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6권 1화 – 9년 전

비뢰도 26권 1화 – 9년 전

9년 전

– 쏟아지는 비, 폭우, 질퍽이는 바닥

마천십삼대 대장 회의가 끝났다.

각 기숙사의 대장들은 자신이 담당하게 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떠났다.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은 적포인은 자리에 몸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오른쪽 어 깨로부터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이제 시작이야… 이제……..”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귓가로 구 년 전 내리던 폭우 소리가 먼 산에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첨벙첨벙첨벙!

쏟아지는 비, 질퍽이는 진창 속을 내달리며,

그는 도망쳤다.

어깻죽지로부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달렸다. 달리는 기세를 늦추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실패했다. 또다시 패배했다.

젠장! 젠장! 젠장!

어깨의 상처는 증오해 마지않은 형으로부터 입은 검상이었다.

그자는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만다. 자신의 모든 걸 빼앗아간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전부.

자신의 삶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벽이 아직도 아무런 상처도 없이 굳건하게 서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쳇, 그 아이, 예린이만 망가뜨릴 수 있었으면 그자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길 수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방해하고 들어올 줄이야……. 방심했다.

자신의 배신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차피 그동안 나는 있으나 마나 한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자의 인생에 오점은 남길 수 있으리라. 그는 그 오점이 일평생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 마지않았다.

콰직!

눈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강철의 오른손으로 거칠게 쳐내자, 나뭇가지가 나무째로 부서져 나간다. 과연 전설의 마기(魔器)인 ‘서풍(西風)의 광란(亂)’, 실로 대단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서천멸겁이 남긴 이 힘만 있다면…….?

그자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도 꿈은 아니다.

“언제가 반드시…….?”

오늘 당한 것은 아직 그가 이 서천의 유산(遺産)을 완전히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일 뿐이다. 결코 자신이 그 저주받을 자보다 약해서 진 것은 아니었다. 결코. 결코! 그러니 그자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살아야 한다. 살아서 다시 복수해야 한다. 자신의 삶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자에게, 자신의 친형에게! 계획이 실패한 이상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이곳이 백도무림의 영역인 이상 정천맹주인 그의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었다.

그자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 잠시 동안 몸을 숨겨야 했다. 심장 속에 박힌 가시처럼,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마음을 좀먹어 가리라. “크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

나일천은 광소했다.

나백천의 신경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불안에 떨 수 있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쁜 것이다.

조카의 정신을 할퀴어놓은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을 것이다. 딸이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고 그자가 괴로워하기를 그는 진신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 자그마 한 보상조차 없이는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이다.

자, 어디로 갈까?

문득 마지막 받았던 비밀 서찰을 떠올랐다. 보낸 곳도, 보낸 사람도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비밀리에 보내진 한 통의 서찰. 최후로 받은 서찰에는, 만일 일이 실 패하면 동정호로 오라고 적혀 있었다.

ᅳ자신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암중에 자신을 도와준 신비인. 나일천 역시 아직 그자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일단 동정호로 가볼까.?

흑도의 두 축(軸) 중 하나인 마천각이 있는 그곳이라면 추적의 손길도 약해질 터. 덤으로 그에게 그동안 서찰을 보내 정보를 알려주던 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그자는 과연 자신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해가 될까?

“뭐, 상관없겠지. 뭣 하면 죽여 버리면 되고!’

나일천은 다시 한 번 그 서찰들에 대해서 떠올린다.

한쪽 팔을 잃고 거의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던 그의 앞에,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서찰.

보낸 곳도 보낸 이도 적혀 있지 않은 그 한 통의 서찰이 그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당시 나일천은 그의 형인 나백천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낳아준 어머니가 다른 그의 형 나백천은 모든 면에서 축복받은 존재였다. 그가 철이 들 무렵부터 그는 이미 확고부동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뛰 어난 기재인 그의 형과 모든 면에서 일일이 비교를 당해야 했다. 그의 재능이 남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데도, 아니, 오히려 뛰어난데도.

ᅳ내가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이런 굴욕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한참이나 늦게 태어난 죄로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분했다.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나이 가 들어도, 무림에서 어느 정도의 명성과 지위를 얻게 되어도 그 박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무기력한 박탈감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기엔 그의 자존심이 너무 높았다. 그래서 그는 형 나백천에게 도전했다. 가문의 후계자라는 권리를 걸고.

결과는 비참했고, 대가는 비쌌다.

무모한 도전의 대가로 그는 오른쪽 팔을 잃었다. 당황한 나백천은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ᅳ분명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어! 일부러 ! 일부러 !

