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곤이 하나로 만날 때
-눈을 감다
동해왕자군과의 대결에서 아직까지 반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몰리고 있는 모용휘는 내심 초조해져 있었다.
“위험해……. 이대로는 계속 놓치고 말아…….’
마치 허깨비를 상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용휘도 빠름에는 나름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괜히 ‘모용세가의 검은 유성처럼 빠르다’라는 이야기가 강호상에 화자되는 게 아니다. 그런 세가의 검법을 약관의 나이에 절정의 경지까지 익힌 그였다. 괜히 천재나 기재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군의 움직임은 번번이 놓치기만 할 뿐이었다.
“어째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자군의 보법이 가진 비밀을 파헤치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좀 더 확실히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떻게 하지? 무언가 방도가 있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모용휘는,
스르릉!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무슨 짓이냐, 검을 집어넣다니? 나의 아름다움 앞에 드디어 전의를 상실한 건가?”
패배를 인정하느냐는 말에 모용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본인은 아직 패배하지 않았소. 본인에게 항복을 받아내려면 당신은 좀 더 노력해야 할 거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날 놀리는 건가? 맨손으로 날 쓰러뜨릴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소.”
자군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군. 몸에 붉은 꽃이 만개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겠나? 자네의 미는 나의 미에 견줄 수 없다는 것을?”
“누가 더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는 관심없소. 하지만 누가 이기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소. 자, 오시오.”
“좋아. 아름다운 붉은 꽃을 피워주마!”
쏴라라라락! 쉬익쉬익!
붉은 채찍의 현란한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모용휘는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방어는 잠시 잊자. 손해를 감수하고 파고드는 거다.”
저자군의 산화무영’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직접 맨손으로 만져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럼 검을 통해서는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이 없는 만큼 날아오는 채찍을 쳐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맨팔로 진기가 실린 저 채찍을 정면으로 받았다가는 살째로 뜯겨 나가고 말 게 분명했다.
모용휘는 위력이 약한 채찍의 중간 부분을 장력으로 쳐내며 강제로 길을 열었다. 그리고는 유성보 중에서도 가장 빠른 초식을 이용해 자군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 려들었다. 날아들어 오는 채찍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마 이런 식으로 정면으로 뛰어들어 올 줄 몰랐던 자군은 급히 신형을 피했다.
‘닿아라!’
모용휘는 오른팔을 앞으로 쫙 뻗었다. 따뜻한 무언가가 그의 손아귀에 움켜쥐어졌다.
‘잡았나?!’
최대의 속도로 달려든 것이었는데, 자군의 신형은 그곳에 없었다. 대신 그의 손아귀에 들린 것은 붉은 꽃잎이었다.
“하하하하하! 뭐냐? 그 꼴사나운 모습은. 설마 맨손이라면 이 아름다운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아직 십 년은 빠르다. 암, 빠르고말고.”
망연자실해 있는 모용휘의 주위에서 또다시 여인들의 야유 소리가 쏟아졌다.
“…..”
그러나 모용휘는 지금 다른 생각에 몰두하느라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지? 방금 전의 그 감촉은…….’
그는 꽃잎을 움켜쥐고 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분명히 이 손으로 느꼈던 그 감촉, 그의 손가락은 분명 자군의 옷자락에 닿았었다. 종이 한 장 차이 였다. 그리고 그때 그는 피부를 뜨겁게 하는 열기를 느꼈던 것이다.
‘응?’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한번 해볼까?”
약간 무모하지만 도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스르륵.
모용휘는 적을 앞에 두고 망설임없이 눈을 감았다.
“무, 무슨 짓이냐? 눈을 감다니?!”
“…….”
모용휘는 대답 대신 온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나의 미를 보지 않겠다니, 날 모욕할 셈이냐?”
자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엉뚱한 부분에서 화가 난 모양이다.
“굳이 보지 않아도 전혀 아쉽지 않소.”
그가 지금 볼 수 없어서 애잔한 마음이 드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은, 아니, 그 여인은 바로 은설란이었다.
“뭐, 뭣이!”
모용휘의 말에 동해왕자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언제나 소수의 열광적인 추종자들에게만 둘러싸여 있던 그가 언제 이런 식의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 었는가.
“내, 내가 겉보기뿐이란 말이냐! 볼 가치도 없는!”
자군이 하지도 않은 말을 입에 올렸다.
“본인은 그렇게 말한 적 없소. 그렇게 말한 것은 당신이오.”
약간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모용휘가 대답했다.
“나, 난 절대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아니오. 그렇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생각까지 하고 있소.”
