그게 뭐냐? 개가 먹는 거냐? 우리 비뢰문에 포기란 없다! 포기할 거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마라!’ 그렇게 가르친 건 사부였잖아요? 그러니 그 말에 책임을 지셔야죠.”
“이 사부한텐 모든 게 다 예외야. 그것도 몰랐냐?”
“그런 편리한 이론, 전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전 아직도 사부가 비뢰도를 빌려줄 거라 믿고 있어요.”
“그 황당한 믿음의 근거가 뭐냐? 갑자기 궁금하구나.”
“그야 그렇지 못하면 상금 삼십만 냥을 못 받게 될 테니까요.”
“뭐라고?”
털썩!
갑자기 비류연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사부님!”
노사부의 눈이 불신으로 인해 휘둥그레졌다.
“뭐, 뭐냐, 이 녀석아? 이건 또 무슨 음모냐?”
“음모 아닙니다.”
“그럼 미친 게로구나. 아니면 바보가 되었거나 의원한테 가보는 게 어떠냐? 좋은 의원 하나 소개시켜줄까?”
그렇게 무릎이 뻣뻣하던 녀석이 게다가 생전 안 붙이던 ‘님’ 자까지 재차 붙이다니. 오늘 본 해가 마지막이고 내일부터는 더 이상 해가 뜨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 다.
“미쳤든 안 미쳤든 그런 건 지금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소리쳤다. 무릎 꿇은 주제에 어째 기세는 더 등등했다. 살짝 잘린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호박색 눈동자가 이글이글 금색으로 불타 오르고 있었다.
“에구머니, 깜짝이야. 심장 떨어질 뻔했다.”
제자의 이런 돌발적인 반응을 처음 접하는 사부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무엇이 이 녀석을 이렇게까지 하도록 만들었을까? 어지간한 일에는 항상 냉소로 일관하 지만 자존심만은 절대로 굽힐 것 같지 않던 이 녀석을 말이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데? 네가 한번 말해보려무나.”
그러자 비류연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구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녀를 ……합니다.”
그 순간 노사부의 움직임이 그대로 정지했다. 사고마저 멈추어 버린 듯했다. 석상이라도 된 듯 굳어 있던 노사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음……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두겠다.”
아무래도 그게 본인의 정신 건강에도 이득이 될 것 같았다.
“절 바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바보 정도는 되어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 바보.”
그러자 비류연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빠직 솟아올랐다.
“그렇다고 꼭 바보라 부르란 건 아닙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 바보 제자?”
빠직.
“어쨌든! 지금 저에게 필요한 건 단 한 자루의 진(眞) 비뢰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그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 다.”
“음… 그건 말야, 바보 제자 너도 알다시피 터무니없이 강한 살기를 품고 있는 무기다. 그런 걸로 사람을 구할 수는 없어. 그건 사람을 철저하게 죽이기 위한 물 건이지 살리기 위한 물건이 아니다.”
이른바 정론(定論)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론 따위 비류연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전 지금 싸우기 위한 무기가 필요합니다. 소중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싸워야 하니까요. 그리고 전 이 싸움을 회피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습니다. 부탁드립 니다, 사부님. 저에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말에 노사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거참! 소중한 사람이라……. 너,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았냐?”
제자가 강호에 나가더니 희한한 것을 만들 줄 아는 재주를 얻은 모양이다.
“사부님보다는 훨씬 제대로 된 인간이니까요.”
“너, 약 먹었니?”
“안 먹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사부가 되물었다.
“여자 맞는 거지?”
“당연하죠. 그건 왜 묻죠?”
“아니, 세상 취향은 다양하니까. 얼마 전에 여장도 해서 혹시 그쪽으로 관심이 있나 했지.”
“여장시켜서 돈 벌어오라고 한 원흉은 따지고 보면 사부잖아요. 이제 와서 제 취향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당시의 일은 가련한 근로혹사소년이 강압에 등이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한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원흉이 할 수 있는 사부는 짐짓 못 들은 척 다시 물었다. “미인이냐?”
“엄청 미인입니다.”
“흠, 미인이란 건 귀한 보물이긴 하지.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그것이 어떤 경우에라도 말이다.”
약간 마음이 움직이는 듯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비류연이 말했다.
“장담하건대 그녀에게 비견될 아름다움 따윈 없습니다.”
비류연의 대답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흠……. 약만 먹은 게 아니라 눈도 멀었구나. 그런 낯간지러운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니.”
증상이 제대로구만, 이라고 노사부가 중얼거렸다.
“사부님!!”
비류연이 다시 한 번 ‘사부님’을 외쳤다.
“어째, 그 사부님이란 소리가 적응이 안 되는구나. 바보 제자 네놈이 네놈이 아닌 것 같아서.”
“싸부…….”
비류연이 평소처럼 노인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은은하게 격동하고 있었다. 그러자 노사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님’자 붙여라!”
칼날처럼 단호한 목소리였다.
얘기가 다르잖아!
어째 행동이랑 말이 전혀 달랐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자. 삼십만 냥을 못 받게 된다는 건 무슨 소리냐?”
“우승 상금을 줘야 할 쩐주가 공범이거든요.”
“뭣이랏!”
“게다가 우승 상금도 안 주고 튀었어요.”
그러자 노사부가 불같이 화내며 외쳤다.
“그런 건 좀 더 일찍 얘기했어야지!”
금적신 돈왕이 원통투기장의 주인이자 대회 주최자였다. 모든 상금의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숨겨둔 재산 모두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를 찾지 못하면 끝장이었다. 노사부로선 막대한 수익을 얻을 기회를 날려 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강제로 비뢰도 대여료를 내야 하는 처지인 비류연도 마찬가지 였다.
“옜다!”
사부가 지니고 있던 봉뢰함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 이게 뭐예요?!”
비뢰도 전용 보관함인 봉뢰함을 열어본 비류연은 깜짝 놀랐다.
“왜?”
“반밖에 없잖아요!”
“반씩이나 있잖느냐.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져야지.”
“이게 물잔인 줄 아세요? 왜 반밖에 없는 거죠? 혹시 엿 바꿔 드신 건 아닐 테고.”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다는 안 돼, 들고 튈지도 모르니까.”
비류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제자를 못 믿습니까?”
그러자 노사부는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혹시 여기에 다른 제자라도 있는가 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응? 믿을 만한 제자라니, 어디? 혹시 설마하니 널 말하는 거냐?”
아직 노부는 너를 냉큼 믿어줄 정도로 노망들지 않았다, 그 백발이 성성한 눈썹 밑에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관두죠.”
더 이상 이야기해 봤자 시간낭비라는 것을 비류연은 깨달았다. 말은 말이 통하는 상대랑 해야 하는 법이다.
“그거면 됐잖아? 아니면 두 개로 줄여줄까?”
그러자 비류연이 봉뢰함의 뚜껑을 쾅! 닫은 후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쓰고 꼭 돌려 드리죠, 싸부님!”
그리고는 등을 돌려 쏜살같이 달려갔다.
금세 한 개의 검은 점으로 변해 버린 제자를 바라보며 노사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쫓아갈 마음도 안 드는구나. 뭐,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할까? 제자 녀석의 활약상이라는 것을?”
그건 그런대로 만족스런 안줏거리가 될 것 같았다. 아직 술병에 술은 남았으니 할 일이 많았다.
“그나저나 저런 정신줄 놓은 상태로 괜찮을까 모르겠군.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말이야.”
참으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사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