촉망받는 검객이었던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폐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검을 휘두를 오른팔이 없는 그는 주변에서 보기엔 폐물, 혹은 쓰레기에 불과했다. 정천 맹에서 어느 정도 쌓아 올렸던 지위도 심하게 흔들렸지만, 나백천에 의해 어찌저찌 무마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뒷담화는 더욱 심해졌다.

무리도 아니었다. 남들이 보기엔 형의 위광으로 겨우 자리보전이나 하는 무능력자 팔병신으로 비춰졌으리라. 나백천에 대해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출하며 술퍼마 시기를 일삼던 그는 사천 변방의 지부로 쫓겨나게 되었다. 명백한 좌천이었다.

그는 사천 변방에서 형 나백천을 향한 증오심을 더욱더 강하게 불태웠다. 그러나 무림의 기둥이 되어버린 형을 쓰러뜨릴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검을 쥘 오른손과 검을 휘두를 오른팔은 이미 그의 어깨에 붙어 있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폐인이 되어갔고,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더 잊혀졌다.

그런 그에게 느닷없이 구원의 손길이 뻗어왔다.

어느 날 그 앞에 날아온 한 통의 서찰.

그곳에 적혀 있는 것은 바로 그가 그의 증오를 풀 수 있는 방법, 잃어버린 오른쪽 팔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천멸겁’이 남긴 마병(魔兵) 철갑마수 ‘서풍의 광란’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 서찰에는 현재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나일천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날부터 그 무기명 서찰은 계속해서 그의 앞으로 배달되었다. 그럴수록 서풍의 광란이 보관되어져 있는 비고(秘庫)의 정보가 더욱 갱신되어 갔다.

나일천 스스로도 그곳에 대한 정보를 자체적으로 입수했다. 그리고는 받은 정보와 종합해서 어떻게 그것을 손에 넣을지 면밀히 계획을 짰다. 그런 다음 범행 예고 서찰을 보내자 예상대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결행일이 찾아왔다.

나일천은 업무를 핑계로 정천맹 본부로 찾아간 다음, 몰래 형 나백천의 집무실로 숨어들어가 제칠() 비고의 열쇠를 빼냈다. 무림맹주의 동생이라는 배경은 아직 도 이곳에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제칠비고로 접근할 수 있었다. 형의 이름을 팔고 접근해 비고 안으로 들어갔다. 범행 예고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비해 서 비고의 보관 상태를 점검해 본다는 것이 그 핑계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마지막 심처(處)까지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곳부터는 오직 맹주님 본인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제칠비고의 최고 관리자인 비고장(秘庫長)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나일천의 좌장이 질풍처럼 비고장의 심장을 때렸다.

“컥!”

단 일격에 비고장의 심장은 짜부라졌다. 내가중수법의 수법으로 인한 즉사였다. 마지막 관문인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특수 자물쇠는 나일천이 나백천의 집무실에 서 몰래 빼낸 열쇠를 이용해 뚫었다.

마침내 열고 들어간 제칠비고의 안에 그것이 봉인되어 있었다. 사람의 피를 먹고 싶어하는 강철의 검은 마수 ‘서풍의 광란’이 서천이 남긴 비급과 함께 들어 있었 다. 특수한 암호로 적혀 있어 아직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기에 이 비고 안에 같이 봉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몰래 가지고 나온 후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사천으로 출발했다. 죽은 비고장과 텅 빈 제칠비고가 발견되었을 때는 그는 이미 남창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사천에 도착한 나일천은 독자적으로 키워놓은 비밀 경로를 통해 ‘마치 서천이 가지고 간 것처럼 꾸민 서찰을 보냈다. 물론 몽땅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서천멸 겁이 되기로 이미 결정을 내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천으로 돌아온 그는 철갑마수를 장착하고 몰래 서천의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무기명 서찰 덕분에 그 해독법을 알고 있었으 므로 비급 해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철갑마수 ‘서풍의 광란’은 놀라운 마기였다.

오른팔은 이미 잘려 나가고 없는데도 미세하게 기를 조종함으로써 마치 진짜 오른팔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있으면 그자를 쓰러뜨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겠어!”

잃어버린 팔을 되찾은 그는 철갑마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서천의 무공을 익히고 철갑마수를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자만하고 말았다. 적당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나백천을 유인하기로 했다. 다시 비밀리에 서찰을 보내자, 나백천은 그의 계획대로 사천 지부로 시찰차 왔다. 의외의 수확까지 있어 조카까지 함께 대동한 상태였다. 어리지만 이상할 정도로 사람을 사로잡는 마력을 품고 있는 그 여자아이는 완벽하기 그지없는 나백천의 유일한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여조카의 신비한 마력은 소문 이상이라 나일천 역시 진짜로 욕정 을 느낄 정도였다.

‘오호!’

그 순간 나백천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상처를 남길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그때 생긴 빈틈을 틈타 공격한다면 천하의 나백천이라 해도 속수무책이라 그렇게 확 신했다.