“아냐, 절대 아냐! 절대로 아니라고!”
“눈을 감는다고 보이지 않는다면 어차피 당신의 미는 그저 겉보기였다는 것뿐 아니겠소?”
“그럴 리가 없어! 난 아름다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렇다면 그렇게 남에게 강요할 필요 없을 텐데? 스스로에게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타인의 평 같은 건 어찌 되든 상관없는 것 아니오? 적어도 난 그렇게 생 “각하오.”
“상관있어! 나의 미가 무시당하는 걸 난 참을 수 없다!”
“그래서 강요하는 거요? 그거야말로 어린애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아니면 실은 자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걸, 어딘가 부족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 아 니오?”
모용휘가 선언했다. 그러자 자군의 표정이 일순간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라!”
양염화화려려신공(陽炎華華麗麗神功)
편법(鞭法)의 미학(美學)
홍장미란풍(紅薔薇亂風)
촤악!
날카로운 가시 달린 장미 채찍이 모용휘의 생살을 찢기 위해 매섭게 휘둘러졌다.
촤악! 촤악!
“자, 인정해라!”
자군이 피처럼 붉은 ‘홍장미편’을 휘두르며 외쳤다.
“이제 인정할테냐?”
쫘악! 쫘악!
다시 한 번 채찍이 바람을 가르며 꽃보라를 일으킨다. 그러면서 또다시 외친다.
“자, 보라! 이 아름다운 공격을! 완벽한 미를!”
뭘 보라는 건지 모용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피하기를 계속할 뿐이다. 눈을 감은 상태인데도 마치 눈을 뜨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자, 나의 미를 인정해라! 그리고 찬양하라!”
그 목소리에는 광기가 들어차 있었다.
나를 인정하라, 라고 반복해서 외치면서 자군이 홍장미편을 계속해서 휘두른다. 일초식 일초식이 화려하기 짝이 없다. 바람에 지는 꽃잎의 소용돌이와 같은 공격 이 계속해서 모용휘를 압박해 들어왔다.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동해왕자군이 지닌 미의 기준은 간단했다. 바로 그의 얼굴과 몸 그 자체였다.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을 모용휘에게 인정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야말로 진정한 그의 승리가 결정되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
느끼하고 이상하다고 느낀 적은 있어도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을 어떻게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그것도 남자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미에 대한 집착이 무엇을 낳을 수 있는지 모용휘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자군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누구나 취향이 다를 수 있는 것 아닌가. 특히 ‘미’라는 가치는 특히나 기준이 애매하고 변덕스러워 취향이 다양하게 마련이다. 잘못은 자신의 미의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는 자군에게 있었다. 그는 공감을 얻어내려고 하기보다는 억지로 강요하고 있었다. 거기에 공감은 없다. 독선과 끔찍함 만이 혼재할 뿐이다.
모용휘는 그런 아름다움 따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그런 걸로 더럽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란…….’
그의 머릿속으로 한 여인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창백하게 빛나던 달 아래에서 흐르던 눈물을 생각한다. 그때 보석처럼 빛나던 눈물과 아름다운 얼굴을 생각 한다.
온화하고 가련한, 하지만 때때로 격렬했던 그 아름다움을 외부의 압력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 가슴 아린 세계를 자군의 얼굴 같은 느끼한 걸로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유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싸워야 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류연 그 친구가 알면 삼 년은 내리 놀려먹겠군.’
그러니 절대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줘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단 이기고 나서의 이야기겠지.’
모용휘는 그렇게 결심하며 자군의 존재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응? 이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온몸의 감각을 전면적으로 개방시킨 모용휘의 손에 이상한 느낌이 전해졌다. 눈을 뜨고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감 각.
“역시…… 열기(熱氣)가 맞아.”
열기는 열기인데 공격에 사용되지 않는 열기라…..
‘뜨겁다?”
자군의 몸 근처에 닿으면 뜨겁다는 느낌이 든다. 오행 중의 ‘화기’인가?
하지만 피부가 탈 정도는 아니었다.
‘염도 노사님과 같은 화기(火氣) 계통인가? 오행 중의 불의 기운을 쓰는…….?’
뜨겁기는 하지만 피부를 태울 정도의 열기는 아니라…….
‘뭐지? 저 환영신법과 무슨 관계가 있나?”
무언가가 계속 마음에 걸려 떨어지질 않았다.
“게다가 보법에 왜 화기를 사용하지?’
불의 속성을 지닌 화기는 그 강한 성질 때문에 공격에 쓰이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보법을 사용하는 중에 화의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양염(陽炎)…… 아지랑이…… 열기…… 환상..