그러나…….

때가 일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것을. 나백천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딸아이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근엄해 보이던 무 림맹주가 거의 병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각무쌍한 딸 바보 아빠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 패착이었다.

서천의 무공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그는 아직 나백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또 한 번의 패배.

그 순간 그가 쌓아놓았던 모든 것이 무너졌다. 있을 곳조차 사라졌다. 그의 존재는 이제 정천맹의 힘이 미치는 모든 영역에서 지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동정호로 향했다. 정천맹의 힘이 덜 미치는 곳으로.

악양루(岳陽樓).

동정호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 중 하나인 그곳에 그자는 얼굴에 청동가면을 쓴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면의 이마 부분에는 북(北)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하늘에 는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여전히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자의 옷은 이 폭우 속에서도 단 한 방울도 젖지 않은 채 멀쩡했다. 보이지 않는 기의 막이 빗 물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세우불침(細雨不侵)의 경지.

그러나 이자는 세우(細雨보슬비)가 아니라 매서운 폭우(暴雨) 속에서도 옷 하나 젖지 않고 있으니 그 내공의 깊이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자리에 선 채 몰래 끌어올렸던 내공을 다시 흐트러뜨리고는 손에서 힘을 뺐다. 지금은 저자와 싸워봤자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게 분명했던 것이다.

“넌 대체 누구냐?”

“이 청동가면을 보고도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조금은 더 똑똑한 줄 알았는데?”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그자의 목소리만은 귓속에 날아와 박히는 것처럼 똑똑히 들렸다.

“설마…….”

“바로 그 설마지. 내가 바로 사천멸겁의 우두머리이자 천겁령을 총괄하는 북천멸겁이다. 즉, 서천멸겁의 계승자가 된 자네의 상관이기도 하지.”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는 것, 그것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웃기지 마라! 누가 너 따위한테!” 촤좌좌좌작!

나일천의 오른손에 장착된 철갑마수 ‘서풍광란’이 북천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주욱 늘어났다. 그의 출수에 의해 발생한 경력에 휘말린 폭우가 사방팔방으로 튕겨 져 나갔다. 그러나 그 일초는 너무도 손쉽게 북천의 손에 의해 제압되었다.

“아직 서천의 정수를 완전히 얻지 못했군. 지금으로서는 전대 서천의 반에도 미치지 못해.”

아쉽다는 듯 북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뭣이라! 날 모욕할 셈이냐!”

북천은 나일천의 말을 무시하고는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얻은 후의 시간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는.”

북천의 음성은 낮고 무거웠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람을 압박하는 힘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추구하던 사람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권위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에게 복수하고 싶나?”

북천이 물었다.

“물론이오. 그걸 위해서라면 귀신이든 악마든 뭐든지 되어주겠소.”

북천을 대하는 그의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 지금 싸워봤자 아직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척을 져서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때를 기다려라.”

북천의 말투는 충고라기보다 명령에 가까웠다.

“때? 무슨 때를 기다리란 말이오?”

“하늘과 땅이 뒤집힐 때를.”

“……”

“그때가 되면 나백천이 쌓아 올린 모든 것, 지키고자 노력한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잿더미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흐흐흐흐, ‘모든 것’을 말이오?”

나일천의 눈에서 열망 섞인 광기가 희번덕거렸다.

“모든 것을!”

“기다릴 수 있겠나?”

힘주어 대답한 다음, 되물었다.

“물론.”

이 증오심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식지 않아. 그를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려 주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난 백 년을 기다렸다. 하지만 자넨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약속하지. 앞으로 십 년, 그 안에 세상이 바뀐다. 그동안 몸을 숨기고 힘을 기를 곳을 마 련해 주겠다.”

“그곳이 어디요?”

“마천각.”

“마천각?”

“이제부터 자네는 사천멸겁의 일원이다. 천겁령의 요람(搖藍)에 온 걸 환영하지.”

***

의자에 몸을 누이고 있던 적포인이 다시 눈을 떴다.

“그로부터 구 년… 기나긴 기다림이었소. 이 동생이 지난 구 년 동안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을 기쁘게 받아주면 좋겠소. 큭큭큭큭.”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적포인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시오? 지금부터가 진짜 절망의 시작이오. 당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멀뚱히 지켜보며 자신의 무력함에 한껏 절망하는 게 좋을 거요. 하하하하! 으하하하 하하하!”

터져 나온 적포인의 홍소는 대청이 떠나갈 듯 우렁찼다. 그리고 미친 듯한 그 웃음은 길게 이어지며 한동안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겨우 웃음이 멎자 적포인의 눈빛은 얼음보다 더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오직 바닥을 알 수 없는 증오와 악의만이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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