여러 가지 단서들이 모용휘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었다.
“설마…….”
그 순간 섬광처럼 그의 뇌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깨달음이 있었다.
“알았다[察]!”
모용휘의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형형한 안광을 직시한 자군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멈추었다.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그 안에 깃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양염화화려려신공의 비밀을 알아챘다고 모용휘는 확신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깨뜨릴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알았다고? 대체 뭘 알았다는 거냐?”
자군이 반문했다.
“당신 신법의 비밀을 알아냈소.”
숨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모용휘는 대답했다. 그러자 자군은 놀라기보다 폭소했다.
“아하하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다 하는군. 그렇게 당황스러웠나?”
그는 아무래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용휘의 얼굴은 여전히 진지했다.
“그 비밀은 열기에 있소.”
흠칫, 자군의 몸짓이 우뚝 멈추었다. 순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정곡을 찔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내 예감이 정확했던 모양이오?”
자군의 반응을 읽은 모용휘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네, 네, 네놈, 감히 날 떠본 거냐?”
열이 받아 얼굴이 벌게진 자군이 고함쳤다. 그러나 모용휘의 반응은 태연하기만 했다.
“악우(惡)의 흉내를 내봤을 뿐이오.”
물론 그 악우의 정체는 비류연이라는 인간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나쁜 것만 가르치는 친구로군. 대체 어떤 막돼먹은 놈인지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군.”
미간에 깊은 골을 새기며 자군이 궁시렁거렸다. 얼마 전 자신이 청혼했던 연비의 진짜 정체가 바로 그 막돼먹은 놈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그였다. 그리 고 정신건강상 상상하지 않는 쪽을 권장할 만했다.
“동감이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모용휘가 대답했다. 항상 단정하고 깨끗하고 틀에 찍어놓은 듯한 완전무결의 화신인 그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감정의 편린(片鱗)이었다.
“하지만 비밀을 알았다 해서 깰 수 있을 만큼 산화무영은 만만하지 않아. 이 세상에는 알면서도 막을 수 없다는 게 있단 말이지. 바로 나의 아름다움 같은 것 말이 야. 거역하려 해도 거역할 수 없는 미의 마성. 아아, 이 얼마나 죄 많은 몸인…….?”
그 말을 끊듯 모용휘가 말했다.
“파훼해 보이겠소.”
“…뭐라고?!”
주름의 습격에 상관치 않은 채 자군은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이 세계에는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기술들이 있소. 하지만 그 안에 당신의 기술은 포함되지 않소. 그걸 지금부터 내가 깨끗하고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겠 소, 당신의 기술을 파훼하는 것으로.”
자군의 위협적인 공격을 받았으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는 모용휘의 그 당당하고 굴강한 모습에 혼을 홀딱 빼앗겨 버린 여인들이 저도 모르게 ‘까아아악! 멋져어어 어!’ 비명을 질렀다. 반면 자군을 응원하는 여인들의 소리는 예전보다 눈에 띄게, 아니, 귀에 띄게 줄어 있었다. 자신의 추종자들을 점점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에 자 군의 분노는 점점 더 짙어졌다. 지금까지 그에게서 느껴졌던 여유가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어느 때보다 초조해하고 있었다.
“흐흐흐흐. 지금 그 말, 영원히 후회하게 해주지.”
차캉! 화르르르륵!
홍장미편이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가시가 일제히 겉으로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채찍 전체가 기이한 열기를 띠더니 이내 타오르기 시작했다.
“최고 아름다운 기술로 장사 지내주마. 넌 피의 웅덩이에서 비료나 되는 게 딱 어울려. 나의 아름다움을 더욱 드높여 줄 비료가!”
‘그걸 시험해 볼까?”
스윽!
결심을 마친 모용휘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한 자루의 날카로운 소도였다. 그는 꺼내 든 소도를 왼손으로 잡았다. 기본적인 자세는 좌검우도가 아니라 우검좌도라 할 수 있었다.
“뭐냐, 그건 대체? 모용세가의 검법에 소도를 같이 쓴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자군은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자꾸만 이렇게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주름의 위협으로부터 피해가기는 더 이상 그른 것 같았다.
“이건 일종의 자기류(自己流)요. 모용세가의 다른 검법은 이렇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소.”
물론 전혀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자군이 이미 최후의 공격 준비에 들어간 만큼 모용휘도 준비에 들어갔다. 그동안 염도와 빙검에게 상당히 혹독한 수련을 받으면서 연마한 자기만의 기술, 그것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진기를 모으기 시작하자 왼손에 들고 있는 소도로 새하얀 진기가 서서히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검이 청백 빛을 발하면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좌수 소도에 집중된 청백색 기를 붕결(崩訣)을 이용해 더욱더 세게 압축시켰다.
검극에 한 점으로 모인 기가 검을 빠져나와 동그란 구(球)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푸른 기운의 도는 청백색의 강기구에서 서릿발 같은 한기를 뿜어내기 시작했 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검은 불에 달구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금 펼치고 있는 검법의 바탕은 모용세가에서 검성을 제외하고는 오직 그 혼자만이 익히는 데 성공한 검성 직전(直傳)의 비전검법 은하류 개벽검이지만 그 내용 은 달라져 있었다. 원래 오른손에 들린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쾌() 속성의 유성강기를 좌수 검결지에 맺힌 중(重) 속성의 붕결(崩訣)로 압축시키고, 또 압축시킨 다음 일순간에 폭발시킴으로서 엄청난 파괴력을 얻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아직 천고기재라 불리는 모용휘 역시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지고의 검공이었다. 천무삼 성 중에 가장 강한 게 아닌가 여겨지는 검성조차 참수 끝에 말년에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던 초고난이도의 검법이기도 했다. 약관의 나이에 흉내라도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정반(正反)의 힘을 동시에 부릴 수 있어야만 익힐 수 있는 특수한 무공.
염령(焰靈)과 빙백(氷魄)의 힘을 동시에 부릴 수 있는 자.
즉, 정과 반, 음과 양의 두 가지 힘을 동시에 쓸 수 있는 것이야말로 ‘태극의 인재’라는 증거라 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均衡)’이라고.”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완벽한 균형. 그 균형이 보인다면 태극으로의 길이 열린다고 했다. 그러나 도대체 그 균형을 어떻게 맞출 수 있는지 모용휘로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쯧쯧, 그놈들은 말이지, 지난 이십 년 동안 실패한 녀석들이야. 그런데 그 녀석들의 방법으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느냐?”
“그럼?”
“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거라. 실마리는 이미 가지고 있지 않느냐?”
실마리! 혁중 노인의 그 말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염도와 빙검의 무공이, 아니, 자신이 그동안 십수 년에 걸쳐 적공을 쌓아온 검법에 눈 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다. 그동안의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정반(正反)의 힘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은하류 개벽검이 있었다. “검을 한 자루 더 든다고 해서 더 강해지는 게 아냐!”
모용휘를 향해 일갈하며 자군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여 왔다.
양염화화려려신공(陽炎華華麗麗神功)
오의(義)
산화무영(花無야마란풍野馬亂風)
자군이 여러 개의 분신을 만들며 모용휘의 주위를 맴돌자, 바닥에 무수히 떨어져 있던 꽃잎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모용휘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 윽고 그것은 꽃잎의 벽을 만들며 모용휘를 고립시켰다. 거대한 꽃바람의 장벽이 모용휘를 둘러싼 것이다.
“흐흐흐흐.”
자군의 입에서 음산스런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보여졌던 지나치게 반짝반짝거리던 그런 느끼한 미소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 느끼한 미소가 더 상큼하게 느껴 질 정도로 혐오감이 드는 미소라 지켜보던 여인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주위를 거세게 맴도는 꽃잎의 소용돌이 때문에 자군의 위치를 특정해 낼 수가 없었다.
“한 줌의 재가 되어라!”
화르륵!
자군의 손에 들려 있던 홍장미편을 타고 불꽃이 달렸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꽃바람의 장벽을 향해 불꽃이 일렁거리는 채찍을 휘둘렀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륵!
그러자 눈부신 진홍의 빛과 함께 꽃잎들이 일제히 불타올랐다.
양염화화려려신공(陽炎華華麗麗神功)
최종 비기(秘)
격화(火)
소용돌이치던 꽃바람의 장벽은 순식간에 불꽃의 장벽이 되어 그 한가운데 갇혀 있던 모용휘를 집어삼켰다. 발밑에 뿌려져 있던 꽃잎들은 단순한 장식용 꽃잎들이 아니었다. 여차한 순간에 순간적으로 발화(發)시킬 수 있는 특수한 처치를 가한 꽃잎들이었던 것이다. 이 꽃잎들은 숨겨진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화 려한 불꽃놀이를 위해 준비된.
“와하하하하하하하!”
그 순간 모용휘의 붉게 달아오른 검이 청백의 구체를 꿰뚫었다.
은하류(銀河流) 개벽검(開闢劍)
신 오의
염천빙지(地)
일원합(元)
화아아아아아악!
모용휘를 둘러싸고 있던 불꽃의 벽 사이사이로 새하얀 빛의 무리가 마치 창처럼 뻗쳐 나왔다. 다음 순간 더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자, 자군은 너무나 눈부셔 자기 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다시 눈을 뜬 자군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순간에 불꽃이 진화되더니, 비무대 전체에 서리가 끼어 있었다. 그의 마지막까지 숨겨두었던 비장의 패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약속대로 제가 이겼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모용휘가 말했다. 예전처럼 은하류 개벽검을 쓴 다음 기력을 완전 소진해 쓰러지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혁중 노인으로부터 실마리를 얻었을 때부터 모용휘는 은하류 개벽검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그 안에 염령과 빙백의 힘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속성, 불꽃이라는 것은 기의 격렬한 운동, 즉 동(動), 특히 격동을 의미했다. 반면 얼음이라는 것은 기의 정, 특히 극정을 의미했다. 기의 움직임이 바로 양이고, 기의 멈춤 이 바로 음인 것이다.
즉, 쾌속성의 유성 강기는 기의 격동을, 붕결음 기의 정과 관련이 있었다. 다른 것 같지만 이들은 서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이 우검좌도 체 계였고, 그렇게 해서 터득한 기술이 바로 ‘염천빙지 일원이었던 것이다.
“아,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군은 다시 산화무영보를 펼쳐 모용휘를 공격하려 했다.
“소용없습니다.”
언제 움직인 것일까. 모용휘의 검날이 어느새 자군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어, 어떻게?!”
그가 가장 자신하던 산화무영보가 단 일검에 파훼당한 것이다.
“산화무영의 비밀은 열기를 이용하여 공기를 데워 환영을 만들어내는 거죠. 한여름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면 사물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죠. 틀렸습 니까?”
“큭…….”
반박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용휘의 예상이 맞았다는 말이다.
산화무영은 그 현상을 한정된 공간에서 더욱 강하게 발휘하도록 하는 무공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맨손으로 만졌을 때 이상할 정도로 열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또 한흩어지는 꽃잎은 환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일종의 눈속임이었던 것이다. 시선을 빼앗기 위한.
“물속에 들어 있는 동전을 잡는 거랑 비슷하지요. 보이는 곳에 있다고 생각한 그곳에 그 동전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 빛의 굴절 때문이지요.”
좀 더 일찍 눈치 챘어야 했다. 아지랑이 역시 공기의 온도 차에 의한 빛의 굴절이 그 원인이다.
‘양염(陽炎)’, ‘야마(野馬)’란 모두 아지랑이의 다른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공기가 식어버리면 더 이상 그 기술을 쓰는 게 불가능하죠.”
그러면서 모용휘는 하얗게 서리가 덮인 비무대를 가리켰다. 조금 전 그가 만들어낸 작품.
“……!!!”
자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얼음 위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리가 없지요.”
당연히 모든 공기가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졌다.”
자군의 몸이 힘을 잃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허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만 것이다. 눈동자는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그가 가진 모든 기술이 간파당한 이상 자군 에게는 더 이상 승산이 없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이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나의 아름다운 최후를 자네 같은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나 모용휘는 검을 거둬들였다.
“본인에겐 당신을 죽여야 할 이유가 없소. 본인은 그저 이곳에 운반되어온 ‘목관’의 내용물만 확인하면 그만이오.”
“나의 아름다움을 아직 이 세상에 남겨두겠단 말이냐……?”
그렇게 묻는 걸 보니 그의 왕자병은 아무래도 패배한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멋져어어어어어어어어어!”
“나 반해 버릴 거야아아아아아!”
“난 이제 휘님으로 갈아탈래!”
“나도나도!!!”
“나, 난 아니에요. 잠깐 혹했지만, 난 영원한 자군님의 충실한 빠순이예요.”
숨을 죽인 채 이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들 사이에서 장내가 떠나갈 듯한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 열광적인 반응에 모용휘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그를 향한 시선이 아까보다 더욱 뜨거워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불편하군…….?”
모용휘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비무대를 내려왔다. 그의 뒤에서 환성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칠절신검 모용휘의 공식오빠부대라 할 수 있는 ‘칠절회’의 회원수가 더욱 늘어났다. 또한 오늘의 이 일은 ‘칠절회 마천 지부’ 탄생의 계기가 되었으니… 모용휘의 결벽증 때문에 본인에게는 비밀리에 활동하기 때문에 모용휘는 